불교이야기/인곡당(법장스님)

[맑고 밝은 삶으로] 비움의 완성

淸潭 2008. 3. 2. 22:25

비움의 완성

 

세간에서 ‘마음을 비워라’와 ‘마음을 비웠다’라는 말이 자주 회자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이런 말은 산중의 선사들의 법어(法語)에서나 접할 수 있었는데 요즈음은 한강을 낀 여의도를 중심으로 정치가나 주식 투자가들이 더욱 자주 써서 세인들의 시선을 끕니다.
‘비웠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각자 무엇을 어떻게 비운 건지 그 경지를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비웠다’라는 말 자체는 욕심으로 가득 찬 세상에 신선한 충격이자 덕담(德談)인 것은 사실이라 듣는 입장에서는 마음에 조금이나마 여유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은 욕망으로 가득한 것이어서 비운 만큼 편해지고 넉넉해지고 밝아지는 묘한 것입니다. 예로부터 깨달음을 증득하신 스님들께서 비움에 대하여 수많은 가르침을 남기셨는데 그 중에서 중국의 황벽희운 스님(黃蘗希運禪師)께서 전심법요(專心法要)에 ‘비워 버리는 것’에 대하여 그 크고 작음에 따라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하셨으니 이 자리를 통해서 전할까 합니다.
스님께서는 비워버리는 것에는 “첫째 몸과 마음을 허공처럼 비워 버리고 취하거나 집착하는 마음을 없애버린 뒤에 방향을 따라 사물에 응하되 주객(主客)을 함께 잊어버리는 것이 큰 버림이요, 둘째 도를 행하고 덕을 베풀며 다른 한편으로는 무엇이든 바라는 마음을 계속 버려 나가는 것이 중간 버림이요, 셋째 여러 가지 선업을 닦으며 희망하는 것이 있었으나 법문을 듣고 난 뒤 만법(萬法)이 공(空)한 줄 알고 집착하지 않는 것이 작은 버림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촛불에 비유하시기를 “큰 버림은 촛불이 앞에 나타난 것과 같아서 다시는 미혹과 깨달음이 없고, 중간 버림도 촛불이 옆에 있는 것 같아서 때로는 밝기도 하고 때로는 어둡기도 하며, 작은 버림은 촛불이 뒤에 있는 것과 같아서 앞이 늘 어둡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비움’을 실천해 가는 데 있어서 마음을 허공처럼 비워버리고 비웠다는 마음조차 없는 큰 버림의 경지를 목표로 정진해야 합니다. 성현이나 도인이 아니면 감히 흉내조차도 낼 수 없는 큰 버림의 경지에 다다르기 위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다 보면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 해탈을 이루어 큰 버림의 경지에서 고통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소욕지족(少欲知足; 욕심이 적어야 만족을 안다)”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욕심이 적어질수록 버림이 커지고 버림이 커질수록 만족 또한 커지는 것이니 욕심을 버림이 곧 만족을 구함이 되는 것입니다.
‘소욕’에 대하여 한 말씀 더 드리자면 불유교경(佛遺敎經)에 “탐욕이 적은 사람은 바로 열반을 얻을 것이니 이것이 소욕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을 비우면 탐욕과 어리석음도 없어져서 곧 구함도 없어지고 다툼도 없어져서 근심도 없어지고 아첨과 삿된 마음도 없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마음을 비우면 저절로 너그러워져서 근심과 두려운 바가 없으며 부닥치는 일마다 여유가 있어서 언제나 모자람이 없습니다.
지족에 대하여서는 “만일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려면 마땅히 만족할 줄 앎을 관(觀)하라. 만족함을 아는 것이 지족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향엄지한 스님(香嚴智閑禪師)의 시에

“작년의 가난은 가난일 것이 못 되고,
금년의 가난함이 비로소 가난일세.
작년에는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었으나
금년에는 그 송곳조차 없다네.
去年貧未是貧
今年貧始是貧
去年無錐之地
今年其錐也無也”

라는 시가 있습니다.
아무 것도 꾸밀 것이 없는 그대로의 무소유적인 삶, 비움의 완성의 경지를 시 한편으로 읊조리며 유유자적하게 살아가는 스님 앞에 부귀영화가 다 무슨 소용이 있었겠습니까? 비움의 아름다움은 인생에 있어서 또 다른 기쁨입니다.
세상 사람 사는 것 생각해보면 늘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합니다. 부귀한 자의 걱정이 빈궁한 자에게는 없고, 빈궁자의 우환이 부귀자에게는 없는 것이 잘 사나 못 사나 세상 사람들의 사는 모습이고 보면 인간은 다 스스로 비워버리기 전에는 다 걱정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저도 제 자신을 스스로 생각해보면 오나가나 몸 하나가 재산인데 여기 저기 소임을 맡다 보면 이것저것 관리할 것이 많아서 책임감에 쫓아다니다 보면 남 보기에 물질에 대한 여유가 있어 보여도 불사를 이루자니 쉴 날 없이 구하러 다녀야 합니다.
또 손놓고 선원이나 토굴에 앉아 있으면 주위에서는 걱정을 해도 제 마음은 한없이 여유롭습니다. 그저 살림이라는 것이 범부들에게는 있어도 걱정, 없어도 걱정인데 있어서 걱정하는 것이 없어서 걱정하는 것보다 남이라도 보기가 편한 법입니다.
제가 몇 년 전에 바로 이 곳에 입원한 적이 있었는데 주위에서는 큰 일이라고 걱정을 하셨어도 저는 그저 스쳐가는 인연일 뿐 큰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으로 있다가 퇴원을 했고 그래서 그런지 지금까지 별탈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물론 그 때 여러분들께서 기도하여 주시고 보살펴 주신 은혜로 오늘이 있다는 생각도 합니다. 여러 날을 병실에서 정진하며 나옹 스님(懶翁和尙)의 말씀을 계속 생각했었습니다.
나옹 스님께서 생전에 병이 중한 제자를 찾아가시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병이 중하다고 들었다. 무슨 병인가? 몸의 병인가, 마음의 병인가? 몸의 병이라면 몸은 흙, 물, 불, 바람의 네 가지 요소가 잠시 모여 이루어진 것이니 그 네 가지는 각각 저마다 주인이 있는데 그 어떤 것이 그 병자인가?
만약 마음의 병이라면 마음은 꼭두각시와 같은 것이라 비록 거짓 이름은 있으나 그 실체는 실로 공한 것이니 병이 어디에서 일어났는가? 그 일어난 곳을 추궁해 본다면 일어난 곳이 없을 것이다. 그럼 지금의 그 고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또 고통을 느끼고 아는 그것은 무엇인가? 이와 같이 자세히 살피고 살펴보면 문득 크게 깨칠 것이다.
이것이 내 병문안이다.”
창 밖으로 넓은 하늘을 보며 ‘병이 일어난 곳이 없다’는 나옹 스님의 말씀을 확신할 때마다 새롭게 솟아나는 제 자신의 생명력을 느낄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예상보다 일찍 산중으로 돌아와 소임에 충실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나옹 스님의 말씀을 양약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릇 물질이든 정신이든 비워버리기 전에는 영원히 집착의 노예가 되어서 내 마음 가지고 내 마음껏 살지 못하고 내 몸 가지고 쓰고 싶은 대로 쓰지 못하는 것이니 비우는 것만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세인들의 이목이나 끄는 정도의 ‘비웠다’가 아니라 모든 것이 본래 비었다는 깨달음을 얻거나 그런 지혜로움이 없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여서 중생은 오직 비워야 편히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비워 버린다’는 생각조차도 ‘비워 버렸다’는 자만도 다 비워진 본래의 상태로 비움의 완성이 이루어진 자리에 곧 해탈과 진리의 본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 법우회 송년법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