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문학/古典散文 271

말과 소리

말과 소리 군자는 되도록 어눌하려고 노력한다. 어눌함만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그렇게 하는가? 아니다. 이치에 맞는 말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蓋君子之欲訥於言者 非徒貴其訥也 貴其言而得中也 개군자지욕눌어언자 비도귀기눌야 귀기언이득중야 - 조긍섭(曺兢燮, 1873〜1933), 『암서집(巖棲集)』 20권, 「눌재기(訥齋記)」 조긍섭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중근(仲謹), 호는 심재(深齋)다. 경남 창녕군 고암면 출신이다. 생몰년에서 나타나듯 그는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라는 격변기를 살아간 인물이다. 당대 영남의 대표 선비였던 곽종석(郭鍾錫)에게 수학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성리학과 문학에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인용한 글은 조긍섭이 눌재(訥齋) 김병린(金柄璘, 1861〜1940)에게 지어준 기문의 일부다..

혼조(昏朝)의 권신(權臣)에서 절신(節臣)으로

혼조(昏朝)의 권신(權臣)에서 절신(節臣)으로 이조가 아뢰기를, “충청도 진천(鎭川)의 유학(幼學) 박준상(朴準祥)의 상언(上言)에 대해 본조가 복계(覆啓)하였는데, 그 8대조 박승종(朴承宗) 및 그 아들 박자흥(朴自興)의 관작을 회복시키는 일을 대신(大臣)에게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윤허하셨습니다. 우의정 조두순(趙斗淳)은 말하기를, ‘박승종은 혼조(昏朝)의 고굉지신(股肱之臣)이자 폐부(肺腑)와 같은 인척으로서 16년을 지냈습니다. 만약 그가 임금의 과실을 바로잡고 이의를 제기하여 잘못이 없는 곳으로 임금을 인도하였다면, 실로 생사를 함께하여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윤리와 기강이 무너지고 사라진 때를 당하여 한마디 말이라도 내어 천지의 경상(經常)을 지킨 일이 있었습니까. 다만 생각하..

바위에 이름을 새기는 일은

바위에 이름을 새기는 일은 대장부의 이름은 마치 푸른 하늘의 밝은 해와 같아, 사관이 책에 기록해두고 넓은 땅 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구차하게도 원숭이나 너구리가 사는 수풀 속 돌에 이름을 새겨 썩지 않기를 바란다. 이는 아득히 날아가 버린 새의 그림자만도 못한 것이니, 후세 사람이 과연 무슨 새였는지 어찌 알겠는가? 大丈夫名字 當如靑天白日 太史書諸冊 廣土銘諸口 區區入石於林莽之間 㹳狸之居 求欲不朽 邈不如飛鳥之影 後世果烏知何如鳥耶 대장부명자 당여청천백일 태사저저책 광토명저구 구구입석어림망지간 오리지거 구욕불후 막불여비조지영 후세과오지하여조야 - 조식(曺植, 1501-1572), 『남명집(南冥集)』 권2, 「유두류록(遊頭流錄)」 남명 조식은 1558년 4월 10일부터 26일까지 ..

벼슬하는 자 백성 위에 있지 않네

벼슬하는 자 백성 위에 있지 않네 사람과 사람 사이 차등이 없으니 / 人與人相等 벼슬하는 자라 해서 백성 위에 있겠는가. / 官何居民上 마음을 어질게 지니고 일 처리를 명철하게 해야 / 爲其仁且明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다네. / 能副衆所望 - 이용휴(李用休, 1708~1782) 「서하로 부임하는 홍광국을 전송하며[送洪光國晟令公之任西河]」 『탄만집(集)』 이용휴가 풍천 부사로 떠나는 홍성(洪晟, 1702∼1778)을 전송하며 써준 시로 전체 5수 가운데 첫 수입니다. 『승정원일기』 영조 42년(1766) 6월 30일 기사에 홍성이 풍천 부사로 떠나며 하직(下直)하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는 이 즈음에 지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지방관은 왕을 대신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중대한 일을 맡은 사람이..

다 때가 있는 법

다 때가 있는 법 하수일의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태이(太易), 호는 송정(松亭)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영산 현감(靈山縣監), 호조 정랑(戶曹正郎) 등을 역임하였지만 크게 현달하지는 못하였다. 문장은 의리(義理)에 근거하여 전아(典雅)하고 조리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인용문의 출처는 「초당삼경설」이다. 음력 2월에 초당을 지은 하수일은 국화와 해바라기를 심었다. 상추는 그보다 늦은 3월 초에 심었는데, 채 20일이 되기도 전에 싹이 났고 4월에는 밥상에 올랐으며, 6월이 되자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혔다. 상추보다 일찍 심은 해바라기는 6월이 되어서야 꽃이 피고 7월에는 다 떨어졌다. 그때까지도 국화는 울창하게 푸를 뿐 꽃이 피려는 조짐이 없었다. 9월, 서리가 내리자 비로소 황금빛 노란 국화가 피어 그..

권귀를 비웃다

권귀를 비웃다 푸른 등라 우거진 곳 밤은 깊었는데 한번 누워 보니 홀가분하여 온갖 생각 사라지네 멀리 산굴에 구름 피어나 다시 달을 가리고 작은 시내에 조수 가득 차 다리가 잠기려 하네 몸에는 벼슬이 없으니 가난해도 오히려 즐겁고 흉중에는 시서(詩書)가 있으니 비천해도 또 교만하다 서글퍼라 새벽이 찾아온 우물에는 벽오동에 서린 가을 기운이 또 쓸쓸하겠지 綠蘿深處夜迢迢 녹라심처야초초 一枕翛然萬慮銷 일침소연만려소 遠岫雲生還掩月 원수운생환엄월 小溪潮滿欲沈橋 소계조만욕침교 身無簪組貧猶樂 신무잠조빈유락 腹有詩書賤亦驕 복유시서천역교 怊悵曉來金井畔 초창효래금정반 碧梧秋氣又蕭蕭 벽오추기우소소 - 성여학(成汝學, 1557~?), 『학천집(鶴泉集)』 2권, 「권귀(權貴)를 비웃다 - 당시 이이첨이 공의 시를 보고자 하였는..

우리 선비들에게 가장 절실한 공부는오직 하학下學입니다

우리 선비들에게 가장 절실한 공부는 오직 하학下學입니다 순암(順菴) 안정복이 72세 되던 해(1783년), 자신에게 간절히 공부의 방법을 묻는 제자 황이수(黃耳叟)에게 보낸 답장에서 한 말이다. 황이수는 황덕길(黃德吉, 1750~1827)이다. 그는 형인 황덕일(黃德壹)과 같이 안정복에게 배웠고, 형이 먼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순암의 정갈한 순암연보를 작성하기도 했으며, 그 학문을 성재 허전(許傳, 1797~1886)에게 전했다. 순암의 수제자였던 셈이다. 후에 이토록 각별한 사승으로 이어진 제자, 이를테면 순암의 학문의 도를 전하여 결과적으로 성호학파의 학맥을 이은 황덕길에게 순암 안정복은 “우리 선비들의 절실한 공부는 하학”이라고 가르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입으로 말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

전조(前兆)를 잘 읽어야

전조(前兆)를 잘 읽어야 『맹자』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나온다. 맹자의 고향인 추(鄒)나라와 노(魯)나라가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에서 추나라의 유사(有司)가 33명이나 죽었는데 백성은 한 명도 죽지 않았다. 여기서 유사는 일선 지휘관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고민에 싸인 추나라 임금이 맹자에게 물었다. “유사가 죽는 현장에서 달아난 백성을 처벌하려니 너무 많아서 모두 처벌할 수가 없고, 처벌하지 않으려니 상관이 죽는 걸 노려보면서 구원하지 않은 죄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맹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흉년이 들어 기근에 시달릴 때 임금의 백성 중 노약자는 굶어서 시궁창에 쓰러져 죽고, 건장한 자들은 살길을 찾아 살던 곳을 떠나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수천 명이 그런 고초를 겪었지요. 그때 임..

얘야, 좀 더 있다 가려믄

얘야, 좀 더 있다 가려믄 이 시는 모주(茅洲) 김시보(金時保, 1658~1734)의 작품입니다. 김시보는 본관이 안동(安東)이고, 자는 사경(士敬)이며 호는 모주(茅洲)입니다. 조선후기 한시 쇄신을 이끈 백악시단의 일원으로서 시명(詩名)이 높았던 문인입니다. 시의 제목과 수련(首聯)의 내용을 보면 시집갔던 시인의 큰딸아이가 무슨 일인가로 친정을 찾았던 모양입니다. 출가외인(出嫁外人)이란 말이 있듯 조선시대 시집간 여성은 친정에 발걸음하기가 여간 쉽지 않았습니다. 친정 부모의 생신이나 제사, 농번기가 끝난 추석에나 시부모께 말미를 얻어 친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친정을 찾은 딸아이는 더없이 반갑고 예쁩니다. 그래서 시인은 기쁜 마음에 술잔을 들었고, 그렇게 기분 좋게 늦은 단잠에 빠질 수 있었..

어버이의 마음

어버이의 마음 5월은 ‘가정의 달’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5월에는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껴있습니다. 5월을 ‘가정의 달’이라고 하는 것도 단정적으로 이 두 날 때문인 것 같습니다. 중순 무렵엔 스승의 날도 있고 석가탄신일도 으레 이맘때쯤 직장인들에게 부처님의 자비를 베풀곤 하지만, 적어도 이런 날들은 ‘가정(家庭)’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 보이니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모두는 반드시 누군가의 자식이면서, 또 어쩌다가 누군가의 어버이일 수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어린이날은 어느새 사람 북적북적한 유원지에 의무적으로 놀러 가는 날, 어버이날은 평소 거들떠보지도 않던 꽃집 들려서 꽃 좋아하지도 않는 부모님께 덥석 꽃다발 안기는 날이 되어 버린 듯 싶습니다. 마치 중세 유럽의 면죄부처럼, 카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