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인곡당(법장스님)

[맑고 밝은 삶으로] 마음 마음 마음

淸潭 2008. 3. 2. 22:19

마음 마음 마음

 

모 방송 인기드라마에서 궁예왕이 관심법(觀心法)을 운운하자 세속에서 관심법이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잘못 알면 관(觀; 볼 관)을 관(關; 빗장 관)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관심(觀心)은 마음을 관찰하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의 본성(本性)을 명확하게 관조(觀照)한다는 것이요, 관심(關心)은 어떤 사물에 마음이 끌리어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승려 출신의 궁예왕은 한때 깨달음을 향해 마음 공부를 했던 연고로 관심법(觀心法)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왕에 많은 사람들이 이 마음을 관하는 법에 매력을 느끼고 있으니 오늘 법회는 마음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마음의 작용이란 신통묘용(神通妙用)해서 경전과 어록마다 설명되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화엄경(華嚴經)에서 “마음은 모든 사물의 근본이기도 하고 미혹(迷惑)의 근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자기 마음의 본성은 일체가 오직 마음으로 짓는 것이다(一切唯心造).”라고 말씀하셨고, 달마 스님(達磨大師)께서는 혈맥론(血脈論)에서 “마음을 마음이라고 보는 그 마음이 참으로 찾기 어렵다. 마음은 넓어진 경우 전 우주를 뒤덮고, 좁아질 경우에는 바늘구멍 하나의 틈도 허용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고통스럽다고 울부짖거나 만족하다고 자만하는 것 모두가 마음의 장난일 뿐인 것을 잘 알면서도 스스로 확철하게 깨닫지 못하고 그냥 알기만한 것이라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마음의 장난에 따라 울고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도 인생을 마음공부에 뜻을 두고 사는 승려인지라 단문(短文)하기는 하나 마음에 대한 성현의 말씀 중에 기억하고 있는 가르침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능가경(楞伽經)에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갖가지 법이 사라진다.”라는 말씀이 있고, 유마경(維摩經)에는 “정토(淨土)를 얻으려면 그 마음을 깨끗이 하고 그 깨끗한 마음을 따라 부처님의 정토가 나타난다.”라는 말씀이 있고, 유교경(遺敎經)에는 “오직 마음을 잘 다스리면 어떠한 일도 판단하지 못할 것이 없다.”라는 말씀이 있고, 불명경(佛名經)에는 “죄는 마음을 좇아 생겼다가 마음을 좇아 사라진다.”라는 말씀이 있고, 관심론(觀心論)에는 “오직 마음을 꿰뚫어 보는 한 법이 우주의 진리를 포괄하고 있으니 이 법이 가장 요긴하다.”라는 말씀이 있고, 끝으로 화엄경(華嚴經)에 “마음 밖에 법을 보면 신심(信心)을 성취하지 못한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수행자가 공부한다는 것도 결국 이 마음공부이니 마음 하나 미(迷)하면 일체를 다 미하는 것이요, 마음 하나 깨달으면 일체를 다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큰 소나무에 칡넝쿨이 감아 올라가 복잡하게 엉키어 있을 때 그 칡넝쿨을 없애려면 줄기나 가지 꽃 열매는 아무리 잘라내도 소용이 없고 오직 뿌리를 파내야 되고 소나무를 잘 가꾸려면 뿌리를 잘 북돋아 주어야 사니 나무의 근본은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나무를 가꿀 때 근본인 뿌리를 잘 가꾸면 멋있게 잘 키울 수 있듯이 수행하는 사람도 마음이 도의 근원, 깨달음의 근본인 줄 알고 공부하면 공을 적게 들이고도 도를 이루기 쉽고, 마음인 줄 모르고 공부하면 공을 많이 들여도 바른 길에서 벗어난 것이라 도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수행자는 언제 어디서나 어떠한 일을 당해도 환경과 상대에서 그 해결을 찾으려 하지 말고 늘 스스로 명심하기를 모든 선과 악, 행복과 불행이 다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알아서 그 마음을 관찰할지언정 마음 밖에서 해결방법을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의문에 대한 모든 해답은 내 마음 속에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가 생겨도 문제가 일어난 그 자리에 해답이 몰래 숨어 있습니다. 지혜로운 성인과 어리석은 범부도 마음의 가치에 따른 것이지 형상의 고귀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육신이라는 본래 사대(四大; 땅, 물, 불, 바람)가 인연 따라 뭉쳐진 것이라 허망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허망한 육신도 그 마음을 쓰는 데 따라서 삼천대천세계를 덮고도 남는 법신(法身)이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달아 더러운 것에 물들지 않으면 성인의 청정법신(淸淨法身)이 되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 열반의 즐거움을 누릴 것이며, 만일 더러운 마음을 따라 악업을 지으면 범부의 육신이나 생사를 윤회하며 갖가지 괴로움을 받는 것입니다.
열반경(涅槃經)에 “모든 중생에게 불성(佛性)이 있으나 어둠에 덮여서 해탈하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중생의 어두운 마음만 밝히면 그대로 찬란히 빛나는 부처님의 덕성(德性)이 나타나는 것인데 우리는 오늘도 태양 아래 서 있는 장님처럼 지혜의 눈이 멀어서 부처님 품안에서 부처님을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금이 비록 귀하나 흙 속에 있고 비취가 비록 맑으나 돌 속에서 나오듯 성현의 출현도 중생의 깨달은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에게 있어 마음을 잘 챙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으니 마음이 지혜롭고 바르면 일체가 다 바르게 바뀌어 육선(六善)을 행하게 되는 복밭이 되니 보살의 거룩한 삶의 주춧돌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참되면 말과 행이 다 참되게 나타나고 마음이 삿되면 밖으로 드러나는 모든 것이 다 삿되고 또 내게 다가오는 인연도 다 삿되게 되어 있습니다. 진인(眞人)이 되느냐 사인(邪人)이 되느냐, 선인(善人)이 되느냐 악인(惡人)이 되느냐, 복인(福人)이 되느냐 천인(賤人)이 되느냐 하는 모든 결과가 모두 마음의 깨달음에 달려 있으니 우리의 삶과 수행에 있어서 마음공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근대 선불교의 중흥조이시며 오늘날까지 선가의 정신적 지주이신 경허 스님(鏡虛禪師)의 생전의 일화(逸話) 중에서 마음에 관한 일화 한 가지를 소개합니다.
경허 스님께서 보임처(補任處)로 계시던 서산(瑞山) 천장사(天藏寺)에 하루는 지금의 홍성에서 이처사(李處士)라는 분이 와서 멀리 스님의 모습을 바라보고 뻣뻣이 서서 큰 소리로 “도인이 계시다고 해서 왔더니 공연히 헛소문 듣고 헛걸음을 했군.” 하고 돌아가려고 하니 스님께서 더 큰 소리로 “처사님은 마음이 헛되니 눈으로는 헛것만 보고 귀로는 헛소리만 듣고 입으로는 헛말만 하고 발로는 헛걸음만 하는구려. 마음이 헛되니 만사가 다 헛것일 수밖에.”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이처사가 자신의 허물을 깨닫고 스님께 예를 갖추어 도와 도인에 대하여 여쭈니 스님께서 “참선인에겐 마음을 깨달은 자가 도인이요, 농부에겐 농사를 잘 짓는 자가 도인이요, 어부에겐 고기를 잘 잡는 자가 도인이요, 포수에겐 사냥을 잘 하는 자가 도인이요, 상인에겐 장사를 잘 하는 자가 도인이니 도라는 것은 정해진 것이 없고 도인도 정해진 것이 없으니 자신의 처지에 따라 마음 하나 잘 쓰는 게 도요, 그 마음 잘 쓰는 사람이 바로 도인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사는 스님의 가르침을 받은 후 정진도 열심히 하고 천장사도 잘 외호하였다고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금 이 시간에도 북망산천(北邙山川)에는 상복을 입은 사람들의 통곡이 울려 퍼지고 있고 다비장에선 연기가 꺼질 날이 없는데 그 자리에 번지는 슬픔이 각자 육신의 허망함을 보고 헤매는 것이지 진정 그 날의 주인공인 영혼의 내세와 업보와 어리석음을 보고 우는 경우가 몇이나 있으며 또 그 영혼을 밝혀줄 능력 있는 상주가 몇이나 있겠습니까? 결국 자신의 영혼은 자신의 삶을 통해 책임져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삶과 죽음을 통해서 진실로 걱정해야 하는 것은 마음이 어떻게 변해가는 것인가이지 육신이 어떻게 변해가는가는 아닙니다. 육신은 아무리 가꾸고 보살펴도 늙고 병들고 무너지는 것이요, 윤회의 주체도 영혼이지 육신은 아니지 않습니까?
생각해보면 이 지구상에서 인간만큼 오래 사는 중생도 드문데 모두들 짧다고 애석해하기만 하니 이 또한 삶의 애착에서 생겨난 고통일 뿐입니다.
그저 살아 숨쉬는 동안 순간 순간에 마음 하나 잘 지키고 살면 숨 꺼지는 순간에 영원한 시간 속으로 마음껏 주인공이 되어서 머무는 업을 가질 수 있는데 이것을 다 함께 쉽게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마음 공부에 대하여 아무리 강조하고 또 강조하여도 지나침은 없으나 시간 관계상 이만 자리를 거둡니다.
부디 진실한 관심법으로 미망의 구름에서 벗어나 부처님이 됩시다.

- 원광대학교 명예철학박사 학위수여기념법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