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고통의 무게에 눌려서 산사를 찾아온 불자님들이 저에게 그 해결 방법을 물을 때 저는 상대에 따라 다양한 표현을 쓰지만 가장 요점은 각자 먼저 자신의 죄업을 참회하고 그 다음에 부처님의 정신에 입각하여 복과 명예를 구하라고 말씀드립니다. 요 근래에는 부처님 제자들이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참회하는 마음이 부족하여 큰 원을 이루는 수행자가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참회(懺悔)란 무엇인고 하니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일입니다. 참은 범어 크샤마(ksama)의 음역인 참마(懺摩)를 줄인 말이고 회(悔)는 범어 크샤마를 뜻으로 번역한 말이니 크샤마는 ‘용서를 빈다’ ‘뉘우친다’ ‘참는다(忍)’의 뜻입니다.
혜능 스님(六祖慧能禪師)께서는 참회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참이란 지나간 허물을 뉘우치는 것으로 전날에 지은 악업, 즉 어리석고 교만하고 허황되고 시기하고 질투한 죄를 뉘우쳐서 다시는 짓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회란 앞으로 범하기 쉬운 허물을 조심하여 그 죄를 미리 깨달아 끊어버리고 다시는 범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진정한 참회란 지난 허물만 뉘우치지 말고 앞으로 닥칠 허물까지 조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참회의 삶을 실천해야 하느냐 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다 인과응보의 법칙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한 예로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에서 신통제일(神通第一)인 목련 스님(木連尊者)께서는 엄지발가락으로 제석천(帝釋天)의 궁전을 진동시키는 신통력을 가지셨는데 평소에는 신통력을 안 쓰시고 다만 부처님의 법회장에 다른 종교인들이 와서 방해를 하거나 설법을 그릇되게 하는 마왕이 날뛰면 그 때에는 신통력으로 부처님의 교단을 지키셨습니다.
말년에 데바닷타 세력의 박해로 집단으로 던지는 돌을 맞으시고 치명적인 중상을 입었는데 도반 사리불 스님(舍利弗尊者)께서 병문안을 가셔서 “벗이여, 신통력을 가지고 왜 박해를 물리치지 않았는가?” 하시니 목련 스님께선 “사리불이여, 이것은 내 자신의 전생의 과보이네. 내가 전생에 아내에게 속아서 나의 부모를 해쳐 그 악업의 과보로써 지금의 고통을 받는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더욱이 전생의 악업 앞에서 목련 스님께서는 자신이 신통력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시고 매를 맞으신 것이니 현세의 신통력보다 전생부터 지어온 업력이 이 얼마나 대단하고 무서운 것입니까?
목련 스님의 예만 보더라도 우리는 먼저 우리의 죄장이 태산 같은 것을 의심하지 말고 숙업을 참회한 다음 바라는 바를 성취하고자 기도해야 합니다. 참회를 하는 데는 가장 대표적인 두 법이 있으니 이참법(理懺法)과 사참법(事懺法)을 말합니다. 먼저 이참법을 설명하자면 참회자가 죄업의 진실한 모습이 어떠한 것인가를 관찰하여 참회를 이루는 것으로 관찰실상참회(觀察實相懺悔)라고도 합니다.
즉 마음이 때묻지 않고 고요히 비어 있는 것을 알게 되면 죄업도 자취가 없어지는 것이니 본래의 마음바탕에서 보면 죄상(罪相)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입장에서 죄업의 실상을 깨달아 죄를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두 비구스님이 깊은 산 속에서 수행을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한 비구스님의 누이동생이 출타 중인 오빠스님을 찾아와서 평소 사모하던 비구스님이 혼자 있는 것을 알고 유혹을 해서 그 비구스님을 파계시켰습니다. 파계 후 정신을 차린 비구스님은 통곡을 했고 여인은 도망을 갔습니다.
잠시 후 돌아온 오빠스님은 도반스님에게 전후 사정을 듣고 분노하여 누이동생을 찾아나서서 헤매다 마침 절벽 위에서 쉬고 있던 누이동생을 보고 달려들자 무서워서 뒷걸음치던 누이동생이 그만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한 비구스님은 음계(淫戒)를, 한 비구스님은 살계(殺戒)를 범했으니 그 얼마나 괴롭고 막막했겠습니까? 두 스님은 서로 붙들고 통곡하다가 참회를 해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그 당시 대율사인 우바리 스님(優婆離尊者)을 찾아가 사실을 고백하였습니다.
이 때 우바리 스님께서는 “두 비구는 사바라이(四波羅夷; 교단에서 축출 당하고 죽어서는 지옥에 떨어지는 죄) 중 하나를 범했으니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이룰 생각을 마라. 바라이 죄를 범한 것은 마치 나락씨를 뜨거운 물에 담갔다 꺼낸 것과 같다. 이에 너희는 보리(菩提) 종자를 완전히 삶아버렸다.”고 호통을 치니 두 비구스님은 자탄하며 바위에 머리를 찧으며 기사굴산을 내려오다 유마 거사(維摩居士)를 만났습니다.
유마 거사께서는 수심이 가득한 두 비구스님께 사연을 물으니 두 비구스님께서는 자초지종을 설명하였고 이에 거사께서는 “두 스님께서는 분명히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럼 어디 한번 봅시다. 그 죄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 하며 두 스님을 향해 손바닥을 내미는데 그 순간 두 비구스님께서는 죄무자성(罪無自性)의 도리를 깨닫고 진실한 이참을 하게 되었습니다.
“죄는 자성이 없는데 마음을 쫓아 일어나는 것이니 마음이 만약 없어지면 죄도 따라없어진다. 죄도 마음도 없어져서 두 가지가 다 공한 상태가 되면 이것을 이름하여 진짜 참회라고 하느니라.(罪無自性從心起 心若滅時罪亦忘 罪忘心滅兩俱空 是卽名爲眞懺悔)” 하는 우리에게는 천수경(千手經)을 통해서 익히 알고 이 게송이 그 때 유마 거사께서 읊은 게송입니다.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에서 아난 스님(阿難尊者)께서 부처님께 여쭙기를, “어떻게 하는 것을 참회라 하나이까?” 하시니 부처님께서는 “진심관(眞心觀)에 들 때 모든 죄는 사라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로써 이참법의 설명을 마치고 이제부터 사참법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참(事懺)은 수사분별참회(隨事分別懺悔)의 약칭입니다. 즉 일에 따라 분별하여 참회하는 법으로 몸으로는 불보살님께 예배를 드리고 입으로는 송경(誦經) 염불을 하며 마음으로는 업장을 참회하는 것을 말하며, 때로는 대중을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하며 정성껏 청소하고 대중을 뒷바라지하는 것도 사참이라 합니다.
신라의 원효 스님(元曉大師)께서 요석공주와의 인연으로 파계 후 걸인 행색을 하시고 저잣거리에서 뒤웅박을 두드리며 “나무아미타불”과 광명진언(光明眞言), 무애가(無碍歌)를 부르면서 그 당시 귀족 불교를 탈피하여 천민을 비롯한 대중을 위해서 불법(佛法)을 전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으니 이와 같은 반야행, 보살행, 자비행, 무애행을 실천하신 스님의 삶이야말로 이참 사참을 동시에 이룬 진정한 참회의 삶을 걸어간 도인이라 생각됩니다.
옛말에 “독초가 나는 곳 근처에는 반드시 양약이 있다.”는 말이 있듯이 수행을 하다가 파계를 했더라도 수행을 포기하지 말고 진실로 참회를 한다면 독을 약으로 바꾸는 결과를 얻을 수 있으니 각기 분수에 따라 참회법을 정하여 원을 세우고 쉬지 말고 실행하며 마음 속의 그릇된 소견과 번뇌와 무지를 닦아갑시다.
진실한 참회는 지혜로써 어리석음을 깨뜨리고 다시는 죄업을 짓지 않게 하여 스스로를 죄장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악을 선으로 돌리고 그릇됨을 올바름으로, 어리석음을 깨달음으로 돌려서 대 해탈을 이루게 하는 참회행을 하여 자신도 제도하고 남도 제도하는 대승보살의 삶을 실천하여야겠습니다.
혜능 스님(慧能禪師)께서도 “죄가 있으면 참회하고 잘못이 있으면 부끄러워할 줄 아는 데에 대장부의 기상이 있다.”고 하였고, 또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모든 장엄에 있어서 가장 첫째가 되는 것이니 부끄러워함은 쇠갈고리와 같아서 능히 사람의 그릇된 법을 제어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언제고 선법(善法)을 지어서 성현이 될 수 있지만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세월이 갈수록 금수(禽獸)와 다를 바가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참회하는 자세로 살아가는 모습보다 이 세상에서 더 아름다운 모습은 없습니다.
- 참회산림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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