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인곡당(법장스님)

2집 제1주제 논평:「뉴밀레니엄의 문명 패러다임과 禪」

淸潭 2008. 2. 22. 17:28

2집 제1주제 논평:「뉴밀레니엄의 문명 패러다임과 禪」

 

목정배(동국대학교 교수)

  우리시대에 있어서 가장 필요하고 가장 긴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모두가 다 걱정하는 바이다.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틀을 짜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다. 새로운 틀이라는 것은 사람이 살아온 것에 대해서 과거의 틀이 제대로 되지 못했다면 오늘의 새로운 틀을 짜야 한다는 의미이다. 여기 발표하신 박이문교수도 인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박이문교수의 발표논문은 ‘뉴밀레니엄의 문명 패러다임과 禪’이라는 제목으로 긴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 중에서도 21세기는 급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급변의 소용돌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지금까지 인간이 살아온 부분에 대해서보다도 새로운 역사가 급속히 발전되어 간다는 의미이다. 문명의 속도는 가속도가 붙었으나, 문화의 속도는 아직까지 문명의 속도에 따라 가지 못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 있어서 발달하고 있는 과학 문명은 편리는 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문화생활, 특히 정신문화생활에 있어서 편안함을 주고 있는가. 이 문제는 앞으로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또 과거에 살아왔던 것을 비교해 가면서 보아야 한다.

Ⅰ. 인간중심적 형이상학과 과학적 자연관

  사실 우리가 과학 속에 살고 있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고 대단히 필요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과학문명의 발달이 과연 인간의 정신문화를 얼마만큼 안정되게 했는가 또는 가라앉혔는가. 이러한 문제는 과학이 해결하지 못하는 한 방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왜냐하면 과학은 기계적이다. 또 과학은 그것이 유형적․고정적인 것을 만들어내서 유형적 물질문명을 우리들이 편리하게 쓰게 할 뿐이지, 그 유형적 문명이 바로 인간의 정신 세계를 편안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은 정신․의식 구조를 어떻게 가라앉히고 침잠시키고 이것을 조용하게 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며, 이러한 가라앉히고 조용하게 하는 것은 종교의 힘에 의해서도 이루어졌으나, 어떤 경우는 종교가 더욱이 인간의 양심이나 평정성을 갈등으로 몰아간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들이 어디에 의거해서 새 패러다임을 짜야하는가 이렇게 생각해본다. 정신문화는 편안하게 하는 것과 동시에 우리의 과학문명은 편리하게 하는 것이 서로 상충하지 않고 어떤 문제에 있어서는 서로 보완 연계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이러한 연계가 없이 일변도로 간다면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특히 우리들의 편리위주로 살면 인간 생활은 다 해결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편리, 그것이 도리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공간을 괴롭히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괴롭힘이 없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불교의 어떤 교리를 현대문명과 현대 정신세계에 깊게 받아들여져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박이문교수는 이와 같은 말을 했다. “문명을 ‘인간이 자신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고안해 낸 자연 개발의 인위적 장치’ 로 정의할 때, 그것은 필연적으로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산물임을 함의한다. 이런 점에서, 얼핏 모든 문명은 필연적으로 인간중심적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유추는 논리적 오류를 범한 피상적 판단이다.”
  이러한 표현은 대단히 적의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신의 삶을 개선하기 위하여 발견해낸 자연개발이 인위적 장치, 이것을 인간이 잘못 인식한 것이다. 자연이라는 것은 인간에 의해서 어떻게 이용되고, 또 어떻게 사용되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은 不二的인 관계이다. 이 불이적 관계라는 것은 인간도 자연속에 속하여 있고 자연속에 또 인간이 있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다시말하면, 生土一如인 것이다. 生이라는 것은 중생을 말하고 土라고 하는 것은 국토를 말한다. 중생과 국토가 하나이다. 달리말하면 의보와 정보가 있는데 의보와 정보가 하나라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인간은 모든 자연을 본위로 이용하기 위해서 생활에 이용하기 위해서 파괴하고 개발하고 하는데 쓰이게 된다면 자연에 대한 모독이요 자연에 대한 몰이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박이문교수도 이러한 논리는 오류를 범한 피상적 판단이라는 한 것에 대해 논자도 동감하는 바이다.
  우리가 살기위해서는 서로 조화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오늘날 우리 지구는 날로 파괴되고 피폐되었고, 참혹화 되어가고 있다. 이것은 환경에 의해서만 그것이 피폐되고 파괴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자연과의 순환속으로 자연이 순환되는 것에 대해서 어떤 잘못된 힘을 가세한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신만이 살면 된다는 독자적인, 오만한, 아집에 의해서 자연을 훼손 파괴한다는 것이다. 훼손․개발이라는 의미 속에 이용이라는 말을 한다. 이 말자체에 대해서도 우리들은 한번 생각해 보아야한다. 이용은 일방적으로 쓰임을 의미한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이용이라는 말보다도 공용이라고 한다. 쓰이는 쪽이나 쓰임을 받는 쪽이 서로 피해가 없고 어떤 힘의 균형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인간 본위로서 모든 자연을 바라볼 때에 자연은 일방적으로 개발의 미명아래 파괴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과학이 모든 것을 이용해서 해결하는데 있어서 앞장 서 있다.

Ⅱ. 생태중심주의와 선불교적 세계관

  이것은 과학이 주는 큰 피해라고 본다. 그러면 모든 생명체는 이 자연속에 살아야 할 본분 본래적인 생태적인 생명을 갖고 있다. 이 본래적이고 생태적인 생명은 어느 누구에게도 파괴, 저지, 억제, 압박을 받을 수 없는 자존성을 가지고 있다.
  일찍이 부처님께서 ‘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는 말을 했다. 이 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는 것은 넓은 의미로 살펴보면 하늘 위에나 하늘아래에 오직 생명이 존귀하다는 의미가 있다. 우리들의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저 천상세계의 모든 어떤 생명, 우리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생명이 있다. 육안으로 보일 때 생명이 있다고 한다. 어떤 생명은 우리의 육안으로 보이지 않지만 어떤 미진 속에 우리들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작고작은 미진 속에 생명의 실상이 있다. 이 생명의 실상이 크면, 큰 것과, 큰 것과  큰 것과 작은 것, 작은 것과 큰 것, 작은 것과 작은 것이 상응연기하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명의 화합성을 또 다른 생명이 가지고 있는 화합성을 나눌 때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주 연기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개체적인 자기 생명만을 본위로 삼고 그 이외의 생명에 대해서는 잘못되게 인식하고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는 말을 하늘 위나 하늘 아래엔 내가 제일 높다. 이렇게 해석하는 경우도 있으나, 삼계의 도사요, 사생의 자부이신 부처님이 깨침의 일성으로 표현했던 그 말씀을 어떻게 나 홀로 라는 이러한 자기적인, 자의적인, 자아적인 표현을 했다고 할 수 있는가. 이 생명은 공존적 생명, 범생명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것을 다시 해석해 보면, 하늘 위에나 하늘 아래에 있든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생명은 자기의 독자성을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모든 생명과 서로 공존 공생할 수 있는 생명임을 말한 것이라고 본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날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지구에는 개인은 개인, 국가는 국가, 민족은 민족, 인류는 인류, 개개인이 자기 나름의 어떤 세력을 가지고서 상대세력을 억누르고 지배하고 독점하고 독재하려는 경향이 날로 짙어가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불교가 가지고 있는 생명관, 공존관, 평등관, 평화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자못 의미가 심장하고 유장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박이문교수가 발표하신 이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 본다. 박이문교수는 논문에서 “‘이기주의’가 ‘나 이외의 다른 이들의 이익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오로지 나 자신만의 이익을 생각하는 나의 태도와 행동’을 지칭하는 것과 똑같이, ‘인간중심주의’는 ‘인간 이외의 다른 생명체들의 이익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오로지 인간만을 생각하는 태도와 행동’을 뜻할 뿐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말은 대단히 동감하는 말이다. 이기주의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이기주의는 자아적인 독선을 의미한다. 이기주의가 인간중심주의로 변함과 동시에 인간이외의 다른 생명체의 이익을 배려하지 않는다라는 표현과 생각은 참으로 철학적 사고에서 우러난 생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인간중심주의라는 이러한 어휘를 가능하면 우리들이 사용하지 않도록 해야한다. 인간중심주의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게 될 때에 인간 이외의 다른 생명체들에 대한 관심을 갖게된다. 우리들은 모든 생명체들에 광물, 식물, 동물 할 것 없이 다 관심을 갖고 연구해 왔다. 그러한 관심은 인간자신의 어떤 생활을 편리하게 하거나 풍부하게 하거나 하는 데에 대한 객관적 사물로 대했던 것이다. 그것이 인간에게 이용되는 어떤 대상물이었지, 그 생물체에 대한 경외심이나 숭엄심이나 어떤 사랑을 갖고 대하는 것이 아니고 이 대상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이용하고 더 많이 사용할 수 있을까. 소비적 사고 방식으로 이해되어 온 것이다. 자연을 소비적 대상으로 보는 이러한 견해를 우리는 탈피해야 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연은 우리들 인간에게 이용당하여 고갈되고 만다. 이용은 바로 고갈을 의미한다.
  고갈된 상태에서 다시 인간중심의 인간만이 살 수 있는 세상이 올 수 있겠는가. 인간이라는 것은 자연과 모든 것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지혜를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
  오늘날 우리들은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말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파괴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21세기에서 얼마가지 않아 모든 것이 고갈되고 말 것이다.
  지하수를 연구하는 이들의 말을 빌면, 물이 지구의 4/5를 차지하고 있다하더라도 물의 궁핍의 시대, 물의 결핍의 시대가 온다고 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의 청정성이나, 물의 시원함, 깨끗함, 이러한 것이 인간들이 쏘아올린 대기오염으로 인해 원천적으로 물의 원소가 오염되어 있는 것이다. 저장될 수 있는 숲이나 삼림이나 자연이 없어져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바로 인간이 온 지구 곳곳에 불도저 등 기계적인 것을 이용해서 남벌, 훼손, 개간, 개발을 함으로 인하여 그 원시림, 정글 이러한 것들이 점차적으로 사막화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의 곳곳이 사막화가 되고 피폐하게 되면 인간은 물의 공급을 받을 수 없다. 인구밀도는 날로 증가해가고 인간이 1일 필요한 물의 용량을 자연이 제공하지 아니할 때 인간은 다른 식물에 의해서 생명을 보존하는 것보다도 물의 고갈로 말미암아 인간의 생명은 죽음으로 가게 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이외 다른 생명체들의 이익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은 참으로 합당한 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지구는 인간만의 삶의 것이 아니라 이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가 공동으로 공용할 수 있는 것으로 인지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들이 인지를 계발하고 과학을 첨단화한다 하여도 그 인지의 과학의 첨단이 인간의 사랑과 자비와 관용이 자연에게 미치지 아니하면 안된다고 본다. 이것은 바로 자연을 피폐하게 하는데, 자연의 피폐는 바로 환경오염이요, 생태계의 교란이다. 어떻게 과학문명이 환경을 정화한다고 하더라도 과학이 정화한다는 것은 자연이 자연을 정화한다는 것과는 대단한 차이가 있다.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것은 여러분이 알다시피 한강자체를 정화시키는 어떤 화학물질이나 정수기를 만들었다하더라도 그 자체는 자정할 수 있는 자연의 힘에 의한 자정력이지, 그것이 어떤 기구나 기계나 과학방법으로 한강전체를 자정시킬 수 없다.
  예를 들어보면 물이라는 것은 높은 곳에서 흘러 내려오면서 자갈이나 모래에 서로 부딪치면서 하늘에 있는 위에서 오는 태양의 열을 받으며 산소공급량이 증가하여 자연적으로 자정이 되어야 한다.
  우리들이 정수기에 물을 맑힌다고 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자연은 자연으로써만이 할 수 있는 기능을 갖고 있다. 그러나 한강 상수원쪽에 오물이나 유류물이나 일체의 폐기물을 한강에 버렸을 때 그것이 자연적으로 정화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자연이 자연을 정화시키는 자정력을 가동할 수 있는 것을 모두다 빼어버렸기 때문이다. 한강변에 汚泥가 가득차면 안된다. 뻘이 가득차면 안된다. 한강은 바로 자갈이나 모래, 이러한 것이 원형적 생태를 갖추어야 만이 위에서 흘러오면서 모래와 부딪치고 자갈에 부딪치면서 자정이 되어야 되는데 모래와 자갈 위에 오니가 가득차면 물은 미끄러져 내려갈 뿐이지 물의 운동은 없어진다. 물의 운동을 빼어버렸을 때 그 물은 썩고 만다. 물도 운동을 해야한다. 물도 뒹굴고 박차나가고 하는 등 무수한 운동을 전개하고 난 후에라야 자연스럽게 자정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살펴볼 때에 우리 인간이 얼마만큼 자연에 대해서 몰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이치에 대해서 불식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이러한 면에 있어서 박이문교수의 이 논문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Ⅲ. 새로운 문명패러다임과 선불교적 세계관

  박이문교수는 ‘새로운 문명패러다임과 禪’이라는 말을 했다. 해결방법에 의해서 생태중심적인 세계관이 새로운 패러다임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말이라고 하겠다.
  “지구와 우주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라 유기적 자연자체이며, 가장 존엄한 것은 인류가 아니라 생태계이며, 가치의 근본은 인간이 아니라 생명자체이다. 이러한 세계인식을 생태중심주의라 부를 수 있다면, 사실과 맞는, 올바른 세계관은 인간중심주의가 아니라 바로 생태중심주의이다”라고 말했다.
  논자도 일찍이 sattvaism, 즉 중생주의, bodhisattva라는 말은 깨친 세계에서 보면 중생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디 bodhi 깨침, sattva 중생, 중생은 깨쳐야 되고 깨치지 않으면 독선주의가 된다. 깨치게 되면 모든 생명과 일여하게 된다. 이것을 본인은 sattvaism. 다시 말하면 중생주의, 중생주의라는 말은 현대에 많은 이들이 주장하고 있는 생태중심주의와 같은 말이다.
  이것을 논자는 하나의 公式으로 이야기했다. 그것은 n(n-1)/2 이다.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생물은 獨我的, 獨善的, 自存的으로 살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생명은 자기 생명과 다른 생명과 서로 에너지의 교호․교환과 같이 상대적으로 유용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용이라는 것보다도 공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인간 이외의 모든 자연과 생명학적으로 공존의식을 가져야 한다. 다시 말해서 윤리적으로 공존의식을 갖는다 하는 것은 인간끼리 도덕이나 윤리로써 서로 예의범절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윤리라는 말보다도 중생과 중생이 연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각각의 중생의 생명 속에 생명의 핵이 온전하게 있으면서 그 생명의 핵이 공유되어야 한다. 그로기 위해서는 첫째 나의 생명을 조화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나의 생명은 보존하고 남의 생명을 박탈․침해․약탈하면 안된다. 내 생명을 멸살시킴과 동시에 남의 생명 속으로 그것을 존중의 힘으로 돌려야 한다. 다른 생명의 힘이 융화됨과 동시에 내 생명 속으로 와서 힘의 공력으로 나타나야 한다. 서로 더하고 빼는 것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더하는 것으로 무한히 가는 것이 아니라 더하고 나누는 것이 만나서 공의 속에 무화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중도라 한다. 이것은 가운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이다. 곧 ‘中’의 세계에 드는 것이다. 선악․생멸이 대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선악․생멸 이것이 하나의 공의 상태가 되어 선의 생명체를 보존함과 동시에 다른 생명과 공존할 수 있는 덕을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곧 중생주의 sattvaism와 같은 깊은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다. 오늘날 생태의 중심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환경보전은 우리의 도시환경이나 농촌환경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환경을 말한다. 지구전체를 생명체로 보고 생명이 공존한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윤리라는 것은 도덕적인 약속이다. 생명윤리나 환경윤리하고 할 수도 있겠으나 환경과 자연에 대해서 도덕적으로 보고 보존하는 철학을 가지자는 것이다. 환경윤리나 생태윤리보다도 중생주의는 생명이 근본이다 라고 보는 것이다. 생명은 곧 우주의 가장 존귀한 핵이다. 이 핵이 한 곳에서 파괴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응이 일어난다. 좋은 핵분열이 일어나면 온 우주가 평화로워지겠지만 나쁜 핵이 분열하면 우주는 흑암이 되고 맙니다. 잘 아시다시피 중국대륙의 모래바람이 우리나라에서는 황사가 되는데 그 모래바람이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인체에 해로운 것을 몰고 온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의 식물을 파괴한다. 그처럼 인간생명은 다 무수한 살생의 기회와 더불어 생명을 살리는 기회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사막이 황폐화되는 것을 과학기술의 발휘를 통해서 고쳐나가야 한다.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 공덕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가 지니고 있는 수행과 체험과 철학적 교설을 새롭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박이문교수는 불교의 가르침을 사성제 · 팔정도로 보고 있다. 이것은 부처님이 녹야원에서 전법할 때 처음으로 갈파한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괴로움의 세계를 고라 한다. 그 고는 어디서 왔는가. 인간의 정신세계에서 일고 있는 욕망을 억제하지 못한 결과 그것이 확산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과거의 원인이 현재의 결과가 된다.  괴로움은 현재의 사실이다. 현재의 사실로 괴로움을 받고 있다는 것은 과거의 욕망이 지나친 것이다. 그 욕망을 집(集)이라 하는데 貪瞋癡 三毒을 말한다. 지나친 탐진치의 작용에 의해서 현재의 고를 받는 것입니다. 고와 집은 이와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현실의 고통과 오염속에서 살고 있는 것은 과학일변도의 편리성 · 일회성․간편성에 욕망을 두고 있기 때문인데 이것이 集이다. 그러면 이러한 원인이 더욱 계속된다면 훗날도 고통은 계속될 것입니다. 어제의 원인이 오늘의 결과이고 오늘의 원인이 내일의 결과인 것처럼 우리가 고와 집에서 살고 있는 한 희망은 없다. 그 어떤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그것이 곧 도로서 팔정도이다. 우주의 참모습을 바로 보는 것이다. 바르게 보고 바르게 사유할 줄 아는 것이다. 바로 본다는 것은 우주의 실상․연기의 이법․중생주의․생태중심주의를 바로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보고 바로 생각하고 바로 행동함으로써 수행하는 8가지 단계를 거친다면 멸에 다다를 수 있다. 멸이라는 것은 평화․평정으로서 이상적인 세계입니다. 그 이상세계를 현실화하지 못하면 험난한 고의 세계에 살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눈을 새롭게 돌려 자연과 우주에 전개시키는 안목을 지닐 때 가장 지혜로운 세계․청정한 세계에서 살 수 있습니다. 사성제의 멸이 죽음을 의한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여기에서는 인간이 살아있으면서 다른 생명과 자연이 가장 여여하게 가고 오고 하는 흔적도 없이 자연스럽게 되는 세계를 말한다. 사후열반 혹은 유여․무여열반이라 말하지만 열반은 이상이 아니라 현실세계에서 모든 생명이 이상을 훼손하지 않고 각각의 두두물물 모두가 평상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숲길을 지나가면서 이슬맺힌 꽃을 흔들거나 어찌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보는 것이다. 그러면 이슬방울은 땅으로 스며들어 물이 된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무엇을 그냥 두지 않고 억압하거나 어떤 형태로 변화시키려 한다. 그 힘을 안으로 증장시켜야 한다. 바로 팔정도의 마지막의 正定을 수행하면 멸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이 선이다. 선은 어렵게 생각하지만 그것은 心一境性 곧 일심이 되는 것이다. 心一境性은 마음속에 彼我가 없는 세계이다. 자연․인간․객관이 없는 세계이다. 무념․무심이라 할 때 마음이나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주객이 없고 피아가 없다는 뜻이다. 곧 이러한 무망념의 세계는 선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禪이라는 한자를 보면 이것과 저것의 분별이 아닌 하나로 본다는 의미가 잘 담겨 있다. 본다는 것은 보인다는 것으로 하나로 간단하게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복잡하게 혼란스럽게 살고 있다. 복잡한 것을 싫어하면서도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모든 생활이 편리한 듯하나 복잡하다. 간단하고 단순한 생활 속에 적나라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의식주․정보․교통․가재․전자도구 등 아주 복잡한 속에서 살고 있다. 그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러려면 생활이 단순해야 한다. 선은 心一境性이다. 애욕이 永盡하여 다시는 애욕이 일지 않는 것을 열반이라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애욕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욕망과 갈애 속에서 살고 있다. 애욕의 소용돌이 속에서 탈출하는 것이 선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이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새로울 것은 없다. 본래부터 당연히 그러해야 할 것을 그러하고 못하고 제2의 욕망을 선택한 것뿐이다. 학문․철학․도덕․과학과 같은 것으로부터 애욕을 확산시켰을 뿐입니다. 이로부터 벗어나려면 선수행을 해야 한다. 새로운 세기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가. 지금의 것을 그대로 두면서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인간만이 최고가 아니라는 것이다. 박이문교수는 생태중심․환경중심․우주중심을 언급하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에 동감하면서 논자는 중생주의 · Cosmobuddhism, 곧 우주생명연기를 깨치는 생각을 지금 이 자리에서 실현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단순 · 순박 · 단일하게 되는 것이 곧 그것의 실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이문교수의 논문을 읽고 많은 교시를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