德崇禪學 2-2 제2주제:韓國禪의 특수성과 보편성
종 호(동국대학교 교수)
Ⅰ. 머리말
인도에서 기원한 선은 중국으로 넘어와 기존과는 다른 사상과 수행체계로서 새로운 선의 세계를 이루고, 다시 한국과 일본으로 전래된 후 오늘날에는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상이 되어 있다. 이들 각 지역에서의 선은 기본적인 부분에서는 서로 상관적 모습을 보이면서도 다른 면에서는 제각기 나름대로의 특색을 지니면서 발전해 왔다.
생각을 한 곳에 모으는 가장 기초적인 修禪의 형태나 선수행을 통해 인류를 구제하려는 불교의 궁극적 목적을 지향하고 있는 것들은 인도를 포함해 중국에서나 한국 등 모든 지역에서 보이고 있는 공통적인 부분이지만 단계적 관찰 과정의 형태를 띠고 있는 관법 중심의 인도적 방법과 하나의 문제를 참구 과제로 삼아 궁구하거나 本證의 상태에 대한 직접적 자각을 추구하고 있는 중국적 방법, 그리고 여기에 내재된 선사상을 합일시키면서 독자적 관점을 가지려 노력한 한국에서의 선과, 현대에 들어 특히 선의 문화적 측면에서 발전을 보이고 있는 일본의 선 등은 제각기의 지역적 특색을 가진 상이한 모습들이다.
이중 인도의 선은 불교의 탄생과 함께 시작된 불법수행의 가장 밑받침이 되는 기본요소였으며, 중국에서의 선은 불교의 종합적 사상체계이자 핵심 수행방법이었고, 한국과 일본의 선은 이들의 장점을 지역 여건과 문화에 알맞게 발전시킨 사상과 생활선으로서의 특징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다.
본 논의 주제인 한국선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살펴보는데 있어 고래로부터 직접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는 이들 인도와 중국 및 일본, 그리고 현대 서양에서의 선까지 전반적인 고찰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고, 그것도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측면도 함께 살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단편 논문으로서는 너무 광범한 것이라 여겨진다.
따라서 본 논에서는 한국의 선이 직접적이면서도 가장 많은 영향을 받고 있는 중국에서의 선에, 그리고 역사적인 면으로 그 범위를 한정하고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Ⅱ. 한국선의 보편성
9세기 초 구산선문의 선사들에 의해 선이 전해지고 고려대에 보조지눌(1158~1210)에 의해 중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한국의 선은, 중국에서 형성된 선사상을 오롯하게 이어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만의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도 있다. 선의 모든 것을 빠짐없이 수용하여 독자적 사상과 수행체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 한국에서의 선인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한국의 선사들이 보인 선에 대한 이해와 한국이라는 지역적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한 禪者로서의 태도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한국선에 깃들어 있는 보편적 모습은 어떤 것인가? 생각하는 관점에 따라 달리 말할 수도 있겠지만 논자는 한국의 조사들이 보인 선사상에의 철저함과 중생의 제도라는 度生의 삶이 이른바 한국선의 보편적 모습이 아닌가 한다. 선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와 그 어느 것보다도 중요한 선의 궁극적 지향점에 한국의 조사들은 가장 일반적 모습, 곧 보편적 특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선사상에 대한 철저함과 중생제도의 삶은 선이 중국에서 오늘날 인식되고 있는 바와 같은 선으로서 정립된 후, 선수행 및 선자로서의 이상적 삶의 형태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것이 되어 있다. 이중 사상에 대해 철저함은 선이 내포하고 있는 내적 세계에 투철함을 말하는 것이고, 중생제도의 삶은 이런 투철한 내면의 선 관점을 가지고 현실의 중생들을 皆共成佛로 이끄는 소위 ‘佛敎’적 삶을 말한다. 선이 가진 특징이자 또한 가장 보편적 형태인 이런 사상의 철저함과 도생의 행은 선이 존재하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한결같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지만 한국의 선사들은 이에 두드러진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국선에서 ‘선사상에의 철저함’은 우선 인도를 거쳐 중국에서 형성되어 유행한 모든 선사상의 수용, 곧 중국 선사상의 모든 것을 받아들인 역사적 측면과, 그 중요 내용에 대한 완벽한 파악 및 이를 종합하여 핵심사상을 압출하고 거기에 철저했던 사상적인 면 등 두 가지를 들 수가 있다.
먼저 선사상의 전래를 살펴보자. 한국에는 중국에서 형성된 선사상의 전체가 전래되고 있다. 혜능 이전의 초기선을 비롯해 마조의 조사선과 선종오가의 선, 그리고 이후 간화선과 묵조선의 수행법들에 이르기까지 중국선의 전반적인 것들이 모두 전래되어 수용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에 선이 전해진 최초는 선종 초조 보리달마로부터 비롯된 純禪이 혜가와 승찬을 거쳐 500여 대중들이 모여 본격적으로 선을 수행하기 시작한 사조도신(580~651)의 선법부터이다. 곧 사조도신하에서 수학한 法朗 법랑의 생멸 연대는 불명이나 최치원의 ꡔ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ꡕ에는 법랑이 도신에게서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고, 또한 道信 - 法朗 - 愼行 - 遵範 - 慧隱 - 智證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언급하면서 한국에 그의 선법이 전해진 것으로 밝히고 있다.(ꡔ朝鮮金石總覽ꡕ 上, 亞細亞文化社, 1976, p.90~91)
이 도신의 선을 전하여 한국에 선법을 최초로 전한 인물이 되어 있으며, 이후 오조홍인 문하에도 楊州智德禪師가 있었음이 ꡔ역대법보기ꡕ에 언급되어 있다. ꡔ대정장ꡕ 51, p.821 상.
선이 형성되기 시작한 초기에 이미 한국의 선사들이 중국에 건너가 선을 수학, 전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선법의 전래는 육조 문하에서도 살펴볼 수 있으며, ꡔ경덕전등록ꡕ 권6 목차 부분에는 육조의 5대 제자 중의 한 사람인 남악회양 문하에 本如禪師가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기록할 기연어구가 없다 하며 이름만 언급하고 있다.
논증이 필요한 부분이지만 신행(704~779)에 의한 신수계 선의 전래, 곧 북종선의 수학과 전래도 있다. 또한 이후 마조도일의 조사선이 흥성하면서는 이른바 구산선문의 개창조들을 중심으로 수많은 선사들이 중국에 들어가 선법을 공부하고 귀국, 선을 전파하고 있다.
구산선문기 중국에서는 馬祖道一(709~788)로부터 비롯되는 조사선의 사상이 널리 전개되고 있었고, 이는 道義 등 구산문의 선사들에 의해 한국에 전해지고 있다. 가지산문의 도의(738년 入唐 821년 귀국)와 실상산문의 홍척(입당 미상, 826~836년 경 귀국) 및 동리산문의 혜철(814년 입당 839년 귀국)이 마조의 제자인 서당지장(735~814)에게서 선법을 수학하여 전래하고 있으며, 이후 봉림산문의 현욱(824년 입당 837년 귀국)이 장경회휘에게서, 성주산문의 무염(821년 입당 845년 귀국)은 마곡보철, 사굴산문의 범일(827~835년 입당 847년 귀국)은 염관제안, 사자산문의 도윤(825년 입당 847년 귀국)은 남전보원, 진감혜조(804년 입당 830년 귀국)는 창주신감, 그리고 대매법상하의 迦智(?)선사와 忠彦, 귀종지상하의 大茅, 현욱의 스승인 장경회휘하의 覺體 등 많은 선사들이 마조의 문하인들에게서 마조로부터 비롯되는 조사선을 수학하여 전래하고 있다.
이런 선사상의 수학과 전래는 이후에도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다. 마조계에서만 보더라도 백장회해 - 위산영우 - 앙산혜적으로 이어지는 계열의 선과, 백장 - 황벽희운 - 임제의현으로 이어지는 계보의 선이 모두 전래 수용되고 있다. 곧 856년 입당하여 앙산혜적에게 가르침을 받고 866년 귀국한 大通禪師와, 858년 입당하여 역시 앙산으로부터 위앙의 대표적 접화방법인 圓相을 고스란히 전해 받은 五冠山 順之에 의해 위앙종의 선이 전래되고 있으며, 순지의 귀국 연대는 미상.
임제의현의 선은 지리산화상에 의해 전해지고 있다. ꡔ경덕전등록ꡕ 권12에는 이름만 언급하고 있으나 ꡔ천성광등록ꡕ 권13(만속장 135, p.713) 및 ꡔ오등회원ꡕ 권11(만속장 138, p.398)에서는 일단의 사상을 함께 전하고 있다.
소위 선종오가 중의 위앙종과 임제종의 선법이 한국에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들 마조계뿐만 아니라 청원행사에서 석두희천으로 이어지는 석두 계열의 선법도 똑같이 전해지고 있다. 석두 계열 선법의 최초 전래자로 알려지고 있는 行寂(870년 입당 885년 귀국)이나 행적은 석두희천 - 약산유엄 - 천황도오 - 석상경제로 이어지는 계열의 선법 전승자이다.
석두 - 단하 - 취미로 이어지는 투자대동의 선을 수학한 璨幽(892년 입당 921년 귀국), 청원 - 석두 - 약산 - 도오 - 석상 - 곡산도연으로 이어지는 계보의 선법 전승자 兢讓(897년 입당 924년 귀국), 석두로부터 역시 약산 - 도오 - 석상 - 구봉도건으로 이어지는 계보의 玄暉(906년 입당 924년 귀국), 그리고 석두에서 약산을 거쳐 운암과 동산으로 이어지는 계보로 조동종의 개조인 동산양개하의 金藏과, 동산의 법사인 소산광인의 법을 계승한 동리산문의 제자 慶甫(892년 입당 921년 귀국), 또한 같은 동산의 제자인 운거도응의 선법을 잇고 있는 성주산문의 麗嚴과 수미산문의 利嚴(896년 입당 911년 귀국) 및 慶猷(입당 미상 908년 귀국)와 逈微(891년 입당 901년 귀국) 등의 4인 이들 4인을 흔히 海東四無畏라 칭한다.
등이 조동의 선을 전래하고 있다.
또한 고려 4대 광종기(재위 945~975)에는 선종오가 중의 하나인 법안문익계의 법안종이 전승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그중에는 ꡔ경덕전등록ꡕ에 문익의 嗣法 제자로 언급되어 있는 慧炬와 靈鑒禪師가 있으며, 혜거는 ‘본국의 왕이 (대사를) 사모하여 사신을 보내 귀국하기를 청하므로 마침내 본국으로 돌아갔다. 국왕이 心訣을 듣고 예의를 갖춰 극진히 대우했다.(本國主思慕遣使來請 遂回故地 國主受心訣禮待彌厚)’(「高麗道峯山慧炬國師」, ꡔ韓國金石全文ꡕ, 아세아문화사, p.414 중~하)는 내용으로 보아 당시 이미 상당한 지명도를 가지고 있었던 인물로 보이며, 영감의 경우 ‘어떤 것이 청정한 가람입니까?’ ‘소 우리가 그것이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저 어리석은 자를 끌어내라.(僧問 如何是淸淨伽藍 師曰 牛欄是 問如何是佛 師曰 拽出癲漢著)’(「高麗靈鑒禪師」, 위의 책, p.420 상)라는 관련 내용이 있다.
혜거 이후 그의 제자인 寂然國師 英俊(932~1014)이나 圓空國師 智宗(930~1018), 眞觀禪師 釋超(912~964) 등 많은 승려들이 법안선의 계승자 천태덕소(891~972)나 영명연수(904~975)에게서 嗣法하고 귀국하여 선을 전하고 있다. 이중 적연국사 영준은 광종 19년인 송 建德 6년(968) 3월에 吳越國의 영명연수를 찾아 사법한 후 광종 23년(972)에 귀국한 선사이며, ꡔ靈巖寺寂然國師慈光塔碑ꡕ(ꡔ韓國金石全文ꡕ, 앞의 책, pp.457~458)
원공국사 지종은 광종 6년(955)에 역시 吳越에서 연수에게 가르침을 받고 광종 13년(962)에 귀국하고 있고, ꡔ居頓寺圓空國師勝妙塔碑ꡕ(위의 책, pp.463~464)
진관선사 석초는 태조 23년(940)에 남중국에 들어가 延壽의 법형제인 龍冊曉榮 문하에서 수학하고 定宗 년간인 946년에 귀국한 선사이다.
뿐만 아니라 ꡔ경덕전등록ꡕ의 「永明延壽章」에는 ‘고려국의 왕이 대사의 설법을 전해 듣고 사신을 보내 글을 보내며 제자의 예를 올리고 금실로 짠 가사와 자수정으로 만든 염주와 금으로 만든 다관 등을 바쳤다. 또한 그 나라의 승 36인이 직접 수기를 받아 본국으로 돌아가 제각기 한 지방을 교화했다.’ ꡔ景德傳燈錄ꡕ 권26, 「杭州慧日永明寺智覺禪師延壽章」(대정장 51, p.422 상) ‘高麗國王覽師言敎 遣使齎書叙弟子之禮 奉金線織成袈裟紫水晶數珠金澡罐等 彼國僧三十六人親承印記 前後歸本國各化一方’ 인용문 앞 구절에서 ‘建隆 元年에 충의왕의 청에 의해 靈隱山의 새로 지은 절에 주석하며 第一世가 되었고, 그 다음 해에 역시 청에 의해 영명의 대도량에 머무르며 제2세가 되었는데 대중들이 이천이 넘었다.(동, p.421 하. 建隆元年忠懿王請入居靈隱山新寺爲第一世 明年復請住永明大道場爲第二世)”는 내용으로 볼 때 연수가 영명사에 주석한 것은 송의 태조 2년인 961년이고, 당시의 고려 임금은 光宗(재위 949~975)이므로 36명의 승려를 보낸 것은 광종이다.
고 하여 광종시에 연수 문하에 고려 승 36인이 수학하고 있었던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고려대 법안선의 일시적 흥성은, 광종 중반기부터 吳越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많은 승려들이 중국에 들어가 수학하고 특히 법안의 문하인 천태덕소나 영명연수 등 법안계의 인물들과 교류한 이들 고승들이 귀국하여 고려 선종계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활동한 것에 의한 것이다.
또 대각국사 의천(1055~1101)과 함께 入宋하여 정인도진의 법을 계승하여 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혜소가 있으며, 淨因은 臨濟義玄 - 興化存獎 - 南院慧顒 - 風穴延沼 - 首山省念 - 葉縣歸省 - 浮山法遠 - 淨因道臻으로 이어지는 法系를 지닌 臨濟 門下人이다. 慧炤의 入宋 得法에 대해 ꡔ東文選ꡕ에서는 ‘航海西遇 得淨因髓’라 하여 慧炤가 淨因의 法을 이어 받았음을 전하고 있다.(ꡔ東文選ꡕ 권109, 「慧炤國師祭文」) 淨因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승려는 부용도계의 법사 淨因法成(1071~1128)이나 姜融道平의 법사 淨因繼成 및 淨因大覺璉禪師 등 대략 아홉 여명 정도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혜거의 경우 더 고찰이 필요하기는 하나 ꡔ七賢山七長寺事實記ꡕ에 ‘入中國繼臨濟之正脈’이라 하여 慧炤가 中國에 들어가 임제의 正脈을 전해 온 것은 사실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ꡔ朝鮮寺刹史料ꡕ 상, p.68)
혜소의 제자인 대감국사 탄연(1069~1158)도 황룡혜남계의 문인인 무시개심과 교류를 갖고 있고, ꡔ斷俗寺大鑑國師塔碑ꡕ에 의하면 ‘宗派에 대해 헤아려 보면 선사는 임제의 9대손이다. 선사의 諱는 탄연이며, 속성은 손씨이다. … 일찍이 그가 스스로 지은 四威儀頌과 함께 上堂語句를 써서 상선을 이용해 大宋 四明 阿育王山 廣利寺의 介諶禪師에게 보내 그의 인가를 받았다. 개심은 선사에게 매우 아름답다고 탄미하며 사백여 언의 글을 보냈는데 비문이 번거로울까봐 싣지 않는다.(以宗派考之 臨濟九代孫也 師諱坦然 俗姓孫氏 … 嘗寫所作四威儀頌 倂上堂語句 附商舶寄 大宋四明阿育王山 廣利寺 禪師介諶印可 諶乃復書 極加歎美 僅四百餘言 文繁不載. ꡔ朝鮮金石總覽ꡕ 상, pp.563~564)고 하고 있어 이에 의하면 坦然의 臨濟禪 繼承은 중국에 가지 않고 서신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여타의 선사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ꡔ선문염송ꡕ의 저자 혜심의 법손인 원명국사 충감(1274~1338)은 임제종 양기파의 문인이자 고려 선사들과 많은 교류를 갖고 있는 몽산덕이 寶鑑國師 混丘(1250~1322)의 비문에는 吳의 蒙山異禪師가 일찍이 無極說을 지어 선박 편으로 보내었으며 보감이 묵연히 그 뜻을 받들어 스스로 無極老人이라고 號를 했다고 하고 있고, ꡔ松廣寺慧鑑國師廣照塔碑ꡕ에도 혼구와 거의 같은 시기에 살았던 慧鑑國師 萬恒(1259~1315)이 蒙山과 親交를 가지고 있었음을 전하고 있다. 주지의 사실처럼 몽산이 고려 승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는 이야기이다.(「寶鑑國師妙應塔碑」, ꡔ高麗名賢集ꡕ 2, p.294 및 「松廣寺慧鑑國師廣照塔碑」, 同 p.292)
의 제자 鐵山瓊선사의 선을 수학 전래하고 있다.
이후에도 충목왕 2(1346)년 중국에 들어가 양기방회 계열의 석옥청공의 법을 전래한 태고보우(1301~1382)와, 보우보다 19세 연하로 27세 때인 충목왕 3년(1347)에 중국에 들어가 인도승 지공과 석옥의 동문 평산처림으로부터 法衣와 拂子를 전해 받고 있는 나옹혜근(1320~1377), 그리고 역시 석옥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인물로 오늘날에는 세계 最古의 금속활자본인 ꡔ佛祖直指心體要節ꡕ의 저자로 이름을 남기고 있는 백운경한(1299~1375)이 있다.
그러나 조선기에 들어서서는 입중국하여 선을 수학 전래하여 뚜렷한 행적을 남기고 있는 선사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통치권과 유생들의 숭유억불 정책에 따른 사회적 여건, 그리고 중국에서의 선법 쇠퇴에 기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초기의 남악계와 이후의 조동계에 이어 고려초의 법안계와 후기의 임제계에 이르기까지 중국선의 전반적인 부분들이 한국에 전래 수용되고 있다.
이런 선의 수학 및 전래와 동시에 선사상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한국의 선이다. 초기 도의나 동리산의 혜철 등 모든 선사들이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837년에 입당하여 840년 귀국한 가지산문의 體澄의 관련 기록은 이를 단적으로 증명해주고 있다.
개성 2년 정사년에 동학인 정육 허회 등과 함께 뱃길로 서쪽 중국으로 건너가 선지식들을 참문했다. 3~5州를 다니면서 온 법계가 좋아하는 것이 같으며 性相이 다름이 없음을 알았다. 이에 말하기를 ‘우리의 조사가 이미 가르침을 준 것에 더 덧붙일 것이 없는데 무엇하러 애써 먼길을 다니겠는가’하고 그만 발길을 멈추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ꡔ寶林寺普照禪寺彰聖塔碑ꡕ(ꡔ朝鮮金石總覽ꡕ 상, 앞의 책, p.62)
開成二年丁巳 與同學貞育虛懷等 路出滄波 西入華夏 參善知識 歷三五州 知其法界 嗜欲共同 性相無異 乃曰我祖師所說 無以爲加 何勞遠適 止足意. 개성 2년은 희강왕 2년으로 837년.
이외에도 최초 도의와 함께 마조하의 서당지장에게서 선을 수학하고 귀국하여 실상사에 머물렀던 홍척의 선에 대해 최치원은 임금이 국가의 안위(順風)를 위해 법문을 청했으며 아침의 범부가 저녁에 성인이 되게 했다고 하면서 또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시험삼아 그 종취를 비교해 본다면, 수행하되 수행할 것이 없는 것을 수행하며 증득하되 증득할 것이 없는 것을 증득하는 것이다. 고요할 때에는 산이 서 있는 것과 같고 움직일 때에는 산골의 메아리가 응답하는 것과 같다. 무위(법)의 이익을 논쟁하지 않고도 이겨버린다. 이 어찌 동쪽 사람들의 마음을 비우게 하는 것이 아니랴. ꡔ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ꡕ(위의 책, p.90)
有洪陟大師 亦西堂證心 來南岳休足 鷩冕陳順風之請 龍德慶開霧之期 顯示密傳 朝凡暮聖 變非蔚也 興且□□□□□□勃焉 試처較其宗趣 則修乎修設修 證乎證設證 其靜也山立 其動也谷應 無爲之益 不爭而勝 於是乎東人方寸地虛意.(‘처’는 虛+見) 내용 중 修乎修設修 證乎證設證에서 ‘設’자는 ꡔ海東金石苑ꡕ에 ‘沒’자로 되어 있다. 내용으로 본다면 沒자가 맞다.
내용 중 수행하되 수행할 것이 없는 것을 수행한다는 修乎修沒修와 증득하되 증득할 것이 없는 것을 증득한다는 證乎證沒證 및 無爲之益은 조사선의 개창조 마조가 즉심시불과 평상심시도를 설하면서 한결같이 강조하고 있는 조사선의 핵심사상, 곧 無修無證 및 平常無爲의 내용이다. 마조는 일체의 모든 현상은 그대로 참된 진리이고 그대로 해탈의 경지이며, 그대로가 진여법계의 세계이니 달리 수행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取善이나 捨惡, 觀空, 入定 등 취사․조작․작위․분별의 마음을 갖는 것을 경계하고, 이러한 분별심을 갖지 않는 것이 眞道의 세계요, 그 진도의 세계가 道不用修 無修無證의 세계이며, 이 도불용수의 현현이 곧 평상심라 설한 바 있다. ꡔ景德傳燈錄ꡕ 권28, 「江西大寂道一禪師示衆」(대정장 51 p.440 상).
道不用修 但莫汚染 何爲汚染 但有生死心 造作趣向 皆是汚染 若欲直會其道 平常心是道 謂平常心 無造作 無是非 無取捨 無斷常 無凡無聖 經云 非凡夫行 非聖賢行 是菩薩行 只如今行住坐臥 應機接物 眞是道 道卽是法界 乃至河沙妙用 不出法界 若不然者 云何言心地法門 云何言無盡燈.
그러나 마조의 이 설을 무조건적 不修로 보아서는 안된다. ꡔ馬祖語錄ꡕ(ꡔ四家語錄․五家語錄ꡕ, 中文出版社 p.6)에서는 ‘僧問 如何是修道 曰 道不屬修 若言修得 修成還壞 卽同聲聞 若言不修 卽同凡夫 又問 作何見解 卽得達道 祖曰 自性本來具足 但於善惡事中不滯 喚作修道人 取善捨惡 觀空入定 卽屬造作’라 하여 만약 수행이 필요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곧 범부와 같은 것이라고 하고 있다.
또한 이런 내용은 이후 임제에 이르러서는 ‘부처도 없으며, 법도 없고, 닦을 것도 없으며, 증득할 것도 없다. 그런데 무엇을 밖에서 구하려고 하는가? 눈먼 이들이여! 머리 위에 또 머리를 얹으려고 하는구나. 그대들에게 또 무엇이 모자란다는 것인가? 수행자들이여! 내 눈앞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대 자신들이 祖佛과 전혀 다르지 않거늘 왜 믿지 않고 밖으로만 찾아 헤메이는가? 잘못 판단해서는 안된다. 밖에도 법이 없고 안에서도 얻을 것이 없다.’고 하는 강력한 내용으로 이어지고 있다. ꡔ鎭州臨濟慧照禪師語錄ꡕ(ꡔ대정장ꡕ 48, p.500 하)
向爾道 無佛無法 無修無證 祗與麽傍家擬求什麽物 瞎漢頭上安頭 是爾欠少什麽 道類 是爾目前用底 與祖佛不別 祗麽不信便向外求 莫錯向外無法 內亦不可得 爾取山僧口裏語 不如休歇無事去.
곧 이런 조사선이 가진 선의 본령에 대해 한국의 선사들은 완벽히 체득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고려 志謙이 저술한 ꡔ宗門圓相集ꡕ ꡔ한국불교전서ꡕ 제6책, pp.71~89.
에 의하면 了悟順之에 의해 위앙종의 접화 특색인 원상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고, 앞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ꡔ천성광등록ꡕ의 「新羅國智異山禪師章」에는 이름이 정확하지 않은 지리산화상이 임제의 선법을 오롯하게 전수 받고 있다. 특히 이 지리산화상은 한 승이 어느 家의 曲調를 부르며, 宗風은 누구를 계승했느냐고 물은 후 그가 어렸을 때는 여기저기 다녔으나 지금과 같이 되어서는 배가 불러 굶주리지 않게 되었다고 답하자, ‘그래서 곧 鎭陽의 格調를 오늘날 온전하게 베푸시는군요.(鎭陽格調今日全施也)’라고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임제선의 온전한 傳得을 가지고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ꡔ天聖廣燈錄ꡕ 권13, 「新羅國智異山和尙章」(ꡔ卍續藏ꡕ 135, p.713)
僧問 師唱誰家曲 宗風嗣阿雖 師云 小年曾歷他門戶 員至如今飽不飢 進云 恁麽卽鎭陽格調今日全施也 師云 盲龜値木且藏身 問欲掏眞性去 未免業纏牽 未審如何免得 師云 放下著 進云 放後如何 師云 臨崖看虎眼 特持一場愁 問如何是和尙家風 師云 琉璃盌內水 符刀喝起行 進云 忽遇客來將何祗待 師云 三巡茶後室中煙 問如何是鎭國寶 師云 華表拄頭 思天念地 進云 旣是鎭國寶 爲什麽却如此 師云 非公境界 問如何是菩提路 師云 三門前 進云 便恁麽去時如何 師云 看 師上堂云 冬不寒臘後看 便下座. 내용 중 鎭陽은 臨濟가 살았던 鎭州의 異名으로 臨濟를 의미한다.
또한 법안문익과 천태덕소 및 영명연수로 이어지는 법안선을 전래한 고려 초기의 수많은 선사들은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창립된 천태종으로 흡수되기까지 선교일치를 중심으로 한 법안선의 세계를 펼치고 있으며, 보조지눌에 의해 주창되어 한국선에서 새로운 기틀로 자리하고 있는 간화선, 이후 정해년(1347) 가을 湖州 霞霧山의 석옥화상을 참알하여 법을 계승하고 옷을 전해 받으면서 석옥으로부터 불법이 동으로 간다는 말과 함께 ‘이 법은 영산으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오늘 그대에게 전한다. 그대는 잘 호지하여 끊어짐이 없도록 하라.’는 부촉을 받고 있는 태고보우와 그 선세계, ꡔ太古和尙語錄ꡕ, 普濟社, 1940, p.10. 보우의 경우 臨濟喝德山棒 是甚兒戱’라는 그의 上堂法門 구절에서 살필 수 있듯 임제가 설한 無位眞人의 세계에 證入하고 나아가 石屋의 臨濟宗旨을 뛰어 넘어 無碍自在한 禪機를 전개하였던 선사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려에도 다녀간 적이 있는 지공에게서 ‘종지를 밝힌 법왕에게 千劒을 준다(明宗法王給千劒)’는 말과 함께 신표로 법의와 불자를 전해 받고 있는 나옹혜근의 선, 그리고 忠定王 3년(1351)에 元에 들어가 석옥으로부터 無心無念이라는 임제종의 근본 종지를 얻고, 뿐만 아니라 간화를 하거나 조사 어구를 배우며 경전을 본다던가 造論討疏를 하고, 제방의 선지식을 찾아다니거나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고 조용한 곳을 찾는 것과 같은 것들은 參學이 아니라고 하면서 澄心黙照가 참학이라는, 곧 묵조선에도 정통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백운경한 등 모든 선사들이 글자 그대로 중국에서 정립된 선사상들을 전승하여 완벽히 구현해 내고 있다.
바로 이와 같은 모든 선사상의 수용과 체득이 한국선이 가진 보편적 모습 중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되어진다.
한국선이 가진 보편적 모습 중의 또 하나는 한국의 조사들이 보인 중생제도의 삶이라고 하겠다. 두 말 할 나위 없이 선의 궁극적 목적은 자신의 본래면목에 대한 깨달음을 이루고 일체의 중생들을 제도하고자 하는 度生의 삶에 있다. 육조혜능도 선의 가르침은 후대의 수행자들이 菩提를 頓悟하여 제각기 스스로의 마음을 살피고 본성을 돈오케 하는 것에 있다고 하고 있으며, ꡔ敦煌本壇經ꡕ(장경각, pp.175~176)
是故將此(汝)敎法 流行後代 令(今)學道者 頓悟菩提 各自觀心 令自本性頓悟
이런 선의 세계를 가장 현저하게 발현시킨 임제의현은 心心不異의 세계를 이루고 도생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活祖, 혹은 祖佛이라 하며 이를 가장 이상적인 선자의 삶으로 규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ꡔ十牛圖ꡕ에서는 여덟 번째의 人牛俱忘과 아홉 째의 返本還源을 거쳐 맨 마지막 열 번째 단계에서 자신의 특징적 모습을 제거하고 옛 성현들의 가르침도 멀리하면서 표주박을 차고 지팡이를 끌며 술집이나 생선가게 등 집집마다 다니면서 교화하는 入纏垂手를 들고 있고, 자각종색선사의 ꡔ좌선의ꡕ에서도 修禪을 하는 목적을 자신 혼자만의 해탈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不爲一身 獨求解脫) 오직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력을 세우고(誓度衆生) 정진해야 함을 밝히고 있다.
말하자면 이런 선의 생활태도에 대해 철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일반화된 보편적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 한국의 선사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는 중국에서나 한국의 선사들 모두가 마찬가지이다. 물론 모든 선사들이 그야말로 투철하게 이에 일관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면의 본면목에 집중하는 것이 선이고 이에 따라 낙도적 삶의 형태를 보이고 있는 일부 선자들도 있지만 이른바 조사로 불리워지며 확고한 선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선사들은 한결같이 철저하고 분명한 도생의 삶을 살고 있다.
중국의 경우를 보면 도신하의 500여명이나 홍인하의 천여 명 및 이후 많은 문하인들을 지도하고 있는 선사 등 선종의 내부적 부분들을 제외하고 수많은 선사들이 일반 재가인들을 위해 제도의 가르침을 펼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대표적 인물들 몇 명만 든다면 초기의 선사들 중 장안과 낙양의 제도권에 들어가 선법을 폈던 혜안이나 신수와 같은 선사들이 있으며, 모두가 一方의 宗主들로 전국 각지에 흩어져 중생교화의 실천행을 행하고 있는 마조하의 선사들이 있고, ꡔ경덕전등록ꡕ 권6에 의하면 마조의 제자로는 139인이 있었고 이들 모두 한 지역의 종주가 되는 인물들이며, 교화가 무궁하다고 기록하고 있다.(「馬祖道一章」, ꡔ大正藏ꡕ 51, p.246 中. 師入室弟子一百三十九人 各爲一方宗主轉化無窮)
이후 신흥세력인 절도사들과 교류하며 중생제도의 행을 하고 있는 위산 및 앙산이나 임제, 조산 등 오가의 선사들이 있다. 위앙종의 개조가 되는 위산영우는 李景讓(786~857)이나 相國 崔愼由(?~861?)의 극진한 귀의 속에 선법을 전파 교화하고 있고, 그 제자인 앙산혜적은 相公 鄭愚나 陸希聲 등 각 고을의 節史, 察史, 刺史들의 歸依를 받아 활발한 활동을 하였던 선사이다. 또한 임제도 太尉將軍 黙君和나 河北府主 王常侍와 교류하며 도생을 행을 하고 있고, 조동종의 조산 및 운거도응은 南州의 수장인 南平鐘王의 귀의를 받아 교화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임제가 주장한 무위진인이나 무의도인의 설은 이런 교화행과도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조사의 중생교화에 대한 관점을 여실하게 엿보게 하는 부분이다. 졸저, ꡔ臨濟禪硏究ꡕ(경서원, 1996), Ⅴ장 3절 1항 참조.
또한 선종오가의 선사들 중 운문종의 운문문언은 오대 南漢의 고조 유엄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며 韶州의 관청에서 도속 수천 명에게 설법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펴고 있고, 법안종의 문익도 남당의 李昇 및 李璟의 귀의를 받아 폭넓은 교화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문익의 경우 그가 입적하자 公卿 李建勳 이하 관원들이 소복을 입고 유해를 받들어 江寧縣의 丹陽鄕으로 가 탑을 세웠다 하니 그의 교화행적을 익히 알 수가 있다.
이후 많은 사대부들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간화선에 의한 교화를 펴고 있는 남송기의 대혜 등 역대의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선사들이 선의 궁극적 목적인 도생의 삶을 실현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것이 한국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구산문 초기 실상산문의 홍척은 앞의 주17)에서 언급한 것처럼 왕실의 초청을 받아 임금에게 국가의 안녕을 위해 법을 설하고 있고, 동리산문의 혜철은 ‘문성왕이 혜철에 대한 소식을 듣고 象法의 말기에 화신으로 나투셨다 하고 자주 서신을 보내 위문하고 절의 사방에 禁殺의 幢을 세워 살생을 금하게 했으며, 理國의 핵심을 물음에 받들어 몇 가지를 올리니 모두 時政의 急務라 왕이 매우 기뻐하였다. 이런 조정에 도움이 되는 바로 인해 왕과 후가 예를 다해 마지 않았다.’ ꡔ大安寺寂忍禪師照輪淸淨塔碑ꡕ(ꡔ朝鮮金石總覽ꡕ, 앞의 책, pp.118~119)
文聖大王聞之 … 朝廷王侯致禮.
라는 구절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처럼 임금에게 정치의 화급한 내용을 자문하고 있다.
또한 경문과 헌강 두 임금의 국사로 받들어지고 있는 성주산문 무염의 가르침을 받은 헌강왕은 ‘三畏는 三歸에 비견되고 五常은 五戒와 균등하므로 왕도를 잘 실천하는 것이 불심에 부합된다.’ ꡔ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ꡕ(ꡔ朝鮮金石總覽ꡕ, 위의 책, p.79)
三畏比三歸 五常均五戒 能踐王道是符佛心. 삼외는 군자가 경외하는 天命과 大人, 聖人.
는 깨우침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특히 무염은 왕실 이외에도 보령지방에서 세력을 가지고 있던 金昕 등 지방 호족들에게도 가르침을 펴고 있다.
호족들에 대한 교화 활동을 하고 있는 또 다른 선사들로 강원지방의 金周元이나 경북지역의 沈忠 등에게 교화를 편 사굴산문의 범일이나 희양산문의 도헌 및 지방호족인 金律熙계와 교류하고 있는 봉림산문의 심희 등이 있다. 이들 선사들과 지방호족 세력들의 관계에 대해 선사들이 중앙왕실의 권위를 부정하면서 사상적으로 지방호족들이 세력화 하는 것을 뒷받침했다고 보는 설도 있지만 金杜珍, 「了悟禪師 順之의 禪思想」(ꡔ歷史學報ꡕ 65집, p.51)
왕실과 지방호족 등을 막론하고 선사들은 중생 구제라는 목적하에 활발한 교화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려대에 들어 광종조에 활약한 圓空智宗과 道峰慧炬, 寂然英俊, 眞觀釋超 등 법안종계 선승들과, 찬유의 高達院과 긍양의 曦陽院 및 혜거의 道峰院, 곧 三院을 중심으로 한 소속 선승들의 활동, 그리고 보조지눌로부터 고봉화상에 이르는 修禪社의 16국사들의 행적도 도생의 모습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것들이다.
뿐만 아니라 구산선문의 통합을 시도하면서 1356년부터 1366년까지 圓融府를 중심으로 불교행정의 혁신과 개경에서 한양으로의 수도 천도를 활동을 하였던 태고보우(1301~1382)의 삶 또한 이에 입각해 있다고 하겠으며, 韓基斗, ꡔ韓國禪思想硏究ꡕ(一志社, 1991, p.278)
나옹혜근(1320~1377)은 1362년 神光寺에 머무르며 국사의 중대한 일을 처리하거나 홍건적을 교화 覺宏이 쓴 나옹의 行狀에 나옹이 설법시에 홍건적 수십 명이 쳐들어 왔는데 두려운 빛 없이 그들을 대해 오히려 그들이 향을 올리고 물러갔다고 기록되어 있다.(무비 역주, ꡔ나옹스님어록ꡕ, 민족사, 1996, p.83)
하는 등의 행적을 보이고 있고, 백운경한(1299~1375)의 경우 元의 수도 燕京에서 황제를 감동시키고 사람들을 교화하는 등 해외에서까지 중생제도의 행적을 남기고 있다. 無比 譯註, ꡔ백운스님어록ꡕ(민족사, 1996, p.18)
또 조선기에 들어 무학은 태조 원년(1392) 10월 왕의 부름을 받아 양종오교의 납자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백성 보호하기를 어린 아이 돌보듯 하면 백성의 부모가 될 수 있을 것이요, 지극한 仁과 큰 자비로 나라에 임한다면 자연 聖壽는 한이 없고 임금의 자손들은 길이 창성하며 사직이 편안할 것입니다. 새로 나라를 세운 요즈음 형법에 빠진 자가 하나 둘이 아니니 바라건데 전하께서 모두를 동일하게 사랑하고 모두 용서하여 臣民들을 仁壽에 이르게 한다면 나라의 무궁한 복이 될 것입니다.’는 법문을 하여 중앙과 지방의 죄수들을 풀어주게 하고 있으며, 명성, 「無學大師塔銘」(ꡔ삼대화상연구논집ꡕ, 佛泉, 1996, p.300)
이외 숭유억불에 의한 위정자들의 기나긴 억압의 세월 속에서도 중생을 향한 爲人의 마음을 결코 놓지 않은 수많은 조선기의 선자들이 있다.
곧 선의 유입기나 고려대에 비해 사회적 영향력이 절망적 상태로 바뀐 것이 조선기이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허응당 보우가 문정왕후의 후원을 받아 선교 양종의 승과부활과 도첩제의 재시행을 통한 승려들의 지위향상, 퇴락하고 황폐한 사원의 복구 등의 불교부흥책을 펴고 있는 것이라든가, 金容祚, 「虛應堂 普雨의 佛敎復興運動」(ꡔ虛應堂普雨大師硏究ꡕ, 佛舍利塔, 1993, p.102)
너무나도 잘 알려진 서산휴정(1520~1604)과 그 문하인들이 임란을 당하여 목숨을 걸고 국가의 안위와 국민의 생명 보호에 앞장서고 있는 것들이 그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중 보우의 경우 직접적인 도생의 삶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나 불법의 성세가 위인도생의 보다 실제적인 밑바탕이 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직접적인 행동 못지 않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수많은 선승들은 중생제도라는 선의 궁극적 실천행에 매진하고 있다. 바로 이런 실천적 자세가 한국선이 가진 보편적 모습 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Ⅲ. 한국선의 특수성
앞서의 보편적 모습과 달리 한국선만이 가지고 있는 특이한 내용은 무엇인가? 한국의 조사들이 중국에서 형성된 모든 선사상을 오롯하게 수학 전래하고 그에 바탕한 도생의 삶을 살고 있지만 중국과 달리 한국 선사들만이 보이고 있는 몇 가지의 주목되는 점이 있다.
그것은 곧 사상적인 면에서 禪主敎從을 바탕으로 선교일치의 관점을 취하면서 궁극적으로는 捨敎入禪의 면을 보이고 있다는 것과 돈오점수만의 강조, 그리고 독자적 관점을 형성하려고 했다는 점과, 수행방법에서 간화의 행법만을 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위 이들 네 가지가 중국에서의 선과 다른 한국선만이 가진 특색이 아닌가 한다.
첫째 선주교종을 바탕으로 선교일치의 관점을 취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사교입선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것은 교학보다 선을 우위에 두면서 일차적으로는 교학을 이해하고 이후 이의 견해에서 벗어나 선으로 귀일케 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선교일치의 관점을 가지면서도 선 중심의 사상체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중국과 다른 한국선만의 특징이다. 물론 중국에서도 선종초조 보리달마가 경전에 의거해 불교의 핵심을 깨닫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던가(ꡔ二入四行論ꡕ에 언급되어 있는 理入者 謂籍敎悟宗의 부분), 마조가 제자 서당지장에게 경전을 보라고 장려하고 있는 것 ꡔ경덕전등록ꡕ 권7 「虔州西堂智藏大師章」(ꡔ大正藏ꡕ 51, p.252 상)
馬祖一日問師云 子何不看經 師云 經豈異耶 祖云 然雖如此汝向後爲人也修. 내용 그대로 훗날 사람들을 지도하기 위해서 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및 황벽이 문인들을 지도하면서 교설을 보고 있는 것, ꡔ임제록ꡕ에는 임제가 황벽이 글을 보고 있는 모습을 보고 ‘검은 콩이나 주어 먹는 늙은 화상’이라고 비판하고 있는 구절이 있다.(ꡔ대정장ꡕ 48, p.505 중. 元來是暗黑豆老和尙.)
그리고 규봉종밀이나 법안문익 및 그 문하인들의 전개하고 있는 선교일치 등이 있지만 종밀은 선과 교를 동등한 입장에서 선교일치를 주장하고 있지만 법안종의 문익은 선교 동등이 아니라 선의 입장에서 교설을 수용, 곧 화엄의 육상원융을 제자들을 지도하기 위한 접인법으로 활용하면서 선교일치를 주장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종밀과 문익의 선교일치는 기본적으로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는 교화의 방법론이나 원활한 언설을 찾기 위한 방편법으로서 선사들의 가르침일 뿐이고, 조사선자들이 가지고 있는 교학에 대한 기본 관점은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정통 조사선자들은 거의 한결같이 교설에 대해 철저히 부정하는 입장에 있다. 임제종의 개조 임제의현은 三乘十二分敎가 모두 不淨을 닦는 헌 종이, ꡔ臨濟錄ꡕ(ꡔ大正藏ꡕ 47, p.499 하)
乃至三乘十二分敎 皆是拭不淨故紙.
곧 화장실의 화장지와 같은 것이라고 하면서 또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오늘날의 수행자들이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것은 대개 名字를 인정하여 자신의 견해로 삼기 때문이다. 큰 책 위에서 죽은 老師의 말을 拔萃하고 보자기로 세 겹 다섯 겹 싸 사람들에게는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면서 ‘이것이 玄旨이다’고 하며 소중히 여긴다. 아주 크게 잘못되어 있다. 위의 책, p.501 하.
今時學人不得 蓋爲認名字爲解 大策子上 抄死老漢語 三重五重複子裏 不敎人見 道是玄旨 以爲保重 大錯.
또한 ‘문자를 향하여 구하려 하지 말라’(동, p.502 하. 莫向文字中求.)라던가, “수행자들이여, 그대들은 일반 老師의 말을 가지고 ‘이것이 참다운 道이다’하고, ‘이 선지식은 不可思議하다’고 하며, ‘우리는 凡夫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어찌 감히 저 훌륭한 老宿을 헤아릴 수가 있겠는가’한다. 눈 먼 어리석은 사람들아, 그대들은 일생을 다만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두 눈을 못쓰고 추워서 입을 다무는가? 마치 벌벌 떨며 얼음장 위로 가는 당나귀와 같구나.(道類 爾取這一般老師口裏語 爲是眞道 是善知識不思議 我是凡夫心 不敢測度他老宿 瞎屢生 爾一生秖作這箇見解 辜負這一雙眼 冷噤噤地 如凍凌上驢駒相似. p.499 중)”라던가, ‘자신을 열등시하고 비굴한 생각으로 나는 衆生이고 그는 聖人이라고 한다. 머리 깎은 어리석은 놈들아! 무엇을 그렇게 황급하게 찾아 헤매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사자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여우의 소리를 내는가? 당당한 대장부가 장부의 기개를 갖지 못할 뿐더러 자신의 속에 있는 보배를 철저히 믿지 않고 오직 밖으로만 구하면서 옛사람의 언구에만 사로잡혀 옳다 그르다를 분별하며 참된 자신의 삶을 통찰하지 못하는구나.(自輕而退屈言 我是凡夫他是聖人 禿屢生 有甚死急 披他師子皮 却作野于鳴 大丈夫漢 不作丈夫氣息 自家屋裏物不肯信 秖麽向外覓 上他古人閑名句 倚陰博陽 不能特達. 동 p.502 중)라는 등 수처에서 이러한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이런 관점은 이외 위앙종의 앙산이나 조동종의 조산, 운문종의 운문 및 법안종의 문익 위앙의 앙산은 ‘다른 사람이 전에 말한 불생불멸이나 二邊, 중도 등의 이치만 논한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빛과 그림자일 뿐이다.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수많은 理論들을 除去하도록 하라.(ꡔ조당집ꡕ 권18 「앙산화상장」, ꡔ고려장ꡕ 45, p.350 중. 他身前不生不滅 二邊中道義海 是他人光影 抛却身前義海)고 하고 있으며, 조산은 ‘諸方에는 말로서 이루어진 선사들이 많아서 여러분의 귓속에 가득해 있으리라. 그러나 온갖 법을 빌리지도 않고 접하지도 않으며, 오직 체험해서 알기만 한다면, 그들의 그 많은 분별된 지식으로도 그대들을 어찌하지 못하리라. … 그대들은 千經과 萬論의 말로서만 이루어진 사람들이 자유롭지 못하고 시종을 초월하지 못했음을 보지 못했는가? 그것은 곧 자신의 일을 밝히지 못했기 때문이다.’(ꡔ조당집ꡕ 권8 「曹山和尙章」, ꡔ고려장ꡕ 45, p.285 상~중. 諸方多有說成底禪師在 儞諸人耳裏惣滿也 一切法不接不借 但与摩軆會他家差別知解 … 儞見他千經万論說成底事 不得自在 不超始終 盖爲不明自己事)고 하고 있다.
운문종의 운문은 ‘광대한 經典의 주석서로 가죽 포대에 불과한 몸뚱이를 가득 채우고는 가는 곳마다 이리저리 헤아린다. 화롯가에 삼삼오오 머리를 맞대고 둘러앉아 입을 놀리며 시끄럽게 떠들어대며 말하기를, ‘이것은 公의 재치 있는 말씀이고 이것은 상황에 맞추어 하신 말씀이며, 이것은 현상 쪽에서 이르신 말씀이고, 이것은 본체에서 하신 말씀이다’고들 한다. 그대 몸뚱이 속의 늙은 아비 어미(爺孃)는 체득했는가? 밥을 눈으로만 보아 넘기고 꿈 이야기만 해 대면서 나는 佛法을 알았다고들 하는구나.’(ꡔ운문광진선사광록ꡕ, ꡔ대정장ꡕ 47, p.552 상. 大卷抄將去 向皮袋裏 卜度到處火鑪邊三箇五箇聚頭擧口 喃喃地便道 這箇是公才語 這箇是就處打出語 這箇是事上道底語 這箇是體 語體汝屋裏老爺老孃 噇却飯了 秖管說夢便道 我會佛法了也.)고 하고 있으며, 또한 법안도 ‘여러분들은 일찍이 還源觀․百門義解․華嚴論․涅槃經 따위의 여러 서적을 보았을 것인데 어느 경전에 그런 경계가 있던가? 있다면 이야기해 보라. 이런 경 속에 이런 말씀이 있는데 바로 이런 경계가 아닐런지요하고. 그렇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ꡔ경덕전등록ꡕ 권24 「法眼文益章」, ꡔ대정장ꡕ 51, p.398 하. 諸人各曾看 還源觀 百門義海 華嚴論 涅槃經 諸多策子阿那箇敎中有遮箇時節 若有試擧看 莫是恁麽經裏有恁麽語是且時節麽 有什麽交涉.)라 하고 있다. 拙著, ꡔ臨濟禪硏究ꡕ(경서원, 1996) Ⅶ.臨濟禪과 禪宗五家, 2.五家의 思想的 特質 참조.
및 여타 수많은 선사들이 모두 동일한 가르침을 펴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구산선문 이후 려대 초 법안선의 전래 및 이어 보조지눌이 선을 중흥하면서부터 그 이후 계속하여 이런 중국에서의 관점과는 다른, 곧 선주교종의 바탕 위에 선교일치, 그리고 사교입선의 형태를 지향하고 있다. 조선 초까지는 선교양종의 구분을 뚜렷하게 보이고 있는 것이 한국불교의 실제적 모습이지만 이러한 경향은 의천과 지눌에 의해 종래의 교․선 분리 교육을 지양하고 함께 융섭하여 교육시키려는 선․교 융합의 교육이 시도되고 있는 것부터 기원하여 이후 계속 이어지고 있다. 특히 일부 선사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는 그 경향은 매우 강하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일단 동리산문의 혜철은 서당지장에게서 심인을 전수한 후 西州 浮沙寺에서 3년간 대장경을 읽고 있어 교설에 대한 기본적 시각을 보여주고 있고, 지종이나 혜거 등 법안종계의 선법을 계승한 선승들은 천태학에 바탕한 선 우위의 선교일치 관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허흥식, 앞의 책, p.286.
법안종의 소멸 고려에서 법안선이 소멸된 것에는 선교 융합의 바탕 위에 천태사상을 받아들였던 법안종의 종풍과, 그들로부터 선법을 전승한 선사들의 천태사상에 대한 수용과 그 이해, 그리고 의천이라는 한 인물의 위인됨과 그가 가진 사회적 배경 및 위상에 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선주교종이면서 선과 교를 융합적이고 상호 보조적으로 보고 있는 중국에서의 법안선은 한국의 선이 이후 한결같이 禪敎一致, 敎禪一如의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불교에 미친 영향이 매우 크다.
을 거쳐 보조는 ꡔ금강경ꡕ으로 법을 세우고 ꡔ육조단경ꡕ을 심법의 바탕으로 삼아, 그리고 ꡔ화엄신론ꡕ과 ꡔ대혜어록ꡕ을 마음을 밝히는 전거로 삼으면서 선교를 절충하여 이른바 惺寂等持門과 圓頓信解門, 看話徑截門이라는 삼종선을 주창하고 있다. 경전이 사람을 현혹시키는 人惑의 대상이라고 하며 강하게 부정했던 중국의 많은 선사들과는 달리 경론이나 祖錄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禪敎會通과 捨敎入禪의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특히 보조의 이런 관점은 이것이 이후 한국선의 기본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또 진정국사 천책도 1293년 ꡔ선문보장록ꡕ 3권을 지어 선교일치의 관점을 보이고 있고, 태고보우는 석옥화상의 거처로 가던 중 우연히 발견한 ꡔ치문경훈ꡕ을 한국에 전하여 기존의 ꡔ초발심자경문ꡕ으로만 수행하던 초심자들에게 새로운 수행 이론과 교재를 제공하고 있으며, 어록인 ꡔ백운화상어록ꡕ에 나타나 있듯 ꡔ반야경ꡕ이나 ꡔ원각경ꡕ, ꡔ범망경ꡕ 등의 여러 경전들과 운문 및 이통현의 저술 등 조사들의 어구를 설법에서 인용하고 있는 경한은 ꡔ禪敎通論ꡕ에서 ‘오늘날도 부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되 그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하고 가르침을 보여 마음을 밝힙니다. 또 밖에서 찾게 하지 않고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을 전하고 부처님의 씨앗을 이어 바로 조사의 경지에 들게 하는 가르침으로 원칙을 삼고 있으니 어찌 선과 교가 다르다고 하겠습니까?’고 하고, 또 ‘선과 교는 말이나 이름은 달라 보이지만 그 본체는 똑같아서 본래 차별이 없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無比 譯註, ꡔ백운스님어록ꡕ(앞의 책, pp.166~167)
뿐만 아니라 유․불․도 삼교를 자신의 사상 안에 융합시킨 삼교회통의 모습을 보이고도 있는 것이 경한이기도 하다.
이런 형태는 조선기에 들어 태조의 왕사였던 무학자초(1327~1405)의 제자인 함허기화(1376~1433)를 비롯해 환암혼수나, 벽계정심, 벽송지엄(1464~1534)을 거쳐 부용영관(1485~1571)과 청허휴정(1520~1604) 등 교․선을 융합한 수많은 종장들이 배출되고 있는 것에서 더욱 뚜렸해지고 있으며, 그 구체적 형태는 승가의 교육제도에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
조선기에는 통치자들에 의해 선교 양종이 인위적으로 통폐합되고 승과가 폐지되면서 선교일치와 선교겸수를 위한 교육이 행해지고 있는데, 중국 초기 선종의 소의경전인 ꡔ금강경ꡕ과 禪經인 ꡔ능엄경ꡕ을 비롯하여 보조의 ꡔ계초심학인문ꡕ․ꡔ절요ꡕ 및 ꡔ도서ꡕ와 ꡔ선요ꡕ․ꡔ치문경훈ꡕ 등이 편제에 삽입되고, 이후 혜심의 ꡔ선문염송ꡕ과 야운의 ꡔ자경문ꡕ 등이 조선초까지의 선종인들에게 필수 서적이 되고 있다.
또한 교종의 소의경전인 ꡔ화엄경ꡕ․ꡔ법화경ꡕ․ꡔ원각경ꡕ․ꡔ대승기신론ꡕ 등의 경론을 선종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또 원효의 ꡔ발심수행장ꡕ도 선종의 학습과목으로 포함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을 바탕으로 교과과정이 벽계정심을 거쳐 벽송지엄 때 그 일부(사집)가 이루어지고, 다시 부용영관 무렵에 ꡔ전등록ꡕ과 ꡔ선문염송ꡕ․ꡔ원각경ꡕ․ꡔ능엄경ꡕ․ꡔ법화경ꡕ․ꡔ반야경ꡕ․ꡔ화엄경ꡕ 등의 사교․대교의 교과목이 정해졌으며, 인조~숙종시에 이르러서는 상봉정원이나 백암성총․월담설제․월저도안 등에 의해 사미․사집․사교․대교의 학제가 확정되는 등 사교입선을 위한 예비문의 역할로서 교학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拙論, 「한국불교의 교학체계와 수행체계에 대한 연구」(ꡔ세계승가공동체의 교학체계와 수행체계ꡕ, 대한불교 조계종 교육원, 1997) 참조.
특히 천여명의 청허 문하인 중 사명유정(1544~1610)과 편양언기(1581~1644), 소요태능(1562~1649), 정관일선(1533~1608) 등의 4대 제자와 이들의 계열에서 배출되고 있는 풍담의담(1592~1665), 월담설제(1632~1704), 월저도안, 환성지안(1664~1729) 등 수많은 선․교의 종장들의 승가교육에 대한 영향은 매우 지대하게 나타나고 있다. 李能和, 朝鮮佛敎通史 上, pp.522~528.
이들은 교학 강의와 修禪을 겸하여 선․교 겸학의 수학체계를 이 땅에 뿌리내리게 하고 있다.
이런 여러 인물들 중 선주교종을 바탕으로 선교일치의 관점을 취하면서 명확한 사교입선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대표적 인물은 역시 청허휴정이다. 휴정은 ꡔ선가귀감ꡕ 등 자신의 저술을 통해 이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① 부처님이 말씀하신 경전은 먼저 여러 법을 분별한 다음 공한 이치를 말씀하신 것이지만 조사들이 보인 구절은 자취가 생각에서 끊어지고 이치가 마음의 근원에서 나타난 것이다. … 제불은 활같이 말씀하시고 조사들은 활줄처럼 말씀하신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無碍의 법은 바로 一味로 돌아가는 것이나 이 일미의 자취조차 떨쳐버려야 조사가 보인 한 마음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므로 ‘뜰 앞의 잣나무’라 한 화두는 龍藏에도 없다고 한 것이다. 李鍾益․沈載烈 강설, ꡔ禪家龜鑑ꡕ(普成文化史, 1996, pp.48~51)
諸佛說經 先分別諸法 後說畢竟空 祖師示句 迹絶於意志 理顯於心源 … 諸佛說弓 祖師說絃 佛說無碍之法 方歸一味 拂此一味之迹 方現祖師所示一心 故云 庭前栢樹子話 龍藏所未有底.
② 부처님께서 三處傳心하신 것이 禪旨가 되고 일생에 걸쳐 말씀하신 것이 敎門이 되었다. 그러므로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 그러므로 누구든지 말에서 잃으면 염화미소가 모두 교의 자취일 뿐이요, 마음에서 얻으면 세간의 온갖 잡스런 말들도 교외별전의 선지가 된다. 위의 책, pp.31~39.
世尊 三處傳心者 爲禪旨 一代所說者 爲敎門 故曰 禪是佛心 敎是佛語 … 是故 若人 失之於口 則拈花微笑 皆是敎迹 得之於心 則世間鹿言細語 皆是敎外別傳禪旨.
③ 수행자는 먼저 진실한 言敎로서 不變과 隨緣의 두 의미가 내 마음의 性相이며, 돈오와 점수의 두 문이 내 수행의 시작과 끝임을 자세하게 가려 잘 안 연후에, 교설의 뜻을 놓아버리고 오로지 자신의 마음이 뚜렷이 드러난 한 마음으로서 禪旨를 참구한다면 반드시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니 이것이 出身活路이다. 위의 책, p.55.
學者先以如實言敎 委辨不變隨緣二義 是自心之性相 頓悟漸修兩門 是自行之始終 然後放下敎義 但將自心現前一念 參詳禪旨則必有所得 所謂出身活路.
①은 선주교종의 내용이고 ②는 선교일치의 관점이며, ③은 사교입선에 대한 말이다. 특히 ꡔ청허집ꡕ에서는 ‘문자지식이 아니라면 어떻게 密義宗綱을 궁구하겠는가’ ꡔ청허집ꡕ 권6 「圓覺經慶讚䟽」.
不是文字知識 終何究密議宗綱.
라 하고 있는 등 선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교설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放下敎義하여 선으로 돌아가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에 선이 전래된 이후 선사상을 그 기저로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처럼 선이 중심이 되고 교학이 뒷받침한다는 관점 하에 선교일치의 관점을 견지하면서 마침내는 사교입선해야 한다는 것을 설하고 있는 것이 한국 선사들의 주된 가르침이고 이것이 한국선의 특수한 한 모습이라고 하겠다.
두 번째 한국선의 특징 중의 하나는 돈오점수를 견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른바 돈오한 이후에도 점수의 과정을 가져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 역시 중국과는 다른 모습이다.
중국에서의 돈점설은 신회를 중심으로 약 50여년 사이에 주로 언급되었던 문제이다. 물론 이후에도 일부 나타나고는 있지만 중요한 문제로 취급되지는 않고 있다. 곧 신회에 의해 돈오사상이 주창된 이후 마조 등 이후의 선사들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더 이상 논란이 되고 있지는 않은 것이다. 이런 면에서 신회의 돈오설 주창은 중국선사상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당시의 선 분위기를 일대 대전환시켜 돈오로 돌이켜 놓았을 뿐만 아니라 이후 중국선의 사상과 수행법의 핵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북종을 비판하는 것만이 아니라 중국선의 일대 변혁을 가져온 것이 바로 돈오사상이다.
일단 돈오점수설은 이 신회에게서부터 살펴볼 수 있다.
우리의 육대조사는 항상 단도직입하여 곧바로 견성하여 깨닫는 것을 말했고 점차 계합해 들어가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모름지기 공부하는 사람은 불성을 頓見하고 점차 인연을 수행해야 한다. 이는 중생의 삶을 벗어나지 않고 해탈을 얻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어머니가 아이를 낳았으나 우유를 먹여 점차 길러야 그 아이의 지혜가 자연히 증장되는 것과 같다. 돈오하여 불성을 보는 것도 이와 같아 (돈오하면) 지혜는 자연 점점 증장된다. ꡔ신회화상유집ꡕ, pp.286~287.
我六代大師 一一皆言 單刀直入 直了見性 不言階漸 夫學道者 須頓見佛性 漸修因緣 不離是生而得解脫 譬如母頓生子 與乳漸漸養育 其子知慧自然增長 頓悟見佛性者 亦復如是 知慧自然漸漸增長.
돈오에 대한 주장은 일찍이 구마라집의 제자 도생에게서부터 언급되고 있는 내용이나 돈오점수설은 신회로부터 비롯되고 있는 설이다. 곧 신회가 중국선종사에서 최초의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선에서의 주된 관점은 돈오점수가 아니라 돈오돈수에 있다. 특히 육조혜능은 ꡔ단경ꡕ에서 한결같이 돈오를 설하면서 동시에 돈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혜능대사가 말했다. ‘너의 계정혜는 낮은 근기의 사람들에게 권하는 것이요, 나의 계정혜는 높은 근기의 사람들에게 권하는 것이다. 자기의 성품을 깨치면 또한 계정혜도 세우지 않는다.’ 지성이 물었다. ‘대사께서 세우지 않는다고 하신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대사가 말했다. ‘자기의 성품은 그릇됨이 없고 어지러움도 없으며 어리석음도 없다. 생각생각마다 지혜로 관조하여 항상 법의 모양을 떠났는데 무엇을 세우겠는가? 자신의 성품을 頓修하
라. 세우면 점차가 있으니 따라서 세우지 않는다.’ ꡔ돈황본단경ꡕ(앞의 책, pp.222~223) 能大師言 汝戒定惠 勤小根諸人 吾戒定惠 勤上根人 得悟自性 亦不立戒定惠 志誠言 請大師說不立如何 大師言 自性無非無亂無癡 念念般若觀照 常離法相 有何可立 自性頓修 立有漸 此所以不立.(원문과 다른 글자나 생략된 것은 참고서적에 따름)
이런 관점은 마조 이후의 조사선에 일관하여 흐르고 있는 공통된 사상이다. 특히 선종오가 중의 임제는 ‘산승의 견처를 헤아려 보건대 석가와 다르지 않다. 오늘 다반사로 사용하는 곳에 무엇이 부족 하는가? 육도의 신광 육근의 작용을 신령스런 빛으로 비유하고 있는 용어.
이 잠시도 쉬는 일이 없다. 만약 이와 같이 볼 수만 있다면 참으로 일생 일 없는 사람이 된다.’ ꡔ임제록ꡕ(앞의 책, p.497 중)
道類 約山僧見處 與釋迦不別 今日多般用處 欠少什麽 六道神光未曾間歇 若能如是見得 秖是一生無事人.
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오늘날 佛法을 배우는 사람은 진정한 견해를 구해야만 할 것이니, 만일 眞正한 見解를 얻는다면 생사에 물들지 않고 가고 옴에 자유로우며, 수승함을 구하지 않더라도 수승함이 자연히 이루어지느니라. 위의 책, p.497 중.
今時學佛法者 且要求眞正見解 若得眞正見解 生死不染 去住自由 不要求殊勝 殊勝自至.
내용 그대로 진정견해를 얻게 되면 곧바로 돈수된다는 말이다. 또한 종밀도 ꡔ도서ꡕ에서 우두종의 사상을 돈오돈수라 평하고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ꡔ禪源諸詮集都序ꡕ(ꡔ대정장ꡕ 48, p.407 하~408 상)
有云 頓悟頓修者 此說上上智根性 樂欲俱勝 一聞千悟得大總持 一念不生前後際斷 此人三業唯獨自明了 余人所不見 且就事跡而言之 如牛頭融大師之類也)
그러나 이와는 달리 한국에서는 돈오점수설이 주로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특히 보조와 서산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가 있다. 보조는 ꡔ수심결ꡕ에서 ‘한 생각에 광명을 돌려 자기 본성을 보면 이 성품의 바다에는 본래부터 번뇌가 없고 절대 지혜의 성품이 저절로 갖추어져 있어서 모든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이 돈오라고 설명하면서 점수에 대해 ‘점수라고 하는 것은 비록 본성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달았지만 끝없이 익혀 온 습기를 일시에 제거하기 어려우므로 깨달음을 의지해 수행하여 점차로 공을 이루고, 성인의 태를 장양하여 오랜 시간 끝에 성인을 이루게 되는 것이니 그래서 점수라고 한다. 비유하자면 어린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모든 감각기관이 갖추어져 있음을 어른과 같지만 그 힘이 충분치 못하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비로 어른이 되는 것과 같다.’ 심재열 강설, ꡔ普照法語ꡕ(普成文化史, 1980, pp.180~181)
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필요성을 더욱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돈오가 비록 부처님과 같다고 하지만 다생의 습기가 깊으므로 바람은 그치었으나 파도는 계속 용솟음치듯 이치는 드러났지만 생각은 아직 침로한다. 그래서 대혜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끔 영리한 무리들이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이 일을 타파하다가 이내 쉽다는 마음을 내어 다시 닦아 다스리지 않는다. 그러다 세월이 많이 흐르면 결국 예전처럼 윤회의 헤메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깨달은 후에는 오랫동안 비추고 살피어야 하며, 망념이 홀연히 일어나면 아예 그것에 따르지 말고 제거하고 제거하여 무위의 상태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구경의 자리에 이르는 것이니 천하의 선지식들이 깨달은 후 소를 기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니라.’ 위의 책, p.194~195.
단적으로 돈오점수해야 함을 설하고 있는 내용이다. 또한 서산도 ‘幻인 줄 알면 곧 깨달음이니 또한 점차 닦아나가는 것이 없다’(離幻卽覺 亦無漸次)고 하면서도 「이치는 단번에 깨달을 수 있지만 버릇은 일시에 제거할 수 없다」(理雖頓悟 事非頓除) ꡔ선가귀감ꡕ, 앞의 책, p.116 및 122.
고 하며 돈오점수해야 함을 설하고 있다. 특히 보조와 서산은 한국선의 기본형태를 정립하고 또한 중흥시킨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들이 가진 돈오점수설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매우 크다.
이처럼 한국의 대표적 선승이라고 할 수 있는 보조와 서산은 돈오점수를 설하고 있다. 예외라면 근래에 성철선사가 주장한 돈오돈수설이 독특할 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되는 점은 보조 등 이들 선사들이 중국의 정통 조사선이 가지고 있는 돈오돈수의 내용을 몰랐을리는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어떤 연유로 돈오점수를 주장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본 논의 주된 과제는 아니지만 간단히 생각해 본다면, 하나는 이들 조사들은 사상적으로 돈오돈수가 아니라 돈오점수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지며, 또 다른 하나는 돈오돈수는 본질에서 언급되고 있는 내음이 짙고 돈오점수는 현상사를 중심으로 언급되는 경향이 강한데 한국의 조사들은 바로 이 현상사적 측면을 중시 여기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국선의 특수성 중 셋 째의 것은 한국의 조사들이 보이고 있는 몇 몇 독자적인 관점들이다. 곧 무염의 有舌無舌土論이나 범일의 眞歸祖師說, 그리고 보조 등 몇 몇 선사들의 學無常師에 대한 내용과 도선의 裨補寺塔說 등이다.
무염의 유설무설토론은 성주산문의 개조인 낭혜무염(800~888)이 주장한 선 우위론이다. 교설에 비해 선이 우위에 있다는 것은 여타 선사들과 동일한 관점이나 유설 무설을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설 무설의 의미가 무엇인가? 앙산이 말하기를 有說土는 佛土이니 應機門이요, 無舌土는 선이니 正傳門이라고 했다. 응기문이란 무엇인가? 선지식이 揚眉動目으로 법을 보이시는 것 또한 모두 응기문이요 有說이니 하물며 언어이겠는가? 무설토란 무엇인가? 禪根人이 그것이니 그 속에는 스승도 없고 제자도 없다. … 佛土란 먼저 정혜의 옷을 입고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 정혜의 옷을 벗어 던지고 현묘한 지위에 들어서는 것이므로 종적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祖土는 본래 벗어남과 벗어남이 없는 것이어서 실 한오라기 입지 않은 것이기에 佛土와는 다른 것이다. ꡔ禪門寶藏錄ꡕ(ꡔ韓國佛敎全書ꡕ 권6, pp.473 하~474 상) 본 인용문은 高翊晋, 「新羅下代의 禪傳來」(ꡔ韓國禪思想硏究ꡕ, 東國大學校 出版部, 1984) pp.65~66에 의함.
인용문에 나타나 있듯 유설토는 정혜의 방법을 통해 정혜를 극복하여 玄地에 들어가는 것이므로 근기에 응하는 가르침인 응기문으로서의 불토이고, 무설토는 본래부터 벗어남과 벗어남이 없는 것이 없는 정전문으로서의 祖土임을 밝히고 있다. 응기문의 교설보다는 정전문인 선이 월등하게 수승하다는 것으로 심지어는 조사가 보인 揚眉瞬目 拂拳棒喝의 비언어적이고 초논리적인 표현들도 응기문으로 보고 있다.
무염의 이런 주장은 아마도 당시가 선 전래의 초기였던 것으로 보아 유설은 교학, 특히 인용하지 않은 내용 중에 ‘교문에서는 지극한 如來證心을 화엄삼매라고 부른다’는 구절로 보아 화엄을 지칭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런 화엄에 대해 선이 수승한 가르침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본문에서는 유설 무설토론이 위산영우와 함께 위앙종의 개조 중의 한 사람인 앙산(803~887)이 설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ꡔ앙산혜적선사어록ꡕ에는 이런 내용이 없고, 또 마곡보철의 법을 계승하고 있어 마곡의 설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겠으나 ꡔ전등록ꡕ의 「마곡보철장」 등에도 이와 관련된 내용이 없어 무염의 독창적 설임에 분명하다.
범일(810~889)의 진귀조사설은 석존께서 깨달은 깨달음이 완벽하지 못했으며 조사인 진귀대사를 만나 비로소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으로 불타가 보리수하에서 見明星하여 깨달은 깨달음을 불완전한 것으로 보고 있는, 실제로는 논할 만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은 설이다.
일단 내용은 진성여왕이 선과 교의 뜻에 대해 물은 것에 대해 그가 교외별전을 중심으로 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석가가 유성출가하여 설산에서 별을 본 것에 의해 오도를 이루었지만 그 법이 지극에 이르지 못하였음을 느끼고 수십개월을 유행한 끝에 마침내 조사 진귀대사를 만나 비로소 현묘하고 지극한 뜻을 전해 얻었으니 이것이 교외별전이다. ꡔ禪門寶藏錄ꡕ 권상(위의 책, p.494 상). 고익진, 위의 논문, p.66.
석존이 얻은 깨달음이 불충분했으며, 따라서 수십개월을 유행한 끝에 진귀조사를 만나 현묘한 이치를 체득했으니 그것이 교외별전이라는 설명이다. 진귀조사와 관련된 내용은 천책의 ꡔ선문보장록ꡕ 권상에 인용된 「達磨密錄」에 달마가 혜가에게 설해 보인 게송에 이미 들어 있는 설이다. 곧 ‘진귀대사가 설산에 있을 때 총림의 房中에서 석가를 만났다. 조사의 심인을 전해 주었으니 임오년이요, 마음을 깨달은 동시에 조사의 종지를 얻었다.’ 眞歸祖師在雪山 叢林房中待釋迦 傳持祖印壬午歲 心得同時祖宗旨(ꡔ선문보장록ꡕ, 위의 책, p.470 중 및 고익진, 위의 논문, p.67)
는 내용이다. 이는 또한 동서 권하에 인용된 「魏明帝所問諸經篇」에도 유사 구절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석가가 설산에서 12년의 유행을 하여 祖院을 찾아 심인을 얻고 설산에서 성도한 후 普光殿에서 七處八會를 설했으나 심인에 미치지 못해 三藏 이외에 道라고 한다고 되어 있다. 위의 책, 권하, p.479 중.
이 두 전적을 신뢰한다면 시대적으로 이들 전적이 앞선 것이므로 범일은 이에 의거해 진귀조사설을 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전적에 대해 고익진도 「新羅下代의 禪傳來」라는 논문에서 믿을 수 없다고 밝히고 있듯 논자도 달마 관련 자료에서 아직 보지 못했다. 아마도 범일이 독창적으로 창안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런 주장은 사실 불교의 종교적, 교학적, 사상적 모든 체계를 뒤흔들어 놓고 있는 것으로 매우 강한 비판을 받을 수 있는 설이다. 설령 교외별전의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 언급한 것이라 하더라도 용인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옳고 그름을 떠나 본 논의 주제와 관련해 볼 때 그가 독창적 세계를 가지려 했던 것만은 분명하다고 하겠고, 이 역시 한국의 선자들이 지니려 했던 독자적 관점의 한 예라 하겠다.
다음으로 學無常師에 대한 것은 깨달음을 얻는데 있어 일정한 스승이 없이도 가능하다는 것으로 眞空大師나 가지산파 普覺國尊 一然 및 보조지눌 등에서 살펴볼 수 있다. 진공은 ‘이치가 있으면 능히 알아 스승이 없이도 깨달았다(有理能知 無師自悟)’고 하고 있으며, ꡔ비로암진공대사보법탑비ꡕ(ꡔ조선금석총람ꡕ, 앞의 책, p.136)
일연도 ‘학문에는 스승의 가르침이 없이 자연히 통달해 밝게 된다. 이미 도에 들어가면 안온하고 진실된 것으로 거기에 따르게 된다. 또한 걸림이 없기 때문에 옛 사람의 기연어구도 잘 가릴 수가 있다.’ ꡔ高麗國義興花山曹溪宗麟角寺迦智山下普覺國尊碑ꡕ, 위의 책, p.472.
於學不有師訓 自然通曉 旣入道穩實而縱之 以無礙辨至古人之機緣語句.
고 하고 있다.
또한 보조의 ꡔ비명ꡕ에는 보조가 ‘배움에 일정한 스승이 없이 오직 도가 드높아 졌다(學無常師 惟道之從)’고 하면서 그가 깨닫게 된 구체적인 사유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하루는 우연히 공부방에서 육조단경을 보다가 「진여자성이 생각을 일으키므로 비록 육근이 견문각지하더라도 진여의 본성은 만상에 물들지 않고 항상 자재하다」는 구절에서 크게 놀라고 기뻐하며 불가사의한 경계를 체험하였다. … 국사가 일찍이 말하였다. “내가 보문사에서 머무른 이래 십 여년이 되었다. 비록 뜻을 얻어 열심히 수행하고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情見을 버리지 못해 한 물건이 가슴에 걸리어 마치 원수와 함께 있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지리산에 있을 때 대혜어록을 보다 그 속에 「선은 고요한 곳에도 있지 않고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으며, 일상생활에서 인연이 반응하는 곳에도 있지 않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 그러나 먼저 고요한 곳이나 시끄러운 곳, 인연이 반응하는 곳이나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을 버리고 참구하지도 않아야 하나니 만일 갑자기 눈이 열리면 그것이 바로 집안의 일임을 알 것이다.」는 구절에서 깨달음과 계합하여 저절로 물건이 가슴에 걸리지 않고 원수도 함께 있지 않게 되어 그 자리에서 편하고 즐거워졌다.” ꡔ보조법어ꡕ, 앞의 책, pp.511~514.
學無常師의 수학 태도를 가졌고 ꡔ단경ꡕ과 ꡔ대혜어록ꡕ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는 자세한 설명이다. 진공이나 일연 및 보조의 이런 관점은 중국에서는 볼 수 없는 한국 선사들만의 견해로 그야말로 독창적 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견해가 지속적인 호응을 얻지는 못하고 있다. 이후 태고보우가 중국에 들어가 석옥으로부터 법을 전해받고 돌아온 후 사자전등에 의한 수학과 깨달음, 그리고 전법을 전통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선에서 보이고 있는 독자적 관점의 또 하나의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동리산문 혜철의 제자 선각국사 도선이 제기한 비보사탑설이다. 비보사탑은 기운이 강한 곳과 약한 곳에 절이나 탑을 세원 강한 곳은 눌러 주고 약한 곳은 북돋아 준다는 것으로 위에서 언급한 여타의 것과는 달리 선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내용은 아니다.
우선 간략히 살펴보면, ‘우리 나라의 지형은 항해하는 바와 같다. … 배가 물에 뜨려면 화물이 있어 首尾와 背腹을 눌러 주고 키와 노가 항해를 제어해 주어야만 표랑이나 침몰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돌아올 수가 있다. 따라서 寺塔이나 불상을 세워 그것을 누르거나 실하게 해야 한다.’ ꡔ道詵國師實錄ꡕ(ꡔ朝鮮寺刹史料ꡕ 상, p.205)
, 곧 한국의 국토를 항해하는 배의 형상으로 보고 금강․태백이나 지리, 운주 등 중요한 곳에 비보를 해야 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다시 말해 靈地에 절을 짓고 탑을 세우던 이전의 방식에서 벗어나 地勢의 欠背處에 따라 造寺起塔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이런 비보설은 그 스스로 ‘절을 세우고 탑을 세워 국가를 이익케 하는 공덕이 선학의 정밀하고 심오함에는 미치지 못한다.(於建寺立塔利益國家之功 至於禪學精奧 則槪不及焉)’ 위의 책, p.202.
고 하고 있듯이 그가 선사라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도선이 선사라는 것은 그가 혜철로부터 無說之說 無法之法의 선지를 이어받고 있는 등 여러 부분에서 정확하게 살펴볼 수가 있다. 拙論, 「桐裏山門의 禪思想」(ꡔ한국불교학ꡕ 16집, 한국불교학회, 1991) 참조.
그에게 이 비법을 전해준 異人은 이를 ‘대보살이 세상을 구제하고 인간을 제도하는 방법(大菩薩救世度人之法)’이라고 하고 있지만 일단 사상적으로 선과의 연관성을 찾아볼 수는 없다. 하지만 선사인 그가 중생의 제도를 위해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선이 가진 독특한 특색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한국선의 특수성 중 마지막의 것은 수행방법과 관련하여 간화선만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에서는 간화 이외에도 굉지정각이 주창한 묵조선의 수행이 크게 성세를 가지고 있었고, 실제 대혜의 간화선과 함께 주된 수행법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보조가 간화선의 수행을 주창한 이후 한국에는 오로지 간화 일변도로만 수행이 이루어지고 있다. 중요한 몇 몇 선사들을 살펴보면, 먼저 보조는 ꡔ간화결의론ꡕ에서 ‘무자십종병’을 들면서 화두의 참구를 강조하고 있고, ꡔ보조법어ꡕ, 앞의 책, p.475.
태고보우도 ‘몸과 마음과 화두가 한 덩어리가 되어서 조금도 의지할 곳이 없고 마음이 나아갈 곳이 없도록, 대소변을 보거나 옷을 입고 밥을 먹는 등 행주좌와의 어느 때라도, 깨달아야겠다는 마음도 내지 말고 오직 화두만을 간절하게’ 권기종, 「태고보우의 선사상과 그 사적 위치」(ꡔ太古普愚國師ꡕ, 대륜불교문화연구원, 1988, p.325)
하는 방법으로 해 나가되 “만길 벼랑에서 떨어질 때처럼 몸과 마음을 모두 놓아 버리고, 또 죽은 사람처럼 아무 헤아림도 생각도 없어야 한다. 이럴까 저럴까 하는 생각을 버리고 또렷하게 무자 화두만 들되 하루 24시간 다니거나 서거나 앉거나 눕거나 다만 화두를 목숨으로 삼아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한다.” ꡔ太古普愚國師ꡕ, 앞의 책, p.860.
고 하며 간화의 참구를 강조하고 있다.
또 나옹은 “수없이 많은 생각들은 앉은 그 자리에서 끊어버리고 온종일 다니고 머물고 앉고 눕는 가운데 한결같이 화두 하나만을 들어야 합니다. 한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없다’고 했습니다. 깨침의 세계를 그대로 드러내 보인 이 화두를 죽을 힘을 다해 드십시오. 들고 또 들고, 쪼고 또 쪼다보면 움직이거나 잠잠히 있거나 들지 않아도 저절로 들리고, 자나 깨나 의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의심이 될 것입니다.” ꡔ나옹스님어록ꡕ, 앞의 책, p.156.
라 하고 있고, 백운도 “화두는 조주의 무자나 만법귀일, 혹은 父母未生前面目 등으로 이는 반드시 커다란 의심이 있어야 크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마음에 만약 의심이 없다면 생각의 숨길이 끊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ꡔ백운스님어록ꡕ, 앞의 책, p.173 및 257(원문).
고 하고 있다.
이런 간화의 강조는 이후 서산에 이르러 가장 극명하게 강조되고 있다. 活句 참구와 大信根, 大憤志, 大疑團의 參禪三要를 역설하고 있는 휴정은 화두의 참구를 다음과 같이 해야 함을 밝히고 있다.
무릇 참구하는 공안에 대해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를 지어가되 마치 닭이 알을 품듯 하고,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와 같이 하며, 배고픈 사람이 밥 생각하듯, 목마른 사람이 물 생각하듯, 어린아이가 엄마 생각하듯 하라. 그러면 반드시 꿰뚫을 때가 있을 것이다. 李鍾益․沈載烈 講說, ꡔ禪家龜鑑ꡕ, 앞의 책, p.65.
凡本參公案上 切心做工夫 如鷄抱卵 如猫捕鼠 如飢思食 如渴思水 如兒憶母 必有透徹之期. 같은 내용이 태고의 示衆 등에도 있다.(ꡔ太古普愚禪師ꡕ, 앞의 책, p.861)
휴정은 이런 내용과 함께 화두 중에서도 특히 무자화를 강조하고 있다. 물론 무자화는 서산만이 아니라 앞서 언급한 것처럼 보조나 보우 등 모든 선사들의 일관된 가르침이기도 하다.
이후 서산의 수많은 제자들도 이런 간화의 행법을 설하고 있으며, 한국 근세선의 중흥조인 경허선사도 “모든 공력을 조사의 문을 참구하는 데 쓰면 누구든지 견성성불한다. 화두를 참구하는 문에서 말한 깨어 살피고 고요함을 균등히 지니면 능히 견성한다. … 옷 입고 밥 먹으며, 대소변을 보거나 시봉하고, 남을 가르치거나 경을 읽고, 손님을 맞이하고 보내거나, 내지 머물고 앉고 누울 때 등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빛을 돌이켜 비추어 보고 화두를 들고 오고 들고 가며, 의심해 오고 의심해 가며, 살펴서 다시 관하고, 갈고 닦아서 세간의 온갖 번뇌와 사량분별의 마음을 다만 무자 위에 돌이켜 놓는다. 이와 같이 공부하기를 날이 오래고 달이 깊도록 하면 자연히 깨닫게 된다.” ꡔ鏡虛集ꡕ(모아, 1990, p.37 및 43)
고 하고 있고, 제자 만공도 무자화를 언급하며 “이 한 생각을 짓되 고양이가 쥐 생각하듯, 닭이 알을 품듯 앞 생각과 뒷 생각이 서로 끊어짐이 없이 흘러가듯 하여 가되 아침 일찍 찬물에 얼굴 씻고 고요한 마음을 단정히 하고 앉아 화두를 들라.” ꡔ滿空法語ꡕ(能仁禪院, 1982, p.236). 동서의 「漫空月面大禪師行狀」에는 만공이 경허의 가르침에 의해 萬法歸一 一歸何處에서 무자화로 바꾸어 참구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동, p.305)
고 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에서는 간화 묵조가 함께 수행된 중국에서의 방법과는 달리 오직 간화선에 의한 화두 참구만을 수행의 주된 행법으로 삼고 있고, 이것이 중국과는 다른 한국선만의 특이함으로 자리하고 있다.
Ⅳ. 맺는 말
선이 중국에서 새로운 불교사상으로 정립되고 그것을 많은 한국의 입당 구법 선승들이 전승한 이후, 선은 한국의 사상과 수행체계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구산문기를 거쳐 보조가 중흥시킨 후 수선사에서 배출한 16국사들의 활동, 그리고 려대 말기에 보우와 나옹, 혜근 등 커다란 족적을 남기고 있는 선사들과 조선기 억불의 상황속에서도 선적인 삶을 위해 애써 왔던 많은 선장들의 대내외적 활약에 의해 한국 정신문화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한국의 선은 선이 가진 일반적 형태, 곧 보편적 모습과 한국선만이 지니고 있는 특수한 특색을 지니고 있다. 논자가 보기에 보편성으로는 한국의 선사들이 보인 선사상에의 철저함과 중생제도를 위한 化度의 삶이 아닌가 하며, 특수한 특색으로는 선주교종을 기본전제로 하면서 선교일치의 관점을 취하고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사교입선의 형태를 보이고 있는 것과, 돈오돈수가 아니라 돈오점수를 강조하고 있는 것, 그리고 나름대로 독자적인 관점을 형성하려고 노력한 것과, 수행의 방법과 관련해 간화의 행법을 택하고 있는 것 등으로 여겨진다.
한국 선사들이 보인 선사상에의 철저함은 중국에서 형성된 모든 선사상을 수용하고 중요 내용을 완벽히 파악, 이를 종합하여 핵심사상을 이끌어내고 거기에 철저한 모습을 보인 것을 나타낸다. 곧 구산문의 선사들과 이후의 입중국한 선사들에 의해 초기부터 마조의 조사선과 위앙 임제 법안 등 선종오가의 사상, 그리고 간화 묵조의 수행법 등 중국선이 모든 것들이 전래되고 있으며, 한국의 선사들은 이를 완벽히 체득, 즉 소화해 내고 있는 것이다.
중생제도를 위해 애쓴 흔적 또한 한국선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모습 중에 하나이다.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것은 선만이 아니라 불교가 가진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궁극적인 목적으로 역시 중국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고, 한국의 선자들도 구산선문에서 청허에 이르는 모든 선사들이 이를 위해 노력하였던 행적들을 남기고 있다.
한국선이 가진 특수한 모습 중 선을 중요히 여기고 교학을 선의 조력 요소로 간주하면서 선교일치를 내세우고, 마침내는 사교입선의 형태를 보이고 있는 것은 중국에서는 살필 수 없는 한국에서만의 형태이다. 이는 보조나 백운 및 청허를 비롯한 여러 선사들의 가르침과 수행자들에 대한 교육과정에 잘 나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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