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인곡당(법장스님)

德崇禪學 2-1 제1주제:뉴 밀레니엄의 문명 패러다임과 禪

淸潭 2008. 2. 22. 17:26
 

德崇禪學 2-1 제1주제:뉴 밀레니엄의 문명 패러다임과 禪

 

박이문(simmons college 명예교수)

  급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21세기의 문턱을 넘어 선 오늘의 문명은 언듯 보아 진보의 절정에서 있는 듯이 보이지만 좀 더 성찰하면 인류의 역사상 가장 큰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인구폭발, 자연자원의 고갈, 지구온난화 등으로 나타난 이미 심각한 환경오염, 생태계교란, 생명과학에 의한 인간과 생명의 해체현상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천년 후의 문명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천년 후에도 문명이 과연 존속할 수 있을 런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이러한 처지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길게 잡아 향후 백년의 문명에 대한 상상적 전망뿐이다.
  문명은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집단적으로 자연 속에서 자연과 대응하면서 부단히 의도적으로 고안해 낸 기술적, 사회적, 문화적 삶의 총체적 장치이다. 21세기의 문명의 특징은 무엇이고, 그 문명은 어떤 문제를  제기하며 그 문제 해결을 위한 대책은 무엇일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들은 곧 문명의 패러다임에 대한 물음이다. 인간의 모든 개별적 생각과 행위는 그것들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어떤 총괄적 틀을 전제하며, 패러다임이란 바로 이러한 틀을 지칭한다. 그 생각과 행위가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그 대상이 한 사회의 특정한 분야이든 전체이든 사정은 마찬가지다. 한 개인이나 어떤 집단의 생각이나 행동의 패러다임을 이기적/이타적이라는 도덕적 규범으로 구별할 수 있다면, 한 사회의 특정한 측면으로서의 문화와  기술의 패러다임은 개인중심적/집단중심적 및 원시적/근대적이라는 심리적 및 시대적 범주로 각기 분별할 수 있으며, 한 사회의 지적 한 측면으로서의 자연인식의 패러다임은 전과학적/과학적이라는 인식론적 규범으로서 구별될 수 있다. 그러나 거시적 그리고 장기적 차원에서 본 한 사회의 총칭으로서의 문명의 총체적 특징으로서의 패러다임은 그 사회에 깔려있는 세계관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21세기의 문명의 패러다임은 무엇이고, 그 패러다임은 선불교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라는 물음은 곧 21세기 문명에 깔려있는 혹은 그 문명을 지배하는 세계관과 그러한 세계관의 문제와 선불교에 깔려 있는 혹은 선불교를 지배하는 세계관과의 관계에 관한 물음이다.
  이 글에서 나는 첫째 21세기의 문명을 지배할 것으로 전망되는 패러다임 즉 세계관을 분석하고, 둘째, 그러한 문명의 문제를 추측해 보고, 셋째, 어떤 점에서 선불교가 예측되는 21세기 문명의  문제를 풀고 그 문제로 해서 생기는 문명사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잡이와 토대가 될 수 있을  것인가를 성찰해 보면서 새로운 과학관과 선불교의 재해석과 재평가를 추구하고자 한다.

I. 근대문명의 패러다임:인간중심적 형이상학과 과학적 자연관

  1) 서구문명의 인간중심주의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놀라운 지능을 갖은 동물로 진화된 인간은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단순히 주어진 자연적 여건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편리하게 생존하고자 인위적으로 여러가지 장치를 꾸준히 고안하고 자연을 개발해 왔다. 동굴에서 살던 원시인이 사용하던 석기, 부락의 형성, 고대인의 동 혹은 철기를 비롯해서 현재 첨단  도시의 고층건물, 자동차, 컴퓨터, 각종 제도는 그러한 장치의 다양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는 이러한 장치 개발의 진보적 과정에 지나지 않으며, 이러한 장치의 총칭을 문명이라고 규정한다면 문명의 역사는 그러한 것을 고안해 낸 인간집단의 지적 능력, 그들이 생존하는 자연적 조건 그리고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세계관에 따라서 시간적 및 공간적 차원에서 각기 다른 형태와 색깔을 띠고 발전해 왔다. 바로 여기에 문명을 지역적 혹은 시대적으로 구분하고, 21세기 문명과 20세기 문명, 동양문명과 서양문명, 불교문명과 기독교문명 등의 개념으로 구별하고 비교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 지금까지 인류가 구축했던 삶의 장치 즉 문명의 결과로 지구적 차원에서 나타난  인구폭발, 자연고갈, 환경오염, 인간과 생명의 해체, 생태계파괴 등의 구체적이고도 절박한 현상으로 나타난 문제들을 설명하고 그 문제들에 대처하려면, 그 이유를 다음의 논고전개를 통해서 알 수 있게될 것이지만, 문명은 인간중심적 문명과 자연생태중심적 문명의 개념적 구별로서 접근되어야한다.
  문명을 '인간이 자신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고안해 낸 자연 개발의 인위적 장치'로 정의할 때, 그것은 필연적으로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산물임을 함의한다. 이런 점에서, 얼핏 모든 문명은 필연적으로 인간중심적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유추는 논리적 오류를 범한 피상적 판단이다. 여기서 인간중심주의의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인간중심주의는 '인간에 의한 모든 인간의 행위'나 '인간을 위한 모든 행위'를 의미하지도 않으며, '인간에 의한 모든 인간의 모든 행위'가 반드시 '인간만을 위한 행위'가 아니다. '자신의' 삶을 생각하는 것과 '자신만'의 삶을 생각하는 것과는 동일하지 않다. 나는 나를 위해서 공부하고 일하지만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가족, 이웃, 동포를 고려하여 그들과 협력하고, 때로는 나 개인만의 욕망을 포기할 수도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류는 생존하기 위해 다른 생명체, 식물, 동물, 자연을  도구적으로 개발하고 이용하고 희생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와 동시에 그러한 존재들을 그 자체로서 존중하고 상대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자제하면서 가능한 한  그들과 공존할 수 있어야 된다. '이기주의'가 '나 이외의 다른 이들의 이익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오로지 나 자신만의 이익을 생각하는 나의 태도와 행동'을 지칭하는 것과 똑같이, '인간중심주의'는 '인간 이외의 다른 생명체들의 이익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오로지 인간만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태도와 행동'을 뜻할 뿐이다. 그렇다면 문명도 인간중심적 문명과 탈인간중심적 즉 자연생태중심적 문명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실제로 지금까지의 지배적 문명이 인간중심적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문명이 있었다. 근대 이후 오늘날에 이르면서 서양문명이 세계적으로 지배하게되면서 사정은 달랐지만, 자연생태중심적 문명이 있었다. 문명의 가장 기본적인 패러다임으로서의 세계관의 관점에서 볼 때 서양적, 데카르트적, 기독교적 문명이 인간중심적이었다면 동양적, 노장적, 불교적 문명은 탈인간중심적 즉 자연생태중심적 문명이었다.
  지각적 즉 현상적 차원에서 각기 서로 구별되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형이상학적 차원에서는 서로 구별될 수 없는 단 하나의 역동적 우주, 존재전체의 가변적 양상으로 보는 동양의 노장사상이나 불교의 일원론적 형이상학/세계관에서는 자연의 일부로서의 인간은 그 이외의 존재들과 완전히 구별되어 유독 특별한 가치를 갖은 우주/자연의 중심이라는 생각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인간만이 유일한 가치를 갖고 따라서 인간이 자연/우주의 중심이라는 인간중심주의는 인간만이 정신의 소유자로서 물질로서만 서술될 수 있는 그 밖의 모든 자연현상과 구별된다는 서양의 이원론적 데카르트적 형이상학이나 기독교적 세계관의 틀에서만 가능하고, 또한 이 틀 안에서만 인간의 유일한 존엄성을 주장하고, 자연의 지배와 완전한 도구화 해 온 인간중심주의적 서구문명사는 설명되고 정당화되될 수 있다.
  2) 인간중심주의적 수단으로서의 과학적 자연관과 기술
  서구의 인간중심주의적 세계관은 근대에 들어오면서  과학적 자연관의 정립과 과학적 기술의 개발에 의해서 한결 더 강화, 정당화되어 촉진되어 왔다. 날로 발전하면서  과학기술은 인간에게 그만큼 더 힘을 부여했고, 그러한 과학기술로서 오늘날 인간은 지금까지 흔히 위협과 공포의 대상으로 보였던 자연을 완전히 제압, 개발, 착취함으로서 자신의 목적에 따라 도구로서 이용함으로서 물질적 생활을 날로 더 윤택하게 하는데 성공했다. 과학적 지식과 기술이 기하급수적 속도로 발달하고 있는 오늘날 20세기를 막 넘어 온 시점에서 인간은 마침내 동물, 지구는 물론 우주를 거의 완전히 정복함으로서 자연의, 아니 우주의  절대적인 군주적 주인으로서 군림하기에 이르렀다.
  오늘의 이른바 근대문명은 인간중심주의와 과학적 지식 및 기술이 결합함으로서 이루어진 산물이며, 그러한 산물로 얻어진 인간의 힘, 자연지배, 활용, 착취, 그러한 착취를 통한  물질적 욕망충족의 실제와 가능성은  서양의 근대/현대문명과 그것의 기술적 토대가 되는 과학지식과 기술 및 그것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하는 인간중심주의를 정당화하는데 충분한 근거가 되어 왔다. 이 같은 과학기술문명이 서양의 산물인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러한 문명이 전 세계를 지배하면서 하나의 세계적 문명으로 되어 가고 있으며, 그러한 문명의 철학적 패러다임으로서의 인간중심적 세계관이 지구적으로 보편화되어가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II. 근대문명의 패러다임의 문제:과학적 자연관의 맹점과 인간중심주의의 허상

  1) 환경오염/생태계교란/문명의 자기파괴
  그러나 아무리 그 힘과  실용적 가치를 인정하더라도 근대과학기술적  문명의 색깔은 그저 아름답기만 한 장미꽃 색만이 아니며, 그 맛은 그저 달기만 한 꿀맛만이 아니다. 그 장미에는 따거운 가시가 달려있으며, 그 꿀 속에는 치명적 독소가 섞여 있다. 문명의 아름다운 장미꽃을 인간의 자연정복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 꽃의 아픈 가시는 환경오염과 생태계파괴에 비유할 수 있고, 문명의 맛을 달콤한 꿀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 꿀 속에 섞여있는 치명적 독소는 삶의 물질적 풍요의 공허함과 인간멸종의 가능성에 비유될 수 있다.
  지구에는 아직도 수억에 달하는 인구가 경제적 풍요는 커녕 기아상태에 있으며, 인간 이하의 생활 조건에서 극심한 빈곤에 허덕이고 있고, 건강과 장수는 커녕 질병과 단명의 비극적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지구적 맥락에서 근대문명이 인간에게 가져 온 혜택은 근시안적이고 미시적으로 볼 때는 엄청나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 평균수명의 엄청난 연장, 근대의학이 가져 온 질병, 고통의 감소, 인구의 폭발적 증가, 수많은 공산품의 보급에 따른 생활의 편이, 물질적 풍요 등에서 입증된다. 하지만 좀더 원시적이고 거시적으로 볼 때 근대문명이 지난 반세기에서부터 극명하게 들어낸 몇 가지 징후들이 내포하고 있는 극히 부정적  양상들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앞서 언급했던 인구폭발, 자연자원의 고갈, 환경오염, 생태계교란 이외에도 핵무기, 핵에너지에 의한 생물학적 생존의 기본조건인 물리적 생존조건의 파괴 위험, 전자와 인터넷으로 단일화되어 가는 수많은 시스템의 작동차질에 의한 사회적 혼란, 생명공학의 발전에서 야기되는 인간과 생명의 해체와 복제에 따른 세계관의 교란과 가치관의 공백, 치열한 경쟁적 자유시장 경제 체제로 불가피하게된 개인간의, 계층간의, 국가간의 극심한 빈부의 격차가 동반하는 심각한 사회적 불안정 등이 근대문명의 자가 파괴적 심각성의 징후의 몇 가지 예들이다.
  이런 점에서 근대문명은 이론적으로는 자기 모순적이며, 구체적으로는 자기 파멸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거시적 그리고 원시적으로 볼 때 근대문명은 인간에게 복지보다는 불안을, 진보라기 보다는 퇴보를 뜻하는 의미가 되었다고 판단된다. 인류의 문명이 앞으로 천년을 커녕 오백년을 더 살아 남을 지가 의심스러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에 막 발을 디딘 오늘의 문명은 인간중심주의적 근대문명의 연장 상에 있으며, 여러가지 추세로 보아 어떤 대대적인 혁명적 조치로서 제동이 걸리지 않는 한 앞으로의 인간중심주의적 과학기술 문명은 제아무리 과학적 기술을 동원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파국적 문명의 궤도를 더욱 가속적으로 달릴 전망이다. 인류는 과연 이 같은 문명의 모순을 풀어 총체적이며 결정적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어떤 혁명을 일으킬 수 있으며, 있다면 그 방법은 어떤 종류의 것일 수 있으며, 그 혁명은 어떤 것일 수 있는가. 아니면 문명의 파국은 불가피한 문명의 운명인가. 문명의 파국적 위험이 오늘의 객관적 사실이라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2) 형이상학적 오류:인간중심주의의 허구
  많은 이들은 현재의 문명사적 위기의 원인을 과학기술, 그런 기술의 바탕인 과학지식에서 찾는다. 첨단과학기술이 발명되고 이용되지 않았더라면, 현재의 위기가 인간에 의한 자연의 절대적 제압, 대대적인 개발, 철처한 착취가 없었더라면 오늘과 같은 인구폭발, 자연자원의 고갈, 환경오염, 생태계파괴, 인간과 생명의 해체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며, 고도의 과학지식이 발견되지 않았던들 첨단 과학기술의 발명이 불가능했을 것인만큼, 위기의 원인이 과학지식과 과학기술에 있다는 판단은 쉽게 수긍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과학의 본질에 대한 피상적 인식에 근거한 속단이다. 과학지식은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하나의 양식이며, 과학기술은 하나의 기술일 뿐이지 그 지식과 기술이 자연의 재압이나 착취를 함의하지 않는다. 과학지식과 과학기술은 인간의 어떤 목적달성을 위해서 활용될 수 있어도 그것들 자체는 목적 중립적이다. 과학지식과 과학기술은 인간의 의도와 목적에 따라 도구적으로 사용될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 있다. 현재의 문명의 위기는 과학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욕망충족을 위해 그러한 지식과 기술을 자연의 지배, 개발, 착취하는데 무작정 사용해 온데 기인한다.
  윤리가 나 이외의 다른 존재의 기쁨과 고통을 배려하는 태도와 행위에 관한 입장으로 정의할 때, 지금까지의 문명에서 자연에 대해 인간이 취한 위와 같은 태도, 행위및 그 결과는 필연적으로 일종의 윤리관을 반영하고 그러한 윤리관에 기초한다. 그렇다면 현대 문명의 위기의 원인은 그 문명을 지배한 윤리관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한 윤리관은 인간, 자연, 인간과 인간의 관계 및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총체적 비전으로서의 하나의 세계관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현대문명의 위기의 더 근원적 원인은  지금까지 문명을 지배해 온 패러다임 즉 세계관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세계관은 다름 아닌 인간중심주의이다.
  나의 다른 사람들에 대한 나의 윤리적 태도는 내가 나와의 관계에서 다른 사람들을 내가 어떻게 분류해서 인식하느냐에 달려있다. 그 인식에 따라  어떤 사람들은 나의 윤리공동체에 포함되거나 배제되고, 그러한 결정에 따라 윤리적 배려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나 자신만이 아닌 나의 형제, 이웃, 동포, 인류가 윤리적 배려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개인적, 지역적,  인종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류'라는 종으로서 동일한 인간공동체에 포섭되기 때문이고, 버러지, 새, 개, 돼지의 기쁨과 아픔이 전혀 윤리적 배려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것은 그러한 동물들이 윤리공동체에서 제외 됐기 때문이며, 그들이 이같이 제외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존재들이 형이상학적으로 인류와 다를 뿐만 아니라 절대적으로 열등한 존재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인간중심주의가 인간, 자연 그리고 그것들의 관계에 대한 이와 같은 인식을 지칭한다면, 현대문명의 위기의 궁극적 뿌리는 인간중심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자연에 대해서 인간이 취한 태도, 행동 그리고 그 결과는 근본적으로는 인간중심주의적 세계관에 의해서만 설명되고 정당화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개별적 행동이 어떤 목적을 전제하고, 목적이 가치관을 전제하며, 가치관이 세계관을 전제한다면, 인간에 의한 과학지식과 과학기술의 위와 같은 도구적 활용은 인간중심주의적 세계관을 전제함으로서만  설명된다. 그리고 근대문명의 위기의 근본적 원인은 과학지식이나 과학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명의 패러다임으로서의 인간중심주의의 형이상학적 세계관에 있다.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은 인간이 앞으로 취해야 할 태도는 과학지식과 과학기술의 거부와 포기가 아니라 인간중심주의적 세계관을 포기하고 그것을 대치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관을 발견하는 일만이 문명의 위기를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길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중심주의적 형이상학적 세계관의 포기는 인간중심주의의 객관적 진위성에 달려있다. 만약 인간중심주의가 객관성을 갖고 있는 옳은 세계관이라면 그것의 포기는 논리적으로 모순이며, 만약 그것을 포기할 수 없다면 문명의 파국은 자연적, 우주적 필연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인간중심주의가 옳은 세계관이냐 하는데 있으며, 문명의 미래에 대한 우리의 희망은 인간중심주의적 형이상학적 세계관이 잘못됐다는 가능성에 걸려있다.
  다행히도 오늘날 첨단 과학지식의 놀라운 발전과 확대는 인간중심주의적 세계관이 더 이상 속일 수도 없고 감출 수도 없는 형이상학적 허구라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극명하게 들어냈다.
  인간이 우주에서 유일하게 가장 귀중하고 귀중한 존재이며, 다른 어떠한 존재도 그들을 위해서 도구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인간중심주의는 인간과 자연, 정신과 물질이 형이상학적으로 구별할 수 있다는 이원론적 존재론에 뿌리 박고 있으며, 이러한 형이상학적 신념은 전형적인 서양사상으로서 플라톤이나  데카르트적  철학적 사상과 유대교나 기독교의 종교적 교리로서 오랫동안 견고히 뒷받침되고 설득력 있게 정당화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중심주의적 세계관은 16세기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18세의 뉴톤의 만유인력설, 19세기의 라프라스의 결정론, 다윈의 진화론,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역사관, 니체의 철학, 그리고 20세기의 프로이드의 정신분석, 양자역학, 유전공학, 현재 경이로운 속도로 발전하는 전자공학 등은 이원론적 형이상학이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관념적 허구임을 들어냈고 아울러 근대과학기술문명의 패러다임이었던 인간중심주의는 박살이 났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가  문명의 위기의 근본적 원인이었던 인간중심주의적 세계관을 폐기해야한다면  문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세계관이 과연 가능하며, 가능하다면  그러한 세계관은 어떤 것인가를 분명히 알아보아야 하는데 있다.

III. 새로운 문명 패러다임과 선불교적 세계관

  1) 새로운 문명 패러다임으로서의 생태중심적 세계관
  인간중심주의가 전제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인간과 다른 모든 동물, 아니 다른 존재들 사이에는 형이상학적인 단절은 피상적, 관념적, 개념적인 것일 뿐  존재론적 단절은 없다. 현상적으로 서로 차별되는 모든 존재들은 실제적으로는 단 하나의 실체의 다양한 양상에 불과하다. 지구와 우주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라 유기적 자연자체이며, 가장 존엄한 것은 인류가 아니라 생태계이며, 가치의 근본은 인간이 아니라 생명자체이다. 이러한 세계인식을 생태중심주의라 부를 수 있다면, 사실과 맞는, 올바른 세계관은 인간중심주의가 아니라 바로 생태중심주의이다.
  인간과  인간 이외의 모든 다른 동물 그리고 생물들의 형이상학적 구별을 거부하는 생태중심주의는 그러한 구별을 기본적으로 전제하는 인간중심주의와는 다른 윤리관을 함의한다. 후자의 윤리가 인간 이외의 모든 것들을 자신의 윤리공동체로부터 제거하는 형이상학적 근거를 제공하는데 반해서, 전자의 윤리는 그것들을 자신의 윤리공동체에 포함해야하는 형이상학적 근거를 제공한다. 인간 이외의 모든 생명체들을 윤리공동체에서 배제하는 인간 중심적 윤리가 그들에 대한 윤리적 무관심과 무배려를 논리적으로  정당화 할 수 있는데 반해서, 모든 생명체들을 윤리공동체에 포함시키는 생태중심주의적 윤리는 그들에 대한 윤리적 관심과 배려의 당위성을 논리적으로 요청한다.
  이러한 생태중심주의적 윤리의 테두리 안에서 지금까지 그러했던 것과는 달리 자연에 대한 도전적 태도, 무자비한 정복, 무작정 개발, 착취는 물론 동물들의 아픔에 대한 무관심과 무배려는 윤리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 만일 지금까지의 문명이 생태중심주의적 세계관을 패러다임으로 했었다고하면, 자연에 대한 위와 같은 태도와 행위로 환경오염, 인구폭발, 자연생태계 파괴는 초래하지 않았을 것이며, 인류는 오늘과 같은 문명의 위기를 맞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간중심적 세계관의 대안은 생태중심주의적 세계관일 수밖에 없으며, 현재의 문명위기의 근본적 원인이 인간중심주의적 세계관에 있다면, 그 위기는 생태중심주의적 세계관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명의 위기를 극복하고, 멀리는 앞으로의 밀레니엄, 가까이는 21세기를 희망적으로 바라 볼 수 있는 길은 문명의 커다란 패러다임을 인간중심주의에서 생태중심주의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따져보아야 할 문제는 첫째, 과연 객관적으로 참일 수 있는 생태중심주의적 세계관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고, 그렇다면 둘째, 그런 세계관을 주장할 수 있다면 생태중심주의적 세계관이 오늘날은 물론 앞으로 현실적으로 버릴 수 없는 과학지식 및 과학기술과 갈등하지 않고 양립할 수 있는가 즉 생태학적 문명의 패러다임 내에서 과학지식 및 과학기술이 그 정당한 문명사적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가이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현재 위기에 처한 인류문명은 3백년 이상 세계를 지배해 온 인간중심주의적 패러다임 속에 아직도 갇혀있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인류가 그동한 서양에서 축척한 과학지식과 과학기술이 가져온 생활상의 편이를 완전히 포기한다는 것은 실제적으로는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불가능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2) 생태중심주의와  선불교적 세계관
    (a) 생태중심주의와 불교
  생태중심주의적 문명 패러다임의 모델은 존재하며,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다행히 인류는 동양에서 생태중심적 세계관을 몇 천년 전부터 갖고있었다. 그 대표적 예는 서양의 근대문명이 침입하고 지배하기 이전까지 몇 천년 동안 동양문명을 지배해 왔던 중국적 및 인도적 인 세계관, 각별히 중국의 노장사상과 주자학, 인도의 힌두교와 불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사상들은 각기 색깔을 달리하고 있지만 그것들이 다같이 일원론적 존재론과  순환적 자연관에 기초한 무신론적 형이상학을  깔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게 자연중심주의적 형이상학과 일치하고,  그들 중에서도 모든 생명체에 대한 보편적 '자비'를 강조하는 점에서 불교 특히 선불교사상은 각별히 생태중심주의적이다. 그렇다면 불교의 세계관은 어떤 것인가.

    (b) 불교의 개념
  바로 여기서 우리의 논의를 분명히 펴기 위해서 '불교'의 개념정리가 필요하다. 일상생활에서나 학술적 담론에서 그렇게도 널리, 자주 그리고 쉽게 통용되는 '불교'라는 말의 의미가 따지고 보면 너무나 다양하고 애매모호하기 때문이다. '불교'가 부처 석가모니의 가르침이고 그 가르침의 핵심이 [四聖諦  八正道]로 요약된다고 하지만, 그 가르침의 내용을 전수한다는 경전들의 수는 방대하고, 불교 내의 계파, 전통, 지역에 따라 그 경전들의 해석은 천차만별이며, 흔히 [四聖諦 八正道]와 일치하지 않고 서로들 사이에 모순이 들어 난다. 불교를 '종교'의 범주에 귀속시키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이지만, 어떤 경전, 어떤 전통, 어떤 계파, 어떤 해석을 하느냐에 따라 불교를 종교로 볼 수도 있고 철학으로도 볼 수 있으며, 또 정신적 수련방법으로도 볼 수 있다. 이렇게 다른 불교들을 모두 논하는 것은 불교학자가 아닌 본인에게는 영역 밖이다. 전문적 불교학자도 이런 자리에서 모든 불교를 논한다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 논문의 논의를 전개하자면, 독선적이 될 가능성이 있더라도, 논자 나름대로의 불교의 개념설정이 불가피하다.
  종교와 철학은 다같이 세상전체의 본질과 형태에 대한 총체적 설명과  그런 세계속에서의 인간의 올바른 행동의 윤리적 규범을 제안한다. 종교와 철학이 다같이 세계전체의 총괄적 인식과 설명이라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전자가 초월적인 인격적 존재로서의 하나의 신 혹은 다양한 귀신들의 존재를 전제하고, 그런 존재의 인식을 계시나 영감에 의존하는데 반해서, 후자는 그러한 존재를 전제하지 않고 세계인식을 구체적인 관찰에 근거한 경험과 이성에 의한 논리로 뒷받침한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물론 현재 미신으로서 종교에서 제외되는 무교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애니미즘은 다같이 종교에 속한다. 미륵불, 관음불, 지자불, 서방정토를 믿는다면 불교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불교신자로 규정하고 사찰에 가서 불공을 올리는 근거는 위와 같은 영적 존재로서의 부처들을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부처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뜻하며, 그의 가르침의 본질이 [四聖諦 八正道]로 요약되는 한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다. 진리로서의 이 가르침의 세계관과 윤리관 속에는 초월적인 인격적 존재로서의 신/귀신이 있을 자리가 없으며, 그 진리는 계시나 맹목적인 신앙이 아니라 구체적인 관찰에 근거한 경험과 논리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기복을 위해 사찰에 가서 불공을 드리는 불교신자들이나 어쩌면 대부분의 불교적 계파들이나 많은 불경들은 정확한 의미에서 불교 즉 부처 석가모니의 가르침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불교의 관심은 모든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누구나 갖고있는 구체적 문제의 해결에 있다. 이러한 사실은 苦, 集, 滅, 道의 네 명제로 분석되는 [四聖諦]는 객관적 자연이나 우주의 모든 인생의 보편적 고통의 의학적 원인에 대한 객관적 진단이며, 正見, 正思惟, 正語, 正業, 正命, 正精進, 正念, 正定라는 여덟가지 내용의 [八正道]는 그러한 고통을 치료하기 위한 처방이다. 석가모니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행복하지 않고 고통[苦]을 받고있는데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반드시 인과적 관계를 갖은 원인[集]이 있으며, 그 원인은 제거[滅]할 수 있고, 그 방법[道]으로 여덟가지 실천적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인생의 고통의 원인에 대한 이 같은 석가모니의 의학적 진단과 처방은 그의 존재일반의 본질에 대한 형이상학적 존재론을 바탕으로 하고, 그러한 존재론에 비추어서 납득될 수 있다. 막연하고 때로는 일관성이 없지만  서로 다른 수많은 계파의 불교들은 다같이 이러한 형이상학을 전제로하고 있고, 그 중에서도 유일하게 禪불교에서 가장 일관성있고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런점에서 선불교는 불교의 한 계파가 아니라 석가모니의 가르침으로서의 불교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곧 선불교라해도 틀림이 없다.

    (c) 선불교의 개념
  禪불교란 무엇인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불교의 핵심인 [四聖諦 八正道]는 어떤 존재론적 형이상학을 바탕으로 하고있는가. 선불교의 정확한 정의를 내리는 일은 불교의 정의를 내리는 것만큼이나 거의 불가능하다. 선불교에 대한 정의가 불교의 계파만큼이나 다양하기 때문이며, 더 근본적으로는 그것의 존재론적 형이상학이 내포한 인식론적 성격상 근본적 진리의 개념화 즉 정의를 근본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선불교의 주장과 이해는 물론 그것에 대한  언급은 미흡한대로나마 그것에 대한 정의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禪불교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그것이 禪에 초점을 두고 석가모니의 근본적 가르침인 [四聖諦 八正道]를 설명하는 불교라면, 禪은 도대체 어떻게 정의될 수 있는가.
  禪은 산스크리트어인 다이아나 (dhyana)의 漢字이며 그것은 일반적으로 “명상”(meditation)의 뜻으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선은 어떤 객관적 사실의 명제적 진술이 아니라 일종의 행위를 지칭한다. 그렇지만 “선은 그냥  앉아서 명상하는 것이나, 정신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직접적인 깨달음/앎을 뜻할 뿐이다”(1)라는 중국의 재미 철학자 챤/陣의 진술, “禪은 깨달음에 도달하는 이론과 기술인데 그것은 서구 관점에서 볼 때  종교적 혹은 신비주의적인 것이다”.(2)라는 정신분석학자 프롬의 해설,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 禪이다”라는 현각스님(3)의 정의, “禪이란 생명의 진리를 깨닫기 위하여 참구하는 데 열중하는 것이지요,”(4)라는 이원도의  설명에 따르면 禪은 일종의 인식론이며, 그러한 선적 인식/깨달음은 “감성적 오염이나 지적분석이전 상태의 실체(reality)의 직접적 즉  논리이전적 파악이며, 나 자신과 우주의 올바른 관계에 대한 깨달음”(5)을 뜻하며, 그러한 깨달음을 통한 구원을 목적으로 한다.
  사물현상이나 어떤 이치의 인식은 감각에 의존한 직접적 지각과 이성에 의존한 추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현상적 세계에 대한 지각적 지식이나 어떤 이치에 대한 이론적 지식들은 위와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축적된다. 개념을 떠난 지각이나 논리가 불가능하고, 모든 개념과 논리는 언어를 떠나  불가능하고, 언어는 필연적으로 재현적인 것이며, 재현적인 어떤 대상의 인식은 그 대상 자체일 수 없으므로 현상에 대한 지각적 지식이나 어떤 이치에 대한 논리적 인식은 결코 그 현상 혹은 그 이치 자체의 인식일 수 없다. 우리의 일상적 사물인식이나 과학적, 철학적  인식도  꼭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禪이 추구하는 깨달음/앎은 인식 대상으로서의  현상 그 자체, 이치 자체이다. “禪적 인식방법은 인식대상으로서의 사물자체에 직접 들어가서 그것을 말하자면 그 내부에서 보는 데 있다. 꽃을 안다는 것은 꽃이 되는 것이며, 꽃으로서 피고, 내리는 비와 아울러 햇빛을 즐기는 것이다”(6)라는 일본의 선불교 주창자 스즈키의 말은 위와같은 禪 적 인식론을 설명해준다.
  이러한 인식론은 동양적인, 더 정확히는 선불교적 직관이 얻어낸  고유의 우주/존재 일반에 대한 형이상학적 존재론을 전제하며, 그 존재론은 불교에서 말하는 잘 알려진 이른바 ‘空’(shunyata) 사상으로 나타난다. 존재/있음의 본질, 존재/있음이 空이요 空의 본질이 곧 존재/있음, 즉 色是卽空, 空是卽色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空은 無/없음과 아무 상관도 없다. 그것은 모든 현상이 내재적 실체를 소유하고 있지 않음을 이해해야 함을 의미한다.”(7)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空은 보편적 가능성으로서의 우주, 개별적 존재들, 운동, 의식이다.”(8) ‘나/자아’라는 말로 지칭되는 존재나 모든 존재는 영원불변하게 고정된 개별적 실체가 아니라, 그 어떤 것과도 서로 형이상학적으로 구별될 수 없는 단 하나의 유동적 실체의 영원히 유동적인 우주적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영원한 순환적 변화의 다양한 순간적 형태이며 양상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모든 힌두교와 불교에서 공통적으로 말하는 ‘無我(anatta)’와 ‘無存(anicca)’의 개념들은 바로 위와같은 뜻의 空의 형이상학적 그 존재론의 다른 표현이며, 그러한 존재론의 틀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불교 특히 선불교가 도달하고자하는 것이 절대적 진리의 앎/깨달음에 있다면, “그러한 절대적 진리는 다름 아닌 분석적 사유가 아니라 명상적 체험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空, 깨달음의 의미, 모든 존재의 비이원성 즉 하나됨을 인식함을 의미한다.”(9)
  [四聖諦 八正道]에 나타난 석가모니의 궁극적 의도가 인간의 궁극적인  고통을 궁국적인 차원에서 치료해 줌으로서 지복/열반(nirvana)을 실현할 수 있다면, 어째서 ‘空’, ‘無我’, ‘無存’이라는 형이상학적 진리의 터득이 그러한 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가. 고통은 불만족한 실리적 상태에 지나지 않고, 불만은 반드시 욕망을 전제하고, 욕망은 필연적으로 욕망의 주체로서의 나/자아의 실체 즉 영원불변성에 대한 확신과 그렇게 확신된  ‘나/자아’의 집착을 전제한다. 그러나 선불교의  형이상학이  강조하는대로  모든 존재가 ‘空’ 즉 영원불변한 실체가 아니라면, 모든 것들은 無差別 이며, ‘나/자아’와 나의 욕망대상인 ‘존재’를 차별될 수 있는 개별적 실체로 보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내가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나의 욕망충족에 집착함으로서 고통에서 해탈할 수 없다면, 그것은  모든 것의 궁극적 진리로서의 空, 無我, 無存을 인식하지 못하고 실체가 아니라 환상에 빠진 채 無明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역으로 말해서 空, 無我, 無存의 진리를  깨닫는 순간 우리는 고통의 원인인 자아, 자아집착, 욕망으로부터 근원적으로 해방됨으로서 다르마 부처처럼 어느 상황에서도 언제나 열반 속에서 웃는 얼굴로 존재할 수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나 종교화된 불교나 그 밖의 종교들이 절대신 혹은 여러 영적 귀신에 대한 무조건적 믿음을 가장 중요시하는 것과는 달리 禪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세계/우주/존재일반에 대한 진리를 터득하는 것이다. 또한 종교가 구원을 의타적으로 자신 밖의 존재에서 찾는 데 반해서 선불교은 구원을 철저하게 자주적으로 자신의 정신적 내부에서 찾는다.
  禪불교의 존재론적 핵심개념인 ‘空’이 인간이나 어떤 특정 종류의 존재에 제한되지 않고 모든 존재일반에 적용되는 일원적 형이상학의 개념인 만큼, 선불교는 인간과 동물, 동물과 식물의 근원적인 평등주의를 함의하며,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선불교의 궁극적 관심은 인간에게만 제한될 수 없고 살아있는 모든 존재로 확대된다. 선불교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생명체, 고통을 느끼는 모든 존재들은 그것이 동물이든, 버러지이든, 식물이든지 모두  윤리공동체 내에 포함되며, 따라서 불교에서 가장 귀중한 윤리적 배려로서의 ‘慈悲’는 모든 생명체, 고통을 느끼는 모든 존재에게  베풀어저야한다. 선불교, 아니 불교일반의 세계관은 결코 인간중심주의적일 수 없고, 근원적으로 생태 중심적이다. 앞에서 주장했듯이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문명의 위기는 문명의 패러다임이 인간중심주의에서 생태중심주의로의 대치로서만 가능하다면, 근원적으로 생태중심주의적인 선불교적 세계관은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이어야 한다.
IV. 과학적 세계관과 선불교적 세계관

  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선불교의 세계관과 과학의 관계가 정리되지 않고는  설득력이 없다. 과학적 지식과 기술을 완전히 배제된 앞으로의 문명을 상상할 수 없는 이상,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은 과학적 지식과 과학기술을 그 속에 채용할 수 있는 것이라야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적어도 얼핏보기에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거의 자명한 것으로 믿고 있듯이, 모든 현상을 미립자적 차원에까지 서로 분리, 차별화 하여 분석할 수 있는 과학적 존재론과 관찰, 측량, 실험 그리고 논리적 추론을 통해서만 그러한 존재를 파악할 수 있다는 과학적 인식론은, 모든 존재를 서로 차별할 수 없는 하나 의 총체로 보는 선불교의 존재론과, 사물의 본질은 관찰, 실험, 논리보다도 坐禪을 통한 직관으로만 파악할 수 있다는 선불교적 인식론과 정면으로 충돌하는데 있다. 어떤 불경도 자연현상에 대한 근대적 의미의 과학지식의 발견이나 과학기술의 발명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으며, 실제로 과학은 불교문화권 밖에 있는 기독교적 문화권의 산물이며, 그곳에서 발달해 왔다.
  “역설적이지만 동양의 종교적 사상은 서양의 종교적 사상보다도 서양의 합리적 사고에 더 잘 맞는다”(10)라는 프롬의 말대로 과학과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것은 불교가 아니라 과학을 탄생시킨 문화권을 지배한 기독교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의인적이어서 모든 현상을 초월적 즉 영적  존재의 자유의지의 표현으로 설명하는데 반해서 불교적 세계관은 과학적 세계관과 더불어 자연주의적이어서 모든 현상을 그냥 자연적 현상의 인과적 관계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과학과 불교는 피상적인 차원에서만  갈등하지 그것들이 깔고 있는 형이상학적 차원에서는 일치한다.
  과학적 세계관과 선불교적 세계관이 양립할 수 있다는 사실은 두 개의 세계관이 다같이 의인적이 아니라 자연주의적이라는 사실 이외에 불교적 형이상학의 핵심을 이루는 개념인 緣起의 의미를 새겨보면 더 확실해진다. 緣起는 因果關係를 지칭하며, 緣起說은 모든 존재와 현상들이 우연이나 기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불변하는 因果적 법칙(dharma)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이라는 이론이다. 그렇다면  緣起는 과학적 [四聖諦] 즉 네 가지 근본적 진리의 하나인 ‘集’이 곧 ‘緣起’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자연현상의 인식에 근본적으로 전제된 因果法則(causal law)과 전혀 다르지 않다. 이런 점에서 선불교적 세계관은 과학적이며, 과학적 세계관은 불교적이다.
  그런데도 그것들이 상충해 보이는 것은 인식대상의 영역의 차이에 있다. 그 차이는 과학이 인식대상으로서 물리적 현상으로서의 자연만을 택하고 그것을 지각적 경험의 차원에서 접근하는데 반면에 불교는 자연, 인간, 인간의 정신현상을 포함한 모든 현상을 자신의 인식대상으로 삼고 그것들을 형이상학적 즉 근원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데 있다. 다만, 티벳의 승려로 출가한 리까르 스님의 말대로 영적생활 사이에는 아무런 근본적  갈등 없이 양립할 수 있지만, 불교신자로서의 ‘나’에게는 전자가 후자보다 더 중요했을 뿐이다.(11)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리까르 스님의 말을 더 들어보자.
  “생명과학과 물리학은 생명의 기원과 우주형성에 관해서 놀라운 지식을 알아냈다. 하지만 과연 생명과학과 물리학이 행복과 고통의 근본적 메카니즘을 해명해 줄 수 있을까. 우리가 설정한 삶의 목적을 잃어서는 안된다. 지구의 정확한 형태와 크기에 대한 지식은 의심할 수 없는 진보이다. 하지만  지구가 둥글거나 평평하거나 하는 것은 인간 실존의 의미에 관한 한 아무 변화도 가져오지 않는다. 의학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그것은  죽음과 직면해서 다시 그 한계가 나타남으로 극에 달하는 고통을 잠정적으로만 덜어줄 수 있을 뿐이다. 우리의 정신을 바꾸지 않는 한 하나의 분쟁, 하나의 전쟁을 막더라도 다른 분쟁들과 전쟁들이 뜻밖에 다시 나타날 것이다. 그런 것들 대신 건강, 권력, 성공, 돈, 감각적 쾌락과는 독립된 내면적 마음의 평화, 즉 내면적 평화의  원천으로서의 내면적 평화를 발견하는 방법은 없을까.”(12)
  인과법칙을 세계를 설명하고 인식하는 기본적 틀로 삼는다는 점에서 과학과 불교가 다같지만, 과학의 지적 관심이 자연현상에만 있는데 반해서 선불교의 인식적 관심의 핵심이 행복, 고통, 의미경험이란 정신적 영역으로 확대되고, 따라서 인과법칙이 선불교에서는 과학에서 보다 훨씬 넓은 생명과 정신의 영역에까지 적용된다는 점에서 과학과 선불교, 더 정확히 말해서 과학적 세계관과 선불교적 세계인식의 시각은 다르다. 인식적  관심의 세계를 수적으로만 측량할 수 있는 물리적 차원을 넘어서 수적으로 계량할 수 없고 내밀한 현상학적 체험을 통해서만 접할 수 있는 생명과 정신의 영역에까지 확대한다는 점에서 선불교의 세계관은 과학적 세계관과는 달리 생명 중심적이다. 그렇다면 과학과 선불교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세계관이 아니라, 전자를 후자 속에 조화롭게 포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고, 과학적 세계관을 선불교적 세계관 속에 포함시켜 통합할 수 있는 가능성 곧 과학적 세계관을 생태중심주의적 세계관 속에 통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과학적 세계관의 선불교적 즉 생태중심주의적 통합은 형이상학적으로는  자연현상에 적용되는 과학적 인과법칙이 선불교적 인과법칙이 한 파생적 양상 혹은 측면으로서 후자에 비추어서만 그 의미를 갖는 것을 함의하고, 과학적 지식과 기술의 기능과 그 의미는 생태계의 가치,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의 행복과 고통에 비추어서만  규정되고 평가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
  과학의 발달이 없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산업화는 없었을 것이며, 산업화가 없었더라면 오늘과 같은 문명의 위기는 나타나지 않았을 것임으로 과학을 문명의 위기의 원천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듯이  인간의 자기중심적 욕망, 즉 인간중심적 세계관이 아니었다면 산업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었을 것임으로 오늘의 위기의 근본 원인은 과학이 아니라 인간중심적 욕망이다. 과학 그 자체는 인간중심주의와 전혀 무관하고 오히려 자연중심적이다. 문명 위기의 원인은 과학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중심주의적 세계관의 틀에서 인간이 오로지 자신의 물질적 즉 현상적 욕망만을 위해서 과학기술을 도구적으로 활용했던 데 있었다. 그러므로 과학적 지식과 기술은 탈인간중심주의적 즉 생태중심주의적 세계관 속에 전혀 모순 없이 통합되고, 그러한 틀에서 전혀 달리 조절되고 활용될 수 있다.
  오늘날의 과학기술문명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이 오로지 인간중심주의적 세계관에서 생태중심주의적 세계관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으로만 열릴 수 있다면, 생태중심주의 원형은 선불교사상에서 찾을 수 있고 선불교적 세계관에 의해서 형이상학적 근거를 제공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선불교적 세계관은 큰 틀에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명제로 요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존재론적 명제이다. 모든 현상은 緣起의 형이상학적 존재/우주의 원리에 의해서 연결된 단 하나의  총체이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과 다른 동물, 다른 존재 사이에는 절대적 차등이 없음을 의미하고, 인간이 중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존재들도 다같이 중요하며, 따라서 모든 생명체의 행복과 고통에도 나름대로의 적절한 배려가 필요하다. 둘째는 가치론적 명제이다. 가장 중요한 가치는 행복이며, 궁극적 행복은 물질적 욕구만 충족이 아니라 정신적 평화로서만 가능하다. 셋째는 방법론적 명제이다. 이러한 행복은 우주의 형이상학적 원리에 따라 나만의 이적적, 인간만의 인간중심주의적 소승적 행복이 아니라 모든 인간, 모든 생명의 생태중심적 즉 대승적인 관점에 섰을 때만 가능하다. 바로 위와 같은 근거에서 선불교야 말로 21세기, 아니 제3의 밀레니엄의 문명의 패러다임이 될 수 있고 또 그러해야만 한다.

Ⅴ. 결 론:문명의 전환과 세계관의 전환

  지금으로부터 한 밀레니엄, 아니 한 세기 문명이 상존하자면 지금까지 물려 받아 온 인간중심적 문명의 패러다임을 생태중심적 즉 선불교적 문명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이외의 다른 방법은 없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고 걱정하지만, 안타까운 사실은 현재의 추세로 볼 때 이러한 세계관,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은 쉽사리 이루어 질 것같지 않다는 데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다른 선택이 남아 있지 않고, 우리에게는 더 이상 주저하고 선택을 미룰 시간적 여유가 없다.
  또한 우리 이외에는 아무도 이 문제를 대신해서 해결할 존재는 없다. 이제 부터의 문제는 이론/깨달음이 아니라 이론에 따른 실천즉 業(karma)만이 남아 있다. 우리의 운명은 밖으로부터 이미 결정된 것이 아니라 우리자신의 禪 /修練으로 쌓게 될 業/행위에 달려있을 뿐이다.

각주:
1) Wing-Tsit Chan, A Source Book in Chinese Philosophy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2), p.425
2) Eric Fromm, Ò Psychoanalysis and Zen BuddhismÓ in Eric Fromm, D.T. Suzuki, and Richard De Martino, Zen Buddhism and Psychoanalysis(N.Y: Harper & Row, 1970) p.77
3) 현각스님, 萬行: 하바드에서 화계사까지-2권 (열림원, 1999)
4) 이도원, 그냥 갈 수 없는 길 (불광출판사, 1998) p.170
5) Fromm, Ibid., p.134
6) D.T. Suzuki, ?ectures on Zen Buddhism? Ibid., p.11
7) Mathieu Ricard in Jean Francois Revel & Mattieu Ricard, Le moine et le philosophe(Paris: Nil Editions, 1997/1999) p.159
8) Ricard, Ibid, p.172
9) Ricard, Ibid., p.172
10) Fromm, Ibid., p.80
11) Ricard, Ibid., p.33
12) Ricard, Ibid. p.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