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사 능인선원’<경향신문 2004/7/23>
우리 불교사에서 경허스님만큼 ‘살아있는
화두’가 된 스님이 또 있을까. 경허스님의
행적을 쫓아다닐 때나, 남긴 시들을 음미할
때마다 새삼 떠오르는 질문이다.
그는 자신의 깨달음을 인가해줄 스승조차
찾을 수 없었을 정도로 선불교가 피폐했던 조선말에 태어나, 그 스스로 등불이 된
선각자였다. 만공, 혜월, 한암 등 걸출한 제자들이 모두 그로부터 점화되었다.
그러나 그는 늘 외로운 존재였다. 스스로를 황량한 삼수갑산에 유폐시키고,
시골 훈장으로 생을 마감한 것은 그 정점이었다.
바람에 떨어지는 서리 묻은 나뭇잎/ 문득 다시 바람에 날아가네
어쩔거나 이 마음 다시 잡기 어려워/ 나그네는 오랫동안 돌아가지 못하네
그의 시들은 다른 선시들과 달리 오늘날에 읽어도 여전히 가슴에 와 닿는다.
그 이유는 그의 시들이 폐부로부터 우러나오는 인간적 갈등과 고독, 그리고 연민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제자들은 이러한 스승에게서 각자의 근기에 맞게 뼈를
하나씩 얻어갔다. 혜월의 천진무구, 만공의 무애자유, 한암의 용맹정진은 모두
스승의 골수에서 나온 것이었다.
홍성, 서산 일대는 경허와 그의 제자들이 활활한 발걸음을 옮겨다니던 선불교의
중흥지이다. 수덕사를 비롯해 천장사, 개심사, 부석사 등 이 일대의 여러 사찰에
이러한 대선사들의 체취가 묻어 있다.
경허스님의 행적을 쫓아 헤매던 3년 전 겨울, 스님이 활연대오한 천장사를 거쳐
수덕사의 산내 암자를 답사하던 중 그해의 첫눈을 맞은 적이 있다. 아무도 밟지
않은 첫눈을 마치 백지 위에 글을 써가듯 조심조심 밟고 가는데, 마침 저 위에서
한 떼의 스님들이 길을 쓸며 내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경허, 만공의 선풍(禪風)이
절정을 이룬 정혜사 능인선원에서 동안거 정진중인 수좌들이었다. 순백의 첫눈과
수좌들의 잿빛 승복은 마치 한 편의 정갈한 흑백 사진처럼 잘 어울렸다. 수좌들은
큰 스승인 경허, 만공의 영정이 모셔진 진영각(眞影閣) 앞을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눈 대신 장맛비를 맞으며 찾아간 능인선원은 아쉽게도 옛 건물을 허물고 새롭게 짓는
중이었다. 원래는 보수하려고 했으나 막상 천장을 열어보니 서까래가 썩어있는 등
너무 위험해 완전히 새로 짓게 되었다고 한다. 만공스님이 조실로 있던 1932년에
지어진 건물이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고졸한 맛이 배어나오던 선원을 다시 볼
수 없는 안타까움은 컸다. 이곳은 만공스님이 삼수갑산에서 스승의 입적을 확인한
뒤 위패를 가지고 돌아온 곳이자, 만공스님이 입적한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건물이
완공되면 올해 동안거 부터 수좌들을 다시 받을 수 있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만공스님은 스승의 죽음 앞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착하기는 부처를, 악하기는 범을 능가하니/ 이 분이 바로 경허선사이시다
이 육신을 벗고 어느 곳을 향해 가셨는가/ 술에 취해 꽃얼굴로 누워계시네
경허스님의 행적과 시를 참구해보면 이 짧은 한 편의 시 속에 경허스님의
진면목이 빠짐없이 다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이 지극한 존경과
사랑의 노래에서 경허, 만공으로 이어지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선맥(禪脈)을 느낀다. 능인선원을 찾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