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세상사는 이야기

부모님 병원 한번 모시고 싶어도...

淸潭 2006. 10. 30. 20:38

 부모님 병원 한번 모시고 싶어도...

 

엄마 정신이 ‘오락가락’ 한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귀의 달팽이관에 이상이 생겨 안산의큰 병원을 찾은 엄마와 함께 있던 안산 작은 누나가 내게 연락을 해왔다. 엄마 정신이 오락가락 하니 혼자서는 버스타고 집(충남 서산)에 가기 힘들다는 것이다. 누나는 집에서 쉬고 있는 내가 엄마를 모셔다 드렸으면 했다.


 

누나의 ‘오락가락’ 표현은 그리 심각할 수준은 아니었다. 어제 저녁 드시고 양약을 복용한 후 정신이 혼미해지고 몸이 휘청거리는 증세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흔히 ‘약기운 돈다, 약에 취했다’ 정도의 표현이면 적합할 것 같다. 40kg이 채 나가지 않는 약골인 엄마에게 양약 복용 후 속쓰림이나 어지럼증은 늘 수반되는 일이었다.


 

다음 날 아침 고향 길에 올랐다. ‘뒤뚱거림’의 대명사인 경승용차에 모시는게 마음이 걸렸다. 아무리 고급 승용차라해도 엄마는 반드시 차멀미를 하시는데 앞뒤가 짧아 뒤뚱거림이 심한 내 차가 오히려 버스보다 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곧장 시골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서산 시내 큰 형집에 들렀다. 형수와 함께 한약방에서 진맥을 짚어보기 위해서였다. 엄마는 서양의학보다는 한방의 탕약(달여서 먹는 한약)에 더 의지하는 분이다.


 

이미 멀미를 심하게 하신 엄마는 약 한 시간 동안 안정을 취하셨다. 그 상태에선 진맥이 제대로 짚어지지 않을 거라 하셨다. ‘에구에구’하며 힘들어하시는 모습 뵙기가 안쓰러웠다. 진맥 결과 소음인인 엄마는 기가 약하고 허약 체질이라며 한의사가 적당한 처방과 함께 약을 다려줬다. 한약방을 나오시며 엄마는 중얼거렸다. “늙어서 그랴, 소용 없어”라고 말이다.


 

10분 거리인 시골집에 도착했다. 이번엔 아버지 차례다. 두 달 전부터 다리에 부스럼 같은 게 나고 아주 심하게 가려운 증상이 있다고 했다. 심할 때는 밤에 한숨 못 주무실 정도란다. 또 허벅지에 밤알처럼 멍울이 올랐다고 했다. 식구들은 피부암이 아닐까 큰 걱정을 했다. 아니면 들판에서 들쥐나 두더지 등한테 병균이 옮은 게 아닌가 걱정했다. 그 정답은 병원에 가면 금방 알 수 있지만 아버지는 절대 병원에 가지 않으셨다. 차타고 10분이면 갈 수 있는 병원인데 말이다.


 

부모님은 물론 우리 6남매도 큰형 말이라면 꼼짝 못하지만 큰형도 이번엔 아버지를 움직이지 못했다. 며칠 전 병원에 안 가시겠다고 고집 부리시는 아버지와 꼭 모시고 가야겠다던 큰형 사이에 큰 목소리가 오갔고 결국 큰형만 ‘혼구녕’ 났다고 했다. 우리 4형제가 팔, 다리 붙잡고 억지로 모셔 가기 전에는 병원 문턱을 넘지 못할 것 같았다.


 

피부병이 계속되는 동안 아버지는 오로지 민간요법만 쓰셨다. 마늘을 짓이겨 환부에 붙이기도 하고 때론 담뱃불로 증상이 있는 곳을 지졌다. 그러한 처치가 가려움증을 완화하는데 다소 도움이 됐고 이렇게 며칠 지나면 말끔히 나을 거라고 아버지는 믿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간 가운데 가려운 증상은 더해갔다.


 

이러한 상태에서 내가 엄마를 모시고 시골에 내려온 것이다. 내 임무는 막중했다. 안산에서 내려오기 전 큰누나, 작은누나, 작은 형 등 형제들이 나를 독려했다. 밭에서 일하시는 아버지 곁에서 나는 계속 말씀드리며 졸랐다.


 

나는 피부암인지 피부병인지 무엇이든지 간에 검사해서 초기에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거리도 가깝고 몇 푼 들지 않으니 잠깐 다녀오자고 30동안 말씀드렸다. 효과가 있는 듯 했다. 아버지는 밭 연장을 챙기시며 집안으로 들어오셨다. 그토록 요지부동이던 아버지의 태세는 한순간에 무너졌다. 아마 몇 푼 안 든다는 말에 솔깃하셨던 모양이다. 아니면 다른 특별한 이유라도 있을까?


 

피부과에서 진료를 해보니 가려움증이 특징인 악성 습진이라고 했다. 의사 선생님은 독한 마늘이나 담뱃불이 일시적으로 환부의 세균을 죽여 효과가 있을 수 있지만 이는 오히려 몸을 고문시키는 거라며 다시는 그러한 민간요법을 사용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진찰 받는 동안 아버지는 의사 선생님께 생전 병원한번 오지 않은 것을 자랑하셨고 이번은 서울에서 아들이 일부러 왔기 때문에 특별히 병원을 찾은 것이라고 그 배경을 설명하셨다.


 

주사 한대, 바르는 연고, 양약 짓는데 모두 4500원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부피가 아주 큰 못자리 햇빛 차단 천막을 사서 차에 싣고 왔다. 그 작은 차에 부피 큰 농자재를 넣는다는 게 쉽지 않았다. 아버지가 그날 병원에 나섰던 진짜 이유는 내 차에 농자재를 사서 싣고 오기 위해서였다. 물론 서울에서 내려온 내 힘(?)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내 차를 이용한 농자재 구입이 우선이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여하튼 진찰 받고 제대로 된 처방을 받았으니 다행이었다. 큰누나, 큰형, 작은누나, 작은형, 동생에 이르기까지 모두 내게 전화를 했다. 병원은 가셨냐, 병명은 뭐냐고 묻길래 다 잘 됐다고 전해줬다. 형제들은 한결같이 “정말 수고 많았다, 애썼다”고 격려해줬다.


 

그날 저녁 아버지는 연고를 바르고 양약을 드셨다. 다음 날 아버지는 환부의 가려움증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하셨다. 하룻밤 새 말끔히 나을 걸 두 달을 저렇게 고생하셨나 싶었다.


 

비단 우리 아버지뿐이겠는가? 시골에 계신 부모님들은 대부분 그럴 것이다. 어디가 아프면 스스로 병을 진단하는 의사가 됐다가 처방에 따라 약을 짓는 약사가 되기도 한다. “내 병은 내가 잘 알아” 라는 흔한 말 있지 않은가? 병원에 가십사 거듭 말씀드려도 “나는 괜찮으니 너희들이나 아프지 말고 건강해라”는 그 말씀을 듣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우리는 젊어서 괜찮지만 아버지, 어머니는 건강 조심하셔야 합니다”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