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수사모

경허스님과 만공스님

淸潭 2019. 2. 21. 20:34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을 찾아서 예산 수덕사 기행

 

 

 

수덕사는 백제 위덕왕 (554~597) 때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며 백제 무왕 때는 혜현선사라는 스님이 묘법연화경을 강설하여 그 이름이 널리 퍼졌다고 한다. 이렇게 천오백여년의 역사를 가진 절이다. 특히 대웅전은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에 이어 오래된 건축물로서 그 가치가 높으며 국보49호로 지정되어 있다. 충청지역에서 손꼽히는 사찰이며 비구(남자 승려)가 아닌 비구니(여자 승려)스님들을 길러내는 승보사찰로서 오랫동안 그 가치를 인정받아 왔다.

 

수덕사가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대중가요 수덕사의 여승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수덕사는 덕숭총림이라 불리우는 수덕사를 중심으로 한 충남지역 사찰들에 한국 불교 중흥을 일으킨 전설적인 선사 경허스님과 그의 제자 만공스님이 덕숭총림을 일으킨 것은 물론 한국 불교가 땅에 떨어진 위상으로 허덕이고 있을 때 부처님의 뜻 그대로를 따라간다는 불교 본래의 위엄을 되살려 낸 역사가 살아 숨쉬는 것이다.

 

경허선사

경허(鏡虛, 1849년~1912년)는 한국 근현대 불교를 개창했다는 대선사이다.

1849년 전주에서 태어났고, 9세 때, 경기도 과천 청계산 에 있는 청계사로 출가하였다. 속가의 이름은 송동욱(東旭)이고, 아버지는 송두옥(斗玉)이다. 법호는 경허(鏡虛), 법명은 성우(惺牛)이다.

1879년 11월 15일[모호한 표현], 동학사 밑에 살고 있던 진사인, 이처사(李處士)의 한 마디,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어야지.' 이 한마디를 전해듣고는, 바로 깨달아 부처가 되었다. 1대 조사인 인도의 마하가섭존자 이래 75대 조사이다. 콧구멍 없는 소(牛無鼻孔處: 우무비공처)는 중국 법안종의 종주 법안(法眼) 선사의 어록에 실려 있는 선어다. 당시 경허의 시봉을 받들던 사미승 원규는 경허의 사제인 학명의 제자였고, 이처사는 사미승 원규의 속가 아버지였다.

1886년 6년 동안의 보임(保任)을 마치고 옷과 탈바가지, 주장자 등을 모두 불태운 뒤 무애행(無碍行)에 나섰다.

한동안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돌연 환속하여 박난주(朴蘭州)라고 개명하였고, 서당의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함경도 갑산(甲山) 웅이방(熊耳坊) 도하동(道下洞)에서 1912년 4월 25일 새벽에 임종게를 남긴 뒤 입적하였다. 나이 64세, 법랍 56세이다. 저서에는 《경허집》이 있다.

경허의 수제자로 흔히 '삼월(三月)'로 불리는 혜월(慧月, 1861년 - 1937년), 수월(水月, 1855년 - 1928년)ㆍ만공(滿空, 1871년 - 1946년) 선사가 있다. 경허는 '만공은 복이 많아 대중을 많이 거느릴 테고, 정진력은 수월을 능가할 자가 없고, 지혜는 혜월을 당할 자가 없다'고 했다. 삼월인 제자들도 모두 깨달아 부처가 되었다. 이들 역시 근현대 한국 불교계를 대표하는 선승들이다.

현재, '북송담 남진제'의 두 큰스님의 경우에, 송담스님은 경허(75대)-만공(76대)-전강(77대)-송담(78대)의 계보이고, 진제스님은 경허(75대)-혜월(76대)-운봉(77대)-향곡(78대)-진제(79대)의 계보이다.

 

올해는 경허선사가 입적한지 100년이 되는 해로서 불교에서는 경허스님 기념사업을 벌이려고 하고 있으니 그 기념으로 한번 수덕사를 방문해서 그의 위업을 확인해 보는 것도 좋겠다.

경허스님은 술먹고 고기도 예사로 먹는 무애행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와 관련한 일화도 제법 전해지고 있다. 오죽하면 수덕사를 사람들은 경허선사 때문에 술독사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ㅋㅋ

 

경허선사와 만공스님 이 두분의 선문답에 가까운 대화들도 많이 알려져 남아 있는데 제일 재밌는 것은 옛날 교과서에서 소개된 아직도 업고 있느냐라는 이야기. 어느날 두 스님이 얕은 하천을 건너게 되었는데 아름다운 미인 하나가 물을 못 건너고 그 개울가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걸 보고 경허선사가 등을 내밀며 업히하고 하고 스님으로서 이런 행동을 하는 만공스님이 아무리 스승이지만 못마땅했나 보다, 그래서 개울을 건넌 후 줄곧 못마땅한 얼굴을 하자 경허선사가 무슨 일이냐고 묻고 만공스님은 작정한 듯이 불제자로서 방금 그 행동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화를 내니 경허선사가 대답하시었다.

"나는 그 여인을 개울 건너편에 내려 두고 왔는데 너는 아직도 업고 있느냐?"

 

선문답이란 게 무엇인지 잘 알려주는 그런 말씀이라 인상에 남았는데 그저 두 스님이라고 소개된 내용이 사실 경허선사와 만공스님의 수많은 일화 중에 하나라고 한다. ㅋㅋ

 

여하튼 경허선사는 개심사,수덕사를 비롯해 충청도와 전국의 수많은 사찰들과 그 부속암자들을 돌아다니며 무애행을 했고 만공스님도  그 경허선사를 따라 젊은 날에 많은 길을 걸으며 만행을 했다가 말년에는 덕숭총림의 방장으로서 수덕사에 머물고 잠시 마곡사의 주지를 할 때를 제외하곤 줄곧 수덕사와 지금의 덕숭산의 만공탑이 있는 자리에 암자를 두고 머무셨다고 한다.

 


 

 

만공스님

본관은 여산(), 속명은 도암(), 법명은 월면(), 법호는 만공(滿)이다. 1871년(고종 8) 태인 군내면 상일리(현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에서 출생하였으며, 13세에 출가하였다.

충남 서산 천장사에서 태허()를 은사로 모시고, 경허(, 성우 1849~1912)를 계사()로 하여 사미계를 받았다. 1895년 온양 봉곡사에서 수행한 후 덕숭산 수덕사정혜사·견성암을 거쳐 금강산 유점사()에서 3년을 지냈다. 1905년 덕숭산으로 다시 돌아와 참선하며 수행승들을 가르치고, 1914년 서산 간월도리에 간월암이라는 암자를 세웠다.

1937년 마곡사() 주지를 지낼 때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 조선 31본산() 주지회의가 열렸는데 총독부가 조선불교의 일본불교화를 주장하자 이에 호통을 치며 공박하였다. 주로 덕숭산에 머물며 선불교의 진흥을 위해 힘쓰다가 1946년 전월사에서 입적했다. 사후에 <만공어록 滿>이라는 책이 편찬되었다.

 

이 두 스님은 불교를 잘 모르는 분들에게는 낯설겠지만 조금이라도 한국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분명 들어보았음직한 이름들이다. 사실 두 큰스님을 빼놓고 한국 근현대 불교를 말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으리.

 

 

수덕사 초입에 새로 조성된 일주문 기둥의 굵기가 시선을 압도한다. 아마도 이곳을 새로 일주문으로 만들려는 생각인 것 같다.

 

 

기존 일주문 이곳은 이제 중문 정도가 되어야 할 듯 아님 철거할까?

 

 

수덕사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수덕여관

 

수덕여관에는  한국 최초 여성화가 나혜석과 현대 동양화 화백으로 유명한 이응로 화백에 관한 일화가 남아 있다.  

 

수덕여관 안마당

두 화가가 머물렀던 탓인지 수덕여관은 예술의 향기가 살아 숨쉬는 듯하다.

 

아참 기존 일주문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수덕사 선미술관이 있다. 아마도 이응로화백이나 선관련 법어나 문구 중 좋은 것을 표구하여 깨달음의 선을 널리 알리고자 하는 의도같으니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한번 둘러보는 것도 좋다.

 

 

착하지 않은 세상을 착하게 살기 위하여


 


부처란 곧 마음이며 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니 망상과 미망을 버리고 자신이 부처라는 사실을 확연대오하면 거스를 것이 없다. 는 가르침의 시원이 경허스님에게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말을 그저 머리로 받아들이면 원효대사의 대승기신론소를 읽는 것 만큼이나 때론 따분하고 때론 머리아파 죽으리만치 파고들어도 한치도 깨달을 수가 없겠더니

마음으로 받아들이니 왈칵 눈물이 날 정도로 명쾌하고 그리고 흐믓한 그 무엇이다. 이 깨달음이란 것은


 

 

 

 

 

 

 

 

 

수덕사 안내문

수덕사 사천왕문 내 사천왕상

사천왕에 밟힌 요괴가 괴로워하는게 약간 무서움 ㅋㅋ

 

수덕사에 갔었다. 수덕사 경내에 사찰서점에 경허 만공스님의 고승열전이 나왔다는 것을 보고 사찰 박물관에 가서 만공스님의 유품과 수덕사의 사적들을 돌아보니 문득 그 그윽한 깊이와 닿을 수 없는 선반위에 올려둔 그들의 삶의 질곡 용광로같은 삶에서 추출된 깨달음이 지극히 간단하고도 쉬운 것이지만 세사에 찌든 앎과 생각으로는 도무지 억겁의 시간이 지나도 깨달아지지 않고 윤회는 잔인하다.

구한말과 일제시대를 관통하면서 숭유억불의 끝자락 더이상 무언가를 기대하기가 참혹한 불교의 실정에 진정한 불교 부흥을 꾀했고 지극한 깨달음을 얻은 후에는 무애행으로 마치 신라의 화려한 왕권과 귀족의 뒷그늘에 고통받는 백성들의 신음을 듣고다녔던 저 원효처럼 경허스님도 그렇게 세상의 고통과 슬픔을 어루만졌고 많은 중생을 일깨웠으며

너무 높아진 자신의 자리가 부끄러워 지위를 버리고 자리를 버리고 깨달음도 버리고 그렇게 비승비속의 첨예한 경계에서 오롯이 안타까운 세상을 지켰던 스님의 행적이 많은 미화와 후예들의 첨삭 속에 나타나 있었다. 특히 중학교 때 교과서에서 본 일화 '아직도 업고 있느냐'가

중국의 고사가 아니라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의 일화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도선국사, 원효대사, 자장율사, 사명대사, 이렇게 아득한 시절의 고승대덕의 삶과 깨달음도 물론 중요한 것이겠지만 근대사에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선지식이었고 한국불교 중흥의 기틀을 닦았던 경허큰스님 빈거울로 세상을 맑게 되비추는 그냥 잘 닦여진 거울이기를 원했고 나중에는 거울이면서도 거울이 아닌 그런 경지에 올랐던 분의 행장을 참 재밌게 읽었다.

9척 거구의 장신의 수염을 단 거지행색을 하고 주장자끝에 고기를 매달아 북쪽 땅끝 강계에서 일제에 의해 삼천리 강산이 피를 빨리고 고사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없다는 것을 생각했을 경허큰스님의 모습이 웬지 눈에 선해진다. 아 그 마음, 그러나 함부로 놓아버리지도 파고들지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또 그렇게 해서도 아니해서도 안 되었을 아 그 미망이여, 아 그 깨달음이여

 

수덕사 대웅전 우리나라 사찰 중 세번째로 오래된 건물 대웅전

단청을 하지 않아 속살이 그대로 내보이는 아름다움

 

 

 

 

 

맞배지붕의 각 부분의 명칭 지붕무게를 분산시켜 떠받치는 과학이 숨어 있다.

 

대웅전의 측면

 

스님들이 참선을 하는 방, 백련당 청련당이 대웅전의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사천왕문 앞에 있는 동자승과 포대화상(?~916)

포대화상은 미륵부처의 화신으로 저렇게 뚱뚱하고 언제나 미소짓는 모습으로 조성된다. 중국의 산타클로스랄까 ㅋㅋ 우리가 이놈의 화상아~ 할 때 화상은 어떤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인데 불교에서는 스승을 이르는 말로 사람의 이름뒤에 잘붙여쓴다. 아마도 이놈의 화상아란 말은 야단법석같은 말처럼 민간불교의 의식이 반영된 말인 것 같다.

 

 

기와로 문양을 낸 토담이 매우 인상적이다.

 

이건 다른 토담

 

만공스님은 14살 어린 나이에 한사코 말리는 어머니를 놔두고 도망쳐 삼천리 길을 걸어 중이 되려고 스승을 찾았던 만공은 경허선사를 만나 어렸을 때부터 깨달음의 길을 밝혀나가 유명한 일화도 많이 가지고 심즉시불, 즉 마음이 곧 부처임을 확연대오한 우리 불교 중흥의 선지식이시다.

숭유억불 조선 봉건 왕조의 몰락, 일제 강점기 그리고 해방 한국의 근현대사와 세수가 거의 겹쳐 있는 만공 큰스님은 닿을 수 없는 고고한 것에 청정한 깨달음을 가졌던 분이 아니였으며, 스승과 제자들은 물론하고 지나가는 삼라만상에 모두 자비심을 가지셨던 것으로 유명하며 피폐해 있던 한국 불교의 중흥을 오로지 초심으로 돌아가 일으켜 세우고 덕숭산문의 시조가 되시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느 날 내가 쓴 졸시 한편을 보고 10년 이상 차이나는 여자 후배는 참 연민이 많은 사람이라고 나를 평하였다. 내 스스로의 삶조차 이렇다할 것이 없이 번듯하게 꾸려가지도 못하면서 이 사람 저사람, 아는 사람은 물론 모르는 사람들 그리고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과 심지어는 동물이나 로봇이나 휴대폰같은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마음을 주고 신경을 쓴다는 말이렸다.

물론 칭찬의 일환으로 해 준 말이라 생각하지만 내 스스로 돌이켜 보면 마음에 평정심을 잃고 자꾸 자꾸 발심하여, 이리 흔들 저리 흔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요동치는 마음으로 용케도 한 세상 잘버티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음이 곧 부처이며, 그래도 마음 한번 잘 닦으면 나도 부처요,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 스스로가 이미 부처라는 것을 어떠한 걸림없이 확고하게 깨달으면 그것이 바로 견성이요 성불이라는 사실은 8만6천 법문이 아니라 누군가의 간단한 안부인사로도 깨달을 수 있는 것을, 세상에 속고, 세상을 속이며 참 한심하게도 마음의 주인이 아니라 마음의 노예로 살아왔다는 생각을 책을 읽는 내내 생각했다. 그리고 마음의 주인이 되는 일이 결코 어렵지 않은 일이고 한 세상 살아가면서 이 결의와 실천만 있다면 견성성불이 절대 어려운 일만은 아니려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못 만나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 괴롭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을 못 만나 괴로운 이치를 살짝 엿보는 재미도 있고, 만공 큰스님께서 여러 중생들에게 들려주었다는 일화 속 말씀 하나 하나가 참 좋다는 생각을 한다.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만공 큰스님의 입적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의 내용이었다.

76세의 세수를 마치면서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 날짜까지 어림짐작하게 되고 시봉들던 비구니스님들을 물리치고 고요하게 앉아 있다가 문득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날 목욕재계하고 삭발도 다시금 깨끗이 하고 제자들이 용맹정진하는 요사채와 암자 등에 들러 격려하고 법상을 물려받을 제자에게 잘 지키라 당부하고 그리고 생밤 몇개를 까먹고

당신 자신에게 "참 오래도 함께 살았고 잘 살았으니 이제 우리 이별하세나" 하면서 환한 웃음을 지은 후 침목을 베고 자는 듯 그렇게 열반에 들었다는 만공 큰 스님 이야기를 들으니

삶의 고통 죽음의 고통 즉 인간의 참혹한 윤회의 운명을 만공 큰 스님께서 확실히 벗어나셨구나 그렇게 초당의 문지방을 넘듯 간단하게 가볍게 아무런 흔적도 남김없이 고요히 왔다 갈 수도 있는 거구나. 정말 생불이셨구나 하는 생각을 가슴 깊숙이 느끼게 하는 좋은 책이었다.

온갖 망상과 번뇌에 휘둘려 참 자신을 못찾는 사람, 길을 묻는 사람, 위로나 격려가 필요한 사람, 사는 것보다 죽는게 낫다고 말하는 사람, 죽은 듯 사는 사람, 그리고 온갖 마음을 내어 끊임없이 무언가에 집착하는 사람, 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고 먼저 나 스스로 책의 내용을 늘 곱씹으며, 실천하며 살아야겠다.

주장자로 어깨를 후려치시며

' 네 이놈, 마음의 주인이 되라했더니 왜 자꾸 마음의 똥구멍만 닦고 자빠졌느냐?'

이렇게 호되게 나무라시면

합장 일배로 그렇게 또 나 자신을 가다듬어 갈 용기를 가져가는 그런 상상을 하면서

매미를 잡아오는 놈은 수박을 거저 먹을 것이요, 못 잡은 놈은 동전 세푼을 내야 할 것이다라고 답을 내라 하셨을 때, 그냥 말없이 동전 세푼을 내놓고 합장한 보월스님처럼 나는 나만의 답으로 어떤 답을 할지 생각하고 생각해야 할 일이다.

나무홈을 지나 돌벼루같은 곳에 잠시 고이는 물조차도 깨달음을 주는 듯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비느라고 촛불을 켜둔 흔적, 여기도 사람들의 마음은 다녀간다.

수덕사에 갔다면 꼭 둘러보면 좋을 성보박물관

선 서화 전시관

 

보살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는 현수막,

수덕사에서는 이렇게 사찰과 불교관련 현수막을 걸어둔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원담스님이 아직 입적하시기 전이었는지 원담스님의 하안거 결제 법문이었나 아님 경허스님 법문이었나 여하튼 가슴을 때리는 글이 있어 그냥 머리깎고 선방에 들어앉고 싶은 기분을 자아냈었다.

ㅋㅋ

마음 수행을 하는 도와 길은 같이 도라고 쓰인다. 도를 닦는 것과 같은 길이란 도여로의 이름이 참 인상 깊다.

수덕사 성보박물관에서 꼭 봐야 하는 만공스님 유품, 원래 왕실에 있던 것을 의친왕 이강께서 만공스님께 직접 선사하신 것이라고 한다. 만공스님이 얼마나 존경받는 선지식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 거문고의 원래 주인은 고려 공민왕이었는지 공민왕금이라고 새겨져 있다고 한다.

 

만공스님 누비가사

헤어진 것을 기우고 기운 누비가사가 스님의 소탈한 삶을 말없이 대변해서 보여준다.

만공스님 인장, 여러 서간이나 책들 그리고 서화 등에 사용했을 여러 인장들이 참 아기자기하다.


'불교이야기 > 수사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덕사 경내  (0) 2019.03.17
수덕사의 하로밤   (0) 2019.02.22
鏡虛禪師의 悟道頌에 화답함  (0) 2019.01.29
겁외가 / 경허선사  (0) 2019.01.23
'수덕여관'의 세 여자와 세 남자 이야기  (0) 2019.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