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걸은 간데없네
고려 말에 ‘삼은’이 있었다고 한다. 야은 길재,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이들 세 사람의 호에 ‘은’이라는 한자가 공통적으로 들어 있었기 때문에 이들 세 분 선비를 우러러 보는 후진들이 그 어른들을 존경하는 뜻에서 ‘삼은’이라 부르게 된 것 같다. 그 중 야은 길재가 이렇게 읊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보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벼슬이 성균관 박사에 이르렀던 야은은 새로 등장한 조선조에서 또 그를 다시 벼슬자리에 모시려 했지만 끝까지 거절하고 이런 시 한수를 남기고 떠났다.
500년 가까이 이어온 고려조가 불행하게도 다 무너지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섰다. 길재는 말을 타고 고려의 옛 도읍지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송학산과 예성당은 그대로 있는데 잘난 사나이들은 다 어디를 가고 없는가. 그래도 임금을 모시고 태평성대를 노래하던 그 시절과 돌아오지 못하는 그 날들이 그립기 짝이 없다. 그 시절을 되새기고 이 시조 한 수를 읊으면서 떠난 길재의 허전한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시대에는 산도 그대로 있지 않고, 강물도 그대로 흐르지 않지만, 길재가 살던 그 시대만 해도 산천은 옛날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시인 테니슨과 함께 우리들도 돌아오지 못하는 날들을 생각하며 눈물겨워 하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김동길
Kimdonggi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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