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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안동] '여왕의 밥상'…안동의 음식

淸潭 2010. 3. 9. 15:15

세계 앞에 당당히 올린 '여왕의 밥상'…안동의 음식



10년 전이었던 1999년 4월 21일, 안동은 세기의 진객(眞客)이었던 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을 맞았다. 가장 한국적인 모습을 보고 싶다는 여왕의 마음을 안동과 하회마을이 사로잡았다. 여왕은 공경과 정성이 깃든 안동의 음식으로 차린 자신의 73회째 생일상을 받고 또 한차례 감동, 감탄했다.
 
안동소주 기능보유자 조옥화(경북무형문화재 제12호 및 전통식품명인 제20호) 선생이 안동의 전통음식과 궁중요리 47가지로 만든 큰 상이었다. 이날 여왕은 충효당에서 종가댁 여인네들의 김치 담그는 모습을 보면서 한국의 정서를 마음에 담아갔다.
 
이렇듯 안동의 음식에는 정성과 공경이 깃들어 있다. 일행은 안동의 음식에 깃든 '정'(情)과 '경'(敬)을 느끼기 위해 길을 나섰다.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조선시대 학자 이현보선생의 멋이 베인 '농암종택'. 이 곳에서 찬거리만 15가지가 넘는 상을 받았다. 
 
안동의 유명한 간고등어, 콩가루를 버무려 만든 안동식 냉잇국, 더덕무침, 알맞게 익은 김치와 집된장으로 끓인 된장찌개. 여기에다 안동지역 손님상에 빠지면 푸대접을 받는다고 느낄 만큼 빠져서는 안 될 '보푸리'도 나왔다. 
 
일일이 손으로 두드려 고운 가루처럼 만든 북어 보푸리는 안동지역만의 별미다. 종손 이성원씨는 "안동의 선조들은 검소한 음식문화를 유지했다. 그런 검소하고 절제된 환경속에서 선조들의 학문적 열의가 뜨겁게 타 오를 수 있었을 것"이라 한다. 
 
푸짐하고 화려하진 않지만 안주인의 정성과 철학이 밴 음식상이었다. 예부터 안동지역 종가들의 제일 덕목은 '봉제사 접빈객 '(奉祭祀 接賓客)이었다. 이 때문에 각 종가마다 손님맞이와 제례음식이 전해오고 있다. 특히 접빈과 제례음식에서 제일 중요했던 '술'의 종류와 제조법은 수백여가지가 전해온다.
 
종가의 제례음식은 각 종가가 위치한 지역이나 사회·경제적 여건에 따라 차이가 난다. 종가마다의 긍지와 자부심이 음식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이 때문에 음덕을 기리는 제례음식에서는 형식을 벗어나 '경'(敬)을 표현했다. 서애 류성룡 종가에서는 고인이 평소 즐겼던 '중박계'라는 음식을 올린다.
 
밀가루를 반죽해 발효시켜 튀겨낸 일종의 과자다. 17세기 고인이 즐겼던 음식을 지금까지 잊지 않고 제례음식으로 올리는 것은 대단한 '경'이다. 풍산 소산의 안동김씨 종가에서는 '무익지'라는 음식이 있다. 무를 종이장처럼 얇게 숟가락으로 긁어 찐 후 실고추와 통깨, 간장으로 무친다. 
 
치아부실과 소화력이 떨어진 어르신들을 위한 '효도음식'으로 유명하다. 이 무익지에는 '경' 철학이 담겨져 있다. 지난 2007년 퇴계종가에서는 신세대 며느리를 맞았다. 종가에서 수백년 이어온 '맏며느리 큰 상 내리기'에서 예절음식에 담긴 철학을 엿볼 수 있었다. 
 
퇴계선생이 농민들의 피와 땀으로 얻어진 꿀과 기름이 들어간 유밀과를 제사상에 올리지 말라 했던 유지에 따라 유과나 약과는 없다. 이와 달리 자손번창의 의미를 담은 '잉어찜'과 부녀자들이 쉽게 맛볼 기회가 없는 '전복조림'은 형식은 탈피하면서도 화합과 아낌의 정성이 담겨 있었다. 안동대 민속학과 배영동 교수는 "안동의 종가 음식은 대부분 비슷하다.
 
종가간에 혼인과 학문적 교류가 빈번했던 시대상으로 인해 음식문화도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을 것이다"며 "봉제사 접빈객을 중시했던 종가들은 모든 음식에 정성과 공경을 담아 냈다"고 했다. 안동지역의 대표적 3대 고조리서인 '수운잡방'과 '음식디미방', '온주법'에는 320여가지의 음식 가운데 술이 154 종류로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수운잡방에서는 이미 중국의 양조법과 다른 한국화된 술 빚는 법을 설명하고 있다. 안동지역에 전해오는 대표적 술로 '안동소주'와 '고삼주'가 있다. 안동소주는 고려시대 배앓이 등 민간요법에 사용됐던 것으로 전해온다. 
 
13세기 원이 일본원정 병참기지로 안동에 주둔하면서 소주 제조법이 발달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은 경북도무형문화재 조옥화씨의 '안동소주'를 비롯해 10여가지의 소주가 재생산되고 있다. 
 
고삼주(苦蔘酒)는 929년 말 고창전투에서 순흥사람 안중 할머니가 술밥속에 고삼뿌리를 넣어 빚은 독한 술을 만들어 견훤의 병사들에게 먹여 취하게 해 삼태사가 병사를 이끌고 왕건을 도와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고려개국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음식으로 알려졌다. 권두현 사무처장도 "안동음식의 대표는 술이다.
 
유교사회에서 종가는 봉제사를 통해서 가문을 드러낸다. 이 과정에서 상징적 음식은 술이 차지했다"며 "3대 고조리서에서 술 빚는 법이 절반을 차지하는 것도 술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했다. 안동에는 간고등어도 유명하다. 동해안에서 잡힌 고등어를 등짐과 우마차를 이용해 200여리를 운송해 임동 챗거리 장터에 도착하면 부패를 막기 위해 소금으로 염장처리 했다.
 
이 염장고등어를 다시 안동까지 운송하는 동안 햇볕과 바람을 맞으며 가장 맛있는 상태의 발효된 음식으로 만들어졌다. 이렇게 유래된 '안동간고등어'는 지난 1999년 영국여왕의 안동 방문 직후 새롭게 현대화 상품으로 탄생돼 안동 대표적 먹을거리로 자리잡고 있다.
 
또 안동 헛제사밥은 하회별신굿탈놀이 인간문화재인 이상호씨의 모친 조계행 여사가 지난 1980년대 지금의 안동댐 민속촌에서 처음으로 상품화해 판매하면서 또 하나의 안동 먹을거리로 자리잡았다. 제사를 지내지 않고도 정갈한 나물과 정성이 담긴 제사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한 것.
 
안동 종가의 봉제사에 담긴 음식 철학을 수백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음식이다. 안동시청 이성옥 전통음식담당은 "헛제사밥에 나오는 '안동 비빔밥'은 타지역의 전통 비빔밥과 달리 가장 정갈하게 조리한 제사나물을 그대로 사용하고 간장으로 버무린 가장 품격있고 격조높은 음식이다"며 "안동 비빔밥은 나물의 향과 맛을 그대로 살린 약용 음식으로 기 충만에도 좋은 안동의 대표 전통음식으로 보존, 개발할 필요성이 있다"고 했다.
 
안동시는 3대 조리서에 전해오는 안동음식을 재현해 이를 상품화할 계획이다. 또 안동을 한국의 대표적 전통음식의 고장으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안동 음식에는 맛과 멋 뿐 아니라 '정성'과 '공경'이 깃들어 있다.
 
자문단 : 김휘동 안동시장
배영동 안동대 민속학과 교수
권두현 안동축제관광조직위 사무처장
이성옥 안동시청 전통음식담당
 
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지방제휴사 / 매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