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참선(參禪)을 한다는 수행자를 만나면 승속(僧俗)에 관계없이 대체로 고요한 산사에 집착하는 병이 있습니다. 시끄럽고 복잡하고 바쁜 곳에서 생활하다가 적막한 산사에 들어가면 처음엔 누구나 이내 고요 속에 빠져들어 공부가 절로 되는 듯하지만 그 고요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너무 집착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게을러지고 잠 속에 빠져들게 됩니다.
때로는 사람에 따라서 도를 향한 용맹심마저도 슬그머니 녹아내려서 심신이 무기력해지는 병에 걸려 들기도 합니다. 참선의 길에서 공부의 힘을 얻는 데는 모름지기 화두에 의심을 일으키는 데 있는 것이지 고요함 속에서 버티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니 시끄럽다거나 고요하다는 분별을 떠나서 자나깨나 눈 밝고 사나운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에 네 다리를 딱 벌리고 두 눈을 부릅뜨고 쥐를 노려보듯이 오직 의심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마음이 온통 의심으로만 가득 찬 때가 오면 머리를 들어도 천장이 없고 머리를 숙여도 바닥이 없고 떠들고 시비하고 부딪치는 천 사람 만 사람 가운데 있어도 아무도 없는 것과 같으니 복잡한 학교 안이라고 해서 정진에 장애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참선의 만 가지 병의 근원이 화두에 대한 의심을 놓치는 데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벽에서 들어오는 바람은 벽에 난 구멍을 통해서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유마경(維摩經)에 보면 “비록 세속인으로 있으나 사문(沙門; 승려)의 계율을 어기지 않으며 비록 가정에 거처하나 세상에 집착하지 않으며, 처자를 거느리나 종교적인 생활을 하며 매음가(賣淫街)에 들어가서는 욕정의 과오(過誤)를 보이며, 술집에서 술을 마시면서도 자신의 의지를 잃지 않는다. 그리하여 장자 중에 있을 때는 장자의 존장이 되어 그들을 교화하고 서민들과 있을 때에는 그들 중의 존장이 되어 그들을 인도한다. 이와 같이 무량한 방편으로 중생을 요익케 한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가르침을 각자 깊이 새기고 공연히 신분과 처지, 환경에 분별심을 내지 말고 불경(佛經)과 조사어록을 좀 접했다고 문자에 매달리지 말고 참선해서 도를 통하려고 뜻을 한번 세웠으면 화살이 시위를 떠난 것처럼 뜻을 되돌리지 말고 오직 화두에만 간절한 마음으로 의심해 들어가야 합니다.
선법(禪法)은 노력하면 노력하는 만큼 이루어지는 공부이니 믿음을 가지고 정진하면 분명히 힘을 얻어서 큰 산에 들어간 호랑이가 될 것이요, 믿음이 부족하면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삼계(三戒; 욕계, 색계, 무색계)가 화택(火宅)이라” 하여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불난 집과 같다고 하셨는데 이 마당에 어디가 고요하다고 고요한 곳을 찾을 것이며 또 찾아가면 고요한들 얼마나 고요하겠습니까? 우리가 장소를 탓하며 정진에 게을리하는 것은 다 제대로 발심(發心)을 못했거나 도심(道心)이 약해서 안으로 중심이 바로 서지 못하니까 바깥 경계를 따라다닌다고 생각합니다.
대혜 스님(大慧禪師)께서도 “오랜 세월을 참선했든 먼저 깨쳤든 참으로 고요한 경지에 도달하려면 모름지기 생사심(生死心)을 깨뜨려서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참선 공부는 반드시 생사심을 깨부숴야 하며 생사심이 깨지면 저절로 고요해진다.”라고 하셨으니 진실한 고요함이란 자신의 안으로부터 얻는 것이지 바깥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니 세속에서 살더라도 도심(道心)을 잃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면 고요 속에 살 수 있습니다.
학교 속이라고 답답해할 것도 없고 드나드는 대중을 번잡하다 하여 싫어할 것도 없고 한 마음만 잘 챙겨야지 고요하고 청정한 곳에 마음을 빼앗기면 빼앗길수록 도리어 도를 막는 것이니 도인들의 초탈한 삶을 본받아 걸림이 없어야겠습니다.
혜능 스님(慧能禪師)의 말씀 중에 참선의 여러 방법 중에 좌선(坐禪)에 대한 요긴한 가르침이 있어서 이 자리에서 다시 새겨보면 스님께서 대중에게 이르시기를 “선지식아! 어떤 것을 좌선이라 하느냐? 이 법 안에는 걸림도 없고 막힘도 없다. 밖으로 모든 선악의 경계를 만나도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좌(坐)라 하며 안으로 자성(自性)이 동요함이 없음을 보는 것이 선(禪)이다. 또 어떤 것을 선정(禪定)이라 하느냐? 밖으로 형상(形相)을 떠나게 되면 선이 되고, 안으로 혼란스러움이 없는 것이 정(定)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좌선이란 마음으로부터 진정한 좌(坐)를 터득해야지 사대육신만을 좌했다고 완성이 아님을 철저히 알아서 실참법(實參法)으로 정진하여야겠습니다. 또 실참을 하기 위해서는 예로부터 세 가지 요건이 필요하다 하였으니 큰 신심(大信心)과 큰 분발심(大憤心)과 큰 의심(大疑心)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 세 마음을 지니고 나서 화두를 참구하되 어미 닭이 알을 품고 있을 때 더운 기운을 지속하듯 주릴 때 밥 생각하고 목마를 때 물 생각하듯 간절하게 탐구하여야 합니다.
오직 화두만 챙기며 정진할 뿐 다른 생각으로 헤아리지도 말고 깨닫기를 기다리지도 말아야 합니다. 정진을 하다 보면 누구누구 할 것 없이 과정 과정에 큰 산을 넘어가듯 넓은 강을 건너가듯 성난 바다를 헤쳐가듯이 장애도 많이 생기는데 성현의 가르침에 의해서 그 병을 미리 알고 묵묵히 나아가면 먼 길에 길잡이를 만난 듯 어둠 속에 불빛을 만난 듯 도움이 되는 것이니 이에 대하여 몇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화두를 타파하는 것은 분별로 헤아리는 것도 아니고, 이론으로 알아맞히는 것도 아니고, 경문(經文)으로 근거를 삼는 것도 아니고, 있고 없는 데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조급하게 깨치는 데만 매달려서도 안 되고, 가만히 고요한 곳에만 앉아있는 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니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의심만 정밀하게 점검하며 밀고 나가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행자시절을 수덕사에서 보내면서 경허 스님(鏡虛禪師)의 법문곡(法門曲)을 읽으며 큰 감동을 받아서 오늘날까지 가끔 읊조리는데 오늘 이 법회를 마무리하면서 풍송조로 한번 외워 보려 합니다.
“나도 조년(早年) 입산하여 지금까지 궁구했네
깊이 깊이 공부하여 다시 의심 영절(永絶)하니
어둔 길에 불 만난 듯 주린 사람 밥 만난 듯
목마른 이 물 만난 듯 중병 들어 앓는 사람 명의를 만난 듯
상쾌하고 좋을시고
이 법문을 전파하여 사람 사람 성불하여
생사윤회 면하기를 우인지우(又人知又) 타인지락(他人知樂)
이 내 말씀 자세 듣소
사람이라 하는 것이 몸뚱이는 송장이요
허황한 빈 껍질이 그 속에 한낱 부처 분명히 있는구나
보고 듣고 앉고 서고 밥도 먹고 똥도 누고
언어수작 때로 하고 희로애락 분명하다
그 마음을 알게 되면 진즉 부처 이것이니 찾는 법을 일러보세
누우나 서나, 밥 먹으나, 자나깨나, 움직이나,
똥을 누나, 오줌 누나, 웃을 때나 골낼 때나
일체 처(處) 일체 시(時)에 항상 깊이 의심하여 궁구하되
이것이 무엇인고 어떻게 생겼는고
시시때때 의심하여 의문을 놓지 말고
염념불망(念念不忘)하여 가면 마음은 점점 맑고
의심은 점점 깊어 상속부단(相續不斷)할 지경에
홀연히 깨달으면 천진면목(天眞面目) 좋은 부처 완연히 내게 있다.
살도 죽도 않는 물건 완연히 이것이다.”
젊음이 넘치는 이 도량이 항상 불법(佛法)이 충만한 영산회상(靈山會相)이 되고 반야(般若) 동산이 되어서 부처님의 탄생처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 동국대학교 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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