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문학/漢詩

안전하게 취하는 방법

淸潭 2024. 12. 11. 13:24

안전하게 취하는 방법

 

喜不宜飮酒   희불의음주 / 기쁠 땐 술 마시지 말아야 하니

樂極多愆咎   락극다건구 / 너무 즐거우면 실수가 많아지네

憂不宜飮酒   우불의음주 / 걱정스러울 땐 술 마시지 말아야 하니

醉後轉窈糾   취후전요규 / 취하고 나면 깊은 근심이 되네

唯有無事者   유유무사자 / 아무 일 없는 때라야

然後宜飮酒   연후의음주 / 술 마시기 좋으니

中心旣和平   중심기화평 / 마음이 편안한 뒤에

酣暢可長久   감창가장구 / 술도 오래 즐길 수 있네

淸風自北窓   청풍자북창 / 시원한 바람 북쪽 창에서 불어오고

好月窺南牖   호월규남유 / 밝은 달은 남쪽 창으로 슬며시 비추네

幽人動逸興   유인동일흥 / 한가로운 흥취에 은자는 고무되어

新釀開甕取   신양개옹취 / 술독 열어 새로 빚은 술 담아 오네

引觴還自酌   인상환자작 / 술잔 들어 홀로 마시니

豈必須我友   기필수아우 / 어찌 친구가 꼭 필요하랴

然適意止   훈연적의지 / 얼근하게 기분 좋으면 그만이니

不問石與斗   불문석여두 / 몇 잔을 마시는지는 따질 것 없네

肌膚爲之潤   기부위지윤 / 피부는 술 때문에 매끈해지고

性情爲之厚   성정위지후 / 마음은 술 때문에 너그러워지네

睢盱反淳古   휴우반순고 / 질박하게 순수한 모습으로 돌아가

優游養年壽   우유양연수 / 여유롭게 제 수명대로 살아야지

俗士拘細節   속사구세절 / 쩨쩨한 선비들 자질구레한 규범에 구애되어

流涎强欺口   유연강기구 / 침 흘리면서도 구미 당기지 않는 척하고

放者乃沉酗   방자내침후 / 방탕한 자들 끝내 술독에 빠져

彼哉濡其首   피재유기수 / 머리끝까지 흠뻑 취한 저 모습이란!

非屈復非髡   비굴부비곤 / 굴원도 / 아니고 순우곤도 아니니

此道誰當受   차도수당수 / 이러한 / 이치 누가 이해하랴

 

 - 박태보(朴泰輔, 1654~1689), 『정재집(定齋集)』

 「유종원의 음주 시를 본떠 짓다[擬柳子厚飮酒]」

 

  기쁜 일이 있다고 너무 취하면 기쁨은 술자리 실수에 묻히고, 걱정이 있다고 술로 달래면 몸은 더 병든다. 오히려 한가할 때 바람과 달을 벗 삼아 호젓한 시간을 갖는 것이 술을 제대로 즐기는 방법이다. 주도(酒道)의 일가견을 피력한 듯하지만, 기쁠 때도 취하지 말고 슬플 때도 취하지 말고 심지어 혼자 쓸쓸하게 마시라고 하니 고금의 주당들의 시선으로는 풋내기의 설익은 한담에 불과해 보인다.

 

  지은이 박태보는 17세기의 대표적 학자 박세당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24세에 과거의 시제(試題)를 출제한 일이 문제가 되어 선천(宣川)으로 유배되었는데, 《좌전(左傳)》의 “아름다운 병은 나쁜 약만 못하다.(美不如惡石)”라는 구절을 출제한 것이 효종의 즉위를 비판하는 말이라는 공격을 받았으므로 꽤나 엄중한 죄목이었다.

 

  20대 초반 장원 급제하여 순탄한 관직 생활을 이어 가던 전도유망한 박태보에게 북쪽 변방으로 유배된 일은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이 시는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지어졌다. 그래서 이 시는 술을 즐기는 풍류라기보다 오히려 그의 처신에 대한 다짐으로 읽힌다. 너무 이른 나이에 인생의 큰 굴곡을 겪은 그가 자신의 처신을 술자리의 중도에 비유하여 다짐한 말은 아닐까 추측하게 된다.

 

  시에서는 술을 잘 경계한 인물로 굴원과 순우곤을 인용하였다. 굴원은 초나라 정계에서 축출된 뒤 강가를 배회하다가 어부를 만났는데, 어찌된 연고인지 묻는 질문에 “온 세상이 혼탁한데 홀로 깨끗하였고 모든 사람이 다 취하였는데 홀로 깨어 있어서 추방되었다.”라고 답하였다. 순우곤은 술을 좋아하던 제나라 위왕이 주량을 묻자, 한 말을 마셔도 취하고 한 섬을 마셔도 취한다고 답하였다. 그 이유를 묻자 임금이나 어른을 모시고 마실 때는 한 말, 두 말만 마시고도 취하고, 친구를 만나면 대여섯 말을 마셔야 취하고, 남녀가 어울려 자유롭게 노는 자리에서는 여덟 말, 한 섬까지도 마실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왕에게 “술을 극도로 마시면 어지러워지고 즐거움이 극도에 이르면 슬퍼진다.”라고 간언하였다.

 

  두 사람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술에 초연하였는데, 굴원은 아예 취하지 않는 방법을 선택하였고 순우곤은 상황에 맞게 취하였다. 시에서는 굴원처럼 아예 술을 멀리하지도 못하면서 격식을 차리느라 안 좋아하는 척하는 속된 자들과, 순우곤처럼 상황에 맞게 잘 마시지도 못하면서 주량을 넘어 머리끝까지 만취해버리는 방탕한 자들을 대비하여 비판하고 있다. 적당한 취기로 한가함을 즐기는 음주야말로 술을 제대로 즐기는 방법이듯, 맑은 정신으로 상황에 맞는 행동을 하는 것이 자신이 앞으로 취해야 할 처신의 방향이라고 다짐한 듯하다.

 

  박태보는 이듬해 해배되었고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러나 36세 되던 숙종 15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혹독한 고문을 받고 유배지로 향하던 중 졸하였다. 그 삶은 비록 죽음이라는 비극으로 귀결되었지만 말할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 그 책무를 저버리지 않은 것은, 유배지에서의 그의 다짐이 실로 ‘보신(保身)’보다는 ‘깨어 있음’에 무게가 있었던 반증이라고 할 수 있다.

 

  2024년 12월 우리는 매우 위험한 주정꾼들을 목도하고 있다. 아집과 독선의 폭탄주에 주량을 넘겨 버린 자도 있고, 모든 사람이 깨어 있을 때 권력의 취기에서 여전히 깨어나지 못한 자들도 있다.

 

시인이 말한 것처럼 적당한 취기는 마음을 너그럽게 하고 몸을 윤택하게 할 수 있다. 취하지 않는 취기는 모두에게 안전하다. 우리 사회가 하루 속히 굳건한 민주주의의 울타리를 재건하여 모두가 안전하게 취할 수 있는 따뜻한 연말을 되찾길 기원해 본다.

 

글쓴이 김효동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