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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첫 은퇴출가자 영만 스님

淸潭 2019. 5. 11. 21:34

조계종 첫 은퇴출가자 영만 스님

  • 권오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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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법 만나러 먼 길 돌아왔는데, 불퇴전 각오로 정진해야죠”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성장 
고등학교 때 사제되는 꿈 품어
대학졸업 후 전문서예가로 활동

우연히 접한 불교 책 읽고 감화
부처님가르침 배워보겠다 발원
불교활동 하며 출가자 삶 동경
2017년 은퇴출가 도입되자 출가
올해 65세인 영만 스님은 사미승에게 주요진 하루일과가 벅찰 수도 있다. 그러나 영만 스님은 “절에서의 일 하나하나가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이라며 “모든 것을 공부로 여기면 어렵다거나 힘들다는 생각도 사라진다”고 말했다.

부처님이 열반을 앞둔 어느 날, 쿠시나가라 숲속에서는 작은 소란이 일었다. 한 늙은 바라문이 찾아와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한 것은 우담바라가 피는 것처럼 드문 일이니, 제발 잠시만이라도 뵙게 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아난은 “부처님을 번거롭게 하지 말라”며 만류했다.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부처님은 자비로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늙은 바라문은 정중히 예를 올리고 자신의 의심을 부처님께 물었다. 그의 질문을 받은 부처님은 팔정도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설했다. 이에 감복한 바라문은 “저도 여래의 법 가운데 출가해 구족계를 받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했다. 부처님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다른 가르침을 배우던 이들이 나의 법 가운데서 청정한 행을 닦고자 한다면 4개월 동안 기다려야 합니다. 대중이 당신의 마음가짐과 성향을 살필 수 있도록 시간을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기간 역시 당신의 마음가짐에 달린 것일 뿐 꼭 정해진 것은 아닙니다.”

바라문은 무릎을 꿇어 합장하며 “4개월이 아니라, 4년이라도 기다리겠습니다. 그런 다음 대중의 허락을 얻어 구족계를 받겠습니다”고 간청했다. 부처님은 곧 그의 출가를 허락했다. 부처님 생전 마지막 제자로 불리는 수밧다의 출가이야기다. 당시 수밧다 나이는 120세로 알려져 있다. 

여수 흥국사 사미승 영만 스님. 그는 수밧다 만큼은 아니더라도 부처님 법을 만나기까지 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올해 나이 65세. 이미 환갑을 넘어, 여느 스님 같으면 손상좌까지 뒀을 나이지만 영만 스님은 아직 예비승 신분이다. 스님은 ‘은퇴출가특별법’ 시행에 따른 첫 은퇴출가자다. 

조계종은 2017년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하다 은퇴한 일반인들에게 출가를 통해 수행과 보살행의 기회를 주겠다며 은퇴출가제도를 도입했다. 출가제한연령(만 50세)을 넘긴 ‘늦깎이’ 발심자들에게도 출가의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취지다. 영만 스님은 이 법에 따라 지난 2017년 11월 여수 흥국사에서 주지 명선 스님을 은사로 삭발하고 1년여의 행자기간을 거쳐 지난 3월 직지사에서 사미계를 받았다. 

흥국사 원통전에서 사시예불을 올리는 것은 영만 스님의 주요소임 가운데 하나다.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도량석을 하고 새벽예불과 사시예불, 종무소 행정업무 지원에 사찰의 크고 작은 운력까지, 스님의 할 일은 적지 않다. 젊은 사미승들조차 감당하기 벅찬 하루일과지만 스님은 마다하지 않는다.

“절에서의 일 하나하나가 저를 되돌아보는 시간이죠. 어렵고 힘들기도 하지만 그런 것들이 저의 경계를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봅니다. 모든 것을 공부로 여기면 어렵다거나 힘들다는 생각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영만 스님은 출가수행자가 되기까지 먼 길을 돌아왔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성장한 탓에 어려서부터 성당에 다녔고, 그곳에서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가톨릭을 자신의 종교로 받아들였다. 고등학교에 입학에서는 가톨릭 사제가 되겠다는 뜻도 품었다. 사제가 되는 것은 가톨릭 신자로서 최선의 길이라 여겼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신앙에 대한 회의감이 몰려들었다.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하는 분위기에서 이성적 판단은 쉽지 않았다.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거니 했지만, 기독교 교리에 대한 의문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이 의문을 물어볼 수 없었다. 그럴수록 가톨릭 사제가 되겠다는 생각은 점점 옅어졌다. 결국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서 축산학 전공을 선택했다. 그 무렵 축산업은 유망한 직종이었다. 시골집에 있던 토지를 활용해 축산업을 하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할 무렵, 시골마을에 군부대가 들어왔다. 축산업을 하려고 계획했던 토지도 군부대 사격장으로 수용됐다. 축산업을 하겠다는 꿈은 접어야 했다. 

직장생활을 시작했지만 좀처럼 적성에 맞지 않았다. 반복된 일상, 창의적인 사고보다 누군가의 지시에 따르는 획일적인 업무는 늘 그를 괴롭혔다. 직장생활에 대한 회의감이 밀려올 때면 그는 붓글씨를 쓰면서 마음을 달랬다. 어려서 서당에서 배운 붓글씨는 그의 유일한 취미였다. 

그러던 어느 날 장인이 그의 재능을 알아봤다. 그의 장인 운암 조용민 선생은 한국 서예계를 대표하는 행·초서체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운암 선생은 그에게 서예가로 전업할 것을 권했다. 운암 선생에게 지도를 받은 그의 실력은 나날이 늘었다. 대한민국 서예대전을 비롯해 전라남도 미술대전 등에 출품해 입선하기도 했다. 운암 선생이 운영하는 서예학원에서 강사로도 활동했다. 그러길 십수 년, 그는 전문서예가로서 명성도 얻었다. 

1996년 봄, 전남 담양에 있던 ‘독수정’을 찾았다. 대한민국 서예대전에 출품할 작품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출품을 준비하던 후배가 심심할 때 읽어보라며 책 한권을 건넸다. 그날 후배가 건네준 ‘무’(김정빈 저, 글수레)라는 책 한권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한마음선원 대행 스님의 법문을 엮은 이 책은 불교의 사상과 교리를 알기 쉽게 풀어쓴 책이다. 

심심풀이로 시작한 책 읽기는 밤이 새도록 이어졌다. “모든 것은 고정된 실체가 없으니 헛된 상에 끌리지 말고 자신을 보라.”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으니 그 자리를 믿고 당당히 살아라.” 맹목적 믿음을 강요하지 않았고, 스스로 삶의 주인공이 되라는 것은 그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불교란 무엇일까, 기복적 종교로만 여겼던 불교가 새롭게 다가왔다. 책의 잔상은 한 동안 이어졌다. 불교를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사회에서 복지시설 등을 운영한 경험이 있는 영만 스님은 틈틈이 종무소 행정업무를 지원하고 있다. 

그의 발걸음은 한마음선원 광주지원으로 향했다. 법당에 들어선 첫날, 은은한 향 내음이 코끝을 맴돌았다. 편안함이 밀려왔다. 예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낯선 경험이었다. 매주 법회에 나가고, 절 행사가 있을 때면 먼저 나섰다. 거사회 도반들의 모임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불교 관련 서적을 읽고, 법문을 들으면서 불교를 이해하는 폭도 차츰 넓어졌다. 도반들과 나누는 법담(法談)은 시간이 가도 지루하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불교에 젖어 들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그는 서예학원을 그만뒀다. 당시 서예계는 개인 실력보다 스승이 누구냐가 작가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비쳐졌다. 장인 덕에 특별히 불이익을 받은 것은 없지만 서예계에 만연된 그런 분위기가 싫었다. 서예로 일가를 이룰 것이 아니라면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는 원력을 세운 것도 이즈음이다. 

광주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복지사업에 뛰어들었다. 지금도 넉넉한 편은 아니지만 그 당시 사회복지시설은 열악했다. 특히 시각장애인을 위한 시설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시각장애인 10여명을 모아 밥을 해주고 직업교육을 지원했다. 직업을 찾아 생계를 이어가는 장애인들을 볼 때면 보람도 느꼈다. 복지시설을 운영하는 동안에도 불교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2013년 어느 날, 그는 한마음선원 광주지원에 법문하러 온 광양 백운사 주지 정륜 스님과 인연을 맺었다. 그날 정륜 스님의 첫인상은 여느 스님과 달랐다. 누구보다 맑고 편안해 보였다. 정륜 스님은 무문관에서 3년간 용맹정진을 했으며 오랜 기간 선원에서 정진한 분이었다. 스님의 법문을 듣고, 만남이 잦아질수록 출가수행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깊어졌다. 일상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고 수행할 수도 있지만, 현실에서의 한계도 분명 있었다. 가족을 부양하고 돈벌이를 해야 하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수행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 그는 환갑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출가할 수 있는 나이가 훌쩍 넘어 있었다. 출가를 할 수 없다면 수행자의 삶이라도 살고 싶었다. 

2015년 가을 무렵, 정륜 스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백운사 산내에 상백운암이 비어있는데 수행하면서 관리를 해줄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비록 삭발염의 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는 출가자처럼 살고 싶었다. 가족들에게도 자신이 가고자하는 길을 말했다. 가족들은 그의 선택을 존중했다. 그길로 상백운암에 올라 절 사무를 보며 틈틈이 수행에 전념했다. 그로부터 2년. 조계종은 ‘은퇴출가제도’를 도입했다. 그토록 원했던 출가수행자의 길에 들어설 수 있게 됐다. 

2017년 11월 삭발염의를 하고 은사 명선 스님으로부터 ‘영만’이라는 법명을 받던 날, 그는 발원했다. “부처님 법 만나기 위해 돌고 돌아 이제야 이 길에 들어섰습니다.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막다른 길에서 만난 부처님 좇아 생사윤회에서 벗어나 깨달음 얻고, 고통받는 중생들에게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는 바른 수행자가 되겠습니다.”

영만 스님은 자신이 발원한 그 길을 향해 다시 바쁜 걸음을 시작했다. 

여수=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