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명법문 명강의

경에서 보지 못한 것을 덕숭산 정혜사에서 보았다/성철스님

淸潭 2018. 12. 24. 09:54

경에서 보지 못한 것을 덕숭산 정혜사에서 보았다/성철큰스님 평전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 정혜사 능인선원. 성철 스님은 이곳에서 평생의 도반 청담 스님을 만났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만공은 처음 온양 봉곡사에서 깨달음을 얻었고, 두 번째는 양산 영축산 통도사 백운암에서, 다시 자신이 중창한 덕숭산 정혜사에서 견성했다고 한다. 성철은 몇 번에 걸친 깨달음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성철은 송광사에서 하안거를 마치고 예산 덕숭산의 정혜사로 옮겨갔다. 그곳에는 능인선원이 있었고, 당대 선지식인 만공 스님(1871~1946)이 주석하고 있었다. 성철은 효봉에 이어 만공을 찾아 나선 것이다.

덕숭산은 고찰 수덕사가 있어 수덕산이라고도 불린다. 가야산, 오대산, 용봉산과 마주보고 있다. 덕숭산, 가야산, 용봉산 일대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절터가 남아 있다. 언제 어떻게 쇠락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절을 짓고 부처를 모신 백제인에게는 불국토였을 것이다. 정혜사는 559년(백제 법왕1) 수덕사와 함께 지명 스님이 창건했다. 중창 및 중수의 사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만공이 1930년 중수한 이후 비로소 참선 도량으로 사격이 높아졌다. 만공 문하에는 항상 100여 명의 스님이 있었다고 하니, 그 중 상당수가 이곳에서 참선수행을 했을 것이다.

만공은 경허 스님과 천장암에서 법연을 맺고 14세에 출가했다. 화두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를 붙들었지만 앞이 깜깜하고 공부에 진척이 없자 천장암을 나와 제방에서 수행정진했다. 오도 후에는 경허로부터 전법게를 받았고 수월, 혜월과 함께 ‘경허의 세 달[月]’이라 불렸다. 숱한 중창불사를 통해 덕숭산을 불교 성지로 다시 일으켜 세웠다. 스승 경허처럼 여러 무애행이 전해오지만 일제와 친일승을 향해 천둥처럼 내려친 사자후는 지금도 불교사에 그 자국이 선명하다.

1937년 3월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 조선불교31본산주지회의가 열렸다. 8도 도지사도 참석했고 미나미 총독이 직접 주재했다. 회의는 조선불교진흥책 마련을 내세웠지만 실은 주지들의 협조를 얻어 조선과 일본불교의 병합을 획책하려 했다. 미나미 총독이 초대 총독 데라우치의 사찰령 선포를 찬양하며 주지들의 호응을 유도했다.

사찰령이란 1910년 일제가 조선 불교계를 장악하려는 의도로 입안되었다. 사찰을 병합·이전·폐지하려면 총독부의 허가를 받도록 했고, 또한 시행규칙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30본사체제(후에 화엄사가 추가되어 31본사)로 개편했다. 본사 주지는 총독의 허가를, 말사 주지는 지방장관의 인가를 받아야 했다. 이로써 불교계의 재산권과 인사권을 총독부가 장악했다. 사찰령은 불교계를 얽어매는 올무였고, 사찰령 하의 불교계는 말라가고 있었다. 그럼으로 사찰령 폐지는 비구승들의 염원이었고, 청년불교단체를 중심으로 폐지운동이 끊임없이 전개되었다.

미나미 총독이 속 보이는 은근한 인사말로 분위기를 띄웠다. 그러자 주지 몇이서 조선불교의 현실에서는 사찰령 선포가 마땅했다며 맞장구를 쳤다. 참석자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 마곡사 주지 만공이 벌떡 일어나 총독과 주지들을 노려보며 외쳤다.

“청정이 본연하거늘 어찌하여 산하대지가 나왔는가.”

모두가 놀라 만공을 바라봤다.

“이 자리에 데라우치 초대총독이 한 짓을 칭찬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다들 제정신 차리고 내 말을 잘 들어야 할 것이오. 부처님이 이르시기를 청정 비구 하나를 파계시켜도 무간지옥에 떨어진다고 하셨거늘, 조선승려 7000명을 파계시킨 데라우치 전임 총독이 과연 지금 어디 있는지 아시오? 무간아비지옥에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고 있소이다. 어찌 그걸 모르시는가?”

미나미 총독를 비롯한 참석자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누구는 그만하라고 고함을 질렀다. 만공의 호통은 멈추지 않았다.

“조선 청정비구교단을 어찌 취처육식을 일삼는 일본불교와 병합하려 하는가. 진정 조선불교를 진흥시키려면 조선총독부가 간섭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일제의 야욕과 그 앞에 허무하게 무너진 조선불교를 향해 내려친 장군죽비였다. 또한 총독에게 주지직 허가를 받은 자신의 비루함을 깨무는 ‘할’이었다. 가슴을 돌아 나온 비명 같은 것이었다. 만공의 대성일갈은 멀리 퍼져나갔다. 도반 한용운이 숙소로 찾아와 “천하의 만공”이라며 손을 잡았지만 어찌 보면 그것은 불교사의 슬픈 삽화였다. 불교계 현실을 개탄하고 있던 비구들에게는 한줄기 소나기였지만, 한 번의 소나기로 변할 것은 없었다.

주지회의에서 ‘데라우치를 지옥으로 보낸’ 얼마 후 만공은 마곡사 주지 자리를 내놓고 정혜사에 머물고 있었다. 그리고 1941년 가을, 특별한 선승을 맞았다. 바로 30세 성철이다. 71세 노승 만공은 청담, 용운과 선원에 앉아 있었다.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용운이 문구멍으로 내다봤다.

“괴각쟁이다, 괴각쟁이가 온다.”

청담은 그가 누군지 궁금했다. 이윽고 성철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청담은 문득 성철이 커 보였다. 그가 왜 괴각쟁이인지 알고 싶었다. 만공에게 인사를 드리는 성철의 몸가짐이 듬직했다. 그렇게 처음 만났다. 그날 밤 많은 얘기를 나눴다, 주로 청담이 묻고 성철이 답했다. 아침이 되자 서로에게 도반이 되어 있었다. 두 선승의 인연은 이후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다. 시퍼런 결기로 한국불교에 아침을 불러왔다.

청담은 성철보다 10살이나 많았다. 그러나 불문에 무슨 나이가 필요할 것인가. 괴팍하고 별난 괴각쟁이끼리 뜻이 맞았다. 첫 만남에서 서로의 의기를 섞었다. 치열하게 정진했기에 서로의 경지를 알 수 있었다. 훗날 서로 말을 트는 사이가 불만인 청담의 제자들이 볼멘소리를 했다. 그러면 청담이 제자들을 책했다.

“성철 스님은 한국불교의 보물이다. 이를 내가 아니면 누가 알아보겠느냐. 내가 나이는 열 살이 많지만 불교에 대해서는 성철 스님이 나보다 열 배나 더 잘 안다.”

간혹 청담이 성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는 전생에 부부였던 모양이다.”

성철도 화답했다.

“우리 사이는 물을 부어도 새지 않는다.”

성철은 정혜사 능인선원에서 동안거를 했다. 그 해 겨울 성철은 거침없이, 또 끊임없이 물었다.

“큰스님께서는 견성성불했습니까?”
“견성했지. 여기 정혜사에서 확실히 했지.”

만공은 처음 온양 봉곡사에서 깨달음을 얻었고, 두 번째는 양산 영축산 통도사 백운암에서, 다시 자신이 중창한 덕숭산 정혜사에서 견성했다고 한다. 성철은 몇 번에 걸친 깨달음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견성의 기준이 무엇이란 말인가? 어떤 경계를 깨달음으로 여기는 것인가?’

성철은 그러나 그 경계를 묻지 않았다. 고불고조에 묻고 치열한 수행으로 스스로 답을 찾아온 성철은 만공의 벼락같은 법거량을 내심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내 그런 기대를 내려놓았다. 성불했으면 다름이 같음이었으니, 다시 홀로 가야했다.


그해 겨울 만공은 성철이 큰 그릇임을 알아보고 많은 얘기를 들려줬다. 성철이 물으면 만공은 무엇이든 친절하게 답했다. 성철은 만공에게 들었던 얘기를 ‘큰 그릇’에 담아두고 자주 법어에 인용했다. 그중에서도 성불하려면 가난해야 한다며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만공 스님이 처음 정혜사에 와서 살 때는 집도 없고, 먹을 것도 없었지. 움막도 얄궂게 해놓고 형편없었다 하더구먼. 신심 있는 대중들이 모여서 탁발해서 살았대. 봄이 되면 보리 동냥을 해서, 그 보리를 절구에 넣고 쿵쿵 찧어서 밥을 해먹었어. 그것도 모자라 시꺼먼 보리누룽지를 서로 먹으려고 했대. 그래도 그렇게 배고프게 살 때는 한 철 지나고 나면 ‘나도 깨달았다, 내 말 한마디 들어보라’며 깨달음을 토로하는 사람이 나왔단 말이야. 그런데 그 뒤에 신도가 생기고 절도 좋게 짓고, 양식도 꽁보리밥 신세를 면하고 좀 넉넉해지니까 공부 제대로 했다는 사람이 하나도 안 나오더라 이 말이야.”

만공은 ‘절 짓는 스님’이라고 할 정도로 불사에 매달렸다. 그러나 정작 그 좋은 집에 사는 승려들은 오히려 수행을 게을리 했다. 번들거리는 윤기와 배부름이 마군인 셈이었다. 훗날 성철은 무엇보다 ‘가난’을 먼저 배우라고 설파했으니 이는 만공이 먼저 체득한 것이었다. 

성철은 또 정혜사에서 상서로운 광경을 목격했다. 이듬해 정월, 스님이 대웅전에서 촛불을 밝히고 24시간 철야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조를 짜서 꼬박 사흘 동안 이어서 정진하는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성철은 훗날 제자와 신도들에게 ‘칠일칠야 정진’ ‘삼칠일(21일) 기도 정진’을 시켰는데 이는 정혜사에서 보고 새긴 것이었다. 성철은 정혜사에서 한 철을 나며 불경에서는 보지 못한 많은 것을 보았다.

만공의 스승 섬김은 성철도 부러웠던 모양이다. 어쩌면 우문(愚問)이었는데도 성철은 제자들에게 그때의 문답을 자주 애기했다고 한다.

“스님께서는 경허 스님을 얼마나 존경하셨습니까?”
“먼 길 가다가 식량이 떨어져 먹을 것이 없으면 내가 우리 스님에게 잡혀먹혀야 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