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북부지법 민사단독… 판결 이유 한 문장에 변호사 제출 서면 별지에 붙여
변협, 大法에 공식 항의… 대법원은 "큰 문제없다"
서울북부지법의 한 판사가 민사사건 판결을 하면서 충분한 설명도 없이 단 한 문장의 판결 이유를 쓰고 변호사가 제출한 서류를 베껴 별지(別紙)에 붙인 무성의한 판결문을 작성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판결문을 받은 변호사는 대한변협에 진정을 내고 변협은 대법원에 항의하며 실태 조사를 촉구한 것으로 29일 확인됐다.◆3줄 72자밖에 안 되는 판결 이유
채희준(46) 변호사는 작년 12월 21일 서울북부지법으로부터 자신이 맡은 민사소송 판결문을 송달받아 보고 깜짝 놀랐다. 전모(32)씨가 "조모씨에게 2900만원을 빌려줬는데 떼였다"며 낸 대여금 청구 소송에 대해 서울북부지법 민사단독 서기호 판사가 쓴 판결문이었다.
- ▲ 서울북부지법 민사단독 서기호 판사가 판결문에 단 3줄 72자로 쓴 판결이유(왼쪽 위). 왼쪽 아래 판결 본문 뒤에 붙인 별지는 변호사가 판사에게 제출한 준비서면(오른쪽)의 제목과 내용까지 똑같다.
법원은 통상 이런 판결문에서 먼저 돈거래가 있었는지, 돈의 성격이 무엇인지 따진 뒤 판단을 하는데 이 판결문은 판단 과정을 생략하고 '증거 부족'이라는 막연한 이유만 담았다. 민사소송법상 '판결이 정당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 정도로 당사자의 주장, 그 밖의 공격·방어 방법에 관한 판단을 판결문에 표시해야 한다'는 규정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변호사 서면 '따붙이기'한 판결문
채 변호사는 서 판사가 판결 본문 뒤에 붙인 별지 네 장을 본 순간 더 놀랐다고 했다. 별지는 작년 11월 채 변호사가 서 판사에게 제출한 준비 서면의 내용과 똑같았다. 채 변호사는 "판결문에 다시 쓰기 귀찮으니까 그냥 컴퓨터 파일째 복사해다가 붙여놓은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고 말했다.
채 변호사는 서 판사에게 "이렇게 무성의한 판결문을 쓰면 어떻게 하느냐"고 전화로 항의했고, 그제야 구체적인 판결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고 했다.
◆辯協 항의…大法 형식적 조사만
채 변호사는 지난 1월 대한변협에 진정을 냈다.
"판사들은 항상 '판사는 판결문으로 말한다'고 해왔는데 이런 식의 무책임하고 무성의한 판결문으로 피해보는 당사자들이 더 있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변협은 지난달 25일 법원행정처에 비슷한 사례가 더 있는지 실태 조사를 하고 재발 방지 조치를 촉구하는 공문을 보냈다.
대법원은 이 사건을 조사해 서울북부지법 법원장에게 통보하긴 했으나 '다른 사례'들에 대해서는 조사 계획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법원 관계자는 "서 판사가 심리 자체를 불성실하게 한 것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서 판사 "다른 판사들도 그런다"
서 판사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당사자 주장을 별지로 처리하는 것은 다른 판사들도 하는 일"이라며 "판결문 간이화(簡易化) 방침에 따라 시험 차원에서 해본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하지만 이 사건은 그럴 사건이 아니었던 것 같다. 무성의하게 재판한 것은 아니지만 앞으론 주의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