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에 내 것이란 생각 없고
그것이 없어진다고 해서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 사람
그를 진정한 수행자라 부른다
- 『법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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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호신 화백, 수화자문=조계사 원심회 김장경 회장 |
가을이 깊어지면서 들녘 가득히 오곡백과가 무르익어가고 있다. 산천 골골에서 곡식이 익어가고 과실은 색을 더욱 짙게 물들이는 아름다운 계절이다. 풍요의 계절 가을의 한 가운데서 씨앗을 성장시켜 열매를 맺게 한, 자연의 춘하추동에 감사하고 땀 흘려 노동한 들녘의 농부에 고개 숙여 노고를 위로한다. 나의 한 생명을 살리는 낱알의 곡식 속에 천지자연의 기운이 감돌고 있음을 느끼는 요즈음이다. 온 우주 자연 그리고 모든 생명에 고마워하지 않고는 하루를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닫는다.
부처님 당시 농사지은 곡식을 수확하자마자 다섯 가지 방법으로 수행자에게 공양을 올린 바라문이 있었다고 한다. 첫째는 벼가 익어 첫 번째로 거둔 것, 두 번째는 곡식을 수확하여 탈곡하자마자 첫 번째 것, 세 번째는 타작한 곡식을 창고에 넣을 때 첫 번째 것, 네 번째는 밥을 지어 주걱으로 풀 때 첫 번째 것, 다섯 번째는 그릇에 담은 밥을 수저로 풀 때 첫 번째 것으로 공양을 올리고서 그 다음에 비로소 자신이 먹었다고 한다.
이러한 자신과의 약속을 어기지 않고 지키면서 생활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에게 ‘다섯 가지 방법으로 수확한 첫 번째 것을 공양 올리는 사람’, 곧 빤짝가다야까바라문이라는 별명을 붙였다고 한다.
먹던 밥도 공양 받은 부처님
부처님께서는 빤짝가다야까바라문을 제도하시기 위하여 막 밥상을 받고 앉은 바라문에게 다가가서 공양을 청하셨다. 바라문은 막 먹기 시작한 자신의 밥그릇을 들고 나와서 미리 준비하지 못한 것을 사과드렸다. 항상 새것으로 공양을 올리는 것으로 수행을 삼는 바라문에게는 먹던 밥을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은 참으로 죄송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마음을 아시는 부처님께서는 여래는 첫 번째 것도 두 번째 것도 걸림 없이 다 공양을 받으신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는 『숫타니파타』 217번 게송과 관련 되어 있음을 주석서에 밝히고 있다. 게송의 내용을 살펴보면, “남이 주는 것으로 생활하고 새 음식이거나 먹던 음식이거나 또는 먹고 남은 찌꺼기를 받더라도 먹을 것을 준 사람을 칭찬하지도 않고 화를 내거나 욕하지도 않는 사람, 현자들은 그를 성인으로 안다.”라는 가르침이다.
바라문이 농사를 지어서 새것이 아니면 절대로 공양을 올리지 않겠다며 수행자를 공경하는 자세도 거룩하지만, 걸식(乞食)으로 살아가는 비구로서 어떠한 음식에도 탐착하거나 거부하는 마음 없이 무심으로 받아서 생명을 유지한다는 담담한 마음의 자세도 거룩하기 그지없는 모습이다.
부처님과 같은 최고의 성자가 먹다 올리는 반 그릇의 밥을 무심히 받아 드시는 모습을 통해 걸식으로 살아가는 비구의 참다운 수행의 모습을 보이고 계시는 것이다. 무엇에도 걸림이 없으신 부처님 모습에 감동한 빤짝가다야까바라문 부부에게 부처님께서는 다시 위의 게송을 설하셨다. 몸과 마음 물질과 정신 그 무엇에도 내 것이란 생각 없고, 그것이 없어진다고 해서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 사람 그를 진정한 수행자라 부른다는 가르침을 듣고서 바라문 부부는 그 자리에서 아나함과를 성취했다고 한다.
『법구경』과 『숫타니파타』 게송은 걸식에 의하여 무소유로 살아가는 비구의 삶과 마음 자세에 대한 원론과 같은 가르침이다. 나 자신의 몸과 마음도 내 것이 아닌데 무엇을 먹고 무슨 대접을 받던 성내고 기쁠 것이 무엇이 있을 것인가? 오온(五蘊)이 다 공(空)함을 깨닫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의 기초 중에 기초인 것이다. 『반야심경』의 첫머리에 ‘오온이 다 공함을 밝게 깨닫고서 비로소 일체의 고통과 액난을 벗어났다(照見五蘊皆空度一切苦厄)’고 하는 경문을 새삼 마음에 새겨 볼 일이다.
물질-정신 어디에도 내 것은 없어
오늘의 우리사회는 들판 가득히 곡식이 무르익어 가는데, 한 쪽에서는 농부가 누렇게 익은 벼이삭을 수확도 하지 않은 채 경운기로 갈아 엎어버리고 있다. 쌀 수매가격이 폭락하여 수확을 해보았자 손해만 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1년 내내 농사를 지은 농부의 노동도 허사가 되어서 가슴 아프기 그지없지만, 햇빛과 바람과 잠시 쉬어간 논 메뚜기에게 이르기까지 자연의 은혜에 대하여 오늘 우리는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지 죄스러운 마음 한량이 없다. 벼 이삭이 익어 감은 인간만의노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농부는 좀 더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는 없는 것이며, 자연을 모독하는 우리의 욕심을 좀 더 줄일 수는 없는 것일까를 허공을 향하여 반문해 본다.
농사지은 벼 이삭을 수확도 하지 않고 갈아엎어야 하는 각박하기 그지없는 오늘의 삶에서 2천 여 년 전 왕자의 몸으로 출가하여 최고의 성자가 되어서도 먹다 남은 밥 반 그릇을 공양 받고 담담하게 미소 짓는 부처님을 회상해 본다. 우리 모두는 가을 들녘처럼 넉넉한 마음으로 오직 제자들을 욕망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동분서주하셨던, 스승 부처님을 닮도록 노력할 일이다.
본각 스님(중앙승가대 교수)
1020호 [2009년 10월 27일 1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