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선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덕숭총림(德崇叢林)에서 선학연구원 무불선원(無佛禪院)을 도심에 개원하게 된 목적은 선의 실천(참선; 參禪)을 통한 직관적 깨달음(선의 체험; 禪)과 지성적 사유를 통한 선에 대한 이해와 지식(선의 연구; 禪學)을 병행하여 지도함으로써 다가오는 21세기의 인류가 나아갈 길을 밝게 제시하는 데 있습니다.
전통선원에서의 선사들의 지도법인 화두선(話頭禪)만으로는 현대인들에게 선을 생활화하도록 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따르므로 ‘직접 물을 마시고 차고 더운 것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방법(冷煖自知)’만을 내세우던 것을 수정하여 선을 학문적으로 연구하여 이룩된 지식을 선학자를 통하여 좀더 체계적으로 참선과 선학을 교육을 통해 수행해가는 것으로 방향을 정했습니다.
깨달음의 종교인 불교에서 그 실천방법으로 기초부터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信) 그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解)하고 올바르고 적극적인 실천(行)으로 부처님과 똑같은 깨달음의 경지를 증득(證)하도록 가르치려고 합니다.
불교의 수행단계를 나타내는 위의 가르침은 그 바탕이 다른 종교와 같은 믿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화엄경(華嚴經)에 “믿음(信)은 도의 근본이며 공덕의 어머니”라는 말씀과 『대지도론(大智度論)』에 “불법(佛法)인 진리의 세계는 믿는 마음이 철저해야 능히 그 속에 들어갈 수 있다.”라는 말씀을 명심해야겠습니다.
우리가 깨달음의 경지를 증득하기 위해서는 결국 우리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하는데 열반경(涅槃經)에 보면 부처님께서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佛性)이 있다.”라고 하신 말씀이나 법화경(法華經)에 이르신 “일체 중생에게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열어보이시고 깨닫고 각자가 부처님의 지혜를 증득하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출현하셨다.”는 말씀이나 화엄경(華嚴經)에 “불자여! 여래의 지혜, 무상(無上)의 지혜, 무애(無碍)의 지혜가 모두 중생들에게도 갖추어져 있지만 단지 어리석은 중생은 전도(顚倒)된 망상(妄想)으로 뒤덮여져 있어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있다. 그래서 신심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내재된 불성을 믿고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화엄경의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으며 똑 같다.”는 가르침을 토대로 ‘마음을 보아 부처를 이룬다(見性成佛)’라는 확고한 신념으로 참선에 몰입하여 깨달음을 향해가는 것입니다.
선이라는 것이 그 역사가 비록 고대 인도의 토착민들로부터 비롯된 명상법인 요가(yoga)에 그 근원을 두고 있기는 하나 불교에서의 선은 부처님의 수행을 통한 선정(禪定)에 따라 결과적으로 우주 만법이 본질 즉, 진리를 깨닫는 방법으로서 그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선불교란 부처님과 조사들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스스로 인간의 근원적인 본질을 깨닫고 우주의 진리를 깨달아 참된 자아로써 늘 깨어있는 삶을 영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도에서 시작된 단순한 명상법이나 번뇌를 소멸하여 고요함에서 머무른 차원이 아니라 불성을 깨달아 깨달은 자, 깨달은 보살(覺有情)로서 일상을 법답게 지어가는 것이 선불교의 이상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마조도일 스님(馬祖道一禪師)의 “평상심이 진실된 도이다(平常心是道)”라는 말씀을 대단히 좋아합니다. 선의 실천을 통해 이룬 깨달음을 일상생활로 전개시키는 선불교의 극치에서 나온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또 임제 스님(臨濟禪師)의 “어디에서나 주인이 되어 살라(隨處作主)”라는 말씀도 좋아합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주인이 되어서 살아가는 진실한 삶이야말로 무엇보다도 적극적인 선불교의 실천적 삶이며 주인이 되어서 살아가는 책임 있는 삶이야말로 자아의 주체를 주위의 환경, 경계, 관념, 권위, 위선, 가식에 잃어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가장 위대하고 장엄하고 아름다운 삶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을 통해 주인이 되어 늘 편안하게 살아가는 삶, 즉 안신입명(安身立命)의 삶이야말로 가장 진실한 선사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출가 후 40여 년이 넘게 선가(禪家)의 어른스님들을 모시면서 근래에는 수덕사 주지소임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선불교를 현대인들과 함께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바르게 발전시켜 나갈까 늘 생각해 왔는데 이제 무불선원을 개원하게 되어서 그 숙제를 한 부분 풀어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선원을 통해서 현대인들이 종교의 벽을 초월해서 누구나 다 참선을 해서 자신의 주체를 깨닫고 우주의 법칙을 확연히 알아서 참된 인생관으로 진실된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되기를 서원합니다.
사실 고금을 통해 인생에 대하여 자신에 대하여 사유하는 사람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하셨고, 중국의 노자(老子)께서는 “남을 아는 것은 지(知)이고,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명(明)이다.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이다.”라고 하셨고, 만공 스님께서는 “사람이 만물 가운데 가장 귀하다는 뜻은 나를 찾아 얻는 데 있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렇듯 자기 자신을 찾는 일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선가에서는 자신의 근본을 깨달아 생사문제를 해결한 사람을 대장부, 자유인, 본래인(本來人), 해탈인, 무위진인(無爲眞人), 요사범부(了事凡夫; 일을 마친 범부)라고 합니다.
요사범부라는 말이 나온 김에 방거사(龐居士)의 시 한 편을 떠올립니다. 당나라 때 과거 시험을 보러가다 선불장(選佛場)이라는 현판을 보고 마조 스님의 문하에 들어 깨달음을 얻은 방거사는,
“마음이 여여하니 경계 또한 여여하다.
실다움도 없으며 또한 헛된 것도 없어라.
있음에도 또한 관계치 않고
없음에도 또한 머무르지 않으니
이는 현인도 성인도 아니며 일을 마친 범부일 뿐일세.
心如境亦如
無實亦無虛
有亦不關
無亦不居
不是賢聖
了事凡夫”
스스로를 요사범부라 할 수 있었던 방거사야말로 근원적인 자신의 불성을 깨닫고 본래의 평상심으로 자신이 주인이 되어 일체의 관념이나 지식은 물론 주위의 환경과 조건을 초월해 선(禪)적인 삶을 유유자적하게 누린 도인인 것입니다.
일상에 있어서 지혜만이 온전한 행복의 세계로 들게 합니다. 자신과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지혜야말로 고통의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불완전을 완전으로 무상을 유상으로 순간을 영원으로 알고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끝으로 경허 스님께서 만공 스님에게 이르신 한 말씀을 전할까 합니다.
만공 스님께서 경허 스님을 모시고 산중에 들어서셨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퍼부어 스님을 모시고 바위 굴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 때 경허 스님께서 단단하고 큰 바위로 된 천장을 자꾸만 올려다보시며 유심히 살피셨습니다.
만공 스님께서 궁금하시어 “스님은 왜 자꾸 천장을 올려다보십니까?” 하고 여쭈시니 스님께서 “이 바위가 내려앉을까 염려가 되어서 그러네.” 하셨습니다. 만공 스님께서 “스님, 이 큰 바위가 내려앉을 리가 있겠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하시니 스님께서 넌지시 이르시기를, “이 사람 만공, 가장 안전한 곳이 가장 위험한 곳이라네.”라고 하셨습니다.
자, 그럼 이제 다 같이 살펴봅시다. 지금 앉아있는 이 자리가 위험한 자리인지 안전한 자리인지를… 답은 항상 질문 속에 있는 법입니다.
- 무불선원 개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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