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불교관련

한국의 근대불교 2

淸潭 2006. 11. 10. 17:21
 

한국불교근대사

고구려 소수림왕 2년에 들어온 불교는 많은 혼란과 번창을 반복하면서, 근세를 맞이하게 된 불교계는 1988년 5월 불교재산관리법이 폐지되고 그 대안으로 전통사찰관리법이 발효되면서 어느 정도 관권의 예속으로부터 자립의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 이해 12월 말에는 10/27법란에 대한 국무총리의 사과를 받아 내게 되는데 이는 사회의 민주화 바람과 불교계 내부의 응집된 대응의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조의 참혹한 배불정책과 일제치하에서의 사찰령이 이 땅의 불교를 말살하려는 시도였다면 1954년5월 "대처승은 사찰에서 물러나라"는 이승만의 유시로 점화된 소위 불교정화정책의 회오리는 다시 한번 관권이 불교계를 유린하도록 하는 빌미를 주게 되었고, 그 여파는 불교재산관리법이 폐지되는 1988년까지 이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는 불교계가 자립의 분수령을 이루는 불교재산관리법이 폐지되고 전통사찰관리법이 발효된 직후인 1989년부터 1997년 까지의 불교계 흐름을 논하기로 한다.

 근대 불교의 시기는
 

근대 불교의 시기는 편의 상 승려의 입성금지 해제(1895년)에서 8.15해방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여기에서 입성해제의 의미를 한 번 살펴보자. 입성해제는 1895년 일본의 승려 사노의 상서(上書)하에 이루어졌다. 조선 건국이래 500여년산 줄곧 핍박받으며 입성금지가 되었던 승려들에게는 이보다 더 고마운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노의 근본 목적은 파악하지 못하고 마냥 고마워하기만 할 뿐 민족종교로서의 불교의 책임과 역할을 인지하지 못하고 日人의 손에 의해 풀린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도 못했다. 이로부터 친일 불교는 시작되었는데, 그 계기는 이것뿐만 아니라 당시 한일합방 이후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의 공격에서 사찰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일본불교와 제휴하거나 일본종파에 귀속하기도 했고, 또 자신의 영달을 위해 일하는 경우도 있었다.
승려의 도성 출입 허가 이후 일본 승려와의 교류는 더욱 빈번해졌고, 그들과 제휴함으로써 자신의 신분도 높이고 사찰도 지킬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 불교종파에 자신들의 사찰을 예속시키는 것이 최선책이라 믿었다. 늦게나마 정부에서는 억불책을 지양하고 국가적인 관리체계를 계획하여, 1899년 서울 창신동에 원흥사( 도성 출입을 가능하게 해 준 日僧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이회광이 설립.)를 세워 한국 불교의 종무소로 삼았다. 하지만, 원흥사는 원종 종무원과 함께 친일을 상징하며 한일 불교합방의 요람이 되었다. 원흥사에 불교연구회가 설립되었고, 1908년에 전국 승려 대표자 52명이 여기에 모여 원종(圓宗) 종무원을 세워, 억불책 500여년만에 없어졌던 종명(宗名)을 다시 회복했다. 그러나 대종정(大宗正)으로 추대되었던 이회광(李晦光)이 일본 조동종과 손을 잡고 매불행위를 한 것에 대한 거센 반발로 광주 증심사를 중심으로 승려 대회를 열고 송광사에서 임제종을 세웠다. 하지만 1911년, 일본의 사찰령과 함께 이 두 종파마저 없어지게 된다.
교권에 관심이 있어서 일본불교 임제종에 한국불교를 귀속시키고자 한 이회광은 이렇게 말한다. "한국 불교는 다른 불교와 같이 사회에 대한 자선사업이 없어 이 세상에서 환영 못 받는다. 이런 식으로 가면 한국의 불교는 진흥하지 못할 것이니 한국 불교의 종명을 개종하고 사찰의 재산을 정리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서 한국 불교를 일본에 귀속시켜 그 대가로 교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한국 불교를 소생시킨다는 명분으로 내려진 사찰령은 승단의 좋은 옛 관습을 파괴했다. 특히 사찰의 주지 임명의 문제에 대해서 이다. 주지 임명 방법으로는 相承, 法類相續,招待 席의 3가지 였다. 불교가 시작되어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주지의 임무는 藷般 사무를 관장하는 것이어서 자신의 수행에 방해되기 때문에 사양하는 것이 통례였고, 설사 주지직을 맡은 후에도 수행하는 스님을 어떻게 하면 더 잘 수행하도록 보살필까 하는 데 직무의 중점을 두었다. 하지만 일본 사원의 지주 제도를 그대로 도입한 사찰령에 의해 주지 권한이 상당히 비대해졌다.
이로 인해 주지는 그 자리를 고수하여, 더 나아가 종권을 장악하기 위해 일본 불교에 동화하거나 귀속하는 일을 획책했던 것이다. 사찰의 공의제도(公議制度)가 없어지고 주지의 전횡시대(專橫時代)가 되자 일반 승려와 주지와의 거리는 멀어졌고, 민중과는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주지의 관심은 오직 총무부 -본산주지의 임무권자가 총무였다.-에 쏠려, 사찰 재산의 처리에 공정치 못했던 일이 허다했다.
어쨌든 사찰령으로 인한 지주 권한 비대에 대한 비판으로 젊은 승려 백여명이 각황사에 모여 조선불교 청년회를 창립하고 8개의 개혁안을 건의했다.
그리고 조선 불교유신회가 사찰령의 철폐를 주장하고 나서기도 했으나 이 모두 무산되었다. 그리고 일본의 사찰령에 의해 불교 교단은 조선 불교 선.교 양종이라는 이름으로 일제 총독의 지배하에 30본사로 나뉘어졌다. 이에 30본사 주지들이 임명되고, 주지들의 화합하에 각황사에 연합사무소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본사 주지 권한과 세력의 확대로 좀 더 강력한 중앙 통치의 재구성을 요구하게 되었다. 政.敎분리의 혁신을 주장한 승려들이 각황사에서 중앙 교무원을 설치했다. 이로써 중앙통제기구로서의 모습은 갖출 수 있었다.
그러다가 선명한 종명(宗名),종지(宗旨),종헌(宗憲)등의 제정의 필요성을 느껴 1941년 태고사(현, 조계종)를 세워 31本山의 총 本山으로 삼고, 좀 더 강력한 유기적인 중앙 통제적 역할을 하는 조계종이 탄생하게 된 것이었다. 이는 해방과 더불어 대한 불교 조계종으로 재정비하려 새로운 출발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승만의 정화유시

정치적 혼란과 6.25의 민족사적 비극은 불교계의 민족적 역할 모색의 미진한 기운마저도 끊어버리기에 충분했던 것일까? 역사적 격변기에 불교계는 붓다 가르침의 전파와 그 실천이라는 대의를 역사공간에 실현해 내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일제가 심어 놓고 간 상처의 씨앗은 너무나 질긴 생명력을 지녔었다. 일제가 한국불교에 뿌려놓은 씨앗은 ,대처승의 급속한 증가와 그로 인한 청정비구 승풍의 무너짐이라는 상처로 남았다. 상처의 생체기는 쉬이 아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54년 당시 한국불교의 승려 분포를 보면 대처승이 7000명이었는데 반해 비구승은 200여명에 불과했던 것이다.
따라서 비구측의, 일제 잔재의 청산과 민족정기 고양은 대처승의 추방으로 귀결되어지는 듯한 기운이 감돌고 있을 무렵, 1954년 5월 21일 이승만 정권은 불현듯 정화유시를 내린다. 이것이 1차 정화유시였으며 그 내용은 '처자를 거느린 사람은 승려가 아니므로 사찰에서 물러가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대처승 추방유시나 다름없었다. 불교에 각별한 애정도 갖지 않고 있었던 독실한 크리스챤 대통령이 왜 하필 이런 미묘한 문제에 대한 발언을 서슴없이 하였을까? 대통령은 크리스챤이었기에 당연히 불교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돌출한 사건이라고 여기면 될까? 아니면 의도된 정치적 계산이었던 것일까? 이에 대한 결론은 앞으로의 서술 속에서 명백해 지리라 본다. 계속해서 그 때의 정황을 살펴보자. 이후, 이승만은 3차례에 걸쳐 정화유시를 내리게 되고 불교계는 비구-대처의 확연한 대치선이 그어지게 된다. 이승만의 1차 유시이후, 대처승에 대한 비구승의 요구가 '수행사찰 분배요구'에서 '종권인계'로 비약했던 것이다.1차 혁신운동의 좌절 이후 뚜렷한 진전이 없던 정화의 의지는 이승만의 정화유시를 도화선으로 하여 비구-대처의 종권다툼으로 변질하였던 것이다

비구-대처의 종권분규

불교 내의 비민족적, 비불교적인 일제의 모순들을 척결하고 불교의 순수성을 되찾고자 한 정화운동은 당연한 시대적 요청이자 한국불교의 과제였다. 그러나 순수한 동기와 의지를 지녔던 정화운동은 앞에서 잠깐 언급하였거니와 6.25와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운동'으로서 지속적으로 전개되지 못했던 처지에 놓여 있었다. 바로 이때 단행되었던 것이 이승만의 1차 정화유시였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땅의 불교세력들은 이승만의 유시를 정화운동의 계기점으로 포착하게 되었다. 앞으로의 서술을 통하여 밝혀질 것이지만 이것은 역사의 잘 못 끼워진 단추가 되어 버렸다. 첫번째 단추를 잘 못 끼워 버리면 우리는 끝까지 잘 못 끼워버리는 파국을 맞이할 수 밖에 없다. 이승만의 정화유시및 정권개입이라는 계기점에서 출발한 정화운동은 한국현대불교사를 왜곡되고 뒤틀리게 만든, 그래서 잘 못 끼워진 단추의 구실을 하여 버린 것이다.

 

이승만의 유시가 있은 1개월 후인 1954년 6월 24일, 대처승들에게 눌려 지내던 열세의 비구승들이 서울 선학원(禪學院)에 모여 대처승 추방결의를 하였다. 이로써 불교정화운동은 '불교정화'라는 순수동기가 대의명분으로 전락해 버리고 실제에 있어서는 비구-대처 싸움의 양상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비구측의 대처승 추방결의를 종권도전으로 인식한 대처승 중심의 기성교단은 1954년 7월, 1945년에 제정되었던 '조선불교 교헌'을 '불교 조계종 종헌'으로 바꾸고 종단 대표직명을 다시 교정(敎正)에서 종정(宗正)으로 환원시켜 만암스님을 종정에 추대하였다. 계속해서 비구측에서는 두차례에 걸친 전국비구승대회(1954.8.24 와 9.27)를 열고 대처승측에 자진 환속과 종권 이양을 요구했으며 그 해 10월 9일에는 조선불교의 총본산인 태고사(太古寺)를 강제 접수하고 사찰간판을 조계사(曹溪寺)로 바꾸어 걸었다. 대처측은 11월 23일 조계사 탈환을 시도하였으며 조계사 접수를 둘러 싼 공방은 1년동안 계속되었다. 그 해 비구측은 4차례에 걸쳐 경무대를 방문하여 대처승 추방 협조를 거듭 호소하였다. 불교정화가 비구-대처의 종권다툼으로 변질, 왜곡되면서 종권쟁탈을 위해 정권에 의존하는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했던 것이다.
1955년 8월 11일 비구측은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하여 '조선불교 교헌'을 제정하고 비구 독자적인 종단 집행부를 구성하였다. 이로써 조선불교는 두개의 총무원으로 갈라졌으며, 비구-대처의 대립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종단이 비구, 대처로 두 조각이 나자 대처측은 조계사 승려대회(1955.8.11)를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서울 민사지법에 '사찰정화대책위원회 결의 무효 확인 소송'을 제기(1955.8.15),법적투쟁을 시작했다. 이 소송제기는 계속해서 맞소송을 불러 일으키며 불교내 문제를 법정으로 번져 놓게 했으며 이는 앞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정권과의 공생관계를 노리는 종권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10 여개월만에 내려진 법원의 판결은 대처승측의 승소판결로 끝났고(1956.6.15) 서울 고법항소에서도 공소기각이 되어 대처승의 승소였다.(1957.6.15) 서울 민사 지방법원에서 패소한 비구측은 패소의 원인을 집행부의 능력부족이라 판단내리고 청담 총무원장을 인책 퇴진시켰다.(1956.10.27) 그 후 비구 내분으로 인해 총무원장은 단명하였으며 끊임없는 종권불안의 나날들을 보내야만 했다.
1960년에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물러나자 정부의 비호를 받은 비구측에 밀려 대부분의 사찰에서 물러가고 대처측은 조계사 탈환을 시도했으나(1960.4.27) 실패로 돌아갔으며 5월 3일 석가탄신일 기념행사 후 다시 '비구승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에 비구측은 '불법에 대처승 없다' (1960.11.19)는 구호를 내걸고 가두시위를 했다. 시위의 공방이 계속되던 중 이청담스님을 위원장으로 하는 '불교정화 대책위'를 구성하고 승려대회를 열었다. 승려대회에서는 대법원에 계류중인 '사찰정화대책위원회 결의 무효 확인 소송'을 오판할 경우 순교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어 11월 24일 대법원이 서울고법에서 내린 대처측 패소판결을 파기하고 환송판결을 내리자 비구, 비구니 500여명이 대법원에 난입, 집단시위를 벌였으며 6명이 할복을 기도하였다. 검찰을 대법원 난입과 관련하여 비구승 24명을 구속, 기소하였다.(1960.12.21)
1960년 한 해가 저물고 대법원 난동을 몰고 왔던 상기(上記)의 소송은 1961년 3월 대법원이 비구승단을 법적으로 인정함으로써 비구측의 승소로 결론 지어졌다. 그러나 전국 사찰 쟁탈전은 오히려 더욱 가속화되어 아침마다 주지가 바뀌는 사태가 속출하고 이런 사태들은 곧장 법정투쟁으로 이어졌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종헌 쟁탈전이 지루하게도 이어질 무렵, 5.16군사 쿠테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1,2차 불교정화에 대한 담화를 발표하고(1961.11.9 , 12.9) 문교부는 '불교재건위원회 조례안'을 양측에 제시하나 거부되었다. 이에 박정희는 최고회의 의장 명의의 담화를 발표하였는 바 그것은
"불교계의 분규를 조속히 종속하고 대동단결하여 불교자체의 융성과 민족문화의 향상에 힘쓰라. 정부는 불교재건위원회를 만들어 국민의 여론에 따라 이를 시정하려고 했으나 거두지 못하였음은 유감된 일 분쟁관계자들은 대국적인 견지에서 해결을 모색하라.
이와 같은 분쟁사태가 계속된다면 단연코 묵과하지 않겠다." 는 요지를 담고 있었다.(1962.1.13)
박정희의 담화가 있은 며칠 후 비구-대처 양측 대표들은 문교부에서 주선한 '불교재건위'구성에 극적으로 합의했다(1962.1.18) 1월 22일 양측 대표들은 중앙공보관에서 문교부장관 참석하에 재건위 결성식을 가지고 1월 31일 제 4차 회의에서 통합종단을 구성키 위한 '불교재건 비상 종회 회칙'을 확정하고 종회의원을 선임한 후 발전적으로 해체했다.
불교재건 비상종회는 새 종단(비구. 대처 통합종단)의 명칭을'대한불교 조계종'으로 하고 교조는 태고 보우국사로 하는 등 종명, 종지 등에 완전히 합의하고 2월 28일 종헌을 제정했다. 비상종회에서 승려 자격문제에 '대처승 기득권 문제는 문교부의 해석에 따른다'는 단서에 대해 대처측이 반발했으나 표결결과 가(可)-15 , 부(否)-14 , 무효-1 로 패배했다. 비구측은 3월 6일 대처측의 반발을 묵살하고 재 종헌을 제정, 21일 공포하였다. 5.16쿠테타 후 비구. 대처 분규수습을 위해 구성된 불교재건 비상종회는 제 8차 회의에서 출가독신 수행자만을 승려로 인정할 것을 의결하고 제 9차 회의에서는 종정에 이효봉스님을, 총무원장에 임석진 스님을 추대하는 등 새 종단 구성에 착수하였으며 4월 11일에는 조계사에서 취임식을 거행하였다. 이로써 비구. 대처 통합종단인 조계종의 출범이 선포되었다. 이어 4월 14일 문교부에 정식 등록함으로써 비구중심의 조계종이 한국불교를 대표하게 되었다.
이로써 비구-대처의 지루했던 종권분규는 일단락 되었다. 한때 대처측이 비구측과 다시 투쟁할 것을 선언하면서 서울 민사지법에 '조계종 종헌 무효확인 및 종정추대 무효확인 소송'을 제기함으로써(1962.10.4) 새로운 분규를 예고하는 듯 하였으나 정부당국에 의한 대처측 반발 강력 억제 입장으로 사그라 들었다. 이 후 대처측은 대처측 제30회 중앙종회(1968.11.18)에서 통합종단 백지화를 선언하고 대처측 제9차 전국 대의원회의 (1970.4.16)에서 '한국불교 태고종'으로 독자노선을 선언함으로써 비구-대처는 각각의 종단을 가지게 되었다.

정화운동의 실패

이승만의 유시를 계기로 50년대 이후 진행된 정화운동의 양상은 (불교혁신운동 당시의 진보적 정신은 흐려져 버리고) 비구-대처의 종권분규로 왜곡되어 나타났으며 그 전개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특징을 가진다.
① 정부수뇌(이승만과 박정희)의 유시와 담화로 시작되어 문교부가 개입하여 적극 중재를 시도 ② 양측대표가 일단 화합해서 통합문제를 의논하다가 '승려'의 자격문제와 이에 따른 이해 관계로 대립
③ 결국 문화부는 대처측의 완전 동의 없는 비구측의 통합종단 구성을 인정
④ 대처승은 다시 이탈해서 법정에서 통합종단의 불법성(不法性)을 호소
⑤ 1차에서 대처승 승소, 2차에서 비구승 승소 등 법정판결의 번복을 계속
⑥ 그 방법에 있어 단식, 데모, 할복, 법원난입, 유혈난투 등의 수단을 동원
⑦ 문교당국은 물론 법원마저도 불교정화문제를 정치적으로 다루려 한다는 등등이 그것이다.
살펴보았던 것처럼 불교정화운동은 민족사적 관점에서 일제잔재의 청산과 불교의 순수성을 회복하려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였으나 이승만의 정화유시로 왜곡, 변질되어 전개되고 내부의 자율적, 자주적 정화운동은 말살되어 버렸다.

그 폐단을 살펴보면,
① 한국불교계에 제도적 규제와 계속적인 분쟁을 야기시켰으며
② 분쟁해결을 관권과의 결탁을 통해 해결하려는 악습을 조장하였고
③ 이로 인해 한국불교를 소수권력의 시녀로 전락시켜 버렸다. 또한 분규과정에서 사찰재산의 유실과 임의적 처분,인적.물적 손실을 초래함으로 인해
④ 불교발전의 족쇄를 채우게 하는 '불교재산관리법'(현재,'전통사찰보존법'으로 명칭만 변경되어 있을 뿐이다.)이라는 악법을 제정케 하는 구실을 제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국불교가 현대사를 관통하는 동안 내내 모순과 질곡으로 몰아 넣는 원인
⑤ 종단과 승려의 자질 저하
⑥ 종단의 분열과 종파의 분열 등의 폐해를 안겨다 주었다.

안타깝게도 비구-대처분규는 비구 종단내의 분규로 이어진다

통합종단 조계종내의 분규

50년대 정화운동에서부터 잘 못 끼워진 단추는 통합종단이 들어 선 이후에도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면서 한국불교의 걸림돌로 작용했다. 비구-대처 분쟁을 통해 비구 중심의 조계종이 한국불교의 최대종단으로 자리잡은 이후에는 조계종 내의 종권분규가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조계종 분규의 전체적 양상은 종단을 대표하는 종정과 종단의 행정을 책임지는 총무원장과의 대립으로 일관된다. 명목상 종권을 대표하는 종정과 실질적으로 종단을 대표하는 총무원장간의 반목은 종단 주도권 장악을 위한 각 사찰별 문중,법맥의 대립이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까지 계속된 분규는 청담스님계와 경산스님계의 대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70년대부터 80년대까지의 분규는 조계사측과 개운사측의 대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60년대 말 - 70년대 초까지의 조계종 내분

통합종단 조계종은 종정에 효봉스님을 추대하고 총무원장에 임석진 스님(대처측)을 선출함으로써 그 출범을 알렸다.(1962.4.11)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서 대처측 임석진 총무원장 이하 집행부는 취임 5개월만에 조계종 초대 중앙종회 의원의 구성비율(비구 32 : 대처 8)에 이의를 제기하고 전원 사임했다.(1962.9.10) 이로써 통합종단의 초대 총무원장은 그 해 12월 30일자로 퇴진하게 되고 비구측은 바로 당일 대처측의 김법룡스님을 총무원장으로 선출하고 새 집행부를 구성하는 신속성을 발휘했다. 김법룡 충무원장은 계속되는 비구-대처의 알력 속에서도 3년 3개월이라는 조계종 사상 최장수의 재임기간을 채우고 66년 4월 물러갔으며 김법룡스님의 후임으로 비구측의 손경산스님을 총무원장으로 선출하였다.(1966.4.12) 이로써 그 동안 - 외형적으로나마 - 균형을 이루어 오던 비구-대처의 균형은 무너지고 조계종의 실권은 완전히 비구측으로 넘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새로이 조계종의 총무원장으로 선출된 손경산 스님은 통합종단 조계종에 가담한 대처측 화동파(和同派)에 대한 처리에 있어서 온건론을 유지하였다. 이에 반해 초대 종정인 이청담스님은 곪은 손가락은 절단해 버려야 한다는 강경론을 펼치고 있었다. 이들은 잦은 의견대립을 보이면서 청담-경산 이라는 새로운 대립구도를 서서히 표면화시키기 사작하였다. 조계종 14회 중앙종회(1966.11.30)는 통합종단의 제2대 종정으로 이청담스님을 재추대하게 되고 종정-총무원장의 잦은 의견대립은 문중,파벌의식이 개입됨으로써 종권다툼의 양상으로 번질 기운을 안으로 삭이고 있었다. 급기야 1967년 7월 해인사에서 열린 제16회 임시종회에서는 이 문제가 표면화 되었다. 여기서 당시 총무원장 손경산 스님이 동국대학교 재단을 운영함에 있어서 종단이 4천여만원의 빚을 지게 된데 대한 규탄이 있었고 청담스님은 경산스님의 사퇴만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경산스님이 이에 불응하자 청담스님은 사표를 던졌으며 이에 경산스님도 어쩔 수 없이 사표를 제출했다. 해인사 종회를 계기로 청담,경산 두 거두가 종권의 정당에서 물러가자 조계종은 제3대 종정에 윤고암스님을, 총무원장에 박기종스님을 선출하였다.(1967.8.9)
1969년 8월 12일 한동안 조계종권에 멀어져 있던 청담스님이 "불교정화 이념과 제반 불사가 부진함을 참회하여 대한불교 조계종을 탈퇴한다." 고 하여 조계종 탈퇴선언을 함으로서 조계종단은 다시 벌집을 쑤셔 놓은 듯 들끓었다. 청담스님의 조계종 탈퇴선언은 당시 총무원장 박기종스님에 의해 자신의 불교유신재건안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등 총무원장과의 불화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탈퇴선언이 있은 지 10여일이 지난 후 (1969.8.23) 청담스님의 탈퇴선언에 자극을 받은 선학원(청담스님 지지파)측은 9월 1일 전국비구승대회를 개최할 것을 결의했다. 청담스님을 지지하는 선학원측과 총무원측의 대립이 노골화되기 시작했던 지점이었다. 청담스님탈퇴의 책임 문제에 대한 선학원측의 강력한 공세를 받은 당시 총무원장 박기종스님은 사퇴할 뜻을 밝혔다(1969.8.26) 이처럼 청담스님 탈퇴선언으로 본격화 된 종단분규는 청담스님측과 경산스님측의 총무원 실권장악을 둘러싼 주도권 싸움으로 집약되었던 것이다. 이어 9월 1일 개최된 제21회 비상종회는 선학원측의 최월산스님을 총무원장으로 선츨하였으나(1969.9.13) 봉은사 땅 매각사건으로 10개월만에 물러나게 된다. 최월산 총무원장 후임으로 다시 청담스님이 선출되어 청담 총무원장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1970.7.22)
새롭게 구성된 청담 집행부는 총무원장 외유중에 김경우 총무부장이 관악산 염주암을 임의로 매각해 버림으로 인해 집단사퇴하게 되고 청담 총무원장만이 임시중앙종회(1971.7.27)에서 재선출되었다. 그러나 그 해 11월 15일 청담스님이 갑자기 입적함으로써 조계종 내분은 새로운 양상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청담스님의 입적 후 그 후임을 놓고 조계종단은 다시 파란이 이는 듯 하였으나 비교적 파벌색이 적은 강석주 스님을 후임 총무원장으로 선출하였고(1971.11.23) 강석주 집행부는 청담스님 입적 열흘 후인 11월 25일 출범하게 되었다. 강원장은 재임 1여년만인 1973년 1월 25일 손경산 총무원장에게 종권을 넘겨 주고 물러났다.

70년대부터 80년대 까지의 종권분규 

봉은사 염불암 땅 매각사건으로 총무원 집행부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때 손원장은 젊은 승려들의 옹립을 받으며 등장했다. (1973.1.25) 그러나 손원장 집행부는 73년 5월 윤고암 종정의 사회국장 해임 거부를 발단으로 종정 권한 문제를 둘러싼 종권다툼을 시작했다. 윤종정이 물러나고(1974.7) 문중배경도 없고 대처측 출신이라 종권을 전혀 넘보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파벌색이 없는 이서옹스님이 종정으로 추대됨으로써(1974.8.3) 지루한 종권다툼은 일단락되는 듯 했다.
그러나 이서옹 종정은 예상을 뒤엎고 종정 친정체제를 주장하면서 종단 실무를 관장하겠다고 나서게 되고 이에 손경산 집행부는 정면 도전했다. 이 종정과 손 원장의 종권다툼은 종정취임 두달만인 1975년 9월 30일 손 원장의 구속사태를 빚었다. 손 원장은 경기도 양주 대성암 토지 매각 대금을 다른 항목에 전용해 썼다는 '유용' 혐의로 조계종 사상 현직 원장이 구속되는 충격적인 첫 사례를 남겼다. 손 원장의 구속사태로 새 총무원장에 송서암스님이 선출되었다.(1975.10.6) 그러나 종권안정 여망과는 달리 송서암 집행부는 종단 행정 경륜의 일천함으로 혼미를 거듭하였고 이어 박기종 스님(1975.12.5 - 1976.10.4) - 고경덕 스님 (1976.10.4 - 1976.12.3) - 김자운 스님(1976.12.3 - 1977.3.23)등이 차례로 총무원장으로 선출되었으나 곧 물러나게 됨으로 종권은 불안하기만 하였다. 김자운 집행부에 이어 김혜정 총무원장 집행부가 새로 구성되었다.(1977.7.23) 김혜정 총무원장 집행부는 서옹 종정측으로서 실무친정의 근거지가 되고 이에 반기를 든 종회 중심의 재야세력은 김혜정 집행부에 강경히 맞섰다.
종권다툼의 양상은 종회측의 이 종정 불신임안 통과(1977.10.7), 종정직 해임 확인 청구소송(1977.11.9), 이 종정의 종회 해산 명령(1977.11.11)의 공방을 벌이며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종회측은 해인사 종회후 채벽암 스님을 종정 직무대행으로 추대하고 서울 개운사에 임시 총무원 간판을 내달게 되었다.(1978.3.10) 마침내 조계종단이 조계사 총무원(종정)측과 개운사 총무원(종회중심의 재야)측으로 양분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조계사측과 개운사측으로 양분된 조계종의 내분은 80년에 들어서면서 재판 판결과 승단 지지도가 개운사측으로 확연히 기울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측은 대립구도 탈피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협상에 임한 결과 분규종식을 위한 종회의원 총선에 합의하게 되었다.(1980.3.30) 합의에 따라 제 6대 종회의원 선거가 전격적으로 실시되었으며(1980.4.17) 새로 구성된 제 6대 의원의 표대결로 총무원장 송월주 스님과 종회의 정.부의장을 선출하였는데 모두 개운사측이 독점하였다(1980.4.26 - 4.27) 이에 조계사측이 반발하여 종정추대에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송월주 총무원장 체제의 출범이라는 성과를 얻은 당시 상황은 3년동안 계속된 조계사,개운사 만의 종권분규를 완전 종식시키지 못하였다. 조계종단은 법적인 통일만을 이루었을 뿐이었다. 이 당시 종정 추대에 실패한 종회가 다시 5월 7일 종회를 열어 종정추대를 재시도했으나 총무원장, 종회 정.부의장 등을 모두 개운사측이 독점한 것에 반발한 조계사측이 다시 송월주 총무원장의 자격미달을 들고 나와 당선 무효를 주장하였고 이를 계기로 양측의 공식 대회는 두절되고 와해 상태로 돌입했기 때문이다.
5월 13일 개운사측이 조계사측의 총무원을 강제로 점거하면서 양 조계종단은 다시 내분상태로 되돌아 가게 되었고 이를 주시하고 있던 사찰 당국은 조계종단이 더 이상 자체 정화능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무력으로 조계종단을 정화하려 했다. 이것이 이른바 한국불교 1600년 사상 가장 치욕적인 10.27법난이었던 것이다.
조계종은 1980년 11월 8일 '정화중흥회의'를 발족시켜 법통을 잇고 이어 종헌을 개정하고 이성철 스님을 종정으로 추대하고 이성수 스님을 총무원장으로 선출하였다.(1981.1.7) 조계종 '정화중흥회의'가 총무원 중심제의 종헌을 탄생시킴으로써 총무원장 1인 독재체제는 여러 형식적 장치에도 불구하고 그 효력을 발휘하였다. 총무원장은 본,말사 주지 임명에 개입하면서 파벌,문중의식을 확대,재생산해 내고 그 과정에서 각종 비리, 부패의 진원지가 되었다. 이로써 81년 이후 1년동안 4번이나 총무원장이 교체되는 난맥상(성수 > 초우 > 법전 > 진경)을 노출하였다. 1982년 4월 6일 총무원장으로 새롭게 선출된 황진경 스님 역시 - 10.27법난이후 실력파로 부상해 있었던지라 종권불 안정을 종식시키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 당시 동맹관계에 있던 서의현 종회의장으로부터 종권도전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급기야 1983년 8월 6일 신흥사 주지 교체 인사를 둘러싸고 전대미문의 승려살인 사건을 유발하였다. 이에 황원장은 책임을 지고 자진 사임했다.(1983.9.3) 이에 앞서 원로스님들은 봉은사에서 원로회의를 열어 '조계종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신흥사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물어 당시 총무원 집행부와 종회의원 모두를 사퇴시키고 총무원과 종회를 해산키로 결의하였다.(1983.8.27)
1983년 9월 5일에는 조계사에서 전국승려대회가 개최되고 여기에서 비상종단운영회의설치가 결의되었다. 신흥사 사태수습을 명분으로 출범한 비상종단은 김서운 총무원장을 내세우고 평화적 종권 인수인계를 시도했으나 여의치 않게 되자 서울 봉은사에 임시 총무원 간판을 걸었다. 비상종단은 그 동안 소장승려와 '불교사회문화연구소'에서 꾸준히 준비해 온 개혁안을 토대로 개혁작업을 실행해 나갔다. 비상종단의 개혁작업은 혁신적이고 구체적이었으나 종단 내의 보수기득세력과 권력의 공작에 의해 좌초되고 말았다. 즉 1984년 8월 1일 재야측이 이성철 종정의 지지를 받으면서 소집한 전국승려대회가 만장일치로 비상종단을 불신임하고 오녹원 총무원장을 선출하였고 2일에는 총무원을 접수하였던 것이다.
 

88년 봉은사 분규

1988년, 서의현 총무원장과 봉은사 주지였던 변밀운 스님간의 종권다툼으로 인해 봉은사 분규가 발생했다. 당시 1987년 대선을 앞두고 있는 상황하에서 그들의 종권다툼은 폭력적 물리력 행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당시 민정당 후보였던 노태우를 당선시킴으로써 그 이후 종권을 보장받는 형식으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이들은 서로 앞다투어 노태우 당선기원법회를 열었던 것이다. 87년 대선 이후 정권이양 이후 종권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서의현 체제에 반기를 든 세력들이 밀운스님을 중심으로 하는 독자적인 총무원 체제를 꾸리면서 분규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정권을 등에 업고 중앙승가대 발전을 담보로 하여 학인스님들을 전면에 내세워 폭력으로 봉은사를 접수하는 사태로 이어졌으며 접수의 성공으로 봉은사 분규는 일단락되었다

91년 종정 선출을 둘러싼 분규 

한편, 1991년 2월로서 임기가 만료된 성철스님의 후임을 놓고 성철스님의 연임을 주장하는 범어문중과 원산스님의 추대를 주장하는 덕숭문중간의 대립으로 새로운 분규가 시작되었다. 8년 종헌 개정시 종정선출권한이 원로회의에 있는가 종회에 있는가를 놓고 대립하던 양 세력이 각기 '비상수습대책위'와 '전국교구본사주지연합회'로 조직을 꾸리면서 각자의 정통성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때 서의현 총무원장이 범어문중에 가담하게 되고 이에 '교구본사주지연합회'로 반 서의현세력이 결집하면서 승려대회를 개최하여 각각의 총무원을 구성하게 되었다. 반대측 역시 승려대회를 개최하여 성철스님을 종정으로 재추대하였다. 이는 뿌리깊은 문중, 파벌의식이 초래한 한국불교의 또 하나의 뒤틀린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종단분규의 원인과 그 해결

종단분규의 원인은 무엇일까? 종단분규의 원인을 묻는 한 설문조사에서 스님들은 ① 일부 기득권 스님들의 종권욕, 이권다툼(65.5%) ② 불교사상의 혼란과 수행정진의지 부족(20.6%) ③ 종단제도의 미흡과 운영의 불합리(8.1%) ④ 정치권력의 불교계 이간책(5.6%) 등의 순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위 4개항은 불자들의 의식문제에서부터 교육, 수행, 포교 등 제도개혁의 문제 나아가 종단 내의 비민주적 요소를 온존케 하는 악법제도, 정권에의 예속성 등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사실 이 모든 요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원인 - 결과의 관계에 있는 것이어서 어느 하나의 요인을 절대적으로 지배적인 요인이라 말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종단분규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종단분규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처음으로 만나는 지점이 정화운동이다. 정화운동의 폐해가 현재의 종단분규의 원인으로 작용했음을, 앞에서 살펴보았던 바에 의해 알 수 있다. 그런데 정화운동 역시 다른 원인의 작용이었다. 그것은 바로 일제 잔재의 온존이며 일제 잔재의 온존은 일제국주의의 조선 지배정책의 일환이었던 '사찰령'의 온존을 의미한다.
사찰령은 한국불교의 여러 전통을 파괴하면서 한국불교 모순의 원인으로서 작용하여 모순을 확대, 재생산시켜 나아갔던 것이다. 즉, 사찰령은 전국의 사찰을 본사와 말사로 구분하고 본,말사 주지의 임명을 총독부가 담당케 함으로써 불교를 식민지적 지배하에 놓이게 했으며, 일제에 의해 임명되는 주지에게 권한을 극대화시켜 줌으로서 '주지 전횡제도'를 가능케 했다. 일제가 물러가고 난 후부터 총독부의 역할을 총무원이 대신하고 있고 총무원은 다시 정치권력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왜곡된 현상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주지전횡제도와 총무원장 1인 독재체제로 귀결되는 제도적 악법이 현대불교사를 규정한 종단분규의 원인의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종단분규의 또 하나의 원인은 정권의 재창출, 정통성 확보를 위해 종단분규의 씨를 뿌리고 개입하기도 하는 역대 정권의 기만성이다. 이승만 정권의 정화유시로부터 10.27법난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5, 6 공화국 下에서의 정권과 총무원과의 관계는 이를 잘 증명해 주는 것이다.
또한 91년 이후 종단분규의 한 양상으로 나타난 종정선출을 둘러싼 종권다툼은 문중간의 파벌의식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자기 문중하에 보다 많은 사찰을 운영하기 위하여 문중들은 종정과 총무원장을 자기 문중하에서 배출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욕구는 실제 초탈해야 할 재산권과 인사권의 확보를 위한 것이다. 이러한 문중간의 파벌의식은 종단분규의 한 원인으로서 충분히 작용해 왔던 것이다.
종단분규의 원인이 이러할진대 그 해결방안은 무엇일까? 그 해결방안은 개혁일 수밖에 없다. 오직 새로 태어남으로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밖에 없다. 만해 한용운 스님은 '조선불교유신론'에서 "유신(維新)이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의 파괴의 아들이다. 파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유신의 어머니이다."라고 갈파하였다. 과거 모순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파괴해 버릴 때만이 유신과 개혁은 완수될 수 있을 것이다. 개혁의 방향을 살펴보면 ① 정권으로부터의 '자주'를 획득해야 하며 (불교의 자주화) ② 총무원장 1인 독재체제, 주지전횡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를 개혁해야 하며 (제도적 개혁) ③ 한국불교 모순의 책임자는 불자 대중 자신이라는 의식으로 전환해야 하며 (의식개혁) ④ 불교사상을 현대적으로 정립해야 하며 (사상의 혁신) ⑤ 청정, 화합의 승풍을 진작시켜야 (승풍진작,인물개혁) 하는 것으로 압축될 것이다.


90년대말 불교와 2000년대의 비전

 

90년대는 94년을 기점으로 전후가 뚜렷하게 대비된다. 이미 1983년에 ‘비상종단’을 통해 한번 제기된 바 있는 ‘개혁’이 종단의 첨예한 화두로 대두하게 된 것이다. 서의현 원장의 3선 연임 시도를 계기로 촉발된 개혁운동은 공권력의 일방적 편들기를 이겨내어 개혁회의를 출범시키게 된다.

개혁회의는 종단의 민주화, 자주화 등 4대 과제를 제시하고 제도 정비를 통해 총무원장을 선출한 후 평화적으로 종권을 이양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개혁종단이라는 송월주 총무원장 체제하에서도 크고 작은 이권 다툼은 쉬지 않았고, 불교방송 공금횡령사건, 여의도 불교문화센터 등을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종권 소외세력의 불만은 98년 총무원장 선거를 둘러싸고 폭발하였다.

송월주 총무원장의 3선 저지를 위해 모였던 반대 세력중 일부 세력이 총무원 청사를 점거한 조계사 폭력사태가 발발한 것이다. 점거측은 종정의 교시를 무기로 ‘정화개혁회의’를 출범시켰지만 중앙종회와 집행부측은 승려대회를 통해 종정을 불신임하고 선거일정을 진행하였고 사태는 1개월 만에 공권력 투입으로 점거세력이 강제 해산됨으로써 종식되었다.

선거에서는 고산 스님이 총무원장으로 당선되었다. 당시 이 분쟁에는 종정 권한 강화를 도모하는 측, 종권 소외 세력의 종권확보 기도, 멸빈, 제적 등 중징계자의 사면요구, 총무원 권한 약화를 바라는 일부 본사의 움직임 등 다양한 세력이 얽혀 사태를 극한까지 몰고갔다. 99년 총무원장 선거과정에 대한 법원 판결로 종단 분규가 재연될 조짐을 보이자 고산 총무원장은 1년여 만에 중도 사퇴하고 선거를 통해 정대 스님이 총무원장에 취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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