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한국불교
90년대초 불교
3) 88년 봉은사 분규
1988년, 서의현 총무원장과 봉은사 주지였던 변밀운 스님간의 종권다툼으로 인해 봉은사 분규가 발생했다. 당시 1987년 대선을 앞두고 있는 상황하에서 그들의 종권다툼은 폭력적 물리력 행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당시 민정당 후보였던 노태우를 당선시킴으로써 그 이후 종권을 보장받는 형식으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이들은 서로 앞다투어 노태우 당선기원법회를 열었던 것이다. 87년 대선 이후 정권이양 이후 종권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서의현 체제에 반기를 든 세력들이 밀운스님을 중심으로 하는 독자적인 총무원 체제를 꾸리면서 분규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정권을 등에 업고 중앙승가대 발전을 담보로 하여 학인스님들을 전면에 내세워 폭력으로 봉은사를 접수하는 사태로 이어졌으며 접수의 성공으로 봉은사 분규는 일단락되었다.
4) 91년 종정 선출을 둘러싼 분규
한편, 1991년 2월로서 임기가 만료된 성철스님의 후임을 놓고 성철스님의 연임을 주장하는 범어문중과 원산스님의 추대를 주장하는 덕숭문중간의 대립으로 새로운 분규가 시작되었다. 8년 종헌 개정시 종정선출권한이 원로회의에 있는가 종회에 있는가를 놓고 대립하던 양 세력이 각기 '비상수습대책위'와 '전국교구본사주지연합회'로 조직을 꾸리면서 각자의 정통성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때 서의현 총무원장이 범어문중에 가담하게 되고 이에 '교구본사주지연합회'로 반 서의현세력이 결집하면서 승려대회를 개최하여 각각의 총무원을 구성하게 되었다. 반대측 역시 승려대회를 개최하여 성철스님을 종정으로 재추대하였다. 이는 뿌리깊은 문중, 파벌의식이 초래한 한국불교의 또 하나의 뒤틀린 모습이 아닐 수 없다.
5) 종단분규의 원인과 그 해결
이상에서 본 고는 한국현대불교사를 다루면서 청산해야 할 역사를 조명해 보았다. 현대사를 관통하면서 한국불교는 종권다툼의 각축장화 되었고 그것은 끊임없는 종단분규, 종권불안으로 이어졌음을 살펴보았다. 과히 '현대한국불교사는 종단분규사'라는 명제를 실감할만 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종단분규의 양상을 좀 정리하고 넘어가자. 종단분규는 주로 3가지 유형으로 표출되었다. 즉 주지임명에 관한 분규, 총무원장 선출 혹은 정통성에 관한 분규, 종정선출 혹은 종정과 총무원장간의 갈등에서 일어난 분규가 그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종단분규의 원인은 무엇일까? 종단분규의 원인을 묻는 한 설문조사에서 스님들은
① 일부 기득권 스님들의 종권욕, 이권다툼(65.5%)
② 불교사상의 혼란과 수행정진의지 부족(20.6%)
③ 종단제도의 미흡과 운영의 불합리(8.1%)
④ 정치권력의 불교계 이간책(5.6%) 등의 순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위 4개항은 불자들의 의식문제에서부터 교육, 수행, 포교 등 제도개혁의 문제 나아가 종단 내의 비민주적 요소를 온존케 하는 악법제도, 정권에의 예속성 등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사실 이 모든 요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원인 - 결과의 관계에 있는 것이어서 어느 하나의 요인을 절대적으로 지배적인 요인이라 말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종단분규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종단분규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처음으로 만나는 지점이 정화운동이다. 정화운동의 폐해가 현재의 종단분규의 원인으로 작용했음을, 앞에서 살펴보았던 바에 의해 알 수 있다. 그런데 정화운동 역시 다른 원인의 작용이었다. 그것은 바로 일제 잔재의 온존이며 일제 잔재의 온존은 일제국주의의 조선 지배정책의 일환이었던 '사찰령'의 온존을 의미한다.
사찰령은 한국불교의 여러 전통을 파괴하면서 한국불교 모순의 원인으로서 작용하여 모순을 확대, 재생산시켜 나아갔던 것이다. 즉, 사찰령은 전국의 사찰을 본사와 말사로 구분하고 본,말사 주지의 임명을 총독부가 담당케 함으로써 불교를 식민지적 지배하에 놓이게 했으며, 일제에 의해 임명되는 주지에게 권한을 극대화시켜 줌으로서 '주지 전횡제도'를 가능케 했다. 일제가 물러가고 난 후부터 총독부의 역할을 총무원이 대신하고 있고 총무원은 다시 정치권력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왜곡된 현상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주지전횡제도와 총무원장 1인 독재체제로 귀결되는 제도적 악법이 현대불교사를 규정한 종단분규의 원인의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종단분규의 또 하나의 원인은 정권의 재창출, 정통성 확보를 위해 종단분규의 씨를 뿌리고 개입하기도 하는 역대 정권의 기만성이다. 이승만 정권의 정화유시로부터 10.27법난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5, 6 공화국 下에서의 정권과 총무원과의 관계는 이를 잘 증명해 주는 것이다.
또한 91년 이후 종단분규의 한 양상으로 나타난 종정선출을 둘러싼 종권다툼은 문중간의 파벌의식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자기 문중하에 보다 많은 사찰을 운영하기 위하여 문중들은 종정과 총무원장을 자기 문중하에서 배출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욕구는 실제 초탈해야 할 재산권과 인사권의 확보를 위한 것이다. 이러한 문중간의 파벌의식은 종단분규의 한 원인으로서 충분히 작용해 왔던 것이다.
종단분규의 원인이 이러할진대 그 해결방안은 무엇일까? 그 해결방안은 개혁일 수밖에 없다. 오직 새로 태어남으로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밖에 없다. 만해 한용운 스님은 '조선불교유신론'에서 "유신(維新)이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의 파괴의 아들이다. 파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유신의 어머니이다."라고 갈파하였다. 과거 모순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파괴해 버릴 때만이 유신과 개혁은 완수될 수 있을 것이다.
개혁의 방향을 살펴보면
① 정권으로부터의 '자주'를 획득해야 하며 (불교의 자주화)
② 총무원장 1인 독재체제, 주지전횡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를 개혁해야 하며 (제도적 개혁)
③ 한국불교 모순의 책임자는 불자 대중 자신이라는 의식으로 전환해야 하며 (의식개혁)
④ 불교사상을 현대적으로 정립해야 하며 (사상의 혁신)
⑤ 청정, 화합의 승풍을 진작시켜야 (승풍진작,인물개혁) 하는 것으로 압축될 것이다.
3. 끊이지 않는 탄압과 훼불
누누이 강조하는 바 한국불교의 모순은 한국의 민족모순이 불교적으로 전이된 것이다. 현대사에 있어서 한반도의 민족모순은 일제국주의와 미국의 뿌리깊은 식민정책에 의해 그 골은 깊고 넓어만 갔다. 제국주의의 식민정책은 문화정책에도 일관되게 흐르며 문화정책은 종교정책을 포함시킨다. 제국주의적 문화침탈에 의해 민족종교인 불교의 모순은 극도로 심화되어 왔다. 그 모순들의 현실태로서의 종권분규를 앞에서 다루었다. 이제 그 모순의 또 다른 현실태인 탄압과 훼불을 개략해 보려한다.
탄압은 주로 자체 정화능력의 결여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정치적 계산에 의해 개입하면서 불교의 정치권력에 대한 예속성,의존성 심화를 조장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것의 대표적인 사례가 이승만의 정화유시와 10.27법난이다. 뿐만 아니라 탄압은 민족세력화, 진보세력화의 조짐을 보일때 정권은 철퇴를 가함으로서 민족,민중의식 고양의 저지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는 원각사 법당 난입사건, 각종 집회방해로 나타난다.
훼불은
① 제반정책에 있어서 소외시키는 유형
② 기독교 편향의 사회,문화 속에서 왜곡,변질 시키는 유형
③ 군 내의 불교탄압 유형
④ 이교도들에 의한 불교비방, 훼불유형 등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끊이지 않는 탄압과 훼불은 근본적으로 불자 대중의 각성을 바탕으로 불교의 자주화, 불교의 혁신, 민족문화의 고양을 통해 극복되어질 수 있으리라 본다. 이것은 단순히 불교중흥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민족 중흥의 계기로 작용한다는 데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90년대 불교
1. 종단개혁투쟁의 발단과 그 전개
1) 종단개혁투쟁의 발단 - 서의현 반대투쟁
종단개혁투쟁은 서의현 반대투쟁을 그 촉발지점으로 하여 개혁회의의 출범과 해체, 개혁종단의 출범, 개혁종단의 지속적인 개혁작업을 포괄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종단개혁투쟁은 여전히 지속되어야 한다는 필연성을 확보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종단개혁투쟁의 촉발지점으로 작용하였던 서의현 반대투쟁을 살펴본다.
1994년의 벽두 상무대 이전공사 자금유용에 대한 국방부 특검단의 수사발표(1994.1.27)가 있은 다음 날 조기현은 '특정범죄 가중처벌법 위반 및 뇌물공여' 등의 혐의로 구속수감 되었다. 이를 전후로 하여 상무대 이전공사 자금과 관련하여 각종 소문이 나돌고 있었는데
이때 민주당 정대철의원이 '상무대 비자금 조성'의혹문제를 폭로하였다. 폭로의 내용인 즉, 당시 조계종 전국신도회장이던 청우종합건설대표 조기현이 상무대 이전사업의 대금으로 받은 금액중 223억원을 비자금으로 조성하고 이 중 80억원을 동화사 대불공사에 시주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화사 대불공사에 시주했다는 80억원은 서의현을 통해 대선시기에 김영삼후보쪽으로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상무대 비리사건은
① 서의현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혔으며
② 여전히 불교계 종단권력이 정치권력과 결탁해 있으며 정치권력 역시 종단권력과의 모종의 공생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이 드러 났으며
③ 서의현으로 상징되는 부패,비리 기득권 세력의 제거가 필연적이며
④ 이러한 일련의 이유로 인하여 불교의 개혁이 필연적이라는 불자대중의 인식이 급속히 확산되어 가는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한편 서의현은 '상무대 비리사건'이 자신의 차기 종권장악에 막대한 타격을 입힐 것이라 예상하고는 이 사건을 조기에 진압하고 종권을 장악하기 위해 3월 18일에 차기 총무원장선거를 3월 30일 개최한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실천불교전국승가회'와 같은 불교개혁을 꾸준히 모색해 온 종단개혁세력은 이와 같은 서의현의 불법적이고 도발적인 3월 30일 종회개최설에 반대하여 하나로 세력화 되는 바, 그 세력화의 결과가 바로 '범승가 종단개혁 추진회(범.종.추)'의 결성(1994.3.23)이었던 것이다.
상무대 비리사건과 3월 30일 종회개최발표는 범종추를 종단개혁투쟁의 구심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종단개혁투쟁의 구심점이 된 범종추는 3월 26일부터 '구종법회'를 이끌어 나아갔으며 이에 앞서 3월 25일에는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와 동국대 불교학생회 학생들이 농성에 돌입하였다. 종단개혁의 열기는 승,속을 불문하고 불자대중의 가슴에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갔던 것이다. 3월 28일에는 종단개혁을 위한 결의대회를 가지며 '서원장 3선음모 결사반대'를 결의하고 '상무대 80억 비리의 진상규명'을 촉구하였다. 이후 3월 29일 새벽 6시 30분 서의현 총무원장은 조직 폭력배 300여명을 사주하여 총무원에서의 농성스님및 재가불자들을 습격하였으며 경찰들은 농성자들을 강제연행하기에 이르렀고 종단개혁세력은 이 날의 강재연행,폭력을 3.29법난으로 규정하고 불교개혁을 가로막는 정치권력과의 일대격전도 불사할 것을 선언하였다.
3.29법난 당시 범종추 소속스님들 뿐만 아니라 대불련 소속법우들 역시 (대.경지부에서도 30여명이 참가하였다.)강제연행,폭행을 당하면서 불교자주, 불교개혁의 기치를 내리지 않았다. 그러한 열의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비호를 받은 서의현 세력은 3월 30일 제 112회 임시중앙종회를 개최하여 서의현의 3선을 결의하였다. 바로 다음 날 재가불자들의 조직적이고 한층 더 강력한 투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불교를 바르게 세우기 위한 재가불자연합'이 창립을 선언하고(1994.3.31) 범종추와 함께 종단개혁완수를 위해 투쟁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후 몇번의 양심선언이 서의현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히고 이에 맞서 서의현 세력의 강제로 추측되는 서암스님의 승려대회 중지교시가 발표(1994.4.9) 되는 등 혼미를 거듭하면서 결국에는 4.10 전국승려대회 개최로 이어졌다.
전국승려대회에서는
① 서암종정 불신임 결의
② 서의현 원장 공직박탈 결의
③ 개혁회의 출범선언
④ 개혁회의 의장에 월하스님 선출 등이 이루어졌고
곧 이어 총무원 접수를 시도했으나 경찰은 다시 이를 불법집회로 간주하고 스님및 재가불자들을 강제연행하였다. 이에 원로스님 6명이 단식농성에 돌입하고 4월 11일 원로회의는 조계종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개혁회의는 3.29, 4.10법난을 책임지고 김영삼 정부 퇴진, 최형우 내무장관 구속을 촉구하였다. 4월 13일에는 공권력이 철수하였고 개혁회의는 총무원을 접수하였으며 이어 새벽 5시에는 서의현 원장이 사퇴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날 오후 2시 조계사에서는 1만여명의 대중이 참가하여 범불교도 대회를 개최하였고 개혁회의 현판식이 이루어졌다. 원로회의는 4월 10일의 전국승려대회의 결정을 추인함으로써 서의현 반대투쟁은 승리로 결론지어졌다.
2) 종단개혁투쟁의 전개 - 개혁회의의 출범과 개혁작업
개혁회의는
① 불교의 근본정신 회복및 승단 위계질서 확립
② 교단의 자주성 확립 및 불교관련 악법폐지
③ 교단의 민주적 운영과 재산공개
④ 여법한 주지인사 실시 및 무분별한 불사 지양
⑤ 파벌적 문중의식 타파 및 승가 후생복지 증대
⑥ 승가교육제도 정립
⑦ 의식,법복,의제 정비 및 통일
⑧ 포교활성화 및 사회복지사업 추진
⑨ 재가불자 종단 참여모색
⑩ 인권,환경 등 사회역할 증대 등 10가지 공약을 제시하면서 출범하였다.(1994.4.13)
개혁회의의 출범은 개혁의 완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개혁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물론 서의현 반대투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개혁의 토대를 일정부분 이루어 놓았으며 개혁의 물꼬를 튼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서의현으로 상징되는 기득권 세력의 몰락 그 자체가 불교개혁의 완수일 수 없을 뿐더러 서의현 반대투쟁의 승리 이후에도 여전히 보수기득권세력이 그 모습을 달리하면서 종권에 도전하는가 하면 일부는 시기를 노리며 잠복하고 있는 실정이기에 불교개혁은 너무나 멀고 험난한 길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서의현 반대투쟁을 촉발로 전개 된 불교개혁투쟁은 종단 권력구조의 개편이라는 차원에서 머무르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한국불교 1600년 동안 축적되어온 모순의 총체적 해체와 그를 통한 한국불교중흥이라는 불자대중의 염원을 실현시키는 일련의 지속적이고 조직적인 운동이 되어야한다. 그러하기에 개혁은 총체적일 수 밖에 없다. 그 총체성은 제도개혁, 인적 청산 ,의식개혁 등 모든 개혁의 내용과 대상을 포함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임무를 자기 임무로 설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개혁회의였고 개혁의 총체성은 개혁회의의 임무임을 예고했는지도 모른다.
개혁회의는 출범 이후 6월말까지
① 개혁회의의 존립근거를 마련해 줄 개혁회의법 마련
② 월하스님을 종정으로 추대
③ 훼종조사 특별위원회를 열어서 기간의 부패승려에 대한 조사와 사찰에 대한 감사실시
④ 대체 권력체계에 대한 법안 마련과 공청회 개최
⑤ 재적 본사별 승적 재정비
⑥ 법난 책임을 물어 김영삼 대통령의 사과와 최형우 내무장관의 해임요구 운동 전개
⑦ 동화사,은해사,선본사,보문사 등의 기존의 반개혁세력이 잔존하고 있는 사찰에 대한 직할사찰 운영 등의 일들을 해 왔었다.
개혁회의는 분명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불자대중과 국민들에게 보여 줌으로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개혁종단의 출범을 머리 속에 그려보게 만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개혁회의는 1차부터 마지막까지 공개회의의 원칙을 지켰으며 방청을 원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방청하게 한 것이며 법제화의 과정에서 각종 공청회의 개최를 통하여 불자대중의 참여를 유도한 것과 '열린마당'을 통하여 종도들의 의견을 수렴한 것, 그리고 개혁회의의 진행과정을 '개혁회의 뉴스', '불교신문' 등의 지면을 통해 공개하여 의견을 수렴한 것 등은 분명 이전의 모습과는 다른 것이었다. 또한 개혁회의는 산하에 '법난 대책위'를 설치하여 법난에 대한 대 정권 규탄투쟁을 멈추지 않으며 '불교 자주화'의 당위를 지속적으로 천명하였다.
그러나 개혁회의의 개혁작업들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개혁회의는 시간이 지나면서 '개혁은 물 건너갔다'는 등의 비아냥을 받아야 했으며 이는 잠복해 있던 보수세력의 결집이라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개혁작업이 중도에서 표류하게 된 원인들은 여러가지가 있겠으며 그것은 개혁완수를 반드시 극복해야할 과제인 것이다. 개혁표류의 원인은 종단개혁투쟁에 참여했던 진보세력이 종권을 얻어내면서 변절을 시작했고 재가불자들의 고립이 결국 대중이 아닌 소수세력에 의한 종단 운영을 유도하였으며 진정한 개혁에 대한 의식결여 등등의 개혁회의의 자체적인 원인과 외부적인 원인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나 세부적인 평가들은 이후로 미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그 경위들을 먼저 살펴보자.
개혁회의가 다각도로 개혁을 추진하긴 하였으나 개혁의 구체적인 비젼을 제시하지 못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반개혁세력은 자신들의 복권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개혁회의가 반개혁세력이 온존하며 그들의 물적토대가 되고 있는 사찰을 직영사찰로 하여 새로운 주지를 발령한 것에 대해 반개혁세력이 집단적인 소송을 전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다 우여곡절 끝에 개혁회의에서 통과된 종헌이 (1994.8.11) 원로회의에 의해서 인준이 보류(1994.8.23)되면서 위기감은 고조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출범하면서 기존 종회를 끌어안기 위해서 기존 종회의원 39명을 포함함으로 인해서 내부적 진통에 시달리던 개혁회의가 외부적 도전까지도 받는 상황에서 원로회의의 개혁회의 입안 종헌에 대한 인준거부는 개혁회의의 입지를 위축시킨 결과로 작용하였다.
3) 개혁종단의 출범
내.외적 요인으로 인해 결정적 위기를 맞은 개혁회의는 9월 1일 개최된 원로회의가 제안한 내용을 9월 3일 , 제 8차 개혁회의의 본회의를 개최하여 수용함으로 인해 위기를 일정부분 벗어나게 되었다. 이어 9월 27일에는 제 9차 개혁회의의 본회의가 개최되어 개정종헌이 심의, 의결되었으며 9월 29일에는 원로회의에 의해 개정종헌이 인준되고 개혁회의 의장은 개정종헌을 선포하였다.
새 종헌 ,종법에 의해 11월 7일에는 11대 중앙종회의원 55인이 각 교구별로 직접 선출되고 8일에는 직능별 중앙종회의원이 직능선출위에서 선출되었으며 11월 14일에는 각 교구별로 총무원장 선거인단 240명이 선출되었다. 이어 11월 21일에는 총무원장 선출을 위한 319명의 선거인단에 의해 새로운 총무원장이 선출(월주스님)되었고, 개혁회의의 뒤를 이어 개혁작업을 수행해 나갈 개혁종단이 출범하였다.
2. 종단개혁투쟁의 성과와 한계
서의현 반대투쟁으로 촉발되어 개혁회의의 출범에서부터 어려운 과정을 거치면서 마침내 개혁종단의 출범에까지 이르는 종단개혁투쟁은 여러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 전개과정에서 많은 한계와 오류들을 드러내었다. 이제 그 성과와 오류, 한계를 명확히 짚어냄으로서 여전히 미완인 개혁의 방향을 가늠해 보고자 한다.
서의현 반대투쟁이 촉발될 당시 국민대중뿐만 아니라 일부 불교대중들의 눈에도 종단개혁투쟁은 새로운 종권다툼의 모습으로 비춰졌고 따라서 그들의 눈에 서의현 반대투쟁에 결집한 세력들(보수, 기득권이나 진보를 막론하고)은 곱지 않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아 놓았던 것은 광범위한 대중들의 참여였으며 미리 개혁을 모색한 개혁, 진보세력들의 주도면밀함으로 인해 획득되어진 명분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서의현 반대투쟁은 서의현 독재체제의 해체라는 직접적인 성과를 가져다주었으며 개혁회의를 출범시킴으로서 개혁의 지속적 추진을 가능케 했다.
개혁회의의 지속적인 개혁작업의 추진은
① 제도개혁을 일정부분 이루어 냄으로서 이후 종단운영의 여하에 따라 제도개혁의 큰 틀을 만들 수 있는 시안을 마련하였다는 점
② 불자대중의 불교개혁에 대한 염원과 열의가 가히 폭발적이었음을 확인했다는 점
③ 불자대중의 개혁에 관한 관심과 염원은 향후 불교중흥의 인적토대를 이룰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한 점
④ 개혁과정에서 개혁은 불교의 자주화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현실적으로 확인함으로서 불자대중의 정치적 각성이 이루어졌다는 점
⑤ 개혁과정에서 개혁적, 진보적 승려들이 종단 내로 대거 진출함으로서 개혁세력의 원내 교두보를 확보함은 물론, 전체 승가의 세력재편이 진보적으로 이룰 소지를 제공한 점 등의 성과를 남겼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개혁회의가 개혁작업을 추진해 나가는 과정에서 몇몇 오류와 한계점을 드러냈는 바,
① 개혁 초기 주도세력이 분열함으로서 제도개혁의 불완전(총무원장 직선제 관철 실패)을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개혁의 진전에 차질을 가져다 주었으며 개혁회의가 또 다른 이해관계에 의한 집단으로 오인 받기도 했다는 점
② 구종회의원 39명을 개혁회의에 끌어안은 것은 끝끝내 개혁회의의 부담으로 작용하여 일정부분 개혁의 주도권을 그들에게 내줘야 했던 점
③ 개혁세력의 물적토대의 부족
④ 불교개혁투쟁이 폭발적으로 고양된 것은 불교대중의 광범위한 지지에 힘입은 바였음에도 불구하고 불교대중의 종단운영참여를 배제했던 점(재가대중과 비구니 스님들의 배제는 앞으로 개혁회의의 한계로 집중적으로 비판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⑤ 그로 인하여 출가비구대중들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켰던 점등이 바로 그것이다.
90년대의 불교개혁
1990년대 이후 지금까지 우리 사회의 화두는 ‘개혁’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세계정세의 급격한 변화와 국내정치 상황의 변동은 ‘개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대중적으로 각인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동구사회주의의 몰락은 변혁운동 진영에 적잖은 혼란과 변화를 가져다 주었고, 92년 김영삼 정부의 등장과 문민정부 초기의 각종 개혁조치들은 일시적으로나마 국민들에게 ‘개혁’에 대한 희망을 주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사회 각 부문은 ‘개혁’이라는 공동선에 대한 합의의 폭을 넓혀 나가기 시작했다.
이는 불교계에도 같은 방향으로 인입되었다. 근대 이후 불교계 변화의 여러 동인 중 결정적인 요소가 외부의 변화, 즉 국가의 정치 사회적 변화라 할 때 이러한 현상은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변화를 불교적인 이념과 방법으로 승화했는지 아니면 사회변화를 그저 따라가기만 했는지에 있다.
필자를 포함한 모든 불자의 바람은 불교계가 투철한 불교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사회변화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사상적 자양분을 제공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필자의 좁은 식견으로는 오히려 사회변화가 선행지표이고 불교계의 변화는 그 뒤를 힘겹게 따라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해방 전후의 각종 불교개혁론과 정화운동, 종단개혁운동의 과정과 결과에서도 드러난다.
현재 우리 사회는 국가적으로 ‘개혁’을 둘러싸고 첨예한 대립을 하고 있다. 최근 언론개혁을 둘러싼 사회 주류층의 편가르기는 과거 80년대의 이데올로기적 대립보다 심각한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개혁’에 대해 국민들은 찬성이든 반대이든 뚜렷한 입장을 갖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다. 이는 ‘개혁’의 위기이기도 하다.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의 사활을 건 총공세, 기득권층의 반발, 대선에 대한 집착으로 갈팡질팡하는 정치권의 정쟁, 개혁세력의 현실적 역량부족 등은 지난 10여 년 간 우리 사회를 지탱해 온 ‘개혁’이라는 사회적 화두를 위기로 몰고 있다.
불교계 역시 수년 전부터 ‘개혁’의 위기 또는 실종 속에 머물고 있다. 특히 94년 조계종 종단개혁의 발생과 전개과정, 그 결과물로서의 ‘오늘’은 불교개혁운동의 중요한 평가기준이 되고 있다. 종단권력의 부패에 대한 대중적 공분, 개혁세력의 결집, 부패한 종권 구조의 파괴, 인적 제도적 개혁 청사진 수립, 개혁정책 수립 집행과정에 있어서의 주체세력 분열, 새로운 이해관계의 생성, 개혁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추락 등 94년 종단개혁의 역사적 과정은 또 하나의 사회적 격변기를 맞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평가과제 될 것이다.
본고는 불교개혁운동에 대한 반성적 점검이라는 편집방향에 기초하고 있으나, 94년 종단개혁의 전개과정과 평가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다. 이는 필자의 한계로부터 기인한다. 필자는 전문적인 연구자도 아니고 불교계의 어떤 현상에 대해 논지를 펼만한 능력도 없다.
단지 94년 조계종 종단개혁의 추진체였던 ‘범승가종단개혁추진회’의 실무경험이 있고, 지금도 조계종의 승가단체에서 실무자로 활동하고 있을 뿐이다. 〈불교평론〉에서 필자에게 원고를 청탁한 취지도 종단개혁운동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던 필자의 경험적 시각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라 판단한다. 따라서 본고는 94년 종단개혁의 발생배경과 전개과정을 실제자료에 입각해서 살펴볼 것이고, 종단개혁의 목표와 과제는 무엇이었는지, 그 결과는 어떠했는지, 실패(혹은 성공)의 원인은 무엇이었는지를 비판적으로 점검해 볼 것이다.
2. 94년 조계종 종단개혁운동의 전개과정
1) 종단개혁운동의 배경
94년 조계종 종단개혁의 주체는 젊은 승가였다. 특히 이 중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조직된 젊은 승가의 역할이다. 이들은 80년대 민중불교운동과 사회민주화운동을 경험하면서 불교의 사회적 참여에 대해 몸으로 부딪히며 고민을 해 온 세대이다. 이들은 전체 변혁운동의 한 부문운동으로서 스스로를 규정하면서 사회민주화와 통일운동의 현장에 직접 결합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정치의식화와 조직화라는 성과를 만들어내었다.
특히, 87년 민주화운동을 거치면서 형성된 이들의 사회과학적 방법론과 운동적 자신감은 보수적인 승단 내에서 조직적 결사체를 이끌어내면서 불교계 양심적 세력의 한 축으로 자기위상을 정립해 나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종단의 문제는 이들의 관심권 밖에 있었다. 불교운동진영이 종단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90년에 들어와서부터다. 특히, 문민정부 초기 사회적으로 불어닥친 개혁의 바람은 불교운동진영이 종단 내부의 문제를 둘러보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이 종단의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불교자주화 문제로, 이는 80년대 사회민주화와 통일운동의 과정에서 종단이 보여준 정치예속화 문제에서 기인한다. 불교계가 정치권력으로부터 예속화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었지만,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종단 상황에서 정치권력의 보호가 필수적이라고 판단한 서의현 전 총무원장이 선택한 정치예속화의 길은 시간이 흐를수록 극에 달했다.
92년 대선 당시 여당 선거운동원을 방불케 할 정도의 정치적 지지 행위, 93년 17사단 훼불사건을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던 스님들과 신도들을 오히려 범법자로 규정한 사건, 93년 불교방송 사장에 여권과 친분이 있는 천주교신자를 임명하려다 실패한 사건, 상무대 비리 연루 등 꼬리를 물고 터지는 서의현 전 총무원장과 연관된 정치적 사건들은 불교계의 위상을 극도로 실추시켰으며, 불교운동진영은 정치권력에 예속된 종단의 문제를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다른 하나는 서원장의 3선 문제였다. 86년 총무원장이 된 후 서원장은 과거 단명했던 총무원장과는 달리 강력한 총무원 중심제를 장기간 구축하였다. 서원장은 조계종의 주류 문중에 속해 있지도 않고 정치적 지지 세력도 그다지 크지 않았던 자신의 한계를 냉철히 인식하여 밖으로는 정치권력에 밀착하고, 안으로 정적들이 나타나면 가차없이 제거해 나갔다.
이 두 가지 길의 선택이 서원장 장기집권이 가능했던 배경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승단 내부는 물론이고 신도들 사이에서도 서원장의 폭정에 대한 불만과 비판이 늘어가고 있었다. 두번째 임기 말기인 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은처문제와 성추문이 공공연히 거론될 정도로 대중들의 불만은 한계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결국 서원장이 가진 양면성, 즉 불교의 정치권력 예속화와 폭압적 종단운영은 불교운동진영이 종단의 문제를 고민하게 만든 직접적 계기가 되었으며, 앞으로 살펴볼 종단개혁의 과정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두 가지 문제는 ‘불교자주화’와 ‘종단운영의 민주화’라는 종단개혁의 핵심과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2) 종단개혁운동의 태동과 범종추, 그리고 부패종권의 몰락
(1) 종단개혁운동 주체의 형성과정
앞서도 지적했듯이 90년대 들어서면서 종단권력의 비자주적 권력예속화의 문제와 비민주성에 대해 대중들은 실천적으로 각인하기 시작했다. 군부독재와 함께 무소불위의 권력을 향유해 온 서의현 전 총무원장의 불교권력 8년도 서서히 균열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기 불교운동진영의 종단에 대한 관심도 과거 선언적 수준에서 실천적 수준으로 매우 구체화되면서 개혁주체세력이 본격적으로 형성된다.
당시 개혁적인 승가의 흐름은 80년대 중반 이후 변혁운동에 매진해 왔던 ‘불교정토구현전국승가회’와 ‘대승승가회’의 맥을 이은 ‘실천불교전국승가회(이하 실천승가회)’와 ‘선우도량’으로 대표된다. 80년대 사회운동 일변도의 개혁적 승가운동에 대한 평가를 바탕으로 92년 출범한 실천승가회는 여전히 민족통일과 사회민주화를 승가운동의 궁극적 과제로 잡고있으나, 그 방법론적인 측면에서는 중대한 노선상의 변화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우리 한국불교가 이러한 길로 나아가기에는 먼저 해결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바로 종단구조를 건강하게 바꾸어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과제입니다. 지금까지는 우리 불교운동진영에서 종단개혁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나 실천에 매진할 수 없는 시대상황적인 한계가 있었습니다.
……작금의 불교상황을 볼 때 종단개혁의 논의는 무수히 많았지만 개혁을 이루어낼 주체세력의 형성에는 실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선 종단개혁을 논의하기에 앞서 개혁의 주체세력을 만들어 가는 데 주력할 것입니다. 이 개혁의 주체세력은 불교사상을 새롭게 정립하는 그룹, 올바른 수행에 전념하는 그룹, 제도개혁을 전담하는 그룹이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된 형태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종단개혁을 지향하는 세력들이 통일된 대오를 형성하여 힘있게 실천해 나간다면 종단을 바람직한 수행자들의 집단으로 바꾸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실천승가회 창립선언문〉)
즉, 종단개혁의 과정을 외면하고 더 이상 통일운동과 사회민주화운동에만 전념할 수 없다는 시대적 인식을 한 것이다. 80년대 승가운동의 조직적 토대와 경험적 성과물을 그대로 이어받은 실천승가회는 창립 직후 곧바로 종단개혁운동에 나서게 된다. 이때의 운동목표는 ‘개혁주체세력’의 형성과 ‘종단개혁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얻어내는 것으로 집약된다.
이에 실천승가회는 93년 3월 중앙종회에 종헌종법개정을 위한 공개청원을 하고, 종단개혁에 대한 공개토론회를 개최하는 등 구체적인 행동에 들어가는데, 특히 종단개혁을 위한 승려 2천인 서명운동의 돌입은 향후 종단개혁운동에 대중적 명분을 제공하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실천승가회가 80년대 불교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그대로 이어받은 조직으로서 종단개혁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였다면, 90년 창립한 선우도량은 창립취지와 운동의 목표 등에 있어서 실천승가회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승가단체였다.
당시 교계언론들은 선우도량을 ‘온건개혁파’라고 성격을 규정하기도 했는데, 선우도량은 ‘승풍진작’과 ‘수행 풍토 수립’을 목표로 창립되어 사회운동 중심의 승가운동에 대하여 또 하나의 방향성을 제기한 그룹이었다. 과거 승가운동의 주된 방향이 민주화 운동과 통일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고, 90년대라는 시대사적 전환기를 맞아 성찰과 반성의 시점이라는 점에서 선우도량이 제기한 방향성은 당시로서는 신선한 자극과 새로운 흐름으로 인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로간의 이질적 요소와 방법론적 차이, 사상적 배경의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두 단체가 ‘종단개혁’이라는 공동의 선택을 이루어냈다는 것이다. 이들의 결합이 중요한 것은 두 단체 모두 중앙승가대와 동국대 석림회, 강원의 학인들과 조직적 연계가 가능한 단체라는 것이다. 즉, ‘종단개혁’에 대한 실천승가회와 선우도량의 ‘공동의 선택’은 종단개혁운동의 주체형성이 구체화될 수 있는 직접적 계기로 작용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2) 범종추의 결성
93년 실천승가회와 선우도량 등 젊은 승가의 종단개혁에 대한 관심은 중앙승가대를 비롯한 동국대 석림회와 지방 강원 학인들로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94년 1월 종단개혁을 위한 구체적인 조직건설 논의로 발전하였다.
94년 1월 4일 석림동문회, 실천승가회, 선우도량, 전국승가학인연합 등 대표자 21인은 한국일보 송현클럽에서 ‘한국불교의 미래를 밝히기 위한 승가 제단체 신년 인사회’를 갖는다. 이 모임이 향우 조계종 종단개혁을 이끌었던 ‘범승가종단개혁추진회(이하 범종추)’의 모태가 된다. 이들은 2월 5일 종단개혁이라는 원칙 하에 서의현 총무원장의 3임을 저지하는 데 뜻을 모았고, 2월 25일에는 범종추의 명칭을 확정하고 창립일정을 결의하는 등 매우 발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범종추가 서원장 체제를 무너뜨리는 조직으로까지 발전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이때 세 가지 중요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상황은 급물살을 타게된다. 상무대 비리와 서원장의 3선 강행, 실천승가회의 여론조사 발표가 그것이다. 상무대 비리 사건은 94년 1월 27일 상무대 이전 공사 과정에서 군 간부 2명이 당시 조계종 전국신도회 회장이자 청우종합건설 대표인 조기현씨로부터 수천만원의 뇌물을 받았다는 국방부 특검단의 수사발표로 세간에 알려졌지만, 불교계와 정치권의 핫이슈가 된 것은 제166회 임시국회에서 민주당 정대철 의원이 상무대 이전 사업 223억원 유용의혹과 동화사 80억 시주금의 문제를 제기하면서부터다.
이 사건은 사회적으로도 큰 파장을 일으켰지만 서원장 체제의 개혁이 논의되고 있던 불교계 내부에서는 가히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특히 상무대 비리 사건은 서원장 체제의 권력예속화와 부패상을 만천하에 드러낸 사건으로서 범종추 구성단체들로서는 대중적 여론을 모으는 데 상당한 탄력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교계의 각 단체들은 서원장에게 초점이 맞춰진 성명서를 연일 발표하였고, 일간지를 비롯한 일반 언론도 경쟁적으로 보도하였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서원장은 두번째 대형 사건을 만들었다. 그것은 ‘3선 조기강행’이었다. 상무대 비리 사건이 식을 줄 모르고 계속 달아오르자 서원장은 체제의 위기를 느끼게 되었고, 이에 대한 돌파구로 ‘3선 조기강행’이라는 무리수를 쓰게 된 것이다. 서원장은 3월 17일 당시 중앙종회의장 종하 스님에게 3월 30일 종회에서 총무원장 선출을 안건으로 상정하라는 요구를 하였고, 종하 스님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서원장의 3선 조기강행 시도는 대중들의 공분을 만들어 냈을 뿐, 서원장이 의도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로 나타났다. 상무대 비리 사건으로 악화되고 있는 종단 안팎의 여론에 서원장 스스로가 기름을 부은 꼴이 되었다.
한편 실천승가회는 2월 28일부터 3월 12일까지 현대리서치에 의뢰해 ‘종단개혁에 관한 불교대중 의식조사’를 실시했는데, 3월 16일 이 결과가 발표되면서 종단개혁운동의 대중적 명분과 지지는 한층 가속화되었고, 여론조사의 결과는 향후 전개될 종단개혁운동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상무대 비리사건과 서원장 3선 조기강행에 대한 대중들의 공분은 점점 거세졌고, 여론조사를 통해 대중들의 의식을 구체적으로 확인한 승가단체들은 종단개혁운동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으며, 이를 범종추의 조직적 뼈대와 운동적 목표, 사업계획 등을 발빠르게 마련하여 3월 26일 중앙승가대 대강당에 500여 명의 청년승가가 모여 범종추를 출범시키기에 이른다.
(3) 3.29법난에서 4.10승려대회까지
쪾3월 26일 : ‘구종법회’ 입재
일련의 사건로로 종단개혁의 명분과 대중적 지지를 획득한 범종추는 출범하자마자 ‘종단개혁을 위한 구종법회(이하 구종법회)’를 계획하고 원로스님들과 종회의원, 심지어는 총무원 관계자들까지 만나면서 개혁에 대한 동참을 호소하는 등 전면적인 종단개혁운동의 포문을 열었다. 3월 26일 범종추는 조계사에서 구종법회 입제식을 갖고 청화, 시현, 도법스님 등 각 단체 대표자들이 서원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단식투쟁에 돌입한다.
쪾3월 28일 : 단식투쟁 확산과 총무원 청사 농성
28일에는 조계사에서 ‘종단개혁 촉구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이때부터 남지심씨 등 재가불자들도 단식투쟁 대열에 합류하면서 종단개혁운동의 외연이 승가에서 재가까지 확대된다. 구종법회 참가인원도 점점 증가하여 28일 저녁에는 ‘종단개혁을 위한 결단의 밤’ 행사를 마치고 100여 명의 스님들이 총무원 청사에서 기도정진에 들어갔다.
쪾3월 29일 : ‘3·29 법난’ 발생
다음 날인 3월 29일에는 새벽부터 하루종일 종단개혁운동의 분기점을 맞는 사건이 발생했다. 29일 새벽 6시 30분 경에는 서원장측에서 동원한 조직폭력배들이 총무원 청사에 난입하여 농성을 하고 있던 대중들을 무차별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다음 날 한겨레신문에 사진과 함께 크게 보도되어 서원장측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가하면서 국민 여론의 방향이 잡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폭력배들의 청사 진입은 실패로 끝났으나, 아직도 정치권력의 지원을 받고 있다고 확신한 서원장의 폭력적 대응방식은 시작에 불과했다. 공권력의 묵인 하에 동원한 폭력배들로도 해결이 안 되자 서원장은 29일 저녁 최후의 카드를 내민다. 공권력을 투입하여 농성중이던 대중들을 무차별 구타 연행한 것이다. 경찰 투입은 오후 6시에 이루어졌고, 농성중이던 스님과 재가불자 476명이 연행되었다. 이처럼 서원장이 여론의 지탄을 예상하고도 무리수를 쓴 이유는 30일로 예정되어 있는 중앙종회에서 3선을 관철시키기 위해서였다. 김영삼 정부도 당시 상황을 안이하게 인식하여 서원장 3선이 성공하기만 하면 사태가 진정될 수 있다고 오판한 것으로 보인다.
쪾3월 30일 : 서원장 3선 강행
오전 8시 경찰은 조계사 법당에서 철야정진하고 있던 대중들을 모두 연행하고 조계사를 원천봉쇄한다. 공권력의 노골적인 비호 아래 서원장은 재적의원 73명 중 57명의 참석과 56명의 찬성(1명 기권)으로 총무원장에 당선된다. 서원장의 승리로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중앙종회 내부에서부터 3선 무효 선언이 터져 나왔고, 범종추는 3월 29일 사건을 제2의 법난으로 규정하고 대정부투쟁을 포함한 총력투쟁을 선언하였으며 서원장과 공권력에 대한 여론의 지탄도 점점 거세졌다. 조계사에서 쫓겨난 범종추 지도부는 중앙승가대로 지휘부를 옮기고 무기한 단식을 결의하는 등 투쟁의 전열을 재정비하는 데 매진한다.
쪾3월 31일 : 반 서원장 대열에 언론의 가세
종단개혁운동을 계획하면서 최소한 공권력의 중립을 예측했던 범종추 지도부는 공권력의 무자비한 탄압에 적지 않은 위기의식을 가졌다. 서원장과 정치권력의 공생관계가 얼마나 강고한지 다시금 확인되었고, 이는 종단개혁세력에게 넘기 힘든 벽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때 일반언론들이 반 서원장 대열에 대거 가세하면서 상황은 급반전하게 된다. 3.29법난을 계기로 국내의 거의 모든 언론들은 총무원과 조직폭력배의 관계, 총무원과 김영삼 정부와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며 서원장과 정부의 도덕성에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여론의 움직임에 힘을 얻은 범종추는 발빠르게 전열을 재정비한 뒤 31일 국무총리와 내무부장관 항의방문을 결행하고, ‘서의현 총무원장과 조직폭력배, 공권력의 구조적인 폭력행사’에 대한 기자회견을 개최한다.
쪾4월 2일 ∼ 4월 6일 : 정권의 태도변화, 서의현 체제 붕괴 초읽기
3.29법난의 여파로 서원장 퇴진 목소리가 전 불교계로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원로 스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월하, 관응, 혜암, 화산 스님 등은 ‘원장 3선 거부’와 ‘범종추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했고, 전 종정 서옹 스님은 “서원장을 즉각 퇴진시키고 승려대회를 개최하라”는 말씀을 내렸다. 그동안 서원장 퇴진과 종단개혁에 대해 조심스런 입장을 보였던 원로 스님들이 공개적으로 나섬으로써 종단개혁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아하게 된다. 5일에는 조계종 원로회의가 ‘서의현 총무원장의 3선 연임과 임시 중앙종회 무효’를 선언하고, ‘정부의 공권력 투입에 유감’을 결의한다. 또 불교지성인 419명은 ‘재가불자들의 종단개혁 동참’을 결의하고 ‘서의현 총무원장 퇴진’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때부터 범종추의 투쟁노선도 그 동안 ‘서원장 퇴진’에만 집중하던 것에서 ‘대정부규탄’도 함께 병행하는 것으로 변화한다. 상황이 이렇게 급반전하자 조계종 사태가 자칫 문민정부의 개혁성에 돌이킬 수 없는 흠집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한 김영삼 정부의 태도가 180도 변하기 시작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4월 6일 이회창 총리에게 ‘조계사 폭력사태 철저수사와 관련자 엄중처벌’을 지시하였다. 이는 정부가 불교계와 국민들의 여론을 반영한 것으로 서원장과의 단절을 의미했다. 종권의 유일한 지지자이자 기반이었던 정치권력이 등을 돌리자 서원장 체제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실제 서원장은 4월 6일 종단개혁세력을 폭도로 매도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정치권력의 미묘한 흐름을 감지하고 취소했던 것으로 드러난 바 있다.
쪾4월 7일 ∼ 15일 : 승려대회 성공, 개혁회의 출범
7일 범종추는 최형우 내무부장관과 서원장을 검찰에 고발하고, 전국승려대회 준비에 돌입한다. 서원장을 지지하던 서암 종정은 9일 ‘승려대회 금지’ 교시를 발표하지만 종단개혁의 거대한 흐름을 돌려 세울 수는 없었다. 10일, 수천 명의 납자들이 조계사에 모여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한다. 이날 승려대회에서는 종단의 입법, 사법, 행정권을 총괄하는 개혁회의 출범을 결의하고 개혁회의 의장에 월하 스님을 선출했다. 또한 서암 종정을 불신임하고 서원장에 대해 ‘체탈도첩’을 결의했다. 승려대회에 참가한 대중들은 대회 직후 총무원 청사 접수를 시도하였으나 경찰병력에 의해 가로막혔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스님 122명을 연행하였고, 다수 스님들이 부상을 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원로 스님 6명은 총무원 청사에서 단식농성에 돌입한다. 개혁회의는 이날의 경찰폭력에 대해 법난으로 규정, 11일 ‘4.10법난에 대한 조계종 개혁회의의 입장’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원로회의는 ‘조계종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조계종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교계단체는 물론 민족문학작가회의 등 다수의 시민단체들이 승려대회 지지 및 정부의 공권력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종단의 대세를 파악한 정부도 11일 문화체육부 차관을 조계사에 보내 정부 입장 해명을 시도하지만 3.29, 4.10법난에 대한 대중적 공분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4월 13일 조계종 개혁회의가 총무원 청사를 접수하고, 조계종 원로회의는 승려대회 결의사항을 추인하였다. 경찰병력도 철수하였다. 4월 15일 조계종 제10대 중앙종회가 임시회의를 개최 모든 권한을 개혁회의에 이양하고 해산을 결의하면서 종단개혁의 서막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
3) 개혁회의의 출범과 3대 개혁과제
3.29 구종법회와 4.10 승려대회를 통해 8년 아성의 서원장 체제를 무너뜨리고 등장한 개혁회의는 4월 18일 총무원 청사에서 현판식을 갖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22일에는 1차 본회의를 개최하여 총무원 집행부 및 개혁회의 위원 명단을 발표, 향후 종단개혁을 추진할 주체를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개혁회의 의원 중에는 과거 서원장 체제에 결탁하거나 구시대적 종단정치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는 향후 종단개혁의 내용과 폭을 결정 짓는 주요 변수가 되었고, 종단개혁 주체세력의 조직적 한계를 나타내는 결과이기도 했다.
개혁회의는 불교자주화, 제도개혁, 인적청산 등의 3대 개혁과제를 표방했다. 아울러 개혁회의 의원들은 개혁회의가 한시적인 조직체임을 분명히 했고 6개월 간의 개혁작업을 마무리하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약속을 대중에게 천명했다. 이는 종단개혁의 순수성을 지키는 한편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의 음해와 역공에 대비한 원칙적인 선언이었다.
(1) 불교자주화
개혁회의는 임시 집행부를 구성하고 우선적으로 3.29법난에 대해 ‘최형우 내무장관 퇴진과 김영삼대통령 공식사과’를 요구하는 운동에 집중하였다. 종단개혁의 주요 주체였던 범종추 소속의 젊은 승려들과 재가불자들은 당시 종단개혁운동의 본질을 불교자주화에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으며, 개혁회의는 이를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불교자주화에 대한 개혁회의와 범종추 및 재가불자들의 인식 차이는 점점 벌어졌다.
개혁회의 초기 불교자주화에 대한 대중들의 요구는 뜨거웠다. 1천 3백여 대중들이 검찰청사로 몰려가 책임자 고발운동을 전개했고, 전국 사찰에 정부를 규탄하는 대형현수막을 걸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불자들의 요구에 정부측의 대응은 형식적으로 일관했다. 내무장관 사퇴와 대통령의 사과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6월 16일 최형우 내무장관이 총무원을 방문하여 법난사태에 대한 유감표시를 하는 정도에서 마무리하려 했다. 그러나 최 내무장관의 방문은 불자들의 대정부 규탄 정서를 더욱 자극할 뿐이었다.
원로회의도 6월 20일 회의를 개최하여 “최형우 내무장관 유감 방문을 사과로 받아들이기 미흡하다”는 입장을 표명했다.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총무원과 개혁회의는 정부와의 불편한 관계를 빨리 해소해야 한다는 현실론이 퍼졌다. 급기야 7월 11일 개혁회의 내부의 합의도 없이 월하 종정이 청와대를 방문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는 종단개혁운동 추체세력 간의 균열을 일으키며 큰 파장을 만들었다. 이때부터 개혁회의의 불교자주화 쟁취를 위한 대정부투쟁 기조는 급속히 후퇴하게 되었다.
(2) 제도개혁
개혁회의는 5월 들어서면서 제도개혁을 위한 법제화작업에 본격 돌입한다. 제도개혁의 방향은 참종권 확대, 삼권분립을 통한 견제와 균형 확보, 중앙종단 재정확보 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제도개혁의 길은 순탄치 않았다. 특히 종헌개정은 개혁회의 의원들 사이에 현격한 시각차이가 드러났다. 사실상 제정이나 다름없었던 종헌개정 작업은 8월 11일에 가서야 본회의에서 통과되었으나, 이번에는 원로회의가 ‘총무원장 선거 직선제’ 등의 조항에 수정지시를 하면서 난항을 거듭했다. 결국 총무원장 간선제 등의 방향수정을 거쳐 9월 27일에 가서야 종헌개정은 다시 본회의에 통과됐다.
원로회의의 종헌개정안 인준 후 개혁회의는 본격적인 제도개혁 작업에 들어갔다. 30여 개의 종법 제개정 작업에 들어간 개혁회의는 총무원장 및 종회의원 선거법 개정을 통해 종도들의 참종권을 확대했으며, 중앙종회의를 독립적인 의결기관으로 세우는 한편 종회의 기능을 강화하여 총무원에 대한 견제를 제도화했다. 또한 교육원과 포교원을 독립적인 별원으로 신설하여 불교 본래의 기능을 회복시켰으며, 직영사찰과 특별분담금 사찰을 지정할 수 있는 법규를 마련 재정의 중앙집중화를 꾀했다. 이 밖에도 사설사암 종단등록 의무화 및 삼보정재 유출을 방지하는 법안을 만들었으며, 제한적인 내용이지만 재가신도들의 사찰운영 참여의 길도 법제화하였다.
(3) 인적청산
개혁회의는 출범 직후 ‘해종행위조사특별위원회(이하 해종특위)’를 구성하여 인적청산 작업에 들어갔다. 해종특위는 총 143명의 조사대상자 중 9명을 체탈도첩시키고, 13명을 제적시키는 등 60명을 징계했다. 인적청산 작업은 당시 개혁 주체세력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할 수밖에 없었다. 구 종권에 참여한 인사 중 징계대상자에서 빠지는 경우도 있었고, 특히 개혁회의 의원 구성에 있어서는 극히 보수적이고 구시대적인 인물을 등용함으로써 인적청산에 대한 대중들의 시각은 매우 비판적이었다. 이러한 인적청산 작업의 한계는 이후 제도개혁과 불교자주화 운동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났고, 종단개혁의 제도화를 이루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했다.11월 24일 개혁회의는 해산식을 갖고 7개월 6일 동안의 활동을 마쳤다.
3. 94년 조계종 종단개혁운동, 무엇을 남겼는가?
종단개혁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먼저 전제되어야 할 것은 종단개혁운동이 가지고 있는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다. 특히, 주체의 문제를 명확히 했을 때 종단개혁운동의 성과와 한계는 분명해질 수 있을 것이다.
앞서도 살펴봤듯이 94년 조계종 종단개혁운동은 사부대중은 물론 전국민적인 지지와 성원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종단개혁운동이 사부대중의 지지를 받았다는 것이 곧 종단개혁의 주체가 사부대중이었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은 아니다.
종단개혁의 본격적인 시발점이 된 3.29구종법회에서부터 개혁회의 출범 때까지 ‘불교를 바로세우기 위한 재가불자연합’을 비롯한 각계의 재가불자들은 연일 열리는 집회 참가와 정부관계기관 방문, 시민사회단체 연대사업 등 승단의 외호하고 종단개혁의 대중적 지지기반을 구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서원장 퇴진 후 재가진영은 종단개혁에 제도적으로 동참하여 보다 근본적이고 원칙적인 불교개혁운동을 추진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승단은 개혁회의 구성 과정에서 재가불자의 참여는 허용치 않기로 방침을 정했다.
이에 재가불자연합은 4월 16일 개혁회의 상임위원장 탄성 스님 앞으로 정식 공문을 보내 개혁회의에 재가자의 참여를 보장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개혁회의는 재가자 대표성의 문제를 들어 이를 거절했고, 재가불자연합은 다시 ‘대표성을 띤 재가단체가 만들어질 때까지 공석으로라도 재가자의 참여를 보장하여 개혁회의 내에 재가불자의 지분을 인정해 달라’는 요구를 하였으나 이 역시 거절당했다. 이후 재가단체들은 대표성의 문제를 해결하고, 사부대중이 주인인 종단을 건설하겠다는 취지로 ‘전국재가불자연합’을 6월에 창립하기도 했으나, 개혁회의의 반응은 여전히 냉담했다.
결론적으로 94년 종단개혁운동은 ‘젊은 승가에 의한 승단 내부 질서의 개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개혁 초기, 즉 서원장 체제를 무너뜨리기 까지는 주체의 성격을 명확히 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재가불자들도 정부권력을 등에 없고 저항하는 서원장 체제에 맞서 조직적인 활동을 해왔고, 4월 13일 개혁회의가 총무원 청사에 현판을 걸기까지 목숨을 건 투쟁에 동참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구 종권체제에 대한)‘파괴의 과정’에서 재가불자들의 역할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새로운 종단체제의)‘건설의 과정’에서 재가불자들은 철저히 배제됐다. 일부 재가불자들이 종무원으로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이는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이고, 당시 ‘파괴의 과정’에서 형성된 조직적인 재가불자 진영은 개혁회의로부터 아무런 지위와 역할을 부여받지 못했다. 결국 건설의 과정에서 아무런 지위와 역할을 부여받지 못한 재가불자들은 종단개혁운동에 있어서 단순한 조력자 또는 연대조직 정도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개혁을 논함에 있어서 주체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주체에 따라서 종단개혁운동의 관심과 범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는 승단이 유일한 주체였던 94년 종단개혁운동이 개혁회의 출범 이후 보여준 개혁과제의 선정과 이의 추진과정을 되짚어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특히, 서원장 퇴진의 결정적 역할을 했던 ‘불교자주화’ 운동이 개혁회의에 의해 무력화되는 과정은 이를 여실히 증명해 준다.
개혁회의의 3대 개혁과제 중에서 제일 먼저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이 바로 불교자주화 문제다. 7월 11일 3.29법난에 대한 불교계의 요구사항이 전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종정 월하 스님과 총무원장 탄성 스님은 청와대를 전격 방문한다. 이에 앞서 총무원은 7일 전국 교구본사에 긴급전문을 보내 3.29법난과 4.10법난에 대한 대통령 사과 및 내무장관 해임을 요구하는 현수막의 철거와 1백만 서명운동을 중지하라고 지시했다. 이는 불교자주화의 포기 선언에 다름 아니었다. 재가단체들을 비롯 범종추와 개혁회의 내부에서도 강한 반발이 있었지만 개혁회의 총무원은 소송문제 등 종권을 위협하는 요소를 정부권력에 의존하여 해결하려는 방침을 고수했다.
범종추와 불자 대중들로부터 종단개혁과제를 위임받은 개혁회의는 종단개혁운동의 핵심과제였던 불교자주화를 스스로 포기하고, 종권 유지를 위해 정치권력에 의존하는 구태를 재현함으로써 종단개혁운동 전반에 적지 않은 흠집을 냈다. 재가불자들을 중심으로 개혁회의에 대한 실망감은 결정적으로 확산되었고, 가장 어려울 때 개혁의 기치를 들었던 젊은 승가도 허탈감에 빠졌다. 이처럼 개혁회의가 개혁의 최대 명분을 스스로 버린 것은 불교계 자주화운동의 근본적인 한계로부터 기인한다. 형식적인 자주화 운동이 갖는 치명적인 한계이다. 자주화 운동이 대정부 투쟁에만 국한되어 진행됐을 뿐 불교가 정치권력에 예속될 수밖에 없었던 내부 요인에 대해서는 전혀 수술을 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불교자주화 문제가 아무런 성과도 없이 마무리 되었던 것은 종단의 인적 개혁과도 직결된다. 종단개혁의 3대 과제 중 하나인 인적 개혁은 젊은 승가라는 개혁주체세력의 태생적 한계로부터 출발해야 하지만, 개혁회의 의원 구성 과정에서 보여준 원칙 없는 인선은 향후 개혁과정이 결코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개혁세력이 종단운영 경험이 없고, 개혁의 완성을 위해서는 일부 보수기득권 세력을 견인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구시적 인물로 비난받았던 승려들이 상당수 개혁회의에 진출하였다. 이들은 예견했던 대로 종헌 종법 개정 과정에서 기득권층을 적극적으로 대변했고, 제도개혁와 불교자주화 문제, 인적 개혁 전반에 걸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결론적으로 94년 조계종 종단개혁운동은 ‘젊은 승가에 의한 승단 내부 질서의 변화’ 정도를 이끌어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지나치게 전근대적인 종단운영구조의 변화는 적지 않은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7년이 경과한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그 동안 불교개혁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의식개혁과 수행풍토의 개선이 전혀 진전됨이 없고, 당시 종단개혁세력이었던 젊은 승가도 제도 정치권에 대부분 편입되어 98, 99년 사태와 같은 참혹한 상황을 막을 수 없었던 오늘의 현실은 94년 조계종 종단개혁운동에 대해 근본적이고도 비판적 평가가 진행되어야 할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2) 1980~90년대 불교 운동단체의 대두
한편, 종단 제도권의 이러한 격변과 관계없이 청년 승려와 재가불자들은 1980년 민주화의 봄과 5․18 광주항쟁 등을 거치며 민주시민의식이 높아졌고, 특히 10․27 법난을 겪게 되자 사회민주화운동을 지향하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소위 “寺院化 運動”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는데, 초기불교의 무소유 정신의 승가공동체를 이상으로 삼아 ‘세간의 승가화, 승가의 세간화’를 목표로 삼아 실천운동을 전개하다가 정권의 탄압을 받기도 하였다.
1981년 청년승가육화대회, 대학생불교연합회 지도법사단 활동, 그리고 1983년 7월에 범어사에서 열린 전국청년불교도연합대회 등의 활동은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민주화운동의 지향을 담고 있었다.
불교계 내부의 사회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높아갈 시점인 1983년 8월에 설악산 신흥사에서 주지직 다툼으로 살인 사건이 일어나 교계 안팎에 큰 파문을 던졌다. 이에 청년 승려와 재가불자들은 총무원 집행부의 퇴진과 종단 개혁을 주장하며 조계사에서 농성을 하였으며, 그 해 9월에 조계사에서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하여 불교개혁과 정법수호운동을 천명하고 비상종단운영회의 설치를 결의하였다. 종단의 도덕성이 심각한 불신을 받았던 비상한 상황에서 출범한 비상종단운영회의는 제도개혁위원회를 구성하여 개혁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당시 비상종단은 청년 승려들이 중심이 되고 원로들의 지지를 받아 탄생하였는데, 청년 승려들의 ‘신도의 종단 운영 참여를 골자로 하는 신도법 제정과 재가 신분의 교화승 제도 신설’ 등 종단의 운영 틀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자 중진, 원로의 반발을 불러 왔고 급기야 성철 종정의 사퇴 파문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비상종단은 종단의 신도 참여를 통한 운영 틀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 하는 급진적인 개혁안은 승려 대중의 반발로 실현할 수 없었다.
한편 1980년대 초에 청년 승려와 재가불자를 중심으로 형성된 민중불교운동은 1983년 비상종단 시기 제도 개혁에 참여하였다가 실패한 이후 1985년 5월에 민중불교운동연합을 출범시켜 불교의 자주화와 사회의 민주화 운동을 추진하였다. 이어서 1986년 6월에는 청년 승려들이 ‘불교정토구현승가회’를 창립하여 종단 개혁과 사회 민주화를 지향하였다.
1986년 9월 7일에 열린 해인사에서 개최된 승려대회는 불교 현대사에서 획을 그은 사건으로 평가된다. 종단 청년 승려들이 주도한 대회는 2천여 승려들이 참여하여 ‘불교 자주화, 사회의 민주화’를 천명하면서 불교 관계 악법의 철폐, 사찰의 관광유원지화 중지, 부천서 성고문사건 진상규명, 10․27법난 해명 등을 정부당국에 요구하였다. 더구나 이 대회에는 의현 총무원장이 참석하여 당시로선 금기시하였던 10․27법난을 거론하며 폭거로 규정하고 호국불교의 개념을 특정 정권의 비호가 아닌 국민을 위한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진행된 9․7 해인사 승려대회는 승려 대중의 의식이 변화하여 종단의 자주화와 사회의 민주화에 관심을 가지고 발언하기 시작하였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1988년 3월에는 대승불교승가회가 창립되었다. 9․7 해인사 승려대회를 주도하였던 소장 개혁 승려들이 ‘수행 정진․교화 방편․정토 구현’의 기치를 내걸고 산중불교와 민중불교의 한계를 넘어 대승불교 운동 전개를 목표로 하였다. 대승승가회의 활동은 1980년대 초의 청년 승려의 급진성을 극복하고 사회 민주화운동과 더불어 종단 제도 개혁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것은 승가 대중의 의식과 정서에 맞는 운동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승승가회의 일부 참여자들이 봉은사 주지직 다툼에 관여하면서 이 회는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1990년대 초반에 주목할만한 두 승가단체가 출범하였다. 먼저 주목할 흐름은 1990년 11월에 수덕사에서 중진 선승 80여명이 중심이 되어 창립된 ‘善友道場’이다. 선우도량은 ‘승풍 진작’과 ‘바람직한 수행자상 확립’을 기치로 승가 결사운동을 표방하였다. ‘結社’란 불교사에서 흔히 불교가 위기에 처했을 때 나타난 흐름으로 불교의 근본 정신으로 돌아가려는 사상운동이라 할 수 있다. 선우도량은 교계의 새로운 대안운동으로 주목받았는데, 매년 정기적으로 수련결사를 개최하여 ‘계율’, ‘간화선 수행’, ‘승려교육’, ‘사찰운영’ 등 다양한 주제들을 토론하고 바람직한 대안을 고민하는 장을 마련하였다. 한편 선우도량은 한국불교 근현대사연구회를 부설 기관으로 두어 정화사 정리를 비롯한 불교 근현대사의 1차 자료를 수집 정리하여 자료집으로 묶어내는 의미있는 사업을 전개하였다. 특히 선우도량은 승가의 교육과 수행에 관심을 가지고 종단의 제도개혁을 지속적으로 제안하고 대중적 공감대를 넓히려 다양한 노력을 시도하여 나아갔다.
한편 1992년 10월에는 ‘실천불교전국승가회’가 창립되었다. 실천승가회는 1980년대 승가운동의 계승과 극복을 목표로 하였는데, 그동안 소장 승려들이 종단 내부 문제보다 사회 참여에 중심을 두어 왔던 것을 반성하면서 종단 제도개혁에 실천적인 노력을 전개하였다. 실천승가회는 1993년 4월에 종단개혁을 위한 공개토론회를 거쳐 종회의원 직선제와 주요 소임의 겸직 금지를 골격으로 하는 종헌․종법 개정운동을 제안하였고, 7월에 종헌종법 개정을 위한 대중 서명운동을 전개하여 3개월만에 승려 2천여 명의 서명을 받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1990년 6월에 열린 중앙종회에서 제26대 총무원장 선거에서 의현 원장이 재선되었다. 이것은 1962년 통합종단 조계종 출범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때까지 총무원장은 임기 4년을 채운 적이 없었다. 그 정도로 종단이 불안정하였던 것이다. 종단 불안정의 원인은 대부분 宗權 갈등 때문이었다. 종권 갈등은 세 대결을 넘어 물리적 충돌(총무원 청사의 점거)이나 일반 법정에서 세속 판사의 판결로 정리되는 경우도 많았다. 이것은 정화 이후 종단 승려들이 종단의 문제를 계율에 의지하여 자주적이고도 민주적으로 해결하는 승가 공동체의 이념을 체득하지 못한 한계가 컸다.
3) 1994년 개혁회의의 개혁불사 추진
1994년은 한국불교현대사에서 또 하나의 분수령을 이룬 해였다. 1994년 1월, 석림동문회를 비롯한 8개 승가단체 대표들이 모여 공동으로 종단 개혁을 추진하기로 합의하였다. 3월에는 종단 개혁의 기치 아래 의현 총무원장의 3선 저지에 뜻을 모으고 ‘범승가종단개혁추진회(범종추)’를 출범시켰다. 당시 의현 원장은 정치권력과 연계된 상무대비리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사고 있었고, 종헌에 규정된 원장의 ‘重任’을 3선이 가능하다고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장기 집권 의지를 나타냈다. 이에 범종추를 중심으로 한 사부대중의 반대운동이 거세지자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경찰력과 폭력배를 동원하여 억압하려 하였다. 그러나 중앙 일간 신문에 불교계 폭력배 동원 사실이 크게 보도되어 사회적 파문이 확산되고 사부대중의 퇴진운동이 더욱 격해지면서 원로회의에서 승려대회 개최를 결정하게 되었다. 4월 10일 조계사에서 개최된 전국승려대회에는 원장 퇴진과 종단개혁을 지지하는 2천 5백여 승려가 운집하여 원장 퇴진과 과도개혁기구로 ‘改革會議’ 출범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불자 대중의 광범한 원장 퇴진과 종단 개혁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정치권력은 질서 유지라는 명분으로 경찰력을 동원하여 의현 원장을 지켜 주었는데, 4월 13일에는 범불교도대회를 다시 열어 1만여 사부대중이 정권의 불교 탄압을 규탄하고 대통령 공식 사과, 내무부 장관의 해임을 촉구하면서 광화문까지 가두 시위를 벌였다. 이 무렵 정권은 경찰을 철수시켰고, 의현 원장은 사퇴하여 마침내 사부대중의 원력으로 개혁회의가 출범할 수 있게 되었다.
1994년 4월에 출범한 개혁회의는 5대 활동 지표를 ① 정법종단의 구현, ② 불교 자주화 실현, ③ 종단 운영의 민주화, ④ 청정 교단의 구현, ⑤ 불교의 사회 역할 확대로 설정하였고, 10대 실천 공양으로 ① 불교의 근본 정신 회복 및 승단 위계 질서 확립, ② 교단의 자주성 확립 및 불교 관련 악법 개폐, ③ 교단의 민주적 운영과 재산 공개, … ⑥ 승가교육체계 수립 진행, … ⑧ 포교 활성화 및 사회복지사업 추진, ⑨ 재가불자 종단 참여 모색 … 등을 발표하였다.2) 이와 같이 개혁회의는 안으로는 종단 제도 개혁과 대외적으로는 불교의 자주화와 사회 활동의 확대를 목표로 하였다.
한편 개혁회의는 3선을 강행한 전 원장을 퇴진시키는 과정에서 정치권력이 공권력을 투입하여 비호한 것을 불교 종단의 자주성을 침해한 탄압으로 규정하고 대통령 사과와 책임자 사퇴를 요구하면서 100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하였는데, 당시 경찰을 지휘한 내무부 장관이 조계사 대웅전을 참배하고 종단 지도부에게 사과하는 것으로 해소되었다.
1994년 개혁회의의 종단 개혁불사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종단의 제도개혁과 人的 淨化가 그것이다. 먼저 제도개혁의 측면에서 개혁회의 6개월 여 활동 기간에 종헌종법을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대폭 개정하였다.
첫째, 청정 수행 가풍을 진작하고 제도화하였다. 즉, 종헌에 “수행”章을 신설하여 叢林과 禪院 등 수행기관의 내용을 규정하였으며, 더 나아가 선원을 기초선원과 전문선원으로 구분하고, 기초선원 이수자는 승가기본교육을 이수하는 것을 제도화하여 참선 기본교육을 통해 참선 전문 인력 육성을 제도화하였다.
둘째, 종단 승가 교육체계를 종헌에 제도화하였다. 기초교육 → 기본교육 → 전문․특수 교육 → 재교육의 체계는 1994년 개혁회의의 종헌 개정을 통해 처음으로 제도화되었다. 이에 따라 승려가 되기 위한 기초, 기본 교육은 의무화되었다. 즉 이전에는 출가자가 행자과정을 거쳐 비구계를 받으면 곧바로 승려가 될 수 있었으나 이 개혁 이후로는 최소한 4년 6개월 이상의 의무교육을 이수해야 정식 승려가 될 수 있게 되었다.
셋째, 종단 주요 소임의 상호 겸직을 금지하여 권한의 집중을 막고 권력의 남용을 경계하였다. 총무원장과 부장, 국장, 교구본사 주지 등 집행부의 종회의원 겸직을 금지하였다.
넷째, 모든 사찰에 운영위원회, 교구본사에는 교구 종회 구성을 의무화하여 사찰이 공의에 의해 민주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제도화하였다.
다섯째, 교육․포교․복지사업의 활성화를 위하여 교육원․포교원․사회복지원의 별원 신설을 제도화하였다. 특히, 교육 및 포교를 강화하기 위하여 인사권 및 예산권을 독립적으로 보장하면서 각 원장의 임기를 5년으로 보장하여 보다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제도화하였다.
일곱째, 종도의 참종권과 민주주의 원리를 제도화하기 위하여 총무원장 선거권을 300여명이 넘게 확대하였고, 교구본사 주지, 중앙종회의원, 교구종회의원 등도 직선으로 선출토록 하였다.
아홉째, 승려 개인이 사찰과 법인을 설립하였을 때에는 종단 등록을 의무화하고 이를 위반할 때에는 종단의 권리를 제한하였다.
이러한 방향의 종헌종법 개정을 통한 제도 개혁과 더불어 해종 행위자에 대한 조사와 징계를 단행하여 60명에게 문서견책 이상의 징계를 하였고, 그 중에서 9명을 종단에서 추방하는 멸빈 조치를 하였다.
이와 같이 개혁회의는 종단의 운영제도를 수행과 교육․포교 중심으로 개선하고 청정성과 민주성을 제도화하면서 종단의 청정성과 자주성을 훼손시킨 승려들을 정화하는 방향으로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개혁회의는 1994년 11월에 제28대 총무원장 선거를 시행하여 새 원장을 선출하고 해산하였다. 곧이어 취임한 월주 원장의 제28대 총무원은 개혁회의의 개혁정신을 계승 발전시키는 것을 제일 과제로 천명하였다.
“개혁종단”이라 불리는 제28대 총무원은 출범 초기에 종단 운영의 네 가지 기본 방향을 천명하였다. 첫째, 개혁불사의 정신을 계승하여 새로운 제도를 시행․정착시키고, 둘째, 교단의 자주성과 대정부 현안 문제를 해결하며, 셋째, 이타자리의 보살행 실천을 통한 종단의 대사회적 역할과 위상을 강화하고, 넷째, 종단 운영의 공개화, 민주적 의사 결정 구조의 정착화, 종무행정의 체계화이다.
개혁종단은 개혁회의가 전면 개정한 종헌․종법의 의거하여 새로운 종단 운영제도를 정착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승가 교육체계의 시행과 정비, 교육원․포교원 별원화의 정착, 사찰 운영위원회․중앙신도회의 구성, 사설 사암 및 법인 관리 등 새로 개정된 종법령의 정착과 미비한 제도를 보완하기 위하여 3년여 간 45개의 종법령을 개정하였다.
또한 개혁종단은 조계종 승려가 사설 사암 및 법인을 설립하였을 경우 종단 등록을 의무화하도록 한 개정 종헌을 엄격히 시행하였다. 그리하여 승려가 이를 위배하여 사찰이나 법인을 임의로 소유한 경우 일체의 공직에 취임할 수 없도록 제한하고 그 상좌도 종단 교육 혜택을 제한하였다.
이와 같은 개정 종헌의 사설사암 및 법인의 임의 소유를 금지한 규정으로 인하여 이후 조계종단은 (재)선학원과 상당한 갈등 양상을 나타냈다. 이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한국불교의 전통과 자주성을 수호하기 위해 설립되었고, 해방 이후 개혁과 정화 과정에서 산실의 역할을 한 선학원이 조계종단과 관계 설정을 시대에 맞게 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조계종단의 정체성 정립은 물론 스스로의 존재 의의도 도전받게 된 것이다. 이 관계 정립의 문제는 제30대 총무원까지 지속적으로 논란이 되다가 일단락 되었다.
그러나 개혁종단은 사설사암 소유에 강력한 제재조치를 취하여 3년 간 220여 개의 사설사암의 토지 36만평, 자산 가치로 2천여 억 원 이상의 종단 자산 증대의 효과를 가져 왔다. 이것은 이전 대비 185% 증가한 것으로 이러한 개혁조치가 실제 효과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 1998~99년 종단 분규의 재연
개혁종단인 제28대 총무원은 개혁정신을 계승하면서 종단 운영에 일대 쇄신을 가져왔고, 종단 안정화와 종도 화합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 비교적 안정된 종단 운영이 되었다. 그러나 1998년 10월 제29대 총무원장 선거를 앞두고 다시 갈등이 재연되었다. 종단 갈등이 시작될 무렵 갑자기 종정이 총무원 집행부의 입장에 반대하는 입장을 내놓아 분규가 확산되었다. 1998년 11월 宗正의 지지를 명분으로 한 일단의 반 집행부세력이 폭력을 동원하여 총무원 청사를 점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250여명의 승려들이 조계사에 모여 전국 승려대회를 개최하여 중앙종회 해산과 총무원장 해임, 그리고 ‘淨化改革會議’의 출범을 결의한 뒤에 총무원 청사를 점거하였다. 이들은 총무원 청사를 불법적으로 점거한 상태에서 폭력을 행사하며 총무원장 선거를 방해하여 무산시키고 소위 비상과도기구로 ‘정화개혁회의’를 출범시켰다.
이와 같은 사태에 직면하여 제28대 총무원은 종헌종법 질서 수호를 대의명분으로 ‘정화개혁회의’의 총무원 청사 퇴거와 해산을 요구하였으나 이것이 무시되자 11월 30일 전국승려대회를 소집하여 1천 5백여 명의 승려대중의 원력으로 해산을 시도하였으나 ‘정화개혁회의’측의 강력한 저항으로 물리적 충돌만 빚고 말았다. 이에 총무원 집행부는 공권력의 협조를 빌려 해산시킬 수밖에 없다는 판단으로 세속 법원에 ‘정화개혁회의’의 퇴거 단행 가처분 소송을 제기, 승소하여 12월 23일 경찰력의 협조를 받아 43일만에 총무원 청사를 되찾고 종헌 질서를 회복시켰다.2)
1998년 12월 29일 제29대 총무원장 선거가 이루어져 새 원장이 선출되었다. 제29대 총무원은 종단 분규가 재연되어 실추된 종단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하여 ‘初發心回復運動’을 전개하고 출가 수행자를 비롯한 2천만 불자들이 초심으로 돌아가 청정종풍을 되살리자고 촉구하였다. 이어 1999년 9월에는 조계사 성역화사업추진위원회를 출범시켜 분규의 상징으로 비춰지던 총무원 청사를 허물고 새 건물을 짓는 불사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1999년 10월 1일 서울지방법원 민사재판부는 ‘정화개혁회의’측이 제기한 총무원장 직무정지 가처분 소송에서 “총무원장 선거법 개정 임시 중앙종회의 공고 절차에 문제가 있어 그 선거법에 의해 당선된 총무원장은 자격이 없다”고 판결하였다. 이것은 1998년 소위 ‘정화개혁회의’에 참여한 해종행위자들이 세속 법정에 해종 행위 소송을 자행하여 빚어진 불행한 사태였다.
이에 원로회의와 총무원 그리고 중앙종회 등 종단 제 기관은 공동으로 종단 법통 수호를 천명하고 10월 12일 ‘불교 자주권과 법통 수호를 위한 사부대중 궐기대회’를 열어 재판부의 오판을 규탄하고 사태의 원만 수습을 결의하였다. 해종 행위자들의 세속 법정 소송에 대처하여 사부대중의 지혜와 원력으로 수습해 나간 조계종단은 1999년 11월 15일 제30대 총무원장 선거를 시행하여 새 원장(정대스님)을 선출하고 21세기 2000년대를 맞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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