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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며느리의 감동글

淸潭 2024. 8. 26. 14:30

어느 며느리의 감동글

 

요즘 이런 며느리 보면 얼마나 좋을까요

 

시어머니가 올라오셨다.

결혼한 지 5년이 되었지만, 우리 집에 오신 것은 결혼 초 한 번을 빼면 처음이다.

 

청상과부이신 시 어머니는 아들 둘 모두 남의 밭일 논일을 하며 키우셨고, 농한기에는 읍내 식당 일을 해가며 악착같이 돈을 버셨다고 한다.

 

평생 그렇게 일만 하시던 시 어머니는 아들 둘 다 대학 졸업 시키신 후에 일을 줄이셨다고 한다.

 

결혼 전 처음 시댁에 인사차 내려갔을 때 어머니가 그러셨었다.

 

"고생도 안 해 본 서울 아가씨가 이런 집에 와보니 얼마나 심란할꼬.

집이라 말하기 민망하다.

가진 거 없는 우리 아이랑 결혼해 준다고 해서 고맙다."

 

장남인 남편과 시동생은 지방에서도 알아주는 국립대를 나왔고, 군대 시절을 빼고는 내내 과외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등록금을 보태고 용돈을 썼다고 했다.

주말이나 방학에는 어머니를 도와 농사일을 하느라 연애는 커녕 친구들과 제대로 어울리지도 못했다고 했다.

그렇지만 주변에 늘 좋다는 친구들 후배들이 줄줄 따른다.

둘 다 대학 졸업 후 남편은 서울로 취업을 해서 올라왔다

그리고 회사에서 나를 만났다.

나는 서글서글한 외모에 건강하게 그을린 얼굴이 좋았다.

건강하고 밝은 성격에 회사에서도 그는 늘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됐고, 내가 먼저 고백했다.

그는 망설였다.

자기는 가진 거 없는 몸뚱이 하나뿐인 사람이라고.

하지만 나는 이미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 후였고, 삼고초려 끝에 그는 나를 받아 주었다.

 

그의 집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이 그를 우리 집에 데려갔다.

 

그의 외모와 직업에 우리 부모님은 그를 반겨주었다.

집이 지방이고 어머니가 농사를 지으신다고 했을 때 엄마 얼굴이 어두워졌다.

당장 가진 거라고는 월세 원룸 보증금과 얼마간의 저축이 전부다 했을 때 아빠가 담배를 피우셨다.

 

그가 말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자랐지만, 허리 한번 못 펴시고 우리 형제 위해 평생을 밭에서 엎어져 살아온 어머니께 배운 덕분으로 어디 가서도 영은이 굶겨 죽이지 않을 자신 있습니다."

"공주처럼 고이 키우신 딸, 고생문이 훤하다 걱정되시겠지만, 그래도 영은이에 대한 저의 사랑, 열심히. 당당하게 살 각오가 되어있는 제 결심 이것만 높이 사 주십오.

 

우리는 그렇게 결혼했다.

 

친정아버지가 마련해 주신 돈과 회사에서 받은 전세자금 대출로 신혼집을 마련하고, 그와 내가 모은 얼마간의 저축으로 혼수를 했다.

너무 행복했다.

결혼 후 처음으로 시댁으로 내려갔다.

 

마침 어버이날과 어머니 생신이 겹쳤다.

일부러 주말을 잡아 내려갔다.

시동생도 오고 어머니와 마당 평상에서 고기도 구워 먹고 밭에서 상추를 뜯어다 먹는데 그 맛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삼겹살이었다.

그날 밤 작은방에 예단으로 보내 드렸던 이불이 깔려 있었다.

 

어머니는 한 번도 그 이불을 쓰시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우리 더러 그 방에 자라고 하신다.

싫다고 뿌리치는 어머니 손목을 끌어 작은방으로 모셨다.

"어머니하고 자고 싶어요.

신랑은 도련님하고 넓은 안방에서 자라고 할 거예요.

어머니랑 자고 싶어요."

 

어머니는 목욕도 며칠 못했고, 옷도 못 갈아입었다고, 이불 더럽혀지고 네가

불편해서 안된다.

냄새나 안된다고 자꾸 도망가려 하셨다.

그런 어머니께 소주 마시고 싶다고 함께 소주를 먹었다.

 

어머니가 찢어 주시는 김치가 너무 맛있어서 소주를 홀랑홀랑 비우고 취해 잠들어 버렸다.

자다 목이 말라 깨어 보니 나는 이불 한가운데 누워자고 있고 어머니는 겨우 머리만 요에 얹으신 채로 방바닥에 쪼그리고 주무시고 계셨다.

슬쩍 팔을 잡아 요위에 끌어 드렸다.

"야야~ 고운 이불 더럽혀진다.

냄새 밴다..."

어머니에겐 냄새가 났다.

정말 울 엄마에게 나던 화장품 냄새를 닮은 엄마 냄새가 아닌, 뭐라 말할 수 없는 부뚜막 냄새 흙냄새 같은...

그 냄새가 좋아서 나는 내려갈 때마다 어머니와 잔다.

 

이제는 손주와 주무시고 싶다며 나를 밀쳐 내시지만 악착같이 어머니 한쪽 옆자리는 나다.

어떤 밤이던가 어머니 옆에 누워 조잘거리던 내게, "니는 꼭 딸 낳아라.

이래서 사람들이 딸이 좋다 하는가 보다.

네가 이래 해 주니 네가 꼭 내 딸 같다.

뒷집이고 옆집이고 도시 며느리 본 할망구들 다 나 정말 부러워한다.

며느리들이 차갑고 불편해해서 와도 눈치 보기 바쁘다 하더라.

뭐 당연하다.

내도 네가 첨 인사 왔을 때 어찌나 니가 불편하진 않을까고, 싫다 진 않을까 걱정을 했던지...

말도 못 해.

근데 당연한 거 아이가...

그러니 딸이 좋다 카는 거지...

나는 네가 아래 딸처럼 대해주니 뭐 딸 없어도 되지만 니는 꼭 딸 낳아라..."

 

진작부터 혼자 계시던 어머니가 걱정이었는데 결국 사달이 났다.

상을 들고 방에 들어가시다 넘어지셔서

가뜩이나 퇴행성 관절염이 심한 다리가 아예 부러지셨다 했다.

 

도련님이 있는 대구 병원에 입원을 하셨다.

노인이라 뼈도 잘 안 붙는다고 철심도 박고 수술하고 3개월을 그렇게 병원에 계시다가 지난주 퇴원을 하셨다.

어머니가 뭐라거나 말거나 그 사이 나는 내려가서 간단히 어머니 옷가지며 짐을 챙겨 우리 집에 어머니 방을 꾸렸다.

아들 녀석은 할머니가 오신다고 신이 나있고, 표현할 줄 모르는 남편은 슬쩍슬쩍 그 방을 한 번씩 들여다보며 웃는 것을 나도 안다.

당연히 우리 집에 곱게 오실 리가 없다.

 

"어머니! 저 둘째 가져서 너무 힘들어요!!

우리 친정엄마는 허구한 날 노래교실에, 뭐에 승민이도 잘 안 봐 주시고, 제가 회사에 임신에 육아에 힘들어 죽겠어요!

와서 저 좀 도와주세요!

임신하니까 어머니 음식이 그렇게 땡겨 죽겠단 말이에요!

어머니 김치 담아 주세요~"

그 말에 못 이기는 척 어머니가 오셨다.

친구들이 말했다.

"니가 모시고 살아봐야 힘든 줄을 알지.

착한 며느리 노릇 아무나 하는 줄 알아?"

그래 맞다.

내가 안 해봐서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머니와 살면서 힘든 일이 생기고 어쩌면 어머니가 미워 질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럴 때마다 내 마음을 다잡기 위해 이렇게 글을 쓰고 올린다.

 

여기 많은 분들이 이렇게 증인이니, 혹여나 어머니가 미워지고 싫어져도 나는 이제 어쩔 수 없다.

그냥 이게 내 팔자려니 열심히 지지고 볶고 하면서 같이 사는 수밖에...

승민 아빠 사랑해!

 

~ 좋은 글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