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문학/좋은글

포기 하지 마, 우리도 너네 포기 안 했잖아....

淸潭 2024. 8. 26. 08:05

스케치북의 기적…17승 7패 한화, 고산병 생길라

조회수 1.4만2024. 8. 26. 06:40
 
사진 = OSEN 제공

연대 정시입학한 박상원

5회까지 팽팽하다. 스코어 1-1이다. 하지만 원정팀은 느낌이 심상치 않다. 병살타만 3번이나 쳤다. (25일 잠실, 한화 이글스 vs 두산 베어스)

그러던 6회 초다. 1사 1루에서 장진혁 타순이다. 우중간 2루타가 터진다. 1루 주자 요나단 페라자가 가속 페달을 최대로 밟는다. 2루, 3루를 쏜살같이 지나친다. 내비게이션의 안내가 들린다. “좌회전하세요. 목적지가 27미터 앞에 있습니다.”

결승점이다. 2-1로 추가 기울었다. 9회 1점은 덤이다. 한결 넉넉하고, 편안하다. 박상원에게는 충분한 점수다. 2이닝을 깔끔하게 처리한다. 무안타, 무사사구, 삼진을 2개 잡았다. 류현진의 8승째를 너끈히 지켜낸다.

마무리 투수로 개막을 맞은 그다. 그런데 초반부터 부진했다. 인사이동이 불가피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각성했다. 후반기 18경기에서 5홀드를 거뒀다. 24.2이닝 동안 실점은 4개뿐이다. ERA가 1.46이다. 어제가 19게임째였다. 기어이 세이브를 추가했다(2개째).

갑작스러운 개과천선(?)이다. 이유가 뭘까. 팬들이 과거를 추적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사실을 찾아냈다. 바로 학력이다. 연세대 스포츠레저학과를 졸업했다. 그것도 정시입학으로 알려졌다. 푸른색과 독수리라는 공통점이 떠오른다.

그렇다. ‘푸른 한화’가 되면서 대오각성(大悟覺醒)의 경지를 맞게 된 것이다.

마지막 타자는 강승호다. 3루 땅볼로 27번째 아웃이 완성된다. 마운드 위에서는 환호가 터진다. 동시에 3루 쪽 관중석에서도 함성이 폭발한다. 깜짝 놀랄 정도의 인파다. 잠실 구장의 거의 절반은 채운 것 같다. 원정 응원단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엄청난 세(勢)를 과시한다.

‘나는 행복합니다’의 열창이 일대를 뒤덮는다.

사진 = OSEN 제공

Ryu “태연아, 상규 첫 승 아니야”

무려 19년 만이다. 이글스가 베어스를 상대로 스윕에 성공했다. 당시는 김인식 감독 시절이다. 선발 트리오 문동환-정민철-김해님이 이뤄낸 개가였다(2005년 6월, 청주). 류현진에게도 까마득한 선배들이다.

기자들의 직업병이 있다. 그냥 햇수로 놔두는 걸 못 견딘다. 굳이 날짜로 따져야 한다. 그래야 뭔가 세밀한 것 같다. 왠지 데이터 느낌도 난다. 가장 성미 급한 누군가 벌써 계산해 놨다. <…구라다>는 그분의 신세를 지겠다. 무려 7020일 만이라고 한다.

어제(25일)뿐만이 아니다. 요즘 이글스 담당 기자들, 혹은 구단 홍보팀 일이 조금 늘었을 것 같다. 날짜 계산할 일이 자꾸 생긴다.

하루 전이다. 그러니까 두산과 2차전 때(24일)다. 극적인 연장 승리로 들뜬 분위기다. 김태연을 비롯한 몇몇이 덕아웃에 모였다. 그리고 뭔가를 열심히 궁리한다. 첫 승을 따낸 동료를 위해 특별한 축하를 전할 요량이다.

그 광경을 본 류현진이 조용히 한마디 한다. “태연아, (이) 상규 첫 승 아니야. LG에 있을 때 마무리까지 했어.”

허걱. 팀원들도 잘 모르던 사실이다. 그런데 외국에서 뛰던 선배가 알려준다. 맞다. 2020년에 2승이 있다. 세이브도 1개 기록했다. 고우석이 빠졌을 때였다. 당시 양상문 감독(현 이글스 코치)이 9회를 맡긴 적이 있다.

이후 파란만장했다. 한때 육성 선수로 전환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보호선수에서 제외됐다. 결국 2차 드래프트를 통해 팀을 옮겨야 했다.

막막하던 시절이 떠오른다. 장내 인터뷰 때도 울컥한다. 중계석에서 지켜보던 이상훈 해설위원도 같이 눈물을 글썽인다. LG 피칭 아카데미에서 보낸 시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런 이상규도 날짜를 따져야 한다. 마지막 승리로부터 4년이 지났다. 1553일 만의 개가였다. (포수 최재훈이 마지막 아웃을 잡았다. 그리고 기념구를 고이 전해줬다.)

사진 = OSEN 제공

“우리도 너네 포기 안 했잖아”

그리고 또 있다. 반드시, 꼭, 따져야 할 날이다.

지난달 24일이다. 대전 홈경기 때였다. 이날도 선발은 99번이었다. 7회까지 2실점으로 호투했다. 그런데 타자들이 무기력하다. 삼성 선발(시볼드 코너)에 3안타로 꽁꽁 묶였다. 8회 말 2아웃까지 스코어 1-2로 밀렸다.

그때였다. TV 중계 화면 가득히 스케치북 하나가 클로즈업된다. 이글스 파크 관중석이었다. 어딘가, 누군가, 내놓은 짧지만 엄중한 글귀다. 그리 세련된 폰트는 아니다. 그러나 투박해서 더 절절함이 느껴진다. ‘포기하지 마. 우리도 너네 포기 안 했잖아.’

여기서부터가 시작이다. 안타(김태연)-볼넷(노시환)으로 주자가 모인다. 다음 채은성이 중전 적시타로 동점에 성공한다. 스케치북의 주인이 펄쩍 뛰어오르며 환호한다.

메시지의 완성은 9회에 이뤄진다. 2사 3루. 기회가 사라지려는 순간 페라자가 타올랐다. 마무리 오승환을 상대로 끝내기 안타를 뽑아낸 것이다.

당시 이글스는 9위였다. 5위 SSG, NC에 7게임 차이로 멀어졌다. 오히려 꼴찌 키움(1게임 차)을 걱정해야 할 처지였다.

하지만 이날 역전승 이후로 완전히 달라졌다. 최근 24게임에서 성적이 17승 7패다. 승률로 따지면 0.708이나 된다. 많은 팬들이, 그리고 전문가들이 스케치북을 ‘결정적인 그날’이라고 믿고 있다.

티빙 / KBS N Sports 중계 화면

이글스 약진의 가장 큰 동력

드디어 통곡의 벽을 넘어섰다. 몇 번이나 넘어졌던 승패 마진 ‘-5’를 깨트렸다.

아직 순위는 7위다. 하지만, 고지가 멀지 않다. 6위 SSG는 승률 1리(0.001) 차이다. 5위 KT는 앞집 뒷집(1.0게임 차)이다. 4위 두산도 꼬리가 보인다. 3경기만 어찌어찌하면 욕심도 내볼 수 있다.

‘설레발은 설레네요.’

‘너무 높아 아찔해요.’

‘벌써 고산병 오면 안 되는데.’

온라인 커뮤니티에 유쾌함과 발랄함이 넘쳐난다. 믿거나 말거나, 선수 누군가 했다는 얘기가 파다하다. ‘단기전 노하우’, ‘추울 때 컨디션 관리하는 법’, ‘보온용 개인 장비 리스트’ 같은 썰이다.

큰 걱정은 유니폼 문제다. 여름용 푸른색과 헤어져야 할 계절이다. 그러나 절대 그럴 수 없다. 그 옷을 입고 무려 14승(3패)이나 올렸다. 승률이 무려 0.824나 된다. ‘빨리 가을용도 만들어야 한다’는 여론이 강력하다.

지금이 가장 중요하다. 페넌트레이스의 승부처다. 이맘때 결과에 따라 순위가 요동친다. 이런 시기의 상승세는 평소의 몇 배 가치다. 그래서 이글스의 선전이 더 의미 있다.

많은 요소가 결합한 덕이다. 감독, 코치의 리더십도 있다. 주력 스타들의 선전도 빛난다. 그늘에 가려졌던 선수들의 땀도 큰 도움이다.

그러나 이글스의 약진을 이끄는 가장 큰 동력은 따로 있다.

바로 팬들이다. 땡볕 아래서도,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홈에도, 원정에도. 꼴찌를 할 때도, 연패에 빠졌을 때도. 늘 한결같이 자리를 지킨 묵묵함이다. 포기하지 않고 다독여주던 ‘보살’들이다.

그들이 ‘푸른 한화 유니폼’보다, ‘7이닝 1실점의 에이스’보다 훨씬 강력한 전력이다.

사진 = OSEN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