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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대의 스캔들 어우동(於宇同)

淸潭 2020. 1. 29. 10:43


 희대의 스캔들 어우동(於宇同)               

   


☞ 희대의 스캔들 어우동 ①
성종(成宗)시대 조선을 발칵 뒤집히게 한 어우동(於宇同)은 종3품 박윤창(朴允昌)과
정귀덕(鄭貴德) 사이에서 뛰어난 미모와 예술적 재능을 갖고 1430년경 태어났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의 5째 아들인 영천군 이정(永川君 李定)의 맏아들 정4품 태강수 이동(太江守 李仝)과 결혼해서 딸까지 얻었다.
태강守(太江守)나 벽계守(碧溪守) 등에서 수"(守)"는 종친의 벼슬 이름이다.
그런데 남편 태강수가 기생과 사랑에 빠져 그녀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당시 특히 양반이 이혼하려면 왕의 재가가 있어야 할 정도여서
조정에서는 재결합을 명했지만 어우동은 1476년 친정에 와서
역시 이혼한 어머니와 딸 등 세 모녀가 함께 살았다.
그런데 결국 이혼을 성립시키지 못한 게 화근이 된다.



친정집 여종이 의기소침한 그녀를 위로하려고
사헌부(司憲府) 아전 오종년(吳從年)을 데려오자 마음껏 욕정을 해소하면서부터
두 여인은 상대의 집안과 신분을 안 가리고 사내 사냥에 나섰다.
특히 왕실 종친인 방산수 이난(方山守 李瀾) 수산수 이기(守山守 李驥)와의 간통이나 노비까지 협박해
간통하는 등의 음행은 종친의 부인으로서는 도를 넘어선 것이었다.
결국 4년 만인 1480년 6월 들통나 장안이 떠들썩했고
어유소(魚有沼), 노공필(盧公弼), 김세적(金世勣), 김칭(金偁), 김휘(金暉), 정숙지(鄭叔墀) 등의

사대부들은 모두 혐의를 부인하고 중인이었던 박강창(朴强昌), 홍찬(洪璨) 등은 하옥되었다.
당시 형법으로 박어우동(朴於宇同)의 죄는 간통죄로

장(杖) 100대에 유배형(流配刑)이 최고형이었지만 ...


50년 전 비슷했던 감동(甘同) 사건에서 세종(世宗)은 감동을 유배시켰다가 바로 풀어주는 관용을 보였다.
그러나 평소 냉정하던 성종(成宗)은 대신들의 반대에도 시종일관 사형을 주장했다.
그녀가 아직 이혼을 안 해 종실의 여인이니 왕실의 체통을 손상시켰다는 것과
남자들은 대개 종친(宗親)이거나 차세대 유망주들이니 모두 살려주고 여자만 죽여서 입을 막으려는
증조부 세종과는 비교가 안 되는 치졸한 계산이었다.
결국 1480년 10월 18일 종로(鐘路)를 메운 군중들을 지나
지금의 시청앞 광장으로 끌려온 조선조(朝鮮朝) 최대 스캔들의 주인공은
두 집행인이 목에 건 밧줄을 당기자 잠시 요동치다가 축 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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