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진 논설위원 그러나 이렇게 판결이 났다고 해서 호텔을 바로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담당 공무원이 다른 이유로 허가를 안 내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행정소송법에선 법원이 행정관청의 '불허가 처분'을 취소시킬 순 있어도, 직접 허가를 내주라고 판결할 수는 없게 돼 있다. 그러다 보니 관청 입장에선 소송에 져도 다양한 규제 메뉴 가운데 다른 걸 골라잡으면 그만이다. '고도 제한'으로 안 되면 '소방시설'을 문제 삼는 식이다. 언제 처분이 나올지도 알 수 없다. 그럴 때마다 또 '불허가 취소 소송'을 해야 하고, '빨리 결론 내달라'는 소송을 내는 수밖에 없다. 중앙 정부 규제가 1만4000개, 지방자치단체 규제는 세 배 많은 4만9000개나 된다고 한다. 인허가로 인한 분쟁 탓에 행정소송은 10년 전보다 50% 넘게 늘어나 연간 3만8000건을 헤아린다. 불합리한 규제를 추방하려면 법원 역할이 그만큼 중요해진 셈이다. 그런데도 '규제 권력'을 움켜쥔 공무원 앞에서 대법원 판결문조차 휴지 조각이 되는 일이 수시로 벌어지는 것이다. 이 같은 법의 사각지대를 없애자는 움직임이 10년쯤 전 시작됐다. 법원이 관청에 직접 인허가를 명령할 수 있는 '의무이행 소송' 도입이 핵심이다. 잘 활용하면 꼬리를 무는 지루한 소송 공방은 줄어들고 인허가 분쟁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다. 공무원들이 규제 권력을 휘두를 공간도 줄어든다. 미국·영국·독일·프랑스·일본은 물론 중국까지 이 제도를 도입한 이유다. 2006~2007년 대법원과 법무부는 의무이행 소송을 도입하는 행정소송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 법안은 정치권 무관심으로 폐기됐지만, 2011년부터 다시 입법이 추진돼 현 정부 출범 직후인 2013년 3월 입법예고가 이뤄졌다. 입법예고 당시 법무부는 보도자료까지 내서 "국민 입장에서… 국민 눈높이에 맞게 분쟁을 해결·조정할 수 있게 된다" "정부 부처 간 협의를 거쳤고 금년 중 법안을 국회에 낼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뒤로 개정안의 종적이 묘연하다. 정부가 입법예고한 법안은 국회 제출 전에 차관회의와 국무회의에 올리게 돼 있는데 법무부가 법안을 깔고 앉아 꿈쩍 않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러는지 법무부의 누구 하나 내놓고 설명하는 사람도 없다. '법원 힘이 세질까 봐 그런다더라' '정부 부처들이 반발한다더라'… 뒷말만 무성하다. 이럴 거면 "국민 입장에서" "국민 눈높이에 맞게" 같은 말은 왜 했나. 박근혜 대통령은 "쓸데없는 규제는 우리의 원수(怨讐)"라고 했다. 공무원들이 '한번 물면 놓지 않는 진돗개'처럼 움직여야 한다고도 했다. 대통령은 규제 잡는 법안이 법무부 캐비닛 속에 처박혀 잠자고 있는 걸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규제를 물어뜯어야 할 진돗개들이 틈만 나면 딴생각을 한다는 걸 진짜 아는지 모르겠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상업적 게시판 등)] ▒☞[출처] 조선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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