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宮詞(궁사) -100수 / 瓛齋 朴珪壽

淸潭 2020. 4. 6. 11:00

宮詞(궁사) -100首 瓛齋(환재) 朴珪壽(박규수)

 

鳳韶餘響絶句 一百首 幷序 (봉소여향절구 100병서)

 

궁사(宮詞)

당나라 왕건(王建)에게서 발달했다. ()ㆍ명()의 여러 작가들이 모두 그를 본받아 창작하니, 화려하고 산뜻하며 멋지고 질탕한 작품이라고 일컬어졌다. 태평성대의 음악은 느리되 명랑하지만 말세의 음악은 곱되 지나치게 섬세하니, 경전(經傳)에서 “시가(詩歌)의 도는 정치와 서로 통한다.〔聲音之道, 與政通.〕”라고 한 말은 참으로 속일 수 없다. 일찍이 송ㆍ명의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보았더니, 참으로 아름답기는 하지만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 화려한 점으로 말하자면 궁실과 장막이며 황금과 패물을 나열하여 번잡하게 수식한 것이고, 그 질탕한 점으로 말하자면 잔치를 벌여 노래하고 개와 말을 달려 사냥하는 소란스러움을 표현한 것뿐이니, 어디에 이른바 온유돈후(溫柔敦厚)한 면모와 흥을 느끼고 인정을 살필 수 있으며, 백성을 교화하는 바탕이 될 만한 내용이 있었던가. 이는 작가들이 만난 시대가 융성한 삼대(三代) 시대보다 못하여 시가로 표현된 것이 저절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때문인가.

나는 다행히 태평무사한 시대에 생장하여 지금 스물세 살이 되었다. 무릇 가정에서 들은 것과 스승과 벗들이 입으로 전해준 것과 서적에서 읽은 것이 대부분 우리나라 역대 임금들의 고사(故事)이므로 비석에 새기고 악기로 연주하여 만세토록 전하여 영원히 모범을 삼을 만한 것이었다. 곧장 가송(歌頌)을 지어 한창려(韓昌黎)가 말한 당나라를 일관한 책〔唐一經〕과 같이 만들고 싶었으나, 재주와 역량이 부족하여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래도 모방하고 힘써서 앞선 여러 작가들처럼 지을 수는 있었으니, 이에 고사 중에 현저하게 드러난 100()을 모아서 각각 시를 붙여 드러내었다. 가령 후세에 이 시편을 읽는 자들이 시권(詩卷)을 잡고 논하기를 “이 시편은 당ㆍ송의 여러 작가들보다 나은 점이 있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작가가 유능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역대 임금들의 훌륭한 덕이 그렇게 만든 것이니, 어찌 감히 이로써 스스로 자랑하겠는가. 혹은 논하기를 “이 시편은 송ㆍ명의 여러 작가들에 비해 손색이 있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우리 역대 임금들의 훌륭한 덕이 미흡해서가 아니라 작가의 재주가 그에 미치지 못한 탓이니, 어찌 감히 이로써 스스로 변명하겠는가. 시편이 이루어짐에 《봉소여향집(鳳韶餘響集)》이라 이름을 붙였다. 시편 중에 수록한 것은 모두 성덕(盛德)을 드러낸 것이므로 파인하리(巴人下里)의 속악이라고 스스로 겸손의 뜻을 붙일 수는 없다. 비유하자면 화려한 틀에 줄지어 걸린 경쇠와 종을 버리고 촌스럽고 남루한 질그릇과 북으로 대신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악보에 맞추고 현에 올린 것으로 말하자면 봉황이 이르고 짐승이 춤추던 옛 곡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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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華山佳氣鬱葱籠 북한산의 상서로운 기운 짙게 에워싼 곳 /
勤政門開玉殿通 근정문 열자 화려한 궁전과 통하네 /
萬朶紅雲瞻北極 북극을 바라보니 일만 송이 붉은 구름이고 /
蓬萊旭日照曨
曈 봉래산에 돋는 해는 밝게 비추네 /

 

2.

瑤圖八幅儼明堂 나라의 지도 여덟 폭에 명당이 또렷하니 /
千歲神京漢水陽 천세의 서울을 한수 북쪽에 잡았네 /
政是太平無事日 이때는 태평하고 무사한 시절이라 /
舜衣深拱殿中央 순 임금이 팔짱 끼고 궁전 가운데 계시네 /

국조보감(國朝寶鑑). 태조가 왕위에 오른 4년에 신궁(新宮)의 이름을 지어 올리라 명하였다. 신궁은 경복(景福), 연침(燕寢)은 강녕전(康寧殿), 동소침(東小寢)은 연생전(延生殿), 서소침(西小寢)은 경성전(慶成殿), 연침의남전(南殿)은 사정(思政), 정전(正殿)은 근정(勤政), 문은 근정문(勤政門), 동서 두 누각은 융문(隆文)과 융무(隆武), 오문(午門)은 정문(正門)이다.

 

3.

六龍飛上海東天 육룡이 해동의 하늘로 날아오르니 /
共喜風雲慶會筵 경회루 잔치에 군신의 만남을 함께 기뻐하네 /
舞袖春闌文德曲 봄날 밤늦도록 문덕곡에 맞춰 춤추며 /
金觴稱壽萬斯年 금술잔 들어 만수무강을 축수하네 /

국조보감》. 태조가 왕위에 오른 4년에 임금이 경신(庚申)날 밤이라 하여 여러 훈신을 불러 술자리를 마련하고 음악을 베풀었다. 술이 거나해지자 임금이 말하기를 “경들은 서로 공경하고 삼가서 자손 만세까지 이르도록 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도전(鄭道傳)이 대답하여 “제 환공(齊桓公)이 포숙(鮑叔)에게 묻기를 ‘어떻게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가.’라고 하자 포숙이 ‘공께서 거()에 거처하던 때를 잊지 마시고, 중부(仲父)는 함거(檻車)에 있을 때를 잊지 마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바라건대 전하께서 말에서 떨어지셨을 때를 잊지 마시고, 신도 목에 칼을 썼을 때를 잊지 않는다면 자손만세토록 영화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임금이 “옳도다.”라고 하였다. 악공이 〈문덕곡(文德曲)〉을 부르자 정도전이 일어나 춤을 추니, 이에 갖옷을 하사하여 즐거움을 만끽한 뒤에 파하였다.

 

4.

樓臺霽月十分明 누대에 개인 달이 크게 밝은데 /
除是人間白玉京 이것이 바로 인간세상 백옥경이 아니랴 /
光化門南新唱曲 광화문 남쪽에 새 곡조가 울리니 /
聲聲認得喜昇平 소리마다 태평성대를 기뻐함을 알겠네 /

이기(李墍)의 《송와잡기(松窩雜記). 조종 때에 육조(六曹)에 숙직하는 낭관들이 매번 아름다운 밤을 만나면 광화문 남쪽에 악기를 옮겨 베풀고, 시와 술과 노래로 즐기며 담소와 음주로 밤을 지새어 서울 거리의 안개와 달빛에 관현악기가 떠들썩하였으니, 참으로 태평 시대의 훌륭한 일이었다.

 

5.

天門一曲獻仙桃 대궐문 한 굽이에서 선도를 바치자 /
歡喜官家賜錦袍 임금이 기뻐하며 비단 도포 내리셨네 /
捧上文昭行禮罷 문소전에 올리는 예식을 마치자 /
九重春色映紅醪 구중궁궐 봄볕이 붉은 술동이에 어리네 /

이륙(李陸)의 《청파극담(靑坡劇談). 공정대왕(恭靖大王 정종) 궁의 환관이 2월 말에 우연히 정원에 들어갔다가 건초더미 곁에서 복숭아 수백 개를 얻었는데, 복숭아 빛이 선홍색이어서 참으로 구월의 상도(霜桃 늦복숭아)와 같았다. 정종대왕이 복숭아를 문소전(文昭殿)에 올리고, 또 태종(太宗)이 계신 궁에 보내면서 “선도(仙桃)를 얻었기에 진상합니다.”라고 하자, 태종이 크게 기뻐하며 어포(御袍)를 벗어 그 환관에게 하사하고, 즉시 상왕(上王 정종)이 계신 궁에 나아가 잔치를 베풀고 밤이 새도록 즐기다 파하였다.

 

6.

羽葆逶迤漢水東 의장대의 일산이 한수 동쪽에 이어지니 /
三王淸蹕駐離宮 세 임금의 행차가 이궁에 머무시네 /
催呼太僕承傳旨 급히 태복을 불러 전지를 받들라하여 /
馳賜天閑八尺龍 궁궐 마구간에서 팔척의 용마를 하사했네 /

《조야집요(朝野輯要). 세종대왕이 동교(東郊)의 대산(臺山)에 낙천정(樂天亭)을 세우니 상왕 태종이 편히 지내시도록 지은 것이다. 정종이 광진(廣津)에서 피서하는데, 상왕이 세종과 함께 낙천정에 거둥하여 정종을 불러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상왕이 정종을 몹시 공손히 받들고 세종도 더욱 공손히 받들어 즐거움을 만끽하고 파하였다. 저녁에 궁궐로 돌아오면서 상왕이 백마를 탔는데, 도중에 말에서 내려 하연(河演)에게 하교하기를 “나는 이 말이 길이 잘 들어 아끼어 왔지만 지금 주상에게 주고자 하니, 상승(尙乘)은 안장을 바꿔 올리라.”라고 하였다.

 

7.

船船載飯施江魚 배마다 밥 실어 강물고기에게 보시하니 /
異俗流傳釋氏餘 불가의 기이한 풍속이 후세에 전해졌네 /
聞道宮池停月米 듣자니 궁궐 연못에 달마다 뿌리던 쌀을 정지하면 /
陳倉紅粒賑窮閭 창고의 묵은 곡식으로도 궁민들진휼할 수 있다하네 /

《국조보감》. 태종대왕이 일찍이 예빈시(禮賓寺)에서 묵은쌀로 연못의 물고기를 기른다는 말을 듣고서, 그 곡식이 얼마인지 묻자, “한 달에 열 말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태종이 “비록 묵은쌀이라 하더라도 채소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굶주렸는데도 구제하지 못한다면 물고기를 길러 무에 쓰겠는가. 혁파하라.”라고 하였다.

 

8.

南陽磬石秘千秋 남양에천년동안 경석이 비장되었는데 /
秬黍居然
海州 기장이 갑자기 해주에서 나왔네 /
天爲聖人新製律 하늘이 성인을 위해 새로 율려를 만들게 하니 /
一夔無事
鳴球 일기가 무사히 옥경을 울리네 /

《문헌비고》. 세종 7년 가을에 거서(秬黍 기장)가 해주(海州)에서 났고, 8년 봄에 경석(磬石)이 남양(南陽)에서 났다. 임금이 개연히 옛 제도를 새롭게 바꿀 뜻을 품고서 이에 박연(朴堧)에게 편경(編磬)을 만들도록 명하였다. 박연이 거서를 쌓아서 치수를 재어 황종(黃鐘)을 만들고, 한 달이 지나 편경 2틀을 만들어 올렸다. 임금이 “중국에서 반포한 경쇠는 음이 잘 맞지 않았는데, 지금 새로 만든 경쇠가 바르고 성음이 맑고 아름답다. 다만 이칙(夷則) 1매가 소리가 맞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하였다. 박연이 자세히 살피고서 “먹줄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고서 즉시 먹줄을 갈아내니 소리가 맞게 되었다.

 

9.

希音妙曲雜簫和 세상에 드문 신묘한 곡조가 소소에 섞여 어울리니 /
象德咸英較若何 덕성을 노래한 함영에 비교하면 어떠한가 /
郊廟朝廷新雅樂 종묘와 조정에서 아악을 새로 만드니 /
丹墀初奏御天歌 대궐에서 처음 〈용비어천가〉를연주하네 /

《문헌비고(文獻備考). 세종 27년에 권제(權踶)ㆍ정인지(鄭麟趾) 등에게 목조(穆祖) 이후 왕조의 터전을 개척한 자취 125장을 지어 올리라고 명하여 이를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라고 이름하였다. 궁중에 명을 내려 목판에 새겨 간행하여 조정과 종묘에 쓰는 악가(樂歌)로 삼게 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반사하였다. 나중에 또 이 악가를 바탕으로 〈치화평(致和平)〉ㆍ〈취풍형()〉ㆍ〈여민락(與民樂)〉 등의 악가를 지었다.

 

10.

方音翻切費呼歔 나랏말 표기하려 목소리 수고로웠으니 /
演出銀鉤玉
疏 은구와 옥저를 줄여서 풀어내었네 /
白碾平江花雪紙 평강의화설지를 희게 다듬질하니 /
六宮齊習諺文書 육궁에서 나란히 언문서를 익히네 /

《문헌비고》. 세종 28년에 임금이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지었다. 세종은 모든 나라들이 문자를 만들어 방언(方言)을 기록하는데, 유독 우리나라만 없다고 생각하여 드디어 자모(子母) 28자를 만들어 ‘언문(諺文)’이라 이름을 붙였다. 궁궐 안에 부서를 설치하여 정인지(鄭麟趾), 성삼문(成三問) 등에게 찬정(撰定)하도록 명하였다.

 

11.

蓮葉金龍吐鐵丸 연잎과금룡이 쇠구슬을 토하니 /
聖人神智測乾端 성인의 신묘한 지혜는 하늘끝까지 헤아리네 /
司辰仙子天然走 시간을 맡은 신선이 천연스레 달려가 /
報刻無煩禁漏官 관원들 수고롭지 않게 시간을 알려주네 /

《여지승람》. 보루각(報漏閣)은 경회루 남쪽에 있는데, 김돈(金墩)의 기록에 “임금께서 때를 알리는 자가 혹시 착오를 면치 못할까 염려하여 호군(護軍) 장영실(蔣英實)에게 명하여 사신목인(司辰木人)을 만들어 때가 되면 저절로 알리게 하고 인력을 수고롭지 않게 하였다. 누각을 세워 세 기둥을 세우고 삼신(三神)을 올려놓아, 하나는 시각을 맡아 종을 울리고, 하나는 경()을 맡아 북을 울리고, 하나는 점()을 맡아 징을 울리게 하였다. 구리구슬이나 쇠구슬을 두어 연잎으로는 구슬을 받치고 용의 입으로는 구슬이 나오게 하였다. 여러 기계장치는 모두 숨겨 드러나지 않았고, 보이는 것은 관대(冠帶)를 차려 입은 목인뿐이었다.”라고 하였다.

 

12.

心精目巧任工倕 마음과 눈이 정교하여 공수의 솜씨 발휘하니 /
水晷輪鍾總可爲 물시계며 바퀴종을 모두 만들 수 있었네 /
誰知欽敬宮中閣 누가알랴 궁중의 흠경각에 /
另有豳風七月詩 빈풍 칠월〉 시가 따로 있을 줄을 /

여지승람(輿地勝覽). 흠경각(欽敬閣)은 강녕전(康寧殿) 서쪽에 있는데, 김돈(金墩)의 기록에 “주상전하께서 유사(攸司)에 명하여 의기(儀器)를 제작케 하니 극도로 정교한 것이 앞 시대를 훨씬 능가하였다. 이에 천추전(千秋殿) 서쪽 뜨락에 작은 전각 하나를 세워놓고 종이를 발라 산을 만들고, 그 안에 옥루기륜(玉漏機輪)을 설치하여 그 위에 의기(欹器)를 두었다. 관인(官人)이 금병(金甁)을 들고 물을 쏟는데, 비어 있으면 비스듬해지고 중간쯤 차면 반듯해지며, 가득 차면 엎어져 모두 옛날의 훈계와 같았다. 또 〈빈풍(豳風)〉에 의거하여 나무를 깎아 인물ㆍ금수ㆍ초목의 형상을 만들어 그 절후에 맞춰서 안배해 놓으니, 〈칠월(七月)〉 한 편의 광경이 구비되지 않은 것이 없다. 누각의 이름을 흠경(欽敬)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하늘의 뜻을 공경히 받들어 백성에게 일할 때를 가르쳐 준다.〔欽若昊天, 敬授人時.〕’는 뜻을 취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13.

大君亭子漢師西 대군의 정자가 한양 서쪽에 있어 /
法駕廻時麥滿畦 임금의 행차 돌아올 때 보리가 밭에 가득하네 /
喜溢楯間三字額 난간 사이 세 글자 편액에 기쁨이 넘치니 /
晩來甘雨野萋萋 저물녘 단비에 들판이 무성하네 /

국조보감》. 세종이 서교(西郊)에 거둥하여 농사를 관찰하느라 고삐를 잡고 천천히 다니면서 양맥(兩麥 보리와 밀)이 무성한 것을 보고 흔연히 기쁜 낯빛을 띠었다. 효령대군(孝寧大君) 별장에 들러 새로 지어 놓은 정자에 올랐는데, 마침 때에 맞는 비가 세차게 내려 잠시 후에 사방의 들판을 흡족하게 적시자, 임금이 몹시 기뻐하여 이에 그 정자를 희우정(喜雨亭)이라 이름하였다.

 

14.

如星銀燭讀書牀 별빛 같은 은촛대로 독서하는 책상에 /
中使頻窺白玉堂 환관이 자주 백옥당을 엿보네 /
學士今宵綾被煖 학사가 오늘밤 비단옷 덮어 따스하니 /
夢酣應復近君王 꿈속에서도 군왕을 가까이 모셨으리 /

《해동패림(海東稗林). 세종 조에 신숙주(申叔舟)가 집현전(集賢殿)에서 숙직하는데, 어느 날 밤 2경쯤 되어서 임금께서 환관에게 명하여 학사(學士)가 무엇을 하는가 엿보고 오라고 하였다. 이에 환관이 돌아와 지금 촛불을 켜고 글을 읽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이처럼 서너 번을 엿보았는데 글 읽기를 여전히 중지하지 않고 닭이 울어서야 비로소 잠들었다고 보고하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담비갖옷을 벗어 잠이 깊이 든 틈을 타서 덮어 주게 하였다. 신숙주가 아침에 일어나서야 비로소 이 사실을 깨달았다. 선비들이 이 말을 듣고 더욱 학문에 힘썼다.

 

15.

啾啾百鳥斂飛騰 짹짹 우는 새들이 날기를 그치니 /
撲地長風放白鷹 땅 위를 스치는 바람결에 흰 매를 날리네 /
恭識聖人臨賞意 태종께서 매를 감상하신 뜻을 알고서 /
淸朝臺閣想威稜 맑은 아침 조회에서 그 위엄 상상하네 /

《국조보감》. 세종이 강을 건너 금천(衿川)에 거둥하여 매를 구경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강가에 이르자 눈보라가 갑자기 일고 파도가 거세져 배를 띄우지 못하게 되었다. 임금이 “태종께서 매를 구경하면서 강을 건너지 않았으나 나는 강을 건넜으니, 눈보라는 하늘이 나를 꾸짖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16.

霄漢希微曳屐聲 은하수 희미한데 신발 끄는 소리에 /
集賢學士夢魂驚 집현전 학사가 꿈결에 혼이 놀라네 /
平朝院吏欣相語 이른 아침 관원들이 즐거이 이야기하며 /
鶴駕來時月正明 세자의 행차가 올 때에 달이 정녕 밝았다고 하네 /

《해동패림》. 문종이 오래도록 승화전(承華殿)에 거처하며 학문에 침잠하다가 달이 밝고 인적이 고요해지면 간혹 손에 책 한 권을 들고서 걸어서 집현전의 숙직소에 가서 학사들에게 난해처를 물어보곤 하였다. 이때 성삼문(成三問) 등이 집현전에서 숙직하면서 밤에도 감히 관대(冠帶)를 벗지 못하였다. 어느 날 한밤중이 되어 세자의 행차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서 옷을 벗고 누우려고 하는데, 문밖에 신발 소리가 나며 “근보(謹甫)!” 하고 부르며 들어오니, 바로 세자였다.

 

17.

櫻桃花發滿宮明 앵도꽃 만발하여 온 궁궐이 밝은데 /
葉葉枝枝總睿情 잎이며 가지마다 모두 임금의 효성일세 /
結子端陽看守別 단오에 열매 맺어 각별히 간수하니 /
每煩金彈打流鶯 매양 금탄환으로 꾀꼬리 쫓기 수고롭네 /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 세종이 앵도를 좋아하자 문종이 손수 심어 온 궁궐에 앵도가 가득하였다.

 

18.

忽聞霏微世外香 갑자기 세상 밖의 향기가 은은히 풍기니 /
金盤擎出紫衣郞 자색옷의 관원이 금소반을 받들고 나오네 /
那知的
盤中橘 어찌알았으랴 소반 속 귤의 선명한 빛이 /
半是龍章寶墨光 절반은 임금께서 쓰신 먹빛에서 나온 줄을 /

서거정(徐居正)의 《필원잡기(筆苑雜記). 문종이 동궁(東宮)에 있을 때에 금귤(金橘) 한 소반을 집현전에 보냈다. 귤을 다 먹자 소반에 시가 있었으니, 바로 문종이 지은 것이었다. 시에 “침단목 향기는 코에만 좋고, 고기의 맛은 입에만 좋아라. 가장 동정귤을사랑하노니, 코에도 향기롭고 맛도 달다네.〔沈檀偏宜鼻, 脂膏偏宜口. 最愛洞庭橘, 香鼻又甘口.〕”라고 하였는데, 필법이 뛰어나 당대에 드문 보배였다. 여러 학사들이 그 시를 본떠 쓰려고 하였는데, 안에서 쟁반을 가져오라 재촉하니, 학사들이 쟁반을 붙들고서 차마 놓지 못하였다.

 

19.

爲憐紅女與農夫 길쌈하는 아낙과 농부들을 가련히 여겨 /
獻種歸來理績
纑 헌종하고 돌아와서 베틀에서 베를 짜네 /
今歲中宮新帖子 올해중전께서 신춘에 붙이신 그림은 /
延祥勝似鍾馗圖 상서를 맞이함이 〈종규도〉 보다 낫네 /

《국조보감》. 세조가 근신에게 하교하기를 “중전이 사민도(四民圖)를 세화(歲畫)로 삼아 궁전 벽에다 붙이고자 하는 것을 내가 불가하다고 하였다. 중전이 ‘먹을 것이 여기에서 나오고 입을 것이 여기에서 나오니, 붙여두고 보아도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고서 마침내 붙였다.”라고 하였다.

 

20.

羽葆前頭奏太平 의장대 선두에서 태평곡 연주하니 /
九霄仙樂引聲聲 천상의 선악이 소리가 이어지네 /
誰知衛士旗竿竹 뉘알았으랴 의장대의 깃대가 /
選入簫韶雜鳳笙 소소에 들어 봉생과 어울릴 줄을 /

청파극담(靑坡劇談). 광묘(光廟 세조)가 일찍이 서교(西郊)에 거둥할 때, 도중에서 의장대의 깃발을 멀리 바라보다가 몇 번째 깃대를 가져 오라 명하여 이것으로 피리를 만드니, 악률에 매우 잘 맞았다.

 

21.

三甲戰酣春日高 봄날이 깊어 세 진영 군사들이 싸우는데 /
朱槍挺出意麤豪 붉은 창 높이 들고 기개가 드높네 /
一時拜跪丹墀下 일시에 궁궐 섬돌 아래 꿇어앉아 /
點閱班花翠錦袍 푸른 비단옷에 찍힌 붉은 점을 점검하네 /

국조보감》. 세조가 경회루에 거둥하여 종친과 여러 장수, 내금위(內禁衛)와 장용대(壯勇隊)를 불러 삼갑전법(三甲戰法)을 가르쳤다. 세 대()로 나누되 각 대마다 9명씩이었는데, 사람마다 작은 창을 쥐고, 창끝에는 붉은 물감을 칠하였다. 북소리를 듣고 전진하여 갑()이 을()을 쫓고 을이 병()을 쫓고 병이 갑을 쫓되, 전투가 끝나고 옷 위에 찍힌 붉은 점을 세어 승부를 판가름하였다.

 

22.

金屛繡閤放寒梅 금병풍 화려한 궁궐에 한매가 피니 /
却似人間煖律回 도리어 인간세상에 봄이 돌아온 듯하네 /
半夜內中呼喚急 한밤중 궐내에서 황급히 부르니 /
刑房承旨錄囚來 형방 승지가 죄수의 숫자를 적어 오네 /

김정국(金正國)의 《사재척언(思齋摭言). 파평(坡平) 윤필상(尹弼商)이 형방 승지(刑房承旨)로 숙직하는데, 한밤 오경이 되자 형방 승지를 들라하는 전교가 내려왔다. 침전에 이르자 광묘(光廟 세조)가 하교하기를 “오늘 밤 추위가 심하니 얼어죽는 자가 있을까 염려된다. 경외(京外)에 수감된 자가 얼마인지 속히 기록하여 오라.”라고 하였다. 윤필상이 대답하기를 “신이 이미 그 숫자를 알고 있습니다.”라고 하고서 차례대로 숫자를 아뢰니, 임금이 침전으로 들어오게 하여 술을 하사하였다. 이어 안쪽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나의 보배로운 신하이다.”라고 하기에, 윤필상은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어좌 가까이 계심을 비로소 알고서 황공해하며 물러났다.

 

23.

追風發電走龍獅 추풍오ㆍ발전자가용등자ㆍ사자황을 따라 달리니 /
想見華亭放牧時 화정에서 방목하던 때를 상상해 보네 /
畫史如雲來設色 구름처럼 화가들이 모여 색을 베풀어 /
宮屛八疊寫神騏 궁궐의팔첩 병풍에 준마를 그렸네 /

이정형(李廷馨)의 《동각잡기(東閣雜記). 태조가 타던 말이 여덟 필이었으니,횡운골(橫雲鶻)ㆍ유린청(遊麟靑)ㆍ추풍오(追風烏)ㆍ용등자(龍騰紫)ㆍ응상백(凝霜白)ㆍ사자황(獅子黃)ㆍ현표(玄豹)ㆍ발전자(發電赭)이다. 세조가 안견(安堅)에게 명하여 그 모습을 그리게 하니, 집현전 여러 신하들이 찬문을 지어 올렸다.

 

24.

尙房銀器進銅墀 상의원에서 은그릇을 궁궐에 진상하니 /
水滴熏爐制樣奇 연적과 화로의 만든 모양이 기이하네 /
躬率王家先儉德 왕실에 모범 보여 검소함을 앞세우니 /
傳敎初下代言司 전교가 처음 승정원에 내려오네 /

《갱장록(羹墻錄). 세조 조에 왕세자를 책봉하면서 동궁(東宮)의 의장(儀仗)을 마련하였는데, 상의원(尙衣院)에서 은으로 연로(硯爐)와 연적(硯滴)을 만들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자제를 가르치면서 검약을 우선해야 하거늘 어찌 사치로 인도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25.

緋袍白馬綵花翻 붉은 옷에 흰 말 타고 어사화 너울대니 /
座主門生舊制存 좌주 문생의 옛 제도가 보존되었네 /
一一紅牌金寶榻 하나하나홍패를 하사하고 황금보탑에 앉히니 /
天童歌舞謝君恩 천동이 춤추고 노래하며 임금의 은혜에 사례하네 /

《필원잡기(筆苑雜記). 광묘(光廟 세조)가 친히 공경과 재상 및 아래로 품계를 띤 모든 문관에 이르기까지 책제를 내어 시험을 치르니, 이를 등준시(登俊試)라고 이름하였다. 은영연(恩榮宴)을 베풀어주고 장원 이하에게 홍패(紅牌), 안마(鞍馬), 창옹(唱翁), 천동(天童)을 하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에 좌주(座主 급제한 자가 시관을 높여 일컫던 칭호)와 문생(門生)의 칭호가 있었는데, 지금은 내가 친히 책문으로 선발하였으므로 내가 은문(恩門)이 됨이 마땅하니, 이 궁을 은정전(恩政殿)이라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며칠이 지나 여러 사람들이 임금과 중전(中殿)에게 잔을 올리기를 한결같이 문생이 좌주에게 행하는 예와 같이 하였으니, 우리 동방의 성대한 일이었다.

 

26.

千朶牧丹萬朶梅 천 떨기 모란과 만 떨기 매화가 /
明星綴絡耀樓臺 밝은 별처럼 어우러져 누대를 비추네 /
特宣文武宰樞入 특별히 문무 재상을 들라 명하시어 /
苑裏陪看火樹來 금원에서 함께 불꽃놀이 구경하네 /

《용재총화》. 매년 군기시(軍器寺)에서 화구(火具)를 금원(禁苑)에 설치하는데, 지포(), 화전(火箭), 화간(火竿), 화승(火繩)의 제도가 서로 보완하면서 종횡으로 길게 이어졌다. 매양 지포에 불꽃이 일면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신전(神箭)이 별처럼 날아 온 하늘에 번쩍인다. 또 화림(火林)을 만들어 꽃잎, 모란, 포도와 같은 종류를 새겨 놓고서 잠시 후 불이 숲을 모두 태우면 오직 붉은 꽃과 푸른 잎이 붉은 화염과 푸른 연기 사이에 덩굴처럼 얽힌 것이 보일 뿐이다. 임금이 후원에 거둥하여 문무(文武) 재추(宰樞)들에게 입시하라 명하여 밤이 깊도록 구경하고 파하였다.

 

27.

黃金四目赤銅顔 황금사목에 붉은 구리가면 쓰고 /
侲子來時臘雪寒 초라니가 올 때에 섣달 눈보라가 매섭네 /
十二神幢風肅肅 열두 신당이 풍모가 엄숙한데 /
盡驅邪惡報平安 사악한 귀신 모두 몰아내 평안을 알리네 /

《오례통편(五禮通編). 제석일 전날 밤에 관상감에서 대궐 뜨락에 대나(大儺) 의식을 베푼다. 악공 1인이 창수(唱帥)가 되고, 몽기() 4인이 붉은 옷을 입고 황금사목(黃金四目)의 가면을 쓰고, 곰 가죽을 뒤집어쓰고 창을 잡는다. 가면을 쓴 군졸은 12신당(神幢)을 잡고, 악공 10인은 도열( 복숭아나무와 갈대 이삭으로 만든 빗자루)을 잡고 이들을 따른다. 아동 수십 명에게 가면을 씌우고 붉은 옷과 두건을 입혀 진자(侲子 초라니)로 삼는다. 창수가 외치기를 “갑작(甲作)은 흉()을 먹고, 필위()는 호()를 먹고, 웅백(雄伯)은 매()를 먹고, 등간(騰簡)은 불상(不祥)을 먹고, 남저(攬諸)는 고()를 먹고, 백기(伯奇)는 몽()을 먹고, 강량(强梁)과 조명(祖明)은 함께 손사기생(飧死寄生)을 먹고, 위함(委陷)은 함()과 츤()을 먹고, 착단(錯斷)은 거()를 먹고, 궁기(窮奇)와 등랑(騰狼)은 함께 고()를 잡아먹으라. 오직 너희 12신은 급히 떠나 머무르지 말라. 만약 더 머무르면 네 몸을 쪼개고 너의 몸뚱이를 꺾으며, 너의 살덩이를 헤치고 너의 간장을 뽑아내리라. 그때 가서 후회하지 말라.”라고 한다. 이에 진자(侲子)가 “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죄를 자복하면, 여러 악공이 북과 징을 한꺼번에 울리면서 대궐 문을 출발하여 도성 문에 이르러 그친다.

 

28.

煖帳銷金四周 따스한 소금장을 사방에 둘렀는데 /
玉樓中夜念邊陬 옥누각에서 한밤중에 변방을 염려하네 /
繡闥通明流雪色 화려한 궁궐에 훤하도록 눈빛이 밝으니 /
辟寒那忍御貂裘 어찌 임금의 담비가죽만이 추위를 막으랴 /

삼가 고찰하건대, 성종이 지은 〈야설념북정장사시(夜雪念北征將士詩)〉의 서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내가 변경의 일을 생각하느라 밤잠을 이루지 못하여 한밤중에 침상에서 일어난 것이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지난밤 4경에 잠에서 깨어 창문을 열고 하늘을 우러러 보니, 북두성이 움직인 것이 새벽빛은 아직 먼 듯한데, 정원이 온통 훤한데도 새벽닭이 울지 않았다. 괴이하게 여겨 자세히 살펴보니 바로 눈이 내린 것이었다. 이에 변방 수자리의 고충과 북정(北征)하는 군대를 생각하다가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여 이에 소설시(小雪詩) 한 편을 지었다. 시는 이러하다. ‘한밤중에 침상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거닐자니, 변방에 수자리하고 북정하는 군사들 생각뿐이네. 적게 내린 눈도 밤빛을 이리 더하는데, 저녁 추위 먼저 들어와 바람소리를 돕네. 눈이 뜨락에 흩날려 매화 소식은 아직 먼데, 나무 사이로 가벼이 버들솜처럼 내려 앉네. 매양 삼군이 솜옷을 입었는지 걱정하면서, 갖옷 벗고 불돋우며 새벽까지 기다리네.〔中霄起榻啓軒行, 一念屯邊北討兵. 小雪尙繁增夜色, 暮寒先入助風聲. 飄庭已重梅花信, 穿樹猶加柳絮輕. 更憶三軍憂挾纊, 解貂推火到天明.〕’”

 

29.

催呼學士理華箋 학사를 급히 불러 표전을고쳐쓰라명하매 /
龍硯移來玉案邊 임금의 벼루가 옥 책상 곁으로 옮겨왔네 /
醉裏文章尤卓犖 취중의 문장이 더욱 빼어나니 /
詞臣到此卽神仙 문신의 재능이 이렇다면 신선이라 하리 /

차천로(車天輅)의 《오산설림(五山說林). 찬성(贊成) 손순효(孫舜孝)가 대제학(大提學)이 되자 성종이 몹시 그를 아껴 매번 술을 석 잔 이상 마시지 말라고 주의시키니, 손순효는 하교대로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하루는 임금이 중국에 보내는 하표(賀表)를 고치고자 하여 대제학을 급히 불렀는데, 사자(使者) 십여 명이 손순효의 종적을 찾지 못하였고, 임금은 어탑에서 자주 일어나 손순효가 오기를 몹시 고대하였다. 초저녁이 되자 손순효가 비로소 이르렀는데, 머리를 풀어헤치고 얼굴에 술기운이 가득하였다. 임금이 노하여 “일찍이 경의 면전에서 석 잔을 넘지 말라고 경계했거늘 지금 지키지 않은 까닭이 무엇이냐.”라고 꾸짖자, 손순효는 “신은 그저 세 그릇만 마셨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어떤 그릇이냐고 묻자 손순효는놋사발이라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경이 이미 취했으므로 제학을 불러야 하겠다.”라고 하니, 손순효는 “제학을 부를 필요 없이 신이 직접 지어 올리겠습니다.”라고 대답하기에 임금은 제학을부르란 명을 거두고 손순효에게어연(御硯)을 내주었다. 손순효가 쓰기를 마치고 줄대로 한 번 읽어본 후에 무릎을 꿇고 진상하니, 문장에 다시 고칠 곳이 없었다. 임금이 크게 기뻐하며 즉시 술을 하사하고, 이어 운을 불러 시를 지으라하니 막힘없이 즉시 지었다. 손순효가 이내 취하여 엎어지자, 임금이 남포(藍袍)를 벗어 덮어주었다. 이 말을 들은 자들이 영예로 여겼다.

 

30.

山紅一朶百花前 영산홍 한 떨기가 다른 꽃보다 먼저 피니 /
句引春風霜雪邊 눈서리 곁으로 봄바람을 당겨왔네 /
羯鼓催開嫌太早 갈고로 꽃을 재촉한 것도 너무 일러 싫어하시니 /
宸心都付自然天 임금의 마음은 온통 자연의 순리를 따르네 /

《국조모열(國朝謨烈). 겨울철에 장원서(掌苑署)에서 영산홍(映山紅) 화분 하나를 진상하였다. 성종(成宗)이 하교하기를 “겨울철에 꽃이 핀 것은 인위적으로 피운 데 불과하다. 나는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이후로 다시 올리지 말라.”라고 하였다.

 

31.

金爵銀罍貯滿盤 금술잔 은주발을 소반 가득 벌여놓고 /
就中拾得玉團團 그중에 둥근 옥술잔 잡아들었네 /
醉起宮筵因拜舞 궁궐 잔치에 취해 일어나 절하고 춤을 추니 /
不知袖裏碎琅玕 소매 속에 옥술잔이 깨지는 줄 알지 못했네 /

오산설림(五山說林). 성묘(成廟 성종) 때에 궁궐에 소장된 옥배(玉杯) 하나가 얼음처럼 맑고 영롱하였다. 임금이 매양 술자리를 마련하여 술이 거나해지면 곧 이 술잔을 가지고 술을 마시라고 명을 내렸다. 어떤 종실(宗室)이 특별히 은덕을 입었는데, 하루는 또 이 술잔으로 술을 마시라고 명하자, 그 사람은 술을 마신 후 곧 술잔을 소매에 넣고 일어나 춤을 추다가, 일부러 땅에 엎어져 술잔을 깨뜨리니, 풍간한 것이었다. 임금도 나무라지 않았다.

 

32.

盛事喧傳學士群 성대한 사적이 학사들 사이에 떠들썩하니 /
臂鷹正字出宮門 팔뚝에 매 올린 정자가 궁문을 나서네 /
今朝多少
中味 오늘 아침 부엌의 여러 가지 음식들이 /
便是君王內府分 바로 군왕께서 내부에서 나눠준 것이네 /

《해동패림》. 성종이 일찍이 홍문관 정자(正字) 성희안(成希顔)을 합문으로 불렀다. 중관(中官 내시)에게 명하여 팔뚝에 매 한 마리를 앉혀주고는 하교하기를, “그대에게 노모가 계시니 공무를 마치고 퇴근하여 여가가 있으면 교외에서 사냥하여 맛난 음식을 대접하라.”라고 하였다.

 

33.

不省人扶下殿時 취하여 남에게 업혀 궁궐을 나오는데 /
何來金橘落離離 어디서 온 금귤인지 이리저리 떨어지네 /
橘中有核盈懷袖 귤 속에 씨가 있어 소매에 가득 품고서 /
齎得君親兩樣思 임금과 어버이에 대한 생각을 다 담아왔네 /

《해동패림》. 성희안(成希顔)이 일찍이 야대(夜對)에 들어가자, 성종이 술과 과실을 하사하였다. 성희안이 감귤 수십 개를 소매에 넣고서 곧 취해 엎드려 인사불성이 되었다. 중관이 업고서 나오는데 소매 속의 감귤이 땅에 떨어지는 줄도 몰랐다. 이튿날 임금이 감귤 한 소반을 옥당에 내리면서 “어젯밤 성희안이 어버이께 드리려던 것이므로 하사하노라.”라고 하였다.

 

34.

紫羅毛色眼如星 자색비단 같은 깃털에 별 같은 눈동자 /
趾下紅
項下鈴 붉은 깍지에 앉아 목에 방울 달았네 /
一夕西風雲萬里 어느 저녁 서풍 불어 구름이 만리인데 /
上林飛去海東靑 상림원에서 해동청이 날아 떠나가네 /

《국조보감》. 성종 5년에 대사간 정괄(鄭佸)이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서려(西旅)가 오()를 진상하자 태보(太保)가 경계의 말을 올렸고, 문제(文帝)가 말을 물리치자 사관이 검덕(儉德)을 칭송하였습니다. 성상께서응방(鷹坊)을 혁파하였는데, 지금 도패(都牌) 유수(柳洙)의 집에 늘 해동청(海東靑)을 기르고 있으니, 이는 실제 혁파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바라건대 풀어주도록 명하여 온 나라 신민(臣民)들로 하여금 성상께서 숭상하는 바가 외물(外物)에 있지 않다는 것을 밝게 알게 하소서.”라고 하니, 성종이 즉시 해동청을 풀어주라고 명하였다.

 

35.

仙樂仙醪寵賜新 신선의 음악과 신선의 술을 내려 총애가 새로우니 /
集賢學士讀書臣 집현전 학사들이 독서하는 신하 되었네 /
蓉山走馬承恩入 용산에서 말을 달려 은혜 입고 들어가니 /
紅帕封箋謝聖人 붉은 비단으로 전문을 봉하여 성인께감사드리네 /

《해동패림》. 성종이 용산(龍山)의 폐사(廢寺)를 수리하여 조위(曺偉)에게 기문을 짓게 하고, 아울러 ‘독서당(讀書堂)’ 세 글자를 사액(賜額)하고 술과 음악을 내려 주면서 승지를 보내어 낙성케 하였다. 이튿날 사례하는 전문(箋文)을 지어 대궐에 나아갈 때에는 붉은 비단으로 싼 함()을 마주 들도록 하였고 세악(細樂)을 뒤따르게 하여 임금의 하사(下賜)를 영예롭게 하였다.

 

36.

宮門拜跪贊成臣 대궐문에 꿇어 앉아 절하는 찬성 신하는 /
昨日南山賜酒人 어제 남산에서 술을 하사받은 사람이네 /
坊曲閑遊無不燭 골목길 한가로운 모임도 두루 살피시니 /
一時光寵動朝紳 한 때의 총애가 조정신하를감동시키네 /

선조 충익공(忠翼公)의 《기재잡기(寄齋雜記). 찬성(贊成) 손순효(孫舜孝)는 충신이며 효자에 질박하고 정직하여 성종이 매우 총애하였다. 어느 날 성종이 저녁에 경회루에 올라 멀리 남산을 바라보는데, 마침 몇 사람이 수풀 사이에 둘러 앉아 있었다. 사람을 시켜 엿보게 하니 손공이 두 나그네와 탁주를 마시는데 소반에 참외 한 개뿐이었다. 성종이 즉시 말 한 필을 내어 술과 안주를 갖다 주도록 명하고, 다음날 사례하지 않아도 좋다고 아울러 당부하였다. 손공은 머리를 조아려 감사를 표하고 배불리 먹고 취하였다. 이튿날 새벽에 다시 와서 사례하니, 성종이 그가 당부한 바를 따르지 않음을 책망하자, 손공이 울면서 “신은 그저 임금의 은혜에만 감사하는 것이지 다른 것을 어찌 생각하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37.

南山山色月虛淸 남산산빛에 달이 휘영청 밝으니 /
別院笙歌樂太平 별원에서 음악과 노래로 태평시절 즐기네 /
內下黃封百壺酒 내부에서황봉주 일백 병을 내리시니 /
特分佳節與公卿 특별히 중추가절을 공경들과 함께하기 위함일세 /

국조보감》. 성종 20 8월에 임금이 하교하기를 “8월은 천도(天道)를 살펴보면 한서(寒暑)가 고를 때이고, 월수(月數)로 말하자면 섬토(蟾兎 달)가 둥글 때이니, 옛사람의 달구경이 실로 까닭이 있다. 마침 중추가절을 만났으니, 임금의 은혜를 빌려 청량(淸涼)한 곳을 골라 태평의 기상을 즐기는 것도 아름답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정부, 육조, 경연, 홍문관, 예문관, 승지와 주서(注書)에 명하여 장악원에서 달구경을 하게하고 술과 음악을 내렸다.

 

38.

杏疏槐密選遊塲 성근 살구나무와 우거진 홰나무 사이에 술자리 마련하니 /
特地來宣法醞香 특별히 궁궐에서 법온을 내리셨네 /
從此泮宮絃誦起 이로부터반궁에 현송 소리 일어나니 /
集春西畔是春塘 집춘문 서쪽이 바로 춘당대라네 /

《오산설림》. 삼월 삼짇날에 성종이 황문(黃門 내시) 여러 명과 후원(後苑)에서 노닐며 별감에게 반궁(泮宮 성균관)에 가서 유생이 몇 명인지 보고 오라고 명하였다. 내시가 돌아와 “서생 한 사람만 재사(齋舍)에서 독서하고 있었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임금이 후원문을 열고 불러들이라 명하여 유생에게 묻기를 “제생들이 모두 나갔는데 너는 어찌 홀로 남았느냐?”라고 하니, 유생이 대답하기를 “금일은 좋은 명절이라 제생들은 집으로 돌아간 자도 있고, 친구들과 모임을 연 자도 있습니다. 신은 먼 고장에서 온 사람이라 친척과 친구도 없기에 홀로 남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제생들이 어디에 있는가를 물으니, 십여 인이 막 반수(泮水)에 술자리를 마련하는 중이라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너는 우선 그곳에 가 있어라.”라고 하였다. 잠시 후에 내시가 궁궐의 음식과 좋은 술을 가지고 오자, 서생이 제생들을 불러 함께 즐기니, 모두가 크게 놀랐다.

 

39.

百尺長竿百尺繩 백 척 긴 장대에 백 척의 줄을 매니 /
宮人錯道欲懸燈 궁인은 잘못 알고서 등을 달려 한다 하네 /
公私廩積高如許 공사의 창고에 곡식이 저처럼 높이 쌓여 /
只祝年年大有登 그저 해마다 큰 풍년 들기만 축원하네 /

이자(李耔)의 《음애잡기(陰崖雜記). 민속에서 정월 15일에 짚을 엮어 곡식이삭 모양으로 만들어, 높은 장대를 세우고 긴 줄을 매고서 여기에 주렁주렁 매달아 그해의 풍년을 기원한다. 궁중에서는 민속을 따르되 그 제도를 더 크게 하여 〈칠월편(七月篇)〉을 모방하여 사람이 농사짓는 모양을 만드니, 이는 기교를 부리고자 함이 아니라 바로 근본이 되는 농사를 중시하려는 뜻이다.

 

40.

車如流水馬如龍 수레는 물처럼 흐르고 말은 용처럼 크니 /
曲曲笙歌踏彩虹 골목마다 음악소리 울리며 다리를 밟네 /
試向錦川橋上望 금천교에 가서 위를 올려다보면 /
萬家明月一天中 만가를 비추는 밝은 달이 하늘에 떴으리 /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 도성에 전하는 말에 정월 보름날 밤에 열두 다리를 걸어서 건너면 그해 열두 달의 재액을 없앤다고 한다. 이날 궁궐에 숙직하는 관원들도 서로 어울려 달빛 아래 금천교(禁川橋)를 거니니, 이 또한 답교(踏橋)의 의미이다.

 

41.

靑春紫度金輿 푸른 봄날 금원에 금수레가 납시니 /
花下千官影不疏 꽃 아래 관원들 그림자 드물지 않네 /
學士淸朝誰第一 학사 중에 누가 조정에서 제일인가 /
袖中遺落近思書 소매 속에서 《근사록》을떨구었네 /

《국조보감》. 중종이 재상들과 함께 경회루에서 상화연(賞花宴)을 베풀었다. 연회가 끝나고 내시가 수진본(袖珍本) 《근사록(近思錄)》을 주워서 임금께 바치니, 임금이 “이것은 필시 권벌(權橃)의 소매 속에 있던 물건일 것이다.”라고 하며 돌려주도록 명하였다.

 

42.

芙蓉繡閣水中間 부용루 화려한 누각이 연못 중간에 솟았는데 /
細管淸絲半日閑 관현악기 소리가 반나절 동안 조용하네 /
新罷
園女弟子 이번에 이원의 여악을 혁파하자 /
舍人秋雨獨憑欄 가을비 속에 사인이 홀로 난간에 기대네 /

《해동패림》. 중종이 어지러움을 다스리던 처음에 이성구(李聖求)가 사간이 되어 여악(女樂)을 혁파하기를 건의하였다. 고사에 따르면 정부(政府)의 사인(舍人)은 중서성의 막중한 직임이므로 특별히 정자와 누각, 연못에 사치를 부려 기악(妓樂)을 두어 즐겼는데, 이때에 이르러 모두 혁파하여 돌려보냈다. 얼마 안 있어 이성구가 정부에 들어와 사인이 되고서 시를 짓기를 “이원을 혁파하자고 아뢴 것은 간관이란 직명 때문인데, 이제와 연못 정자에서 풍정을 저버리네. 못물은 가득하고 연꽃은 서늘한데, 홀로 난간에 기대 빗소리 듣는구나.〔奏罷梨園爲諫名, 却來蓮閣負風情. 池塘水滿芙蓉冷, 獨憑危欄聽雨聲.〕”라고 하였으니, 이는 농으로 한 말이었다. 이성구는 중종 때 사람이 아니니, 오류가 있는 듯하므로 고찰해 보아야 한다.

 

43.

玉帶紗袍朱芾煌 옥띠와 붉은 도포에 붉은 신발 갖추니 /
五雲宮闕侍元良 오색구름 궁궐에서 원자를 모시네 /
胄筵講讀衣盈尺 주연에서강독하매 옷도 짤막한데 /
四海春光喜聖王 사해의 봄볕이 성왕을 기쁘게 하네 /

동각잡기》. 중종 기묘년(1519)에 인종(仁宗)이 다섯 살이었는데,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에 거둥하여 원자의 독서하는 모습을 보았다. 보양관(輔養官) 조광조(趙光祖)가 입시하였는데, 원자가 강사직령(絳紗直領)에다가 옥띠를 띠고 흑화(黑靴)를 신었으며 두 손을 단정하게 모으고 책상을 대하는 모습이 마치 성인(成人)처럼 의젓하였고, 훈고(訓詁)를 분석(分析)하는 목소리가 인후(仁厚)하였다. 임금이 얼굴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44.

宮箋如水淨漪漪 궁궐의 종이는 물처럼 깨끗하고 부드러운데 /
五色雲蒸紫玉池 오색구름이 자주색 옥벼루에서피어오르네 /
不寫上林多少樹 상림원의 많은 나무를 그리지 않아도 /
江南脩竹有相思 강남의 긴 대나무를 상상할 수 있네 /

《시강원지》. 인종이 동궁(東宮 세자)으로 있을 때에 김인후(金麟厚)가 춘방(春坊 세자시강원)에 들어와 동궁과 대화를 나눔에 은혜가 날로 융성하였고, 간혹 몸소 숙직소에 이르러 난해처를 질문하기도 하였다. 동궁은 평소 기예가 많으면서도 남에게 보여주고자 하지 않았으나, 김인후에게만은묵죽화(墨竹畫)를 하사하기도 하였다. 김인후의 자손들이 지금까지 보배로 간직하고 있다.

 

45.

布帛羅綺儲滿笥 삼베와 비단이 광주리에 가득하니 /
那知辛苦在蠶絲 누에와 길쌈에 고생한 줄 어찌 알랴 /
六宮近日機聲裏 후궁들이 근래 베틀에서 부르는 노래에 /
歌誦君王織婦詞 군왕께서 지은 베짜는 아낙노래도 부른다네/

삼가 고찰하건대, 《열성어제(列聖御製)》에 인종(仁宗)이 지은 제목이 없는 시 한 수가 있었는데, 시는 다음과 같다. “한 집에 두 며느리가 있는데, 베 짜는 솜씨가 매우 달랐네. 서툰 자는 더딜 것을 염려하여, 하루에 한 자씩 베를 짰고. 솜씨 좋은 자는 솜씨를 믿고서, 백 자를 하루에 짜려고 했네. 머리를 매만지며 궁녀의 화장을 배우고, 꽃 사이의 나비를 쫓아다녔네. 나비를 쫓고 또 꽃을 꺾으며, 서툰 자가 베 짜는 것을 오래도록 비웃었네. 어느 날 저녁 가을바람 불어오고, 집집마다 다듬이소리 바빠졌네. 서툰 자는 먼저 겨울옷을 만들고서, 마루 앞의 달 아래 노래하고 춤추네. 솜씨 좋은 자는 후회한들 소용이 없어, 날씨는 추운데 옷소매가 얇네. 언 손을 불며 베틀 위에서 우는데, 북이 싸늘하여 쉽게 미끄러지네. 전날의 꽃과 나비를 데려와도, 이 추운 밤을 대신하게 할 수 없네.〔一家有兩婦, 巧拙百無敵. 拙者念其拙, 一日織一尺. 巧者恃其巧, 百尺期一日. 理鬢學宮粧, 好逐花間蝶. 逐蝶又折花, 長笑拙者織. 秋風一夕至, 萬戶砧聲急. 拙者先裁衣, 歌舞堂前月. 巧者悔何及, 天寒翠袖薄. 呵手泣機上, 梭寒易. 難將花與蝶, 敵此風霜夕.〕”

 

46.

圖畫溢千箱 궁궐 서고의 도서가 일천 상자를 넘는데 /
箇箇牙籤錦繡囊 책마다상아찌 붙이고 비단 보자기에 쌌네 /
另有陶山新粉墨 따로 도산을 새로 그림으로 그려 /
朝朝移在御牀傍 아침마다 임금의 책상 곁으로 옮겨두네 /

율곡(栗谷) 이 문성공(李文成公)의 《석담일기(石潭日記).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이 벼슬에서 물러나 예안(禮安)에서 살면서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고도 나아가지 않았다. 명종이 그의 염퇴(恬退)를 가상히 여겨 여러 차례 품계를 올려주었고, 또 ‘현자를 불러도 오지 않아 탄식한다.〔招賢不至歎〕’는 제목으로 시제를 내어 근신을 시켜 시를 짓게 하였다. 또 화공을 시켜 이황이 사는 도산(陶山)의 경치를 그려 진상하게 하였으니, 그 경모함이 이와 같았다.

 

47.

宮花如醉復如眠 궁궐의 꽃도 취한 듯 조는 듯한데 /
宮酒千壺宴相臣 천 병의 술로 재상에게 잔치 베푸네 /
雲步障邊金步輦 구름 보장 옆으로 금보련을 타니 /
回鑾一曲太平春 회란가 소리에 태평세월이로세 /

《갱장록》. 명종이 취로정(翠露亭)에 거둥하여 여러 신하를 불러 시를 짓고 술잔을 올리게 하였다. 영의정 상진(尙震)이 연회에 입시하자 임금이 몸소 술잔을 권하니 상진이 취하여 후원에 쓰러졌다. 임금이 궐내로 돌아가면서 “대신이 여기에 있으니, 수레가 지나갈 수 없다.”라고 하고서 장막을 설치하여 가린 뒤에 궐내로 들어갔다. 이어 내관들에게 명하여 대신을 보호하여 돌려보내게 하였다.

 

48.

止水靈臺霽月輝 물 고요한 영대에 밝은 달 휘황하니 /
鳶飛魚躍見天機 솔개 날고 물고기 뛰어 천기를 드러내네 /
內中頒下宸章帖 궐내에서 내려온 임금의 시는 /
洙泗微言濂洛詩 수사의은미한 말이요 염락의 시와 같네 /

삼가 고찰하건대, 선조가 지은 〈제부마(諸駙馬)〉 시는 다음과 같다. “너희들이 학문을 좋아하고 행실이 근면하여 나는 가상히 여긴다. 우연히 율시 하나를 읊어 보이노라. ‘영대의 맑은 물이 훤히 밝은데, 한 점 티끌조차 범접할 수 없네. 무극은 원래 바깥이 없어, 형체가 있어야 기틀이 있게 되네. 둥글게 개인 달은 천지를 비추고, 몇 길 담장에 도로가 희미하네. 더 높이 올라 빼어난 곳 찾고자 하여, 물고기 뛰고 솔개가 나는 모습 고요히 구경하네.〔靈臺止水淨輝輝, 一點纖塵不許依. 無極元來本無外, 有形方始却有機. 一輪霽月乾坤大, 數仞宮墻道路微. 上面欲尋奇絶處, 靜觀魚躍又鳶飛.〕’”

 

49.

鷄人報曉且遲遲 계인이여, 새벽을 알림을 더디게 하라 /
駐得光陰一線移 흐르는 시간 한 눈금이라도 붙들고 싶네 /
日日萬幾常湊集 날마다 일만 가지 사무가 몰려드니 /
天家全少讀書時 궁중에선 독서할 때가 아주 적다네 /

《해동패림》.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가 경연에서 상주하기를 “일찍이 들으니 전하께서 시신(侍臣)에게 ‘내가 학문을 하려 하나 일이 많아서 겨를이 없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 그런 말씀이 있었습니까?”라고 하자, 임금이 그런 말이 과연 있었다고 대답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신이 이 말씀을 듣고 한편으로는 기뻤고, 한편으로는 근심하였습니다. 기뻐한 것은 주상께서 학문에 뜻을 두셨기 때문이요, 근심한 것은 주상께서 학문의 이치를 살피지 못하신 때문입니다. 학문이란 꼿꼿이 단정하게 앉아 종일토록 글만 읽는 것이 아닙니다. 학문이란 단지 날마다 하는 일이 하나하나 이치에 맞는 것을 말합니다. 오직 이치에 맞는지 여부를 능히 스스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독서하여 그 이치를 찾는 것입니다. 만일 독서를 학문으로 알고 날마다 하는 일에 있어서 이치에 합당함을 구하지 않는다면 어찌 이른바 학문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50.

玉尺金刀織錦箱 옥 자와 금 칼로 비단을 짜 함에 담아 /
內人頒下出尙方 황후께서 내려 주어 상의원으로 나왔네 /
留中一領蟒龍袞 궁중에 남은 한 벌의 망룡 곤룡포를 /
分付女官仔細藏 각별히 간수하도록 여관에 분부했네 /

삼가 고찰하건대 《열성지장(列聖誌狀)》에 다음 기록이 있다. 선조 조에 상의원에서 황제가 하사한 면복(冕服)이 옥체에 맞지 않으므로 다시 만들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이것은 황제가 하사하신 것이니, 싫증내지 말고 입어야지 어찌 감히 고치겠는가. 내가 임진년에 황급히 서쪽으로 몽진을 가면서 궁중의 물건은 모두 버리면서도 오직 우리 황제께서 하사하신 망룡의(蟒龍衣)만은 직접 찾아내어 가지고 갔다. 이 옷이 지금까지 남아서 때때로 펼쳐 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라고 하였다.

 

51.

寒女機絲夜夜忙 가난한 아낙이 베틀질하며 밤마다 분주한데 /
織來不自製衣裳 옷감을 짜고도 제 옷을 만들지는 못하네 /
那知吉貝尋常物 어찌알았으랴, 평범한 목화가 /
去襯山龍寶袞章 산룡을 가까이 모셔 곤룡포의 문장이 될 줄을 /

공사문견록(公私聞見錄). 선조 때에 입시한 대신(臺臣)이 근래의 복식이 화려하고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말을 올렸다. 임금이 속옷을 들춰 보여주며 “내 옷도 면포이니, 신하의 복식이 어찌 나보다 좋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자, 여러 신하들이 두렵고 부끄러워하였다. 이로부터 사치하는 풍습이 완전히 변했다.

 

52.

牙籤緗帙淨無塵 상아찌 꽂힌 누런 서책 티끌 없이 깨끗하여 /
內府輸來一樣新 내부에서 하사한 책도 한결같이 새것이네 /
聞說詞垣初薦士 듣자니 사원에서 처음 선비 선발하니 /
登瀛誰是讀書人 영주에 오른 이 중에 누가 독서한 선비인가 /

문충공(文忠公) 이항복(李恒福)의 《백사집(白沙集)》 연보(年譜). 선조가 태학사(太學士) 이문성(李文成)에게 하교하기를 “내가 《강목(綱目)》을 강독하고 싶으니, 미리 재능 있는 신하를 선발하여 강독을 전담케 하라.”라고 하였다. 그때 한음(漢陰 이덕형), 광림(廣林 이정립)과 공이 나란히 그 선발에 뽑혀 내부(內府)에 소장된 《통감강목》을 각각 하사받았다.

 

53.

一領蓑衣一尺鞭 한 벌 도롱이에 한 자의 채찍으로 /
騎牛公子去朝天 소를 탄 공자가 성상을 알현하러 가네 /
天門拜賜歸來晩 대궐문에서 하사에 사은하고 저물녘 돌아오니 /
滿路人看駙馬賢 길 가득한 사람들 어진 부마 바라보네 /

삼가 고찰하건대, 선조가 해숭위(海崇尉)에게 보낸 편지에 “듣자니 공이 하사품을 받고 두려워하면서 삿갓과 도롱이를 빌려 소를 타고 와서 은혜에 사례하고자 한다 하니, 사실인가? 내가 듣자니 군자는 남의 아름다움을 이루도록 도와준다 하니, 공을 위해 푸른 도롱이 한 벌과 백옥(白玉) 채찍 1개를 구하였으나, 오직 삿갓만은 좀처럼 구할 수 없네. 아마 칠리탄(七里灘) 가의 엄자릉(嚴子陵)이 이미 오래 전에 떠난 까닭에 세상에 이런 물건이 없는 듯하네. 여모(女帽)로 대신하는 것이 삿갓보다 훨씬 나을 듯하네. 공은 그 송아지를 타고 이 복식을 하고서 빨리 달려오게. 나는 발돋움을 하고서 기다리겠네.”라고 하고는 드디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푸른 삿갓 짧은 젓대에 소를 거꾸로 타고서, 멀리 대궐문 향해 은혜에 감사하러 돌아오네. 네 마리 수레 타고 속세에서 분주한 나그네여, 영원히 기심을 잊은 이 공자에 비하면 어떠한가.〔靑短笛倒牛騎, 遙向天門拜賜歸. 駟馬紅塵奔走客, 何如公子永忘機.

 

54.

泥金大字絳紗籠 금물로 큰 글자를 붉은 비단에 쓰니 /
處處宸章耀瑞虹 곳곳에 걸린 어필에서 서광이 빛나네 /
略識聖人心畫法 성상의 필법을 대략 터득한 것은 /
只緣供奉在宮中 임금을 모시며 궁중에 머문 까닭이네 /

《공사문견록》. 선조 때의 내시 이봉정(李鳳楨)이 늘 임금을 가까이 모시고 필연(筆硯)을 받들면서 자못 임금의 글씨체를 터득하였다. 동고() 이준경(李浚慶)이 수상(首相)이 되어 이봉정을 불러 꾸짖기를 “네가 임금의 필체를 모방한 것은 무엇을 하고자 해서이냐?”라고 하자 이봉정이 크게 두려워 필체를 고쳤다.

 

55.

金箋簾子步搖搖 금수술로 엮은 발이 걸음마다 흔들리니 /
帷屋粧成品級昭 휘장의 장식에서 품계가 밝게 드러나네 /
近聞都人相告語 근래 들으니, 도성사람들 서로 전하는 말에 /
天家乳媼不乘轎 궁궐의 유모가 가마를 타지 않는다 하네 /

《갱장록》. 선조의 유모가 일찍이 궁중에 들어와 임금을 뵙고 간청을 하자, 선조가 기뻐하지 않았다. 유모가 옥교(屋轎)를 타고 왔다는 소식을 듣고서 “귀천이 분수가 있는데, 어찌 참람하게옥교를 타는가?”라고 꾸짖으니, 유모가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56.

十幅宮箋纈海濤 열 폭의 궁전지에 파도무늬 맺혔으니 /
不要花竹與翎毛 꽃과 대와 짐승을 그릴 필요 없네 /
楷書聖學圖屛進 해서로 쓴 〈성학십도〉 병풍을 올리니 /
溫繹尋常日一遭 하루 한 번씩 가만히 궁구하시네 /

국조보감》. 인조 원년(1623)에 홍문관에 명하여 〈성학십도(聖學十圖)〉 및 〈무일(無逸)〉ㆍ〈홍범(洪範)〉으로 병풍을 만들어 올리게 하여 좌우에 두었다.

 

57.

宮晝如年漏共長 궁궐 대낮이 일 년처럼 더디 가는데 /
聖心猶惜寸陰忙 성상의 마음은 빠른 시간을 아끼시네 /
田中更有揮鉏苦 밭에서호미질 하는 괴로움을 생각하면 /
一念應生殿閣涼 애처로운 일념만으로도 전각에 서늘함이 생기리 /

《국조보감》. 인조 원년(1623) 6월에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거둥하여 행랑 아래서 주강(晝講)을 거행하니, 약원(藥院 내의원)에서 더위가 심하므로 경연을 정지하라고 청하였다. 임금이 “학문의 방도는 촌음(寸陰)을 아껴야 하거늘, 어찌 덥다 하여 주강을 정지한단 말이냐?”라고 하며 듣지 않았다.

 

58.

徹夜經筵響滿堂 밤을 새운 경연의 강독소리 당에 가득하니 /
明朝有旨禮賢良 내일 아침 현량을예우하란 교지가 내리리 /
一束生芻人似玉 생꼴 한 묶음을 먹이니 그 사람 옥과 같아 /
君王親釋白駒章 군왕이 친히 〈백구장〉을풀이하시네 /

《열성지장(列聖誌狀)》을 고찰해보니, 효종이 《시경》의 〈백구(白駒)〉편을 강독하다가 그 주석의 말을 외면서 “예로부터 임금과 신하는 마음이 합치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한신(韓信)이 초나라 사신을 마주했을 때에도 ‘생각을 말하면 들어주시고, 계책을 올리면 따라주셨다.’라는 말로써 사신을 돌려보냈다. 과연 생각을 말하면 들어주고 계책을 올리면 따라준다면, 어진 자가 어찌 떠나고자 할 리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59.

大家密勿事邊籌 큰 인물이 주밀하게 변방 계책 세우니 /
連夜停燈語未休 밤새 등불 밝히며 대화가 그치지 않네 /
想像龍庭風雪壯 용정의 눈보라가 매서울까 상상하여 /
御牀宣賜紫貂裘 주상께서 침상에서 붉은 초구하사하시네 /

우암(尤菴) 송 문정공(宋文正公)의 〈내사초구발(內賜貂裘跋)〉에 다음 기록이 있다. “지난 겨울에 주상께서 이 갖옷을 하사하시기에 신은 걸맞지 않는다는 말로 사양하였다. 나중에 주상께서 면전에서 효유하시기를 ‘사람이 서로 아는 데는 서로의 마음을 아는 것이 귀한데, 전날 내린 담비 갖옷은 요동(遼東)과 계주(薊州)에서 눈보라를 무릅쓰며 함께 말을 달리자는 뜻인데, 그것을 몰라주는가.’라고 하기에 신이 두 번 절하고 ‘전하의 뜻을 어찌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에 드문 큰 공을 세우기는 쉬우나 지극이 은미한 본심은 보존키 어렵고, 중원의 오랑캐는 물리치기 쉬우나 한 몸의 사욕은 제거하기 어렵다는 말은 주자(朱子)가 당시 효종(孝宗)에게 고한 지론이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주상이 ‘선생이 전후로 올린 소장(疏章)에서 진술한 말이 이런 뜻이 아님이 없으니, 비록 불민하지만 가슴 깊이 새기지 않겠소.’라고 하였다.

 

60.

嵌空御甲鎖黃金 어갑에 구멍 뚫고 황금으로 메워넣어 /
披掛元戎聽玉音 원수를 무장시키고 옥음으로 당부하네 /
早晩師行遼薊野 조만간 군대가 요동과 계주로 행군하면 /
一時衝到殺胡林 한 순간 돌진하여 살호림까지이르리 /

《국조보감》. 효종이 일찍이 노량(露梁)에서 열병식을 대대적으로 거행하였다. 그 전에 효종이 금은으로 장식한 어갑주(御甲)와 백우전(白羽箭)ㆍ각궁(角弓)을 훈련대장 이완(李浣)에게 하사하면서 “머지않아 열병식을 거행할 것이니, 군무를 관장함이 실로 대장에게 달려 있다. 당연히 특별한 은전이 있어야 되겠기에 특별히 이것을 경에게 하사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61.

龍舟晩御大江中 임금이 탄 배가 저물녘 큰 강에 이르니 /
錦繡山河四望同 사방을돌아보매 어디나 금수강산일세 /
京外諸營留扈駕 경외의 여러 군영이 어가를 호위하니 /
君王到此閱軍容 군왕이 이곳에 이르러 군대의 위용 사열했네 /

《국조보감》. 효종 6(1655) 가을 9월에 효종이 장릉(章陵)에 거둥하였다가 돌아오는 길에 노량진 언덕에 이르러 도성을 돌아보면서 탄식하기를 “아름답도다. 강산의 빼어남이여! 사방의 조운선이 모여드는 곳으로 이 나라 왕도(王都)로서는 한양이 최고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때 어영군(御營軍) 및 양주군(楊州軍)이 백사장에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다가 대가(大駕)를 수행한 군대와 합류하여 하나의 진을 편성했는데, 총수가 1 3천여 명이었다. 효종이 그 군용(軍容)을 사열하고서 이르기를 “이러한 군대와 말이 있어도 정당한 방법으로 통솔하지 않으면 한낱 쓸모없는 졸개가 될 뿐이다.”라고 하였다.

 

62.

雲錦裳紅繡透心 화려한 비단 붉은 치마에 세밀하게 수를 놓아 /
蟠螭飛鳳纈絲金 서린 용과 나는 봉새를 금실로 엮었네 /
自聞主第封書下 듣자니 공주의 저택에 편지가 내려와 /
宮裏停穿九孔針 궁중에서구공침에 실 꿰는 것도 정지했다 하네 /

공사문견록》. 숙휘공주(淑徽公主)가 일찍이 수놓은 치마 한 벌을 얻고자 청하니, 효종이 하교하기를 “내가 지금 한 나라를 다스리면서 검약을 솔선해 보이고자 하는데, 어찌 너에게 수놓은 치마를 입힐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63.

南海龍駒玉雪光 남해에서 올린 준마가 흰 눈처럼 빛나니 /
儀賓爭備織金韁 부마들이 다투어 금 고삐를 만드네 /
須臾太僕傳天語 잠시 후 태복이 주상의 말씀 전하며 /
特賜宗親崇善房 특별히 종친 숭선방에 내린다 하시네 /

《공사문견록》. 효종 무술년(1658) 가을에 제주(濟州)에서 공납한 말 중에 몸은 희고 갈기는 검으며 체구가 우람하고 잘 걷는 말이 있었다. 당시 홍익평(洪益平)이 여러 부마 중에 가장 나이가 많았고, 나도 새로 의빈(儀賓 부마)에 들어 여러 차례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사람들이 모두 용종(龍種 준마)이 홍공(洪公)에게 돌아가지 않고 반드시 나에게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효종이 어람(御覽)을 마친 후 특별히 숭선군(崇善君)에게 하사하였다. 총애하는 사위에게 하사하지 않고 서제(庶弟)에게 하사하니, 참으로 성대한 덕성이라 하겠다.

 

64.

一粒靈丹欲壽民 한 알의 곡식으로 백성들 장수하게 만들고자 하니 /
金膏瓊液未爲珍 금고와경액도 진귀할 것 없네 /
流霞玉食盤中粒 소반의 밥알이 유하주와 옥식이니 /
粒粒常思溝壑人 낱알마다 늘 구렁텅이 백성을 생각하네 /

공사문견록》. 신이 효종을 후원(後苑)의 별당(別堂)에서 배종할 때, 상식(尙食)이 점심수라를 올렸다. 신이 임금을 모시고 식사를 하면서 물에 밥을 말았는데, 밥이 많아 다 먹을 수가 없었다. 주상께서 책망하기를 “양을 헤아려 말아서 남김이 없어야 한다. 남은 밥을 혹 짐승이 먹는다면 그나마 쓰임이 있으나, 아랫사람들이 곡식 귀한 줄을 몰라 대부분 수채 구멍에 버려 하늘이 낸 물건을 허비하니, 전혀 복을 아끼는 뜻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신이 나중에 상을 물릴 때 보았더니, 주상의 밥사발에 쌀 한톨 남지 않았으므로 신이 가슴에 새겨 지금껏 잊지 않고 있다.

 

65.

宮田數畝易爲功 몇 이랑 궁궐의 논에 일도 그나마 수월해 /
秋穫常看歲歲
豐 가을 수확철에 해마다 풍년을 보네 /
稼穡艱難言切骨 농사의 어려움이 뼈에 사무친다 말하니 /
今人誰似聶夷中 지금 세상에 누가 섭이중과같으랴 /

《국조보감》. 효종이 세자에게 명하여 후원에 가서 논에 벼를 심고 김매고 수확하는 모습을 관찰하여 농사의 어려움을 알도록 하였다. 매양 섭이중(聶夷中)의 시를 외면서 “농가의 괴로움을 눈앞에 보는 듯하다.”라고 하였다.

 

66.

笑語花間人滿垣 꽃 사이 담소하는 사람들 뜰에 가득한데 /
看扶學士出宮門 학사를 부축하여 궁문 나서는 모습 보네 /
經幄儒臣元雋異 경연하는 유신이 본래 준걸이라 /
暫時杯酌不須論 술 취한 한때의 실수 거론할 필요 없네 /

《국조보감》. 효종이 강연에 나아가니, 교리(校理) 이정영(李正英)이 취하여 강독을 할 수 없었다. 효종이 하번(下番)이 대신 강독하라고 명하자 승지가 이정영을 추고(推考)하기를 청하였다. 효종이 “술을 마셨다는 실수로 경연하는 신하를 책망한다면, 어찌 너그럽게 포용하는 도리이겠는가. 그냥 두어라.”라고 하였다.

 

67.

軟羅巾服奉箋來 비단옷차림 유생들이 전문을 받들고 와서 /
閶闔門前拜謝迴 대궐문 앞에서 사은하고 돌아가네 /
歲歲泮宮行飮禮 해마다 반궁에서 행음례 거행하여 /
萬年長醉白銀杯 만년토록 영원히 흰 은술잔에취하리 /

국조보감》. 효종이 명하여 은술잔 한 쌍을 만들어 태학(太學)에 하사하고, 관관(館官) 및 재유(齋儒)들에게 술을 내렸다. 이어 어찰(御札)을 내려서 “사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래오래 쓰려는 것이고, 술을 위해서가 아니라 화목하기를 바라서이다.”라고 하였다. 태종(太宗)이 전조(前朝)의 국자박사(國子博士)를 위해 성균관에서 술잔을 돌릴 때, 청화잔(靑花盞)이라는 것을 썼다. 즉위를 하고서는 술잔을 깊이 간수했다가 많은 선비들이 태학에서 잔치할 때이면 그 술잔으로 술을 돌리도록 허락했다. 나중에 임진왜란의 와중에 잃어버렸고, 이때에 이르러 대사성김익희(金益)가 다시 술잔을 만들어 조종조에서 행했던 훌륭한 일을 계속할 것을 청했기 때문에 이런 명령이 있었던 것이다. 이튿날 지관사(知館事) 채유후(蔡裕後) 등이 제생을 거느리고 전문을 올려 사례했다.

 

68.

扶桑曉日錦鮮紅 부상에 새벽 해 돋아 선홍색이 찬란한데 /
先照王孫白玉宮 먼저 백옥궁의 왕손을 비춰주네 /
一炷小香凝不散 한 가닥 가는 향연기 흩어지지 않아 /
瀋陽萬里化祥虹 만 리 심양에 상서로운 무지개로 변하리 /

삼가 고찰하건대, 《열성지장(列聖誌狀)》에 다음 기록이 있다. 효종이 심양(瀋陽)에 있을 때, 먼저 현종(顯宗)을 우리나라로 돌려보냈다. 현종이 매양 떠오르는 해를 바라볼 때마다 곧 “부모님이 얼른 돌아오시게 해주소서.”라고 축원하였는데, 당시 나이 겨우 4세였다.

 

69.

九重春色映流霞 구중궁궐 봄볕이 유하주에 어리니 /
日午宮筵蔭百花 경연하는 대낮에 백화가 만발했네 /
另樣粧潢新簇子 특별한 모양으로 장황한 새 족자를 /
中官分與講臣家 중관이 강신의 집집마다 나눠주었네 /

《송자대전부록(宋子大全附錄). 금상(今上 현종)이 세자로 있을 때, 동춘(同春)과 시남(市湳) 및 천신(賤臣)이 세자의 경연을 시강(侍講)하였다. 하루는 세자가 술자리를 마련하자, 모시고 앉은 신하들이 각각 잠규(箴規)의 말을 올렸다. 시남이 말하기를 “저하께서 선비를 대우하는 예는 근면하지 않을 수 없고, 스승을 섬기는 예는 더욱 공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동춘과 천신이 말하기를 “유모(兪某)의 말이 옳습니다. 신등이 비록 천박하고 고루한 몸으로 초야에서 나왔지만 홀대해선 안 되고, 또 오늘의 말을 잊어서도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세자 저하가 “내가 어찌 제공들의 말을 잊을 수 있겠소.”라고 하고서 즉시 이 날의 일을 그림으로 그려 족자로 만들어 각각 1본씩 하사하였다. 부록에 서술한 것을 고찰하여 현종이 세자로 있을 때의 일을 삼가 기록한다.

 

70.

雪翎金鏑鵲枝弓 흰 깃털 금 화살로 나무 위의 새를 쏘니 /
花鶩離披墮碧空 들오리가 푸드덕 공중에서 떨어지네 /
莫向衆中誇絶技 사람들에게활솜씨 빼어나다 자랑 말라 /
推仁及物是宸衷 인애가 미물에까지 미친 성상의 마음일세 /

《공사문견록》. 현종 대에 내시 전이성(全以性)이 활을 잘 쏘았다. 하루는 금원에서 들오리를 쏘았는데, 다리 하나가 부러져 멀리 날지 못하고 금원 안에 떨어졌다. 현종은 들오리가 외다리로 퍼덕거리는 것을 가엾게 여겨 바라볼 때마다 측은해 하며 안색이 한동안 좋지 못하였다. 인애(仁愛)가 미물에까지 미침이 아! 지극하도다.

 

71.

養得稚熊禁苑春 금원의 봄볕에 어린 곰을 기르니 /
靈囿麀鹿日相親 영유의우록과 날마다 친히 지내네 /
一朝放爾深山去 하루아침에 곰을 깊은 산에 풀어주니 /
應感如天不殺仁 죽임을 좋아하지 않는 하늘같은 인덕에 감동하였으리 /

《갱장록》. 궁궐에서 일찍이 어린 곰을 길렀는데, 내시 등이 오랜 뒤에 반드시 우환거리가 될 것이므로 죽여야 한다고 청하였다. 현종이 당시 세자로 있으면서 “곰이 비록 사람을 해치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염려하여 먼저 죽인다면 어진 사람의 마음씨가 아니다. 깊은 산에 풀어주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효종이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너의 세대에는 시기와 의심으로 죽음을 당하는 자는 없으리라.”라고 하였다.

 

72.

一葉扁舟萬頃波 만경창파에 일엽편주 띄우고서 /
無人撐楫事如何 아무도 노를 젓지 않으면 어찌될 것인가 /
殿壁輝輝金燭夜 궁전 벽에 찬란히 촛불 밝힌 밤에 /
君王一念一摩
挲 군왕이 한 번 생각하고 한 번 어루만지네 /

《국조보감》. 숙종이 일찍이 비국당상을 불러 한 폭의 그림을 보여주니, 바로 만경창파에 나룻배 한 척이 떠 있는 광경이었다. 그림에 한 편의 글이 있었으니, 바로 임금이 지은 것이었다. 그 글에 “나라를 다스림에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학문을 좋아하는 것이고, 둘째는 어진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고, 셋째는 충성스런 간언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넷째는 나의 허물을 듣기 좋아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보물을 천히 여기고 현자를 귀히 여기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73.

蓮燭詩成月在西 금련촉 아래 시를 지으니 달은 벌써 기울고 /
曉風無賴辟寒犀 새벽바람은 벽한서로도 막을 길 없네 /
薰薰忽覺天香襲 갑자기 훈훈한 향기가 풍겨오니 /
紫幘人來降赫蹄 뷹은 모자의 관원이 시고를 가지고 내려오네 /

《국조보감》. 숙종이 밤에 옥당에 술을 하사하고, 칠언시 한 수를 지어 내렸다. 그 시에 “칼날 같은 북풍한설 솜옷조차 부러질 듯 추운데, 구중궁궐엔 어느새 밤이 침침하네. 불현듯 옥당이 생각나 술과 안주 내리니, 넉넉한 은전에 흠뻑 취하리.〔雪風如劍折綿寒, 金闕沈沈夜已闌. 忽憶登瀛傳御饌, 厭厭醉飽侈恩歡.〕”라고 하였다. 또 소서(小序)를 쓰기를, “경악(經幄)의 신하는 임금을 궁궐에서 가까이 모시고 계설향(鷄舌香)을 물고서 진강을 하거나 하문에 응하는 직책이다. 경들이 모두 훌륭한 문학과 행실로 경연에서 임금을 지성으로 인도하니, 나는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지금 추위가 점점 심해지고 밤이 점점 길어지는데, 어전에 올린 진수성찬을 마주하자 입직한 옥당 관원들이 무료할 것이라 생각하여, 반찬과 술을 내리고 겸하여 시 한 수를 지어 나의 뜻을 표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옥당에입직한 관원이 전문(箋文)을 올려 사례하고, 그 운에 따라 시를 지어 올렸다.

 

74.

尙瑞郞官御座傍 상서원낭관이어좌 곁에 서서 /
紅羅帕子覆匡牀 붉은 비단 보자기로 너른 책상을 덮네 /
伊來誥牒安新寶 이후로고첩에 새 도장을 찍으니 /
爲是皇朝舊印章 명나라가 하사한 옛 도장이기 때문이네 /

충문공(忠文公) 이이명()이 지어 올린 《명릉지문(明陵誌文)》에 다음 기록이 있다. 신이 일찍이 괴원(槐院 승문원)의 옛 종이 가운데서 명나라 성화(成化) 연간에 하사한 인적(印蹟)을 찾아내 올렸더니, 모각하여 어보(御寶)로 삼으라 명하셨고, 이어 명하시기를 “이후로 왕위를 잇는 자들은 청국(淸國)의 도장을 쓰지 말고 이 어보를 써서 자손만대에 황조의 은혜를 잊지 말라.”라고 하였다.

 

75.

官家器服儉爲章 관가의 기명복식이 검약을 법도로 삼아 /
銀鼠皮裘代鷫
鸘 은서피 갖옷을 숙상 갖옷으로 대신했네 /
聞有儒臣新奏達 들으니 유신이 새로 간언을 진달하자 /
殿前催喚尙衣郞 대궐 앞에 급히 상의원 관원을 불렀다네 /

《갱장록》. 숙종 조에 부제학 권해(權瑎)가 상주하기를 “항간에 은서피(銀鼠皮)로 주상의 갖옷을 지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옛날 진 무제(晉武帝)와 당 현종(唐玄宗)은 평범한 임금에 불과했으나 치두구(雉頭裘)와 금수장(錦繡帳)을 불살랐는데, 지금에 밝고 성스러운 전하께서 어찌 저 두 임금이 한 것보다 못하실 리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숙종이 하교를 내려 칭찬하고, 아직 재봉하지 않은 갖옷까지 상의원에 보내 모두 불사르게 하였다.

 

76.

沁園佳卉葉扶疏 심원의 아름다운 나무에 잎이 무성한데 /
早晩移來白玉除 조만간 백옥 섬돌 곁으로 옮겨 오리 /
一夕內中淸供罷 하루 저녁 궐내에서 감상을 마치고서 /
民間還賜舊棕櫚 옛날 심었던 종려도 민가에 되돌려 주었네 /

《국조보감》. 숙종이 일찍이 종려(棕櫚)나무를 구할 때에 군수(郡守)를 지낸 홍만회(洪萬恢) 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액례(掖隷)를 시켜 구해오게 하였다. 이는 홍만회가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의 막내아들로 임금의 인척이 되기 때문이다. 홍만회가 뜰아래 엎드려 “이마에서 발끝까지 국가의 은덕을 입었으니, 머리털도 감히 아끼지 못할 처지인데 하물며 꽃나무이겠습니까. 다만 명색이 국척이라고는 해도 촌수가 먼 외척의 신하이기에 꽃나무를 바치는 것은 죄스러워 감히 하지 못하겠습니다. 신의 집에도 또한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라고 하고는 즉시 뽑아 버렸다. 숙종이 훌륭하다고 칭찬하고, 드디어 전에 심었던 후원의 종려나무도 뽑아서 민간의 주인에게 돌려보내도록 하였다.

 

77.

宮花萬朶復千枝 궁궐의 꽃이 천 송이 만 송이 피어 /
蝶春來不敢窺 봄이 되어도 벌나비가 탐내지 못하네 /
爲是聖人親釀酒 성상께서 손수 술을 빚어서 /
朝朝殿裏拜金巵 아침마다 내전에 금술잔을 올리기 때문이네 /

《국조보감》. 영조가 인현왕후(仁顯王后)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일찍이 뜰에 핀 갖가지 꽃을 따다가 손수 술을 빚어 왕후에게 드렸는데, 이때 영조의 나이 겨우 5세였다.

 

78.

鶴旗靑繖出銅闈 학 깃발 푸른 일산이 대궐문을 나오니 /
班立宮官奉駕遲 늘어선 궁관들이 늦게 돌아온 행차를 맞네 /
報道高陽三十里 고양 땅 삼십 리에 소식 알리니 /
自家今日拜陵歸 세자가 오늘 명릉을 배알하고 돌아간다 하네 /

《국조보감》. 영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 8 15일이 숙종의 탄신일이라 명릉(明陵)을 배알하고서 고령(古靈)의 농사(農舍) 5일간 머물렀다. 장차 대궐로 돌아가 안부를 살피려고 저물녘에 출발하여 덕수천(德水川)에 이르렀는데, 밤이 깊고 불도 없어 검암(黔巖) 파발참(擺撥站)에서 쉬게 되었다. 얼마 후 어떤 사람이 소를 끌고 앞개울을 건너자, 시종하던 자가 영조에게 도둑이라고 고하였다. 영조가 발참장(撥站將) 이성신(李聖臣)에게 이르기를 “저 사람은 흉년이 들어 기한에 시달리다 저렇게 한 것이다. 그러나 농부가 소가 없으면 어떻게 경작할 수 있겠는가.발참장이 비록 낮은 벼슬이긴 해도 또한 관직이다. 네가 잘 처리하여 소는 주인에게 돌려주고 도둑은 관가에 고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성신이 곧 영조의 말대로 하였다. 새벽녘에 영조가 서울의 잠저로 돌아오니, 학가(鶴駕)가 잠저의 문밖에 위의를 갖추고 있었다. 이미 저위(儲位)로 세워진 때문이었다.

 

79.

遲遲花影覆宮茵 한가로운 꽃그늘이 경연자리를 덮으니 /
淸晝臨書泣聖人 맑은 대낮 서책 앞에 주상이 눈물 흘리네 /
爲是先王留手澤 선왕께서 손때 묻은 책을 남기시어 /
宛然如昨貼黃新 마치 어제인양 첩황이 새롭기 때문이네 /

《국조보감》. 숙종이 일찍이 《예기》 〈증자문(曾子問)〉을 강독할 적에, 이미 강독을 마친 부분에 찌를 붙여 놓았는데 몸이 편찮아져서 강독을 마치지 못하였다. 영조가 뒤에 주강(晝講)에 나아가 책을 읽다가 〈증자문〉에 이르자 목이 메어 눈물을 흘리며 말을 잇지 못하였다. 경연관들이 일제히 아뢰기를 “《소학》에서 ‘차마 아버지가 읽던 책을 읽지 못하니 손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청컨대 이 편을 강하지 마소서.”라고 하자, 영조가 따랐다. 이날 밤 소대(召對)를 하고 선찬(宣饌)하면서 부모가 있는 자들에게 가져다 드리라고 명하자, 신하들이 앞 다퉈 소매 가득 채웠으나 부모가 없는 자들은 빈 소매로 물러났다. 주상이 이를 보고 슬피 울자 신하들도 모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80.

毓祥宮接慶宮 육상궁이 경희궁에 인접하여 /
展拜頻繁一歲中 한 해 내내 자주 나아가 절 올리네 /
更欲朝朝瞻望近 또 아침마다 멀리서 바라보고자 /
小樓新起上林東 작은 누대를 상림원 동쪽에 새로 세웠네 /

삼가 고찰하건대, 정조가 지은 《영종행록(英宗行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영조가 만년에 경희궁()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궁원에 영취(暎翠)라는 정자가 있어 높직하여 조망하기에 좋았다. 사직단(社稷壇)이 그 서쪽에 있고, 육상궁(毓祥宮)이 북쪽에 있었다. 영조는 타고난 효성이 지극하여 자전(慈殿)을 오래 모시지 못한 것을 일생의 한으로 삼아, 날마다 새벽이면 영취정에 가서 한참 동안 부복했다가 육상궁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돌아왔고, 저녁에도 그렇게 하면서 모진 추위나 더위에도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었다. 일찍이 하교하기를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바로 혼정신성(昏定晨省)의 뜻이다.”라고 하였다.

 

81.

千官玉珮響玲瓏 관원들의 옥패가 영롱히 울리니 /
黃幄深深拜帝宮 깊숙한 누런 휘장에서 대보단에 절하네 /
風馬雲車瞻髣髴 풍마에운거를 탄 모습 우러른 듯하여 /
漫空一氣北辰中 공중 가득 흰 기운이 어좌를감싸네 /

삼가 고찰하건대, 정조가 지은 《영묘행록(英廟行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갑신년(1644) 3 19일은 바로 의종(毅宗)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날이었다. 그날에 임금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친히 대보단(大報壇)에 제를 올렸는데, 제삿날 며칠 전부터 재거(齋居)하면서 소찬을 들었다. 그리고 신하들에게 하교하기를, “《예기》에 ‘소리 없는 데서 듣고, 형체 없는 데서 본다.〔聽無聲, 視無形.〕’라고 하였고, 또 ‘사흘 동안 재계를 하면, 재계하는 대상을 볼 수 있다.〔齋三日, 乃見其所爲齋者.〕’라고 하였다. 나에게 과연 귀신을 감격시킬 정성이 있다면, 하늘에 계신 영령이 우리나라에도 강림하실 것이다.”라고 하였다. 제삿날 밤에 왕이 지극한 정성으로 제를 올리고, 제가 끝난 후에 또 맨땅에 엎드려 있기도 했는데, 날이 밝을 무렵에 백기(白氣)가 나타나 누런 장막 위에 길게 가로질러 있는 것을 근시들이 모두 목격하였다고 한다.

 

82.

觀耕臺畔柳絲絲 관경대 곁에 버들가지 늘어지니 /
東籍靑紘載耒時 푸른 갓끈으로 동적전에서 쟁기를 멜 때로다 /
農丈人星光燭地 농장인성이 땅을 밝게 비추면 /
明朝太史奏丹墀 내일 아침에 사관이 임금께 아뢰리 /

《국조보감》. 영조 43(1767) 봄에 주상이 왕세손을 거느리고 적전()을 친경(親耕)하였다. 처음에 주상이 《주례(周禮)》의 글에 따라 예조에 명하여 헌종의(獻種儀)를 지어 올리도록 하였다. 하루 전에 왕비가 의례대로 헌종(獻種)하였다. 그날 주상이 왕세손과 더불어 동적전()에 갔다. 주상은 다섯 번 밀어주는 예를 행하고, 왕세손은 일곱 번 밀어주는 예를 행하고, 종실과 대신, 이조 판서 이하가 모두 아홉 번 밀어주는 예를 행하였다. 3일이 지나 주상이 세손과 더불어 남교(南郊)의 성경대(省耕臺)에 행차하여, 세손에게 명하여 몸소 밭두둑에 나가 농사짓는 절차를 묻고 힘들게 일하는 상황을 살피도록 하였다.

 

83.

春來戴勝降公桑 봄 되어 뻐꾸기가 관가의 뽕나무에 내리니 /
夜饗先蠶親上香 밤에 선잠에 제사를 올려 친히 향불 사르네 /
旋製君王新冕服 이윽고 군왕의 새 면복을 지으니 /
六宮齊誦葛覃章 육궁이 나란히 〈갈담장〉을암송하네 /

《국조보감》. 영조 43 3월에 왕비가 비로소 친잠(親蠶)을 행하였다. 하루 전에 왕비가 경복궁에 나아가 선잠(先蠶)에게 제향을 올리고, 이어 채상례(採桑禮)를 의례대로 행하였다. 여름 4월에 왕비가 비로소 수견례(受繭禮)를 행하고, 누에고치를 여러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해 가을 주상이 몸소 석전(釋奠)을 거행하고, 대신에게 하교하기를 “이번 예를 행할 때 입은 면복(冕服)과 대대(大帶)는 바로 내전이 친잠(親蠶)하여 짠 옷감으로 만든 것이다.”라고 하였다.

 

84.

北壇親禱露珠旒 북단에 친히 기도하며 면류관 드러내니 /
絳繖霑來七寶斿 붉은 일산과 칠보 깃대가 비에 젖네 /
步軍隊仗還宮路 보병 의장대와 함께 환궁하는 길에 /
已聽田間活活流 벌써 밭둑 사이에 콸콸 물소리 들리네 /

《국조보감》. 영조 29년 여름에 큰 가뭄이 들어, 주상이 북교(北郊)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초헌(初獻)을 하고 나자 쏴하고 바람 소리가 나서 장막을 거두도록 명하고 빗속에 섰는데, 일을 마칠 즈음 면불(冕黻)이 다 젖었다.

 

85.

鼕鼕靈鼓奏雲臺 둥둥 북소리 울려 운대에 아뢰니 /
捧日羲和暫徊 해를 받든 희화가 잠시 머무네 /
終始敬天勤惕念 시종 하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도록 /
告辭添入數條來 고하는 말에 몇 조목을 덧붙였네 /

《춘관통고(春官通考)》 〈구식의(救食儀)〉에 “주상이 익선관(翼善冠), 참포(黲袍), 오서대(烏犀帶), 백피화(白皮靴)를 갖추고 인정전(仁政殿) 섬돌 위에 나아가 해를 향해 앉으니, 관상감 제조가 나아가 ‘일식이 시작되니, 청컨대 경척수성(警惕修省)하소서.’라고 한다. 이윽고 향을 사르고 북을 쳐 의식대로 일식을 구원하고, 일식이 심해지면 다시 아뢰기를 ‘일식이 심해지려 하니 청컨대 더욱 경척수성하소서.’라고 한다. 해가 다시 둥글어지면 또 아뢰기를 ‘해가 다시 둥글어지려 하니, 청컨대 비해궐성(匪懈厥省)하소서.’라고 한다. 해가 이미 둥글어지면 드디어 북소리를 그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구의(舊儀)에는 다만 일식이 시작되고〔將食〕, 일식이 심해지고〔食甚〕, 다시 둥글어지는〔復圓〕 것만 고할 뿐이었는데, 영조 조에 특별히 명하여 ‘경척(警惕)’을 보태어 말을 만들어 정식으로 삼게 하였다.

 

86.

滿天星斗夜闌干 하늘에 별 가득한 밤 난간에서 /
時燠時寒一念端 계절이 따스하고 추운지를 일념으로 걱정하네 /
聞道江氷千尺合 듣자니 한강의 얼음이 천 척이나 얼어붙으니 /
禮官今曉祭司寒 예관이 오늘 새벽에 사한제를 지냈다 하네 /

《갱장록》. 영조 45년 겨울에 얼음이 얼지 않으니, 관원을 보내어 사한제(司寒祭)를 거행하였다. 주상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자리에 엎드려 말하기를 “《춘추(春秋)》에 얼음이 얼지 않음을 기롱하였는데, 지금 납향(臘享)이 멀지 않은데도 겨울이 이상스레 따스하여 두려움에 편안할 겨를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시각이 다하고서 비로소 내전으로 돌아오니 새벽녘에 한강의 얼음이 모두 합쳐졌다.

 

87.

洞闢重門引鷺班 중문을 활짝 열어 관원들을 인견하니 /
紅雲黼座對南山 붉은 구름 어좌가 남산을 마주하네 /
海日初昇仙仗動 바다의 해가 처음 솟아 의장대 움직이니 /
天風簫管下人間 하늘 바람에 퉁소소리가 인간세상에 울리네 /

《국조보감》. 영조가 일찍이 하교하기를 “예전에 송나라 예조(藝祖)가 ‘중문(重門)을 활짝 여는 것은 바로 나의 마음과 같다.’라고 하였다. 법전(法殿)에 임어(臨御)하였을 때는 양쪽 협문(夾門)을 열라. 임금이 법전에 임어하는 것이 어찌 평시와 같을 수 있겠는가. 이후로는 법전에 임어하였을 때 앞의 세 문을 활짝 열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88.

紗籠對對接天明 붉은 등롱 줄지어 하늘과 닿았는데 /
淸蹕紛紛抵漢城 주상의 행차가 분주하게 한양성에 이르네 /
到此凝旒停玉輦 주상이 이곳에 이르러 가마를 멈추니 /
雲從街上暮鍾聲 운종가에 저녁 종소리 들려오네 /

삼가 고찰하건대, 정조가 지은 《영종행록(英宗行錄)》에 “내가 거둥하다가 종각(鐘閣)에 이르렀을 때 혹시 종이 울리게 되면 곧 행차를 멈추었다가 종소리가 끝난 뒤에 출발했다. 그것은 주자(朱子)가 동안(同安)에서 종소리를 듣고서 마음이 달려나감〔走作〕을 점검했던 것과 같은 뜻이었다.”라고 하였다.

 

89.

漫漫東風日色鮮 살랑살랑 동풍이 불어 풍경이 고운데 /
瀛洲新綠已芊綿 영주의 신록이 벌써 무성하네 /
天心愛玩生生意 주상께서 생장하는 뜻을 사랑하시어 /
芳艸偏承玉案前 봄풀이옥안 앞에서 은혜를 흠뻑 입었네 /

삼가 고찰하건대, 영조가 지은 《자성편(自省編)》에 “봄풀이 막 자라날 때에, 늘 주염계(周濂溪)가 뜰의 풀을 뽑지 않았던 마음이 생각나서 차마 해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90.

太倉腐米樂年 태창의 썩은 쌀은 풍년의 즐거움이니 /
主上親嘗百姓前 주상께서 친히 백성보다 먼저 맛보시네 /
敎取一盤紅粒子 홍부미 한 소반을 가져오라 하교하니 /
中官捧過御牀邊 내시가 받들어 어좌 곁을 지나가네 /

국조보감》. 선혜청에서 상주하기를 “홍부미(紅腐米 오래 묵어 썩은 쌀)를 너무 오랫동안 쌓아두어 도리어 새 쌀을 상하게 하니, 싼 값으로 팔아서 쓸모없는 것을 유용하게 만드소서.”라고 하였다. 영조가 하교하기를 “좋다. 그러나 먹을 수 없는 것이라면 어찌 백성을 속여서야되겠는가. 내가 백성들을 위해 먼저 맛볼 것이니, 속히 홍부미를 가져오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91.

葱籠宮苑近淸明 짙푸른 궁원에 청명이 가까우니 /
巢鵲營營繞樹鳴 까치가 둥지를 지으려 나무를 돌며 우네 /
如此群生皆自樂 이처럼 모든 생명들이 스스로 즐기는데 /
原田辛苦幾人耕 저 들판에서 고생하며 밭가는 이 몇이나 되는가 /

삼가 고찰하건대, 영조가 지은 《자성편》에 “내가 하루는 편전에 앉아 신료들을 접견하는데, 까치가 편전 안에 들어와 방석의 터럭을 물고 날아갔다. 이는 까치집을 지으려는 것이어서 그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 가여운 생각이 들었다. 이 마음을 만약 넓혔다면 백성들이 모두 안정된 삶의 즐거움을 누렸을 텐데, 애석하게도 실심(實心)을 미루어 실정(實政)을 행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92.

異瑞嘉祥日不虛 기이하고 아름다운 상서를 날마다 바치니 /
靈芝九穗
庭除 아홉 이삭 영지가 뜰에서 돋았네 /
只緣聖德撝謙甚 주상의 성덕이 겸양을 중시하시니 /
簪筆天官未敢書 붓을 잡은 사관이 감히 기록하지 못하네 /

《국조보감》. 금원에 기이한 풀이 났는데, 한 줄기에 이삭이 아홉 개나 달렸고 자청색(紫靑色)이었다. 금원을 맡은 자가 영지(靈芝)라고 하면서 바치니, 영조가 “내가 지금 이것을 가지고 상서(祥瑞)로 여긴다면 사방에서 상서라 하면서 바치는 자가 들끓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물리쳤다.

 

93.

二百儒生擢禮闈 유생 이백 명이 과거 시험에 뽑혀 /
幞頭鈴帶唱名歸 복두와방울띠 차림으로 창명하고 돌아가네 /
今年進士恩光別 금년의 진사들 은총이 각별하여 /
新着天朝舊賜衣 명나라에 내린 옛 의복을 새로 입었네 /

《국조보감》. 영조가 진사과(進士科)의 복두(幞頭)ㆍ난삼(襴衫)ㆍ대연화(戴蓮花)ㆍ문희연(聞喜宴) 등의 제도를 복구하고자 하였으나 난삼만은 제도를 알지 못하였다. 연신(筵臣)이 아뢰기를 “고 이조 참판 김륵()이 중국에 사신을 갔을 때, 명나라 신종(神宗) 황제가 복두와난삼을 하사하니, 김륵이 돌아와 안동(安東)의 학사(學舍)에 보관하였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영조가 진상하라고 명하니, 이에 생원과 진사의 의관이 모두 명나라 제도로 회복되었다.

 

94.

煌煌睿墨寫雲雷 빛나는 선친의 붓으로 구름과 용을 그리니 /
鱗甲如生動鬣鰓 비늘이며 갈기가 살아 움직이는 듯하네 /
聞說文孫初誕降 듣자니문손이 처음 탄생할 적에 /
神龍擁護吉祥來 신룡이 보호하는 길상이 있었다 하네 /

삼가 고찰하건대, 정조가 지은 〈경춘전기(景春殿記)〉 뒤에 쓴 소지(小識)에 “궁전 동쪽 벽에 용이 그려져 있다. 그것은 내가 태어나기 전날 밤 선친(先親)께서 꿈에 용이 침실로 들어왔는데, 나를 낳고 보니 흡사 꿈속에 보았던 용처럼 생겼으므로 그것을 손수 벽에다 그려 아들을 얻은 기쁨을 기록한 것이다. 지금 보아도 먹물이 젖은 듯하고, 용의 뿔과 비늘이 움직이는 것 같아 내가 그 그림을 볼 때마다 눈물을 쏟지 않은 적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95.

祈穀禮成復勸農 기곡제 마치고 다시 농사 권장하니 /
綸音寫出百千通 윤음 수백 통을 써서 내리네 /
然黍鼎雷鳴處 둥둥 기장 솥이 울리는 곳에 /
聲合黃鍾第一宮 그 소리 황종 제일궁에 부합하네 /

삼가 고찰하건대, 정조가 지은 〈사직의 기곡일에창려의 신묘설에 화운하다.〔社稷祈穀日 和昌黎辛卯雪詩〕〉라는 시의 소서(小序)에 “몸소 사단에 나아가서 삼가 기곡제를 거행했는데, 기장 솥〔黍鼎〕이 종처럼 울려 대풍()의 조짐이 있었고, 누차 증험해도 마치 기약한 것 같았다. 이때 비가 온 다음에 눈이 내려서 수많은 나무에 설화(雪花)가 활짝 피었다. ‘사단의 비가 풍년을 아뢴다〔社雨報年〕’라는 송인(宋人)의 시도 있거니와, 옛날 창려가 지은 〈신묘설(辛卯雪)〉이라는 시에 풍년의 조짐을 기록하였는데, 그해에 과연 두미(斗米)의 값이 삼전(三錢)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그 시에 화운하여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정성을 붙인다.”라고 하였다.

 

96.

陽秋筆法講宣尼 춘추 필법으로 공자의 가르침을 강독하니 /
典學巍然萬世師 바른 학문 우뚝하여 만세의 사표 되었네 /
村樣杯盤名洗
册 여염집처럼술소반 마련하여 책씻이하니 /
慈心猶憶尺衣時 자전의 심정은 내 어린 시절을 아직도 기억하시네 /

삼가 고찰하건대, 정조가 지은 〈춘추를 완독하던 날에 자궁께서 음식을 베풀어 주어 기쁨을 표하시다.〔春秋完讀日 慈宮設饌識喜〕〉라는 시의 서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기억하건대 옛날 내가 어렸을 때에 책 한 질을 완독하면 자궁(慈宮)께서 그때마다 약간의 음식을 마련해 주시어 기쁨을 표하셨으니, 세속에서 일컫는 ‘책씻이〔冊施時〕’라는 예이다. 오늘에도 일이 있을 때마다 아뢰는 도리에 따라서 《춘추》를 완독한 일을 자궁께 고하였더니, 자궁께서 소자(小子)를 마치 어렸을 때처럼 여기시고 마치 여염집에서와 같이 술과 떡을 약간 준비하시므로, 마침내 감인(監印), 현독(懸讀) 등 여러 사람과 함께 먹었다.

 

97.

編成人瑞獻丹闈 《인서록》 엮어서 궁궐에 올리니 /
南極星光入紫微 남극성 별빛이 자미원에 들어오네 /

萬八門前來上壽 만팔문 앞에 와서 장수를 축원하며 /
君王先着老萊衣 군왕이 먼저 노래자의 색동옷을 입었네 /

삼가 고찰하건대, 정조가 지은 〈인서록에 대해 하전을 올린 날에 지은 연구〔人瑞錄進箋日聯句〕〉란 시의 서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인서록(人瑞錄)》을 간행하여 올리기에, 내가 원자(元子)와 더불어 편전에서 친히 받았다. 이날 날씨는 맑고 경치는 아름다운데, 이 책의 교열(校閱)에 참예한 기구신() 20인이 각각 그 아들, 손자, 증손, 현손의 부축을 받고 들어와, 서로 인도하고 도와서 몸을 굽혀 공경하여 위의(威儀)가 정숙한 것이 매우 볼만하였다. 자궁께서 음식을 내려 축수의 술잔을 들게 하니, 붉은 얼굴과 하얀 머리털이 술동이에 서로 비쳤고, 물러감에 미쳐서는 머리에 꽃을 꽂아 영광됨을 자랑하고, 아악(雅樂) 소리는 거리를 가득 메웠다. 보는 이들이 혀를 치며 찬탄하였고, 이따금 사적으로 이 광경을 그림으로 그려 놓은 이도 있었다.

 

98.

芙蓉亭下百花香 부용정 아래 온갖 꽃 향기로운데 /
特地仙遊卜夜良 빼어난 곳 신선놀이가 좋은 밤 골랐네 /
岸上人同樓上見 언덕 위나 누각 위나 다 함께 바라보니 /
萬川明月一輪光 일만 시내에 비친 밝은 달 똑같이 둥그네 /

삼가 고찰하건대, 정조가 지은 〈내원에서 꽃구경과 낚시질을 하고, 밤에 부용정 작은 누각에 오르다〔內苑賞花釣魚 夜登芙蓉亭小樓〕〉란 시의 서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날 밤에 달이 밝으므로, 내가 여러 신하들에게 ‘원운(原韻)에 궁궐 숲에 달 뜨기만 기다린다〔宮林待月輪〕는 구절이 있으니, 경들은 태액지(太液池)에 배를 띄우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라고 하니, 중신(重臣) 이문원(李文源)이 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배에 오르자, 그를 따르는 사람이 열에 아홉이었다. 이에 옥피리와 한 병의 술을 지급하여 배가 정자와 섬 사이를 돌게 하였고, 사등롱(紗燈籠) 30개를 못가에 마주 세우니, 화려한 꽃과 밝은 달빛이 위아래로 서로 비쳤다. 나는 부용정의 작은 누각에 임어하여 그것을 구경하였는데, 시좌(侍坐)한 사람은 각신이 6, 사관이 1인이었고, 그 나머지는 못가의 언덕에 앉아 있었다. 이때 누각에 앉은 사람이 배 안에 있는 사람과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운()을 부르고 축()을 나누어 운이 떨어지는 대로 곧장 서로 창화하였다.

 

99.

樓船三百大江心 누선 삼백 척을 큰 강 중심에 벌이니 /
十里朱欄接地陰 십 리의 붉은 난간이 땅에 닿아 어둑하네 /
不是虹橋觀壯麗 이는 무지개다리의 아름다운 장관이 아니라 /
萬千省得度支金 수많은 고을에서 모은 탁지부의 돈일세 /

 

100.

神嵩紫閣倚靑空 높은 산과 붉은 대궐이 푸른 하늘을 의지하니 /
鳳舞龍蟠鎭海東 봉황이 춤추고 용이 서려 해동을 안정시키네 /
表裏山河千里國 안팎으로 산하가 뻗은 천리의 나라에 /
扶桑瑞日萬年紅 동쪽에 돋는 해는 만년토록붉으리 /

삼가 고찰하건대 정조가 지은 〈용양봉저정기(龍驤鳳亭記)〉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내가 해마다 현종의 능침에 갈 때, 배로 나루를 건너자면 그 역사가 너무 거대하고 그 비용도 너무 과다하기 때문에 노량강(鷺梁江)에다 주교를 설치하게 하고 관사를 두어 그 일을 맡게 하면서 강가의 작은 정자 하나를 구입하여 주필(駐蹕)하는 곳으로 삼았다. 그 주교가 만들어진 이듬해인 신해년(1791)에 내가 그 정자에 올라갔더니 때마침 먼동이 트고 해가 떠오를 무렵이어서 붉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새하얀 안개가 비단처럼 깔려, 강 주위의 봉우리들이 마치 떨어지는 것 같고, 공수하는 것 같고, 상투를 튼 것 같고, 쪽진 것도 같아서 주렴과 안석 사이로 출몰하며 비쳤다. 또 바다의 기운이 드넓어 천리가 온통 푸른데, 북쪽에는 높은 산이 우뚝하고, 동쪽에서는 한강이 흘러와 마치 용이 꿈틀꿈틀하는 것 같고, 봉이 훨훨 나는 듯하였다. 이에 그 자리에 나온 대신에게 명하여 ‘용양봉저정(龍驤鳳)’이라고 크게 써서 처마 밑에 걸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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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001] 봉소여향절구(鳳韶餘響絶句) : 

환재의 나이 23세 때인 순조 29(1829) 7언 절구 100수로 지은 궁사체(宮詞)의 장편 한시이다. 환재는 순조 말년에 국정을 대리한 효명세자의 명으로 이 작품을 지었는데, 봉소(鳳韶)는 곧 순() 임금 때에 궁중음악 소소(簫韶)를 연주하자 봉황이 날아와 춤추었다는 고사에 유래를 둔 것이고, 여향(餘響)은 여운이란 의미인데, 고대 중국의 이상적인 궁중음악의 전통을 잇는다는 뜻이다. 궁사가 오로지 궁중 내부의 생활을 노래하여 화려한 기교를 발휘한 데 반해, 이 작품은 왕정(王政)에 기여할 교훈적인 궁사를 짓겠다는 자세로 태조 이후 정조에 이르기까지 역대 조선왕조 임금들의 고사를 차례로 노래하였다. 환재는 역대 임금들의 성덕을 노래하면서 임금의 효행, 근학(勤學)과 검덕(儉德), 백성에 대한 여러 시혜조치, 존명사대를 예찬하는 방향에 주안점을 두었다. 또한 하나의 고사를 노래할 때마다 반드시 문헌에 근거한 자세한 주를 붙였다. 인용된 서적은 《국조보감(國朝寶鑑), 《열성어제(列聖御製), 《갱장록(羹墻錄),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 《해동패림(海東稗林),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 《오산설림(五山說林)》 등 30여 종의 문헌을 참조하였다. 《김명호, 환재박규수 연구, 창작과비평사, 2008, 104~118쪽》

[-D002] 궁사(宮詞) : 

고대 시체(詩體) 중의 하나로, 대부분 궁중 생활의 소소한 부분을 주제로 칠언절구(七言絶句) 형식으로 짓는다. 당나라 왕건(王建)이 현종(玄宗) 황제의 궁정생활을 읊은 〈궁사〉 100수가 원조가 되고, 오대 시대 후촉(後蜀)의 임금 맹창(孟昶)의 왕비 비씨(費氏)가 왕건의 작품을 본떠서 자신이 경험한 궁정생활을 100수로 읊어 궁사의 정형을 이루었다. 이후 송대의왕규(王珪)ㆍ송백(宋白)ㆍ장공상(張公庠)ㆍ주언질(周彦質) 등 저명 문인들과 심지어 휘종(徽宗) 황제나 양태후(楊太后)까지 지었으며, 명나라 말 진종(陳琮)ㆍ장지교(蔣之翹)ㆍ진징란(秦徵蘭) 3인의 〈천계궁사(天啓宮詞)〉 등에 이르기까지 활발히 창작되었다. 《김명호, 환재박규수 연구, 창작과비평사, 2008, 104~118쪽》

[-D003] 시가(詩歌)의 …… 통한다〔聲音之道, 與政通. : 

《예기》 〈악기(樂記)〉에 “성음의 도는 정사와 서로 통하는 것이다. 궁은 임금에 해당하고, 상은 신하에 해당하고, 각은 백성에 해당하고, 치는 일에 해당하고, 우는 물에 해당한다.[聲音之道, 與政通矣. 宮爲君, 商爲臣, 角爲民, 徵爲事, 羽爲物.]”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D004] 한창려(韓昌黎)가 …… 책〔唐一經〕 : 

한유(韓愈)가 지은 〈답최입지서(答崔立之書)〉에 나오는 말로 《한창려문집(韓昌黎文集)》 권16에 실려 있다. 한유가 정원(貞元) 8(792)에 진사에 합격한 후 이부(吏部)의 삼시(三試)에 떨어졌을 때, 최립지(崔立之)가 편지를 보내 위로했는데 이에 대한 답장에 “앞으로 널찍한 들에서 밭을 갈며 국가의 유사(遺事)를 구하고, 현인과 명철한 선비의 끝과 처음을 상고하여 당나라를 일관하는 책을 지어 길이 남기겠다.[將耕於寬閑之野, 求國家遺事, 考賢人哲士之終始, 作唐之一經, 垂之無窮.”라고 하였다고 한다.

[-D005] 파인하리(巴人下里) : 

()나라의 민간에서 유행하던 〈파인〉과 〈하리〉라는 속악을 가리키는데, 일반적으로 세속적인 음악을 뜻한다. 송옥(宋玉)의 〈대초왕문(對楚王問)〉이란 글에 고사가 보이는데, 어떤 사람이 영중(郢中)에서 처음에 하리파인(下里巴人)이란 노래를 부르자 그 소리를 알아듣고 화답하는 사람이 수천 명이었고, 양아해로(陽阿薤露)를 부르자 화답하는 사람이 수백 명으로 줄었으며, 양춘백설가(陽春百雪歌)를 부르자 화답하는 사람이 수십 명으로 줄어, 곡조가 높아질수록 그에 화답하는 사람이 더욱 적었다고 한다. 《文選 卷45

[-D006] 봉황이 …… 춤추던 : 

태평성세를 이룩한 성인의 음악이라는 뜻이다. 《서경》 〈익직(益稷)〉에 기()가 “명구를 치고 거문고와 비파를 타며 노래를 읊으니, 조고가오시어 우빈의 자리에서 제후들과 덕으로 사양합니다. 당하에는 관악기와 땡땡이북을 진열하고, 음악을 합하고 멈추되 축과 어로 하며 생황과 용(큰북)을 번갈아 울리니, 새와 짐승이 너울너울 춤을 추며, 소소 아홉 장이 끝까지 연주되자 봉황이 와서 춤을 춥니다.[戞擊鳴球, 搏拊琴瑟以詠, 祖考來格, 虞賓在位, 群后德讓. 下管鼗鼓, 合止, 笙鏞以間, 鳥獸蹌蹌, 簫韶九成, 鳳凰來儀.]”라고 하였다.

[-D007] 순 임금이 …… 계시네 : 

순 임금은 당대의 임금을 비유하여 표현한 말이다. 많은 인재들이 임금을 보좌하여 무위지치(無爲之治)의 태평 시대를 이루자 임금의 다스림이 간소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순 임금이 의상을 늘어뜨리고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도 천하가 잘 다스려졌으니, 이는 대개 천지의 법도를 취했기 때문이었다.[舜垂衣裳而天下治, 蓋取諸乾坤.]”라는 말이 있다.

[-D008] 경신(庚申)날 밤이라 하여 : 

경신일(庚申日) 1년에 여섯 번 돌아오는데, 그 첫 번째 경신일 밤에 잠을 자지 않는 풍속을 가리킨다. 사람의 몸에 깃든 삼시충(三尸蟲)이 경신일에 사람이 잠을 자는 틈을 타서 몸에서 나와 천제(天帝)에게 제 주인의 악행을 밀고하여 수명을 단축시킨다고 하여, 뜬눈으로 밤을 새워 삼시충에게 빈틈을 주지 않고자 했던 풍속이다.

[-D009] 공께서 …… 마소서 : 

어려움에 처했을 때를 잊지 말라는 의미이다. ()나라 양공(襄公)이 무도(無道)하자 관중의 친구인 포숙아(鮑叔牙)는 공자(公子) 소백(小白)을 받들고 거()나라로 망명하였고, 관중은 공자 규()를 받들고 노()나라로 망명하였다. 망명 중에 양공이 죽자 관중은 노나라에서 군대를 동원하여 규를 제나라로 들여보내 임금이 되게 하려고 하였다. 이때 규가 관중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거()의 길을 막고 소백을 죽이게 하였는데, 관중이 쏜 화살이 소백의 대구(帶鉤)를 맞추었으나, 죽이지는 못하였다. 그 뒤에 소백이 먼저 제나라로 돌아와서 임금이 되니 바로 환공(桓公)이다. 환공은 노나라로 하여금 공자 규를 죽이고 관중을 제나라로 돌려보내게 하였다. 그러자 관중은 함거(檻車)에 갇히기를 자청하여 제나라로 왔는데, 포숙아가 환공에게 말하여 관중을 정승으로 삼게 하였다. 이에 관중은 환공을 섬겨 환공을 패자(霸者)로 만들어 천하를 바로잡게 하였다. 《史記 卷62 管晏列傳》

[-D010] 전하께서 …… 않는다면 : 

고려 공양왕 4(1392) 3월에 이성계(李成桂)가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세자 석()을 마중하러 나가 해주(海州)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다쳤다. 이때 정도전(鄭道傳)은 구세력의 탄핵으로 봉화(奉化)에 유배되어 있었는데, 이성계의 낙마 사건을 계기로 고려 왕조를 옹호하던 정몽주(鄭夢周) 등의 탄핵을 받아 보주(甫州)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러나 정몽주가 이방원(李芳遠) 일파에 의해 격살당하자, 유배에서 풀려나와 이성계를 추대, 조선 왕조를 개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D011] 백옥경(白玉京) : 

천제(天帝) 혹은 신선이 상주(常住)하는 천상의 낙원으로 옥루(玉樓)라고도 한다.

[-D012] 문소전(文昭殿) : 

조선 시대 태조(太祖)와 신의왕후(神懿王后)의 혼전(魂殿)이다. 1396(태조5)에 지어 신의왕후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인소전(仁昭殿)이라 했던 것을, 1408(태종8)에 태조가 승하하자 여기에 함께 봉안하고 문소전으로 고쳤다. 세종 15(1433)에는 태조와 태종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D013] 일기가 …… 울리네 : 

박연(朴堧)이 편경(編磬)을 만든 것을 가리킨다. 일기(一夔)는 순() 임금의 신하로 악관에 임명된 기()를 가리키는데, 일기라 한 것은 음악 한 가지 재능으로 충분했다는 뜻이다.

[-D014] 소소에 섞여 어울리니 : 

소소(簫韶)는 순() 임금의 음악 이름으로, 아름답고 오묘한 선악(仙樂)을 지칭한다. 《서경》 〈익직(益稷)〉에 “소소가 구성(九成)이 되매 봉황이 와서 축하하였다.”라고 하였다.

[-D015] 함영(咸英) : 

황제(黃帝)의 음악인 함지(咸池)와 제곡(帝嚳)의 음악인 오영(五英)을 가리킨다. 소호함영(韶頀咸英)은 태평세대의 음악을 상징하는 말인데, 소호는 순() 임금의 음악인 소와 탕() 임금의 음악인 대호(大頀)를 가리킨다.

[-D016] 종묘와 …… 연주하네 : 

세종 27(1445) 4 5일에 권제ㆍ정인지ㆍ안지 등이 《용비어천가》 10권을 올렸는데, 세종이 판에 새겨 발행하라고 명하였다. 이 악장은 세종의 명으로 목조(穆祖)가 처음 터전을 마련할 때로부터 태종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까지의 기이한 사적을 모으고, 또 왕업의 어려움을 자세히 진술하면서 시를 붙이고 전거를 갖췄다.

[-D017] 나중에 …… 지었다 : 

세종 29(1447)에 〈용비어천가〉, 〈여민락〉, 〈치화평〉, 〈취풍형〉 등을 공사간 연향에 모두 통용케 하자는 의정부의 건의에 세종이 허락했다는 기사가 있다. 처음에 임금이 〈용비어천가〉를 관현에 올려 느리고 빠름을 조절하여 〈치화평〉, 〈취풍형〉, 〈여민락〉 등의 음악을 제작하니, 〈치화평〉의 악보는 5, 〈취풍형〉과 〈여민락〉의 악보는 각 2권씩이었다고 한다. 《世宗實錄 29 6 4日 乙丑》

[-D018] 은구(銀鉤)와 …… 풀어내었네 : 

한글이 초서(草書)와 전서(篆書) 등의 유려한 필체에서 유래하였음을 가리킨다. ()나라 색정(索靖)이 초서의 필법을 논하면서 “멋지게 휘돌아 가는 은빛 갈고리[婉若銀鉤]”라고 표현한 일이 있다. 《晉書 卷60 索靖傳》 옥저()는 진()나라 이사(李斯)가 창안한 소전(小篆)의 서체를 말한다.

[-D019] 김돈(金墩)의 …… 하였다 : 

김돈이 지은 〈보루각기(報漏閣記)〉에 나오는 내용인데, 환재가 내용을 축약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東文選 卷82 報漏閣記》

[-D020] 공수() : 

고대 요() 임금 때의 솜씨가 뛰어난 장인(匠人)으로서, 춘추 시대의 공수반(公輸班)과 함께 교묘한 솜씨를 지닌 기술자의 대명사로 병칭된다.

[-D021] 의기(欹器) : 

고대에 임금을 경계하기 위하여 잘 엎어지도록 고안된 술잔 형태의 기물이다. 물이 없으면 기울어지고 물이 가득 차면 엎어지며, 알맞게 담겨야만 반듯하게 서 있는 형태로, 임금들이 이것을 자리 오른쪽에 두고 항상 경계로 삼았다고 한다. 《荀子 宥坐》

[-D022] 하늘의 …… 준다〔欽若昊天, 敬授人時. : 

《서경》 〈요전(堯典)〉에 “이에 희씨(羲氏)와 화씨(和氏)에게 명하여 하늘의 운행을 따라서 해와 달과 별의 운행을 관찰하여 백성들에게 농사철을 알려 주게 하였다.[乃命羲和, 欽若昊天, 曆象日月星辰, 敬授人時.]”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D023] 김돈(金墩)의 …… 하였다 : 

김돈이 지은 〈흠경각기(欽敬閣記)〉에 나오는 내용인데, 환재가 내용을 축약하여 재구성하였다. 《東文選 卷82 欽敬閣記》

[-D024] 세종이 …… 가득하였다 : 

《용재총화(慵齋叢話)》 권2 〈고동궁…(古東宮…)〉 조에 실려 있다.

[-D025] 헌종(獻種) : 

궁중에서 농사를 권장하기 위해 행하는 친경(親耕) 의식의 하나이다. 왕비가 육궁(六宮)의 부인을 거느리고 올벼와 늦벼의 종자를 임금에게 바치는 의식인데, 이는 세대를 이어 번성한다는 상징을 취한 것이라고 한다. 《記言 卷54 續集 四時 親耕序》

[-D026] 종규도(鍾馗圖) : 

종규는 당나라 현종 때 사람으로 모습이 추하다는 이유로 과거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고 원한을 품고 죽었다고 한다. 그의 추한 외모가 귀신을 물리친다는 전설이 있으므로 후세에는 재앙을 쫓기 위하여 그의 형상을 그려 붙이는 풍습이 유행했다고 한다.

[-D027] 소소(簫韶)에 …… 줄을 : 

하찮은 깃대로 만든 피리소리가 궁중의 아악(雅樂)처럼 훌륭한 음악에 뒤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소소는 순() 임금의 음악이름이고, 봉생(鳳笙)은 봉황의 형상으로 만든 생황을 가리킨다.

[-D028] 파평(坡平) …… 물러났다 : 

정희왕후(貞熹王后, 1418~1483)는 윤번()의 딸로 윤필상(尹弼商, 1427~1504)에게 할머니뻘이고, 촌수로는 동성 8촌간이다.

[-D029] 갱장록(羹墻錄) : 

정조가 각신이복원(李福源) 등에게 명하여 열성조(列聖朝)의 업적을 서술하여 편찬한 8 4책의 활자본으로 《열조갱장록(列朝羹墻錄)》 또는 《어정갱장록(御定羹墻錄)》이라고도 부른다.

[-D030] 천동(天童) : 

궁중의 경사나 과방(科榜)을 발표할 때 춤을 추는 동자로, 천동군(天童軍)이라고도 한다.

[-D031] 매년 …… 파하였다 : 

《용재총화(慵齋叢話)》 권1 〈관화지례…(觀火之禮…)〉 조에 실려 있다.

[-D032] 오례통편(五禮通編) : 

《국조오례통편(國朝五禮通編)》을 가리킨다. 조선 후기의 문신 이지영(李祉永)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와 그 속편들을 집성한 책이다.

[-D033] 갈고로 …… 것 : 

갈고(羯鼓)는 만족(蠻族)이 사용하던 북의 일종이다. 당 현종(唐玄宗) 2월에 상원(上苑)에서 노닐 때 장사들을 시켜서 갈고를 쳐 꽃이 빨리 피도록 재촉했더니, 과연 꽃봉오리가 빨리 벌어졌다는 고사가 있다. 《開元天寶遺事》

[-D034] 서려(西旅)가 …… 올렸고 : 

서려는 서융(西戎) 안의 한 나라로 그곳에서 나는 개를 무왕에게 바쳤는데, 태보(太保)의 직에 있던 소공(召公)이 불가하다고 간한 것을 가리킨다. 《書經 周書 旅獒》

[-D035] 문제(文帝)가 …… 칭송하였습니다 : 

()나라 문제 때 어떤 사람이 천리마를 바쳤더니, 문제가 말하기를, “앞에는 천자의 깃발인 난기(鸞旗)가 있고, 뒤에는 예비로 따라오는 속거(屬車)가 있어서 즐거운 일로 떠나는 길행(吉行)은 매일 50, 군대가 출정하는 사행(師行)은 매일 30리를 가는데, 내가 천리마를 타고 홀로 먼저 어디로 갈 것인가?”라고 하고서, 명령을 내려 천리마를 받지 못하게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古今事文類聚 後集 卷38 却千里馬》

[-D036] 성종이 …… 하였다 : 

성종 23년에 용산호(龍山湖) 옆에 있던 폐사(廢寺)를 수리하여 독서당(讀書堂)을 만들었으므로 이를 호당독서(湖堂讀書)라 부르게 되었다.

[-D037] 세악(細樂) : 

군중(軍中)에서 장구ㆍ북ㆍ피리ㆍ저ㆍ깡깡이로 편성한 음악을 가리킨다.

[-D038] 충익공(忠翼公) : 

환재의 8대조인 박동량(朴東亮, 1569~1635)의 시호이다.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자룡(子龍), 호는 기재(寄齋)ㆍ오창(梧窓)ㆍ봉주(鳳洲)이다.

[-D039] 황봉주(黃封酒) : 

궁궐이나 관청에서 빚어 황색 비단이나 종이로 봉한 술을 가리킨다. 본래는 임금이 하사하는 술을 지칭하는데, 널리 술을 가리키기도 한다.

[-D040] 권벌(權橃) : 

1478~1548.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冲齋)ㆍ훤정(萱亭)ㆍ송정(松亭)이다. 1507(중종2) 증광 문과에 급제, 지평ㆍ도승지를 거쳐 1519(중종14)에 예조 참판이 되었으나, 11월에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당하여 귀향하였다. 이후 15년간 고향에서 지내다가 1533(중종28)에 복직되어 용양위 부호군에 임명, 한성부 좌윤ㆍ형조 참판 등을 거쳐 중종 연간에 벼슬이 판서에까지 올랐다. 1539(중종34) 7월에는 이성계의 가계를 고쳐달라는종계변무(宗系辨誣)에 관한 일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명종이 즉위하자 원상(院相)에 임명되었다. 문집에 《충재집(冲齋集)》이 있다.

[-D041] 이성구(李聖求) : 

1584~1644.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이(子異), 호는 분사(分沙)ㆍ동사(東沙)이다. 아버지는 이조 판서 수광(睟光)이다. 1608(광해군1) 별시 문과에 급제, 예조 좌랑ㆍ헌납ㆍ교리 등을 역임하였고, 1623년 인조반정 때에는 사간으로 기용되어 부승지ㆍ병조 참지 등을 거쳐 벼슬이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이성구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광해군과 인조 때에 활약하였으며, 사간이 된 것은 인조반정 때이다.

[-D042] 사해의 …… 하네 :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세자를 좋아하여 봄볕처럼 우러르므로 임금까지 이를 보고 기뻐한다는 의미이다.

[-D043] 기묘년 : 

저본에는 ‘乙卯年’으로 되어 있으나 인종(仁宗 1515~1545)의 생년을 근거로 수정하였다.

[-D044] 구름 …… 타니 : 

보장(步障)은 바람과 먼지를 막기 위해 대나무 등을 줄지어 세우고 휘장을 걸친 것이다. 보련(步輦)은 사람이 끄는 수레로 보만거(步挽車)라고도 한다.

[-D045] 취로정(翠露亭) : 

세조 2(1456) 3월에 경복궁 후원에 지은 정자로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었다.

[-D046] 물 …… 드러내네 : 

고요한 물[止水]과 영대(靈臺)는 모두 마음을 비유한 시어이다. 원문의 ‘연비어약(鳶飛魚躍)’은 하늘에는 솔개가 날고 못에는 고기가 뛴다는 뜻으로, 산수의 자연을 완상하는 중에도 천리가 드러남을 깨닫고 학문의 근원처를 찾는다는 의미이다. 《詩經 旱麓》

[-D047] 수사(洙泗)의 …… 같네 : 

공자의 말이나 성리학자의 시와 닮았다는 의미이다. 수사는 공자의 고향으로 유학의 발원지를 뜻하고, 염락(濂洛)은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 낙양(洛陽)의 정호(程顥)ㆍ정이() 형제를 합칭한 말이다.

[-D048] 열성지장(列聖誌狀) :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를 가리킨다. 조선 태조의 4대 선조인 목조(穆祖)ㆍ익조(翼祖)ㆍ도조(度祖)ㆍ환조(桓祖)로부터 영조(英祖)의 원비(元妃)인 정성왕후(貞聖王后)에 이르기까지 각 인물의 행실ㆍ행장(行狀)ㆍ지문(誌文)ㆍ신도비명(神道碑銘)ㆍ표석음기(表石陰記)ㆍ책문(冊文)ㆍ악장(樂章)ㆍ제문(祭文)ㆍ선위(禪位)ㆍ교서(敎書)ㆍ교명문(敎命文)ㆍ반교문(頒敎文) 등을 모아 엮은 책이다. 1688(숙종14)에 목조 이후 원종까지를 5권 및 보유(補遺) 1권으로 간행하였으며, 그 후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이 인조 이후 열조(列朝)의 지장(誌狀)을 모아 구본(舊本)과 합하여 10책으로 만들었다. 이후 숙종이 어유귀(魚有龜)ㆍ홍계적(洪啓迪) 등에게 명하여 이것을 교정하여 20 10책으로 편성 재간(再刊)하였고, 다시 1758(영조34)에 정성왕후까지 넣어 증수하여 22 14책의 활자본으로 간행하였다.

[-D049] 망룡의(蟒龍衣) : 

망의(蟒衣)라 하여 큰 구렁이의 무늬를 수놓은 예복을 가리키는데, 명나라 제도에 금의위 당상관(錦衣衛堂上官)이 붉은 망의를 입고, 또 재상과 외국 임금에게 내려 주었다고 한다. 선조 20년 정해년(1587)에 방물(方物)을 도둑맞고 옥하관(玉河館)이 불에 탄 일 때문에 진사사(陳謝使)로 배삼익(裵三益)을 차임하여 북경에 보냈는데, 황제가 우리나라에서 지성으로 사대한다 하여 칙서를 내려 표창하고, 또 망룡의를 하사한 일이 있다. 《宣祖實錄 20 9 13日》

[-D050] 산룡(山龍) : 

왕이 입는 옷에 수놓인 산 무늬와 용 무늬로, 곧 곤룡포를 가리킨다.

[-D051] 공사문견록(公私聞見錄) : 

정재륜(鄭載崙, 1648~1723)이 궁중이나 항간에서 일어난 일들을 듣고 본 대로 적은 책이다. 정재륜의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수원(秀遠), 호는 죽헌(竹軒), 시호는 익효(翼孝)이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의 아들로 효종의 다섯째 딸인 숙정공주(淑靜公主)와 결혼하여 동평위(東平尉)가 되었다.

[-D052] 영주에 오른 이 : 

당 태종(唐太宗)이 문학관(文學館)을 열어 방현령(房玄齡), 두여회(杜如晦) 18명을 뽑아 특별히 우대하였는데, 세상에서 이를 등영주(登瀛洲)라 하여 선계에 오른 것에 빗대어 영광으로 여겼다고 한다. 《資治通鑑 唐高祖武德4年》

[-D053] 선조가 …… 하였다 : 

《선조수정실록》 15 61일 기사에 대제학 이이(李珥)에게 《강목》의 강론을 고문할 신하를 선발하게 하자, 이이는 봉교 이항복(李恒福), 정자 이덕형(李德馨), 검열 오억령(吳億齡), 수찬 이정립(李廷立), 봉교 이영(李嶸)을 추천하였다.

[-D054] 해숭위(海崇尉) : 

조선 중기의 문신 윤신지(尹新之, 1582~1657),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중우(仲又), 호는 연초재(燕超齋)이다. 선조와 인빈 김씨(仁嬪金氏)의 소생인 정혜옹주(貞惠翁主)와 결혼하여 해숭위에 봉해졌다.

[-D055] 칠리탄(七里灘) …… 듯하네 : 

동한(東漢)의 은사 엄광(嚴光)이 은거하며 낚시질하던 절강성(浙江省) 동려현(桐廬縣) 남쪽의 여울이다. 엄광은 본래 광무제(光武帝)의 친구로 벼슬을 주겠다는 것도 사양하고 칠리탄에 돌아가 낚시질을 하였는데, 지금도 그의 조대(釣臺)가 남아있다고 한다. 칠리뢰(七里瀨) 혹은 엄릉뢰(嚴陵瀨)라고도 한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嚴光》

[-D056] 옥교(屋轎) : 

나무로 집과 같이 꾸미고, 출입하는 문과 창을 달아 만든 가마로 옥교(玉轎)라고도 한다.

[-D057] 생꼴 …… 풀이하시네 : 

〈백구(白駒)〉는 《시경》 소아(小雅)의 편명으로, 훌륭한 손님이 떠나지 말도록 만류하는 시이다. “망아지에게 먹이는 싱싱한 풀 한 다발, 그 사람 백옥처럼 아름답네.[生芻一束, 其人如玉.]”라고 한 구절이 있다.

[-D058] 주석의 말 : 

〈백구(白駒)〉의 첫 구절에 붙인 주희(朱熹)의 주석에 “이 시를 지은 자는 어진 자가 떠나는데 만류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가 타고 온 망아지가 우리 마당의 싹을 먹는다고 핑계하여, 그 망아지를 묶어 매고 고삐를 동여매어 행여라도 오늘 아침을 더 머무르게 하여 그 어진 분으로 하여금 이곳에서 소요하며 떠나지 않기를 바란 것이니, 후세 사람들이 손님을 만류하려고 수레의 굴대를 빼서 우물에 던져넣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爲此詩者, 以賢者之去而不可留也. 故託以其所乘之駒食我場, 維之, 庶幾以永今朝, 使其人得以於此逍而不去, 若後人留客而投其轄於井中也.]”라고 하였다.

[-D059] 한신(韓信)이 …… 돌려보냈다 : 

한신은 초한(楚漢) 시대 한()나라의 명장으로 처음 항왕(項王)을 섬기다가 한 고조에게 귀의하여 천하통일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일찍이 항왕과 한 고조가 대치할 적에 수세에 몰린 항왕이 사신을 보내 한신에게 한 고조를 배반하고 천하를 삼분하자고 제의하였다. 이에 한신은 “한 고조는 자기 옷을 벗어 나에게 입히고, 자기 음식을 나에게 먹였으며, 생각을 말하면 들어주고 계책을 올리면 써주었다.[衣衣我, 推食食我, 言聽計用.]”라고 하며 초나라 사신을 돌려보낸 일이 있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D060] 용정(龍庭) : 

흉노족 선우가 5월에 큰 회합을 갖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흉노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D061] 내사초구발(內賜貂裘跋) : 

《송자대전(宋子大全)》 권146에 실려 있다. 숭정 기해년(1659) 4월에 작성한 글인데, 얼마 후 효종이 승하하였다.

[-D062] 살호림(殺胡林) :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난성현(欒城縣)의 서북쪽에 있는 지명으로, 당나라 천추태후(千秋太后) 때 이곳에서 돌궐(突厥)을 습격하여 오랑캐를 많이 죽였으므로 이렇게 이름하였다. 《續通典》

[-D063] 효종이 …… 하였다 : 

군대 사열은 효종 5(1654) 3월에 거행되었다. 이완(李浣, 1602~1674)은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징지(澄之),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다. 효종 때의 무신으로 효종의 북벌정책을 도와 국방 및 군대 정비에 기여하였다. 훈련 대장ㆍ형조 판서 등을 거쳐 현종 때에 우의정까지 올랐다. 시호는 정익(貞翼)이다.

[-D064] 장릉(章陵) : 

인조(仁祖)의 생부인 원종(元宗)과 그의 비 인헌왕후(仁獻王后)의 능이다. 본래 경기도 양주(楊州)에 있던 것을 1627(인조5)에 김포로 옮겨 흥경원(興慶園)이라 했다가 1632(인조10)에 장릉이라 하였다.

[-D065] 구공침(九孔針)에 …… 것 : 

부녀자들이 바느질 솜씨를 겨루는 풍속을 가리킨다. 중국에서는 궁중에서 칠석날 비빈(妃嬪)들이 각기 달을 향하여 구멍이 아홉 개인 구공침에 오색실을 꿰는데, 그 실이 바늘구멍을 통과하면 바느질 솜씨가 향상될 조짐으로 여겼다. 또 이때 채색 비단으로 치장한 누각에서 〈청상곡(淸商曲)〉을 연주하여 밤새도록 연회를 즐겼는데, 이 누각을 걸교루(乞巧樓)라 불렀다고 한다. 《開元天寶遺事》

[-D066] 홍익평(洪益平) : 

홍득기(洪得箕, 1635~1673),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자범(子範), 호는 월호(月湖)이다. 1649(인조27) 당시 세자이던 효종의 둘째딸숙안군주(叔安郡主)와 혼인하여 익평부위(益平副尉)에 봉해졌다. 같은 해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자 익평위(益平尉)로 진봉(進封)되었다. 1660(현종1)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인품이 겸손하고 신중하며 또한 소박하여 인망이 높았다.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D067]  : 

《공사문견록》의 저자인 정재륜(鄭載崙, 1648~1723)을 가리킨다. 1656(효종7) 효종의 다섯째 딸 숙정공주(淑靜公主)와 혼인하여 동평위(東平尉)가 되었다.

[-D068] 숭선군(崇善君) : 

조선 중기의 왕자 이징(李徵, ?~1690)의 봉호이다. 인조의 다섯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귀인(貴人) 조씨(趙氏)이다. 1646(인조24)에 숭선군에 봉해지고 효종이 즉위하던 해 동복(同腹)동생들과 함께 노비 150()를 하사받았다. 1651년에 누이 효명옹주(孝明翁主)의 시할아버지 김자점(金自點)의 역모사건이 일어나 어머니와 누이가 역모에 관련되었다 하여 조귀인(趙貴人)이 사사되고 효명옹주는 서인이 되었는데, 이에 연좌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 1656년 부수찬 홍우원(洪宇遠)의 소청으로 풀려 돌아온 뒤 관작이 복구되고, 제주에서 진상된용종마(龍種馬)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시호는 효경(孝敬)이다.

[-D069] 금고와 경액 : 

모두 도가(道家)의 선약이다.

[-D070] 유하주와 옥식이니 : 

유하(流霞)는 신선이 마신다는 좋은 술을 가리키고, 옥식(玉食)은 임금이 먹는 진귀한 음식을 가리킨다.

[-D071] 상식(尙食) : 

조선 시대 내명부(內命婦) 궁관(宮官)에게 주던 종5품 품계로 임금의 식사에 관한 일을 담당하였다.

[-D072] 섭이중(聶夷中)의 시 : 

섭이중(837~884)은 당나라 말기의 시인으로 자는 원지(垣之)이며, 하동(河東) 사람이다. 시를 잘하여 그가 지은 〈상전가(傷田家)〉는 매우 유명하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이월 달에 새 고치실을 미리 팔고, 오월에 새 곡식을 벌써 파네. 당장 눈앞의 급박함은 모면할 수 있으나, 심장의 살점을 도려내는 것 같네. 바라건대 군왕의 마음이, 밝게 빛나는 촛불이 되어. 화려한 잔치자리 비추지 말고, 유랑하는 집들을 두루 비췄으면.[二月賣新絲, 五月糶新穀. 醫得眼前瘡, 却心頭肉. 我願君王心, 化作光明燭. 不照綺羅筵, 徧照逃亡屋.]” 《唐書 卷177

[-D073] 청화잔(靑花盞) : 

파란색 안료로 그림을 그리거나 글자를 써서 장식한 청화자기(靑花磁器)로 된 술잔이다. 조선 시대에 청화자기는 안료를 외국에서 수입하여 매우 고가였으므로 금ㆍ은과 마찬가지로 술그릇처럼 작은 물건 외에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법전에 금지 조항을 두었다. 《經國大典 刑典 禁制》

[-D074] 동춘(同春)과 시남(市湳) : 

동춘은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의 호이고, 시남은 유계(兪棨, 1607~1664)의 호이다. 두 사람은 송시열(宋時烈)ㆍ윤선거(尹宣擧)ㆍ이유태(李惟泰) 등과 더불어 충청도 유림의 오현(五賢)으로 일컬어졌다.

[-D075] 금상(今上)이 …… 기록한다 : 

《송자대전부록(宋子大全附錄)》 권18 〈어록(語錄) 최신록 하(崔愼錄下)〉에 실려 있다.

[-D076] 영유의 …… 지내네 : 

임금의 인덕이 미물에까지 이르러 모두 화락함을 가리킨다. 영유(靈囿)는 주()나라 문왕(文王)의 동산이고, 우록(麀鹿)은 암사슴이다. 《시경》 〈영대(靈臺)〉에 “왕이 영유에 계시니, 암사슴과 사슴이 엎드려 있도다. 암사슴과 사슴이 번드르르 살쪘거늘, 백조는 깨끗하고도 희도다.[王在靈囿, 麀鹿攸伏. 麀鹿濯濯, 白鳥翯翯.]”라고 하였다.

[-D077] 금련촉(金蓮燭) : 

황금 연꽃 모양의 등불로, 신하에 대한 왕의 특별 예우를 표현할 때 쓰이는 말이다. 당나라 영호도(令狐)가 궁궐에서 밤늦게까지 황제와 대화를 나누다가 돌아갈 무렵에 촛불이 거의 다 꺼지자, 황제가 자신의 수레와 금련촉을 주어 보냈는데, 관리들이 이것을 보고는 황제의 행차로 여겼다는 고사가 있다. 《新唐書 卷166 令狐列傳》

[-D078] 벽한서(辟寒犀) : 

추운 기운을 없애 주는 무소 뿔의 이름이다. 당나라 개원(開元) 2(714)에 교지국(交趾國)에서 무소 뿔을 바쳤는데, 이것을 궁전 안에다 놓아두자 한기가 물러가고 온기가 퍼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古今事文類聚 後集 卷36 辟寒犀》

[-D079] 御饌 : 

저본에는 ‘二字缺落’이라 되어 있으나, 《국조보감》 원전을 확인하여 보충하였다.

[-D080] 계설향(鷄舌香)을 물고서 : 

시종신이나 낭관직을 가리킨다. 계설향은 정향(丁香)을 말하는 것으로 옛날 상서성(尙書省)의 낭관이 임금 앞에서 사안을 아뢸 때 입냄새를 없애기 위해 계설향을 머금었다는 고사가 있다.

[-D081] 고첩(誥牒) : 

임금이 신하에게 봉작(封爵) 등을 내릴 때 쓰는 문서를 말한다.

[-D082] 은서피 …… 대신했네 : 

진귀한 것을 평범한 것으로 바꿨다는 의미이다. 은서 갖옷은 흰 족제비 가죽으로 만든 고급 갖옷을 가리키고, 숙상() 갖옷은 기러기와 비슷한 숙상이라는 새의 가죽으로 만든 갖옷 이름인데, 흔히 가난한 사람이 입는 옷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D083] 옛날 …… 불살랐는데 : 

진 무제(晉武帝) 함녕(咸寧) 4(278)에 태의(太醫) 사마정거(司馬程據)가 꿩의 머리 깃털로 장식한 갖옷[雉頭裘]을 바쳤는데, 무제는 기이한 기예나 의복은 전례에 금지된 것이라 하여 대궐 앞에서 불사르도록 명하였고, 당 현종(唐玄宗) 선천(先天) 2(713)에 궁중의 주옥과 금수(錦繡) 등의 사치품을 정전(正殿) 앞에서 불사르게 한 일이 있다. 《晉書 卷3 帝紀 武帝》 《舊唐書 卷8 本紀 玄宗上》

[-D084] 심원(沁園) : 

후한(後漢) 때 심수공주(沁水公主)의 정원 이름으로 후대에 공주의 정원을 가리키게 되었다. 여기서는 홍만회(洪萬恢)가 부마(駙馬) 홍주원(洪柱元)의 아들이므로 한 말이다.

[-D085] 홍만회(洪萬恢) : 

1643~1709.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여곽(汝廓)이다. 영안위(永安尉) 주원(柱元)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선조의 딸 정명공주(貞明公主)이다. 1669(현종10) 사마시에 합격, 장악원직장ㆍ안악군수ㆍ풍덕 부사 등을 지냈다.

[-D086] 덕수천(德水川) : 

경기도 고양시의 덕양구 신도동을 흐르는 하천이다.

[-D087] 검암(黔巖) 파발참(擺撥站) : 

검암은 현재 서울시 은평구 진관내동 일대에 해당하는데 조선 시대에 파발참이 있었다. 현재 〈검암기적비(黔巖紀蹟碑)〉가 있는데, 이는 정조가 1781(정조5)에 숙종을 모신 명릉(明陵)을 참배하고 돌아오던 도중 할아버지 영조가 옛날 이곳에서 소도둑을 잡았다가 풀어준 일화를 회상하며 세운 것이다.

[-D088] 첩황(貼黃) : 

숙종이 붙여 놓았던 찌를 가리킨다. 본래 당나라 때에 조서(詔書)에 고칠 데가 있으면 누런 종이를 붙여서 바로잡았던 데서 유래하였다. 후대에는 상소나 절목 등을 완성한 후에 미진한 데가 있으면 그 끝이나 해당 내용에 누런 종이를 붙여서 부연(敷衍)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고, 이외에도 왕실의 비밀에 속하는 사안일 경우에도 누런 종이를 붙여 국왕이 친히 뜯어보도록 하였는데 이를 첩황이라고도 불렀다.

[-D089] 영종행록(英宗行錄) : 

《영종대왕행록(英宗大王行錄)》을 가리키며 《홍재전서(弘齋全書)》 권17에 실려 있다.

[-D090] 육상궁(毓祥宮) :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에 있는 조선 숙종의 후궁이며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淑嬪崔氏)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영조 원년(1725)에 창건되어 숙빈묘라 하였다가 개칭하여 육상묘(毓祥廟)라 하였고, 영조 29(1753)에 육상궁으로 높였다. 1908년에 저경궁(儲慶宮)ㆍ대빈궁(大嬪宮)ㆍ연호궁(延祜宮)ㆍ선희궁(宣禧宮)ㆍ경우궁(景祐宮) 5개의 묘당을 이곳으로 옮겨와 육궁(六宮)이 되었다가 1929년 덕안궁(德安宮)도 옮겨와서 현재는 칠궁(七宮)이 되었다.

[-D091] 풍마(風馬)에 …… 모습 : 

대보단에 제사를 올림에 의종의 신령이 강림한다는 의미이다. ()나라 무제(武帝) 때 만든 교사가(郊祀歌)에 “천지 신령의 수레는 검은 구름을 얽고……천지 신령이 내려오실 때 바람같이 빠른 말을 타시네.[靈之車, 結玄雲……靈之下, 若風馬.]”라고 하였다. 《漢書 卷22 禮樂志》

[-D092] 영묘행록(英廟行錄) : 

《영종대왕행록(英宗大王行錄)》을 가리키며 《홍재전서(弘齋全書)》 권17에 실려 있다.

[-D093] 소리 …… 본다〔聽無聲, 視無形. :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나온다.

[-D094] 사흘 …… 있다〔齋三日, 乃見其所爲齋者. : 

《예기》 〈제의(祭儀)〉에 나온다.

[-D095] 푸른 갓끈 : 

()은 관()에 다는 끈으로, 천자는 주굉(朱紘)을 쓰고 제후(諸侯)는 청굉(靑紘)을 쓴다.

[-D096] 농장인성(農丈人星)이 …… 아뢰리 : 

농장인성은 별 이름으로 남두성(南斗星) 서남쪽에 있는 별로 추수(秋收)를 주관한다고 한다. 농장인성이 뜨면 풍년이 들 조짐이므로 사관이 임금께 아뢰리라는 뜻이다.

[-D097] 영조 …… 하였다 : 

영조가 친경한 절차는 《영조실록》 43(1767) 2 26일 기사에 자세하다.

[-D098] 봄 …… 사르네 : 

뻐꾸기가 뽕나무에 내린다는 것은 3월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예기》 〈월령(月令)〉에 “3월……산비둘기가 날개를 치고, 뻐꾸기가 뽕나무에 내려앉는다.[季春之月, ……鳴鳩拂其羽, 戴勝降于桑.]”라고 하였다. 공상(公桑)은 천자와 제후의 뽕나무밭을 말하는데, 천자와 제후는 공상과 잠실을 가지고 있었다. 선잠(先蠶)은 누에치기를 처음 시작했다고 전해지는 서릉씨(西陵氏)에게 올리는 제사이다.

[-D099] 갈담장(葛覃章) : 

《시경》 국풍(國風) 주남(周南)의 〈갈담(葛覃)〉을 가리킨다. 두 번째 구절에 “칡덩굴이 쭉쭉 뻗어, 골짜기 가운데에 뻗어가서, 그 잎새가 빽빽하거늘, 그 덩굴을 베어 삶아서, 굵고 가는 갈포옷 지으니, 입으매 싫지가 않도다.[葛之覃兮, 施于中谷. 維葉莫莫, 是刈是濩. 爲絺爲, 服之無斁.]”라고 하여 부녀자로서 부지런하고 효심도 지극했던 문왕(文王)의 후비(后妃)를 기리는 내용이 있다.

[-D100] 영조 …… 주었다 : 

왕비의 친잠(親蠶) 및 누에고치를 반사한 내용은 영조 43년 정해(1767) 3 10, 4 27일 기사에 자세하다.

[-D101] 춘관통고(春官通考) …… 하였다 : 

《춘관통고》는 1788(정조12)경에 유의양(柳義養)이 정조의 명을 받아 《춘관지(春官志)》‚ 《국조오례통편(國朝五禮通編)》 등을 바탕으로 예조(禮曹)가 관장하는 제반 업무를 길례(吉禮)ㆍ가례(嘉禮)ㆍ빈례(賓禮)ㆍ군례(軍禮)ㆍ흉례(凶禮)로 나누어 총96권으로 편찬한 책이다. 위 인용문의 내용은 권76에 〈구일식(救日食), 〈구일식의-원의(救日食儀-原儀), 〈친림구일식의-속의(親臨救日食儀-續儀)〉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는데, 환재가 임의대로 내용을 축약하였다. 일식에 대처하는 의식에 대해서는 《은대편고(銀臺便攷)》 〈예방고(禮房攷) 일월식(日月蝕)〉도 참고할 만하다.

[-D102] 사한제(司寒祭) : 

음력 12월에 사한단(司寒壇)에서 북방의 신인 현명씨(玄冥氏)에게 지내는 제사이름이다. 얼음을 빙고에 넣을 때 장빙제(藏氷祭)를 지내고, 춘분(春分)에 빙고문을 열면서 개빙제(開氷祭)를 지내는데 이를 사한제라 한다. 그리고 추워지지 않아 얼음이 얼지 않을 때에도 제사를 지냈는데, 이를 기한제(祈寒祭) 또는 동빙제(凍氷祭)라고 하였다.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국가의례에서 소사(小祀)로 행하였다.

[-D103] 춘추(春秋)에 …… 기롱하였는데 : 

《춘추》에 노 환공(魯桓公) 14년 정월(正月), 노 성공(魯成公) 원년(元年) 2, 노 양공(魯襄公) 28년 봄에 각각 ‘얼음이 없다.[無氷]’라고 기록한 것을 가리킨다. 유향(劉向)은 “‘게으르면 항상 더운 날씨가 뒤따른다.[豫恒燠若]’라고 한 말은 정사가 서완(舒緩)하고 기강이 해이해져 상벌(賞罰)이 행해지지 않은 상()이다.[豫恒燠若, 此政事舒緩, 紀綱縱弛, 善惡不明, 賞罰不行之象.]”라고 풀이하였다. 《葛庵集 卷3 辭職兼陳所懷疏-庚午》

[-D104] 주자(朱子)가 …… 것 : 

《심경부주(心經附註)》 권3 〈우산지목(牛山之木)〉 장에 “내가 소년 시절에 동안에 있으면서 밤에 종소리를 들었는데, 그 한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이 마음은 벌써 제멋대로 다른 생각을 하려고 달아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를 계기로 철저히 반성한 끝에, 학문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뜻을 전일하게 가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嘗記少年時在同安, 夜聞鍾聲, 聽其一聲未絶, 此心已自走作. 因是警省, 乃知學爲須是致志.]”라는 주희(朱熹)의 말이 실려 있다.

[-D105] 자성편(自省編) : 

《어제자성편(御製自省篇)》을 가리킨다. 1746(영조22)에 영조가 독서와 생활을 통해 느끼고 생각한 바를 모아 2 2책으로 엮은 책이다. 유학의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정신을 따라 마음을 닦는 것을 주제로 한 내편(內篇), 사물을 다스리는 것을 주제로 한 외편(外篇)으로 되어 있다. 인용된 구절은 내편에 실려 있다.

[-D106] 내가 …… 못하였다 : 

인용된 구절은 외편(外篇)에 실려 있다.

[-D107] 복두(幞頭)ㆍ난삼(襴衫)ㆍ대연화(戴蓮花)ㆍ문희연(聞喜宴) : 

복두는 각이 지고 위가 평평한 관모로 조선 시대에 왕세자와 백관의 공복으로 제정된 적도 있었으나 그 용도가 점차 국한되었고, 관례복이나 과거 급제의 복식으로 한말까지 유지되었다. 난삼은 1746(영조22)부터 생원ㆍ진사의 합격자가 착용한 옷으로 녹색이나 검은색의 단령(團領)에 각기 같은 색의 선을 둘렀다. 대연화는 복두에 어사화를 꽂는 것을 가리킨다. 문희연은 과거급제자가 친지를 불러 베푸는 자축 연회이다.

[-D108] 이에 …… 회복되었다 : 

생원ㆍ진사의창방(唱榜) 때에 복두ㆍ난삼을 착용하도록 명한 것은 《영조실록》 영조 22(1746) 9 19일 기사에 자세하다.

[-D109] 문손(文孫) : 

제왕의 자손을 가리키는 말로 정조 자신을 지칭한 말이다. 《서경》 〈입정(立政)〉에 “지금부터 이후로 문자와 문손은 여러 옥사와 여러 신중히 할 형벌을 그르치지 마시고, 오직 정()을 다스리소서.[繼自今, 文子文孫, 其勿誤于庶獄庶愼, 惟正是乂之.]”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D110] 경춘전기(景春殿記) : 

《홍재전서》 권14에 실려 있다. 경춘전은 창경궁(昌慶宮)의 환경전(歡慶殿) 서쪽에 있는 건물로 성종 14(1483)에 건립되었다. 정조는 이 기문에서 경춘전이 숙종(肅宗)과 인원성후(仁元聖后)가 거처하던 곳이고, 그 후에는 사도세자가 거처하였으며, 자신이 태어난 곳이라는 의미를 되새기고, 퇴락한 경춘전을 옛 모습이 보존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수리만 하도록 명하고서, 공사가 끝난 후 ‘탄생전(誕生殿)’ 세 글자를 써서 문지방 위에다 걸게 된 내력을 적었다.

[-D111] 정조가 …… 하였다 : 

《홍재전서》 권7에 〈사단 기곡일에창려의신묘설시 운에 화운하다.[社壇祈穀日 和昌黎辛卯雪詩韻]〉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한유(韓愈)가 지은 시는 〈신묘년의 눈[辛卯年雪]〉이란 시인데, 당시 하남 영(河南令)으로 있으면서 원화(元和) 6(811) 봄에 내린 눈을 읊은 것이다.

[-D112] 춘추를 …… 표하시다〔春秋完讀日 慈宮設饌識喜〕 : 

《홍재전서》 권7에 〈춘추를 완독하던 날에 자궁께서 음식을 베풀어 주어 기쁨을 표하시므로, 읊어서 여러 신하들에게 보이다.[春秋完讀日 慈宮設饌識喜 吟示諸臣]〉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D113] 정조가 …… 있었다 : 

《홍재전서》 권6에 〈어정인서록에 대하여 축하전문을 올린 날에 연구를 짓다.[御定人瑞錄進箋日聯句]〉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인서록(人瑞錄)》은 《어정인서록(御定人瑞錄)》을 가리키는데, 1794(정조18)에 장수한 백관들의 위계에 따라 교지와 포상을 내린 전말을 기록하여 4 2책으로 생생자(生生字)로 간행한 책이다. 영조의 계비 김씨의 오순(五旬)과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의 육순(六旬)을 기념하여 정조의 명으로 규장각 관원들이 편찬하고, 70세가 넘은 대신 및 문음관에게 교열하게 하였다.

[-D114] 정조가 …… 있다 : 

《홍재전서》 권6에 〈밤에 부용정의 작은 누각에 오르다[夜登芙蓉亭小樓]〉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D115] 원운(原韻)에 …… 있으니 : 

《홍재전서》 권6의 〈내원에서 꽃구경하며 고기를 낚다[內苑賞花釣魚]〉란 시를 가리킨다. 원시는 다음과 같다. “이 자리에 원기가 다 모여, 오늘은 온 집안이 봄이로구나. 꽃나무는 겹겹이 서로 얽히고, 못 물은 출렁출렁 싱그러워라. 제군은 임금과 모두 가까운 사람이니, 약간 취하는 것도 자연스러우리. 작은 노 저어 일제히 흥을 타서, 궁궐 숲에 달 뜨기만 기다리자꾸나.[此筵元氣會, 今日一家春. 花木重重合, 池塘灩灩新. 諸君皆地密, 微醉亦天眞. 小棹齊乘興, 宮林待月輪.]

[-D116] 용양봉저정기(龍驤鳳亭記) : 

《홍재전서》 권14에 실려 있다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 김채식 () |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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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