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과 두향의 슬픈 사랑이야기
우리 역사속에는 선비와 기생(妓生)간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많이 전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황진이와 서경덕, 홍랑과 최경창, 이매창과 유희경, 두향과 이황 등이다.
도산서원을 짓고 세계적인 성리학 태두(泰斗)인 퇴계 이황 선생도 근엄한 느낌과는 다르게
관기(官妓)인 두향(杜香)과의 사이에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전한다.
퇴계의 어린 시절에는 불우하였다. 7남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가
별세하여 퇴계는 홀어머니 밑에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었다. 그리고 아버지 같은 형을 잃었다.
단양군수로 부임할 무렵인 때인 48세 때에는 첫 부인에 이어 재처부인마저 사별(死別)하고,
또 둘째 아들이 죽어, 인생의 깊은 고뇌로 심신은 쇠약하였다.
두향(杜香)은 단양에서 이름난 기생 있었다. 이때 두향의 나이는 18세 전하는 말에 두향이는
세조때 금성대군이 순흥현(順興縣)에 내려와 단종복위를 도모할 때 함께 참여했던
사대부의 후손이라고 한다.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집안이 몰락한 것이다.
두향 이는 어머니로부터 글을 배워 시문에 능하였다고 한다. 열 살 이전에 부모와 사별하였는데
그녀의 빼어난 자태를아까워하여 한 퇴기(退妓)가 길러 기적(妓籍)에 올렸다.
얼굴도 아름답고 거문고와 시문에도 능하였다.
그리고 난(蘭)과 매화(梅花)를 기르는 분매(盆梅) 솜씨가 능했다.
두향의 어머니는 죽기 전에 매화 화분 한 그루를 잘 길러 두향에게 남겼는데
두향은 매화를 어머니처럼 대하였다.
관기(官妓)인 두향은 신임 군수 퇴계 이황을 가까이 모시게 되였다.
두향은 사별한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아 애지중지던 매화 화분을 퇴계의 처소에 옮겨 놓았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매화(梅花)를 특별히 사랑하여 매화를 읊은 시가
무려 4500 수(首)라고 하였다. 퇴계는 단양군수로 부임하면서 아래와 같은 매화시를 지었다
매화(梅花)
봄을 맞는 매화송이 찬 기운을 띠었기에 / 한 가지 꺾어내어 옥창(玉窓)에서 마주 보네
산 첩첩 저 밖에 옛사람의 추억 그리워 / 여위고 축나는 천향(天香)을 못 견디리
퇴계가 단양으로 부임하던 시기는 이른 봄이라 화분 속의 매화도 곱게 피어 은은한 향기를
내 뿜고 있었다. 퇴계는 두향이 갖다놓은 매화를 보고 반기는 듯 하였으나,
곧 매화 분(盆)을 가져온 사람에게 돌려주라 명하였다. 고을 다스리는 군수가 백성으로부터
재물이나, 금전을 뇌물로 받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향의 간곡한 청에 의하여 매화 한 그루를 처소에 가져온 것을 차마 물리칠 수가 없었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시화(詩話)와 음률(音律)을 서로 논하고, 산수(山水)를 거닐며
인생을 즐기고 사랑을 나누었다. 두 사람은 강선대(降仙臺)에 앉아 시를 서로 화답하였다.
푸른 산은 북쪽 밭 재를 둘러 있고 / 맑은 물은 동쪽 성을 돌아가도다
오늘밤 여기서 한번 헤어지면 / 외로운 나그네 만리를 가리
퇴계(退溪) --.
떠가는 저 구름은 임의 마음이요 / 지는 이 해는 나의 정이로다
손 흔들며 그대는 떠나가니 / 가는 말 울음소리 못내 서러워
두향(杜香) --.
그러나 퇴계의 단양군수의 기간은 길지 못했다. 퇴계가 단양 군수로 부임한지 10개월 만에
단양을 떠나야만 할 일이 생겼다. 퇴계의 친형이 직속상관인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해 오자,
형과 아우가 직속상하관계로 있으면 나라 일에 공평을 기 할 수 없고,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게 될 수 있기 때문에 퇴계는 그 날로 사표를 제출했다,
청렴결백한 그의 성품을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다. 퇴계의 성품을 안 조정에서는
그를 멀리 경상도 풍기 군수로 임명하였다. 이렇게 되어 퇴계와 두향은 만난 지 10개월 만에
애달픈 이별을 하게 되었다. 그때 퇴계는 풍기 군수로 전근되면서 두향 으로부터 받은
청매(靑梅) 한 그루도 함께 가져갔다.
이별하는 날 밤 두향은 말없이 먹을 갈고 붓을 들어 시 한 수를 썼다.
이별이 하도 서러워 잔들고 슬피 울제
어느덧 술이 다하고 임마저 가는 구나
꽃지고 새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퇴계가 풍기군수로 떠난 후 두향은 호사스러운 기생 생활을 하는 것이 단 10개월 동안이나마
모시던 퇴계의 인격에 대한 모독이라 생각하고 관기 생활을 정리한 후 평생을 수절하면서
퇴계를 그리워했다. 두향은 오로지 퇴계만을 그리워하면서 함께 노닐던 강변을 혼자서 거닐며,
짧은 기간이나마 퇴계와의 수많은 사연들을 추억하면서 외롭게 살아갔다.
두향은 퇴계를 풍기로 떠나보내고 강선대에서 눈물을 흘리며 가야금소리에
도수매(倒垂梅) 시를 보낸다.
도수매(倒垂梅)
한 송이 꽃 약간 뒤돌아 피어도
오히려 의심스럽거늘
어찌하여 모두 거꾸로 드리워져 피었는고
그 까닭을 알고자 꽃 아래에서 살펴보니
머리 쳐든 한송이 한송이 꽃심이 보이네
두향(杜香) --.
두향과 이별한지 4년이 되는 어느 봄날에 퇴계의 나이 52세되던 해에 인편에
시 한 수를 두향에게 보낸다.
누렇게 바랜 옛 책 속에서 성현을 대하며
비어 있는 방안에 초연히 앉았노라
매화 핀 창가에서 봄소식을 다시 보니
거문고 마주 앉아 줄 끊겼다 한탄을 말라
이황(李滉) --.
이 시문의 끝 구절에 “거문고 마주 앉아 줄 끊겼다 한탄 마라”는 두향의 마음을
위로하는 내용이다. 두향은 이 시 한편을 받고 평생을 거문고 가락에 실어
노래로 불렀다고 한다. 20년이 지난 1570년 퇴계가 70세 되던 어느 겨울날 가족들에게
매화 화분을 가리키며 “매형(梅兄)에게 물 잘 주라”는 말을 남기고 임종하였다.
이것이 유언이었다.
퇴계의 임종 소식을 들은 두향은 음식 먹기를 중단하고 스스로 죽음을 택하였다.
두향은 죽으면서 유언하기를 퇴계와 함께 노닐던 강가 강선대(降仙臺) 아래에 묻어 달라 하였다.
강선대가 충주댐이 생기면서 물에 잠기게 되자 퇴계의 후손들이 두향의 묘를 단양팔경중의
하나인 옥순봉 맞은편 제비봉 기슭에 이장하고 두향지묘(杜香之墓)라는 묘비를 세우고
지금까지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조선 영조 때의 문인(文人) 월암(月巖) 이광려(李匡呂)는 두향 사후 150년이 지나 묘앞을
지나면서 두향을 흠모(欽慕)하는 시를 남겼다.
외로운 무덤하나 그 이름 두향 / 강 언덕 강선대 그 아래 있네
미인이 멋있게 놀던 상으로 / 경치도 좋은 곳에 묻어 주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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