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부인은 정치에 뛰어든 남편을 위해 가족들과 지인으로부터 돈을 빌리고 과외를 해 생활비를 댔다. 그렇게 남편 뒷바라지를 하며 8년 동안 부인 명의로 쌓인 빚은 3억 원이 넘었다. 남편은 그런 부인을 배반하고 불륜을 저질렀다. 둘은 이혼하기로 했다. 부인은 자기 명의로 되어 있는 빚을 서로 나눠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부부 재산에서 빚을 빼고 나면 남는 게 한 푼도 없으니 빚은 나눌 수 없다"며 부인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남편 뒷바라지를 위해 부인 명의로 진 빚을 이혼할 때 부인이 혼자 떠안는 것이 맞는 일일까. 대법원은 지난 2년간 이 문제를 심리해왔고 마침내 20일 선고를 내린다. ○ 경제적 뒷바라지한 부인 버린 남편 A 씨(43)와 B 씨(39·여)는 12년 전 결혼했다. 결혼 후 남편 A 씨는 정당 활동을 하면서 지역 위원장직에까지 올랐다. 활동비와 당내 선거자금은 모두 부인 B 씨가 마련했다. B 씨가 지인에게서 빌린 돈은 2억7600여만 원, 보험금 대출도 3000여만 원이나 됐다. 힘든 살림살이였지만 믿고 의지하는 부부 사이에 빚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2006년 부인은 남편이 대학 후배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됐다. 부인은 이혼을 생각했지만 친정어머니의 설득에 마음을 다잡고 결혼 생활을 이어가기로 했다. 남편도 정치 활동을 접고 자격증을 따서 사업을 벌여 제2의 인생을 살기로 마음먹었다. 부인의 뒷바라지는 이때도 계속됐다. 자격증을 따기 위해 다닌 학원비 400만 원을 비롯해 생활비 등을 부인이 모두 댔다. 2007년에야 남편은 결혼 이후 처음으로 부인에게 월급을 가져다 줬다. 그러나 그 후에도 남편은 사업에 필요한 장비 구입비 등과 자격증 시험에 필요한 돈을 계속 부인에게서 받았다. 부인은 끝없는 남편 뒷바라지에 지쳐 2008년 6월경 남편에게 "더이상 도울 수 없다"고 말했다. 남편 A 씨는 부인 B 씨와 다툼 끝에 집을 나가버렸다. ○ 기존 판례는 "나눌 게 빚밖에 없으면 빚진 쪽이 떠안아야" 2010년 이혼 소송이 진행됐다. 그해 5월 1심 법원은 "둘은 이혼하고 남편은 부인에게 위자료 50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법원은 "혼인이 파탄에 이르게 된 책임은 남편의 부정행위에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빚을 갚는 책임에 대해서는 남편에게 면죄부를 줬다. 부인은 "남편의 선거자금에 쓰려고 빌린 빚을 청산하려면 남편이 2억 원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부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부부 명의로 된 총 재산 합계에서 빚을 뺐을 때 남는 재산이 없으면 재산분할은 성립할 수 없다는 1997년 대법원 판례를 근거로 들었다. 1심 판결 당시 부부의 재산은 부인 명의로 된 1억8500만 원짜리 아파트를 포함해 약 1억8720만 원이었다. 부부의 재산 중 남편 명의의 재산은 220만 원에 불과했다. 1심 판결대로 위자료 5000만 원을 받게 된 부인의 재산은 아파트(1억8500만 원)에서 빚(3억600만 원)을 제하더라고 여전히 7100만 원의 부채를 떠안아야 한다. 남편은 자신 명의의 재산 220만 원에서 위자료(5000만 원)를 뺀 마이너스 4780만 원이 되는 셈이다. B 씨 부부 경우는 그나마 아파트가 부인 명의로 돼 있었지만 만약 대부분의 재산을 남편 명의로 해놓은 부부일 경우 부인은 재산도 못 받고 빚만 떠안는 극단적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 2010년 10월 항소심 법원도 부인 B 씨의 이혼과 위자료 청구만 받아들이고 재산분할 청구는 기각했다. 그러나 B 씨는 "빚을 나누지 않으면 전 남편 때문에 진 빚을 혼자 갚아야 해 부당하다"며 상고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박병대 대법관)는 20일 이 사건 선고를 앞두고 있다. ○ 현실 반영한 새 판례 만들까 그동안 이혼하는 부부의 빚을 어떻게 나눠야 하는지에 대한 법원의 판단은 사안마다 엇갈렸다. 기존 판례대로 빚이 순 재산보다 많을 때는 재산분할을 허용하지 않거나 한쪽이 일방적으로 빚을 떠안게 될 때는 다른 쪽 배우자의 재산을 양측으로 나눠준 판결도 있었다. 대법원은 이처럼 하급심 판결이 계속 엇갈리자 이 문제를 전원합의체에 올려 심리해 왔다. 통상 대법원은 사회적 파장이 예상되거나 판례를 바꿀 수 있는 사건은 대법원장을 비롯해 대법관 13명 모두가 참여하는 전원합의체에서 처리한다. 가사소송 전문가들은 빚이 재산보다 많으면 재산분할을 하지 못하도록 한 대법원 판례를 구체적 사안에 따라 탄력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는 견해를 제시한다. 이찬희 법무법인 정률 변호사는 "1997년 판례만을 따라 단지 재산보다 빚이 많다고 해서 재산분할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부부 공동으로 진 빚을 한쪽만 떠안게 돼 재산분할 제도의 취지나 양성평등 이념에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이인철 법무법인 윈 대표변호사는 "배우자 한쪽이 자신을 위해 빚을 졌을 경우 그 빚을 부부가 나눠 부담하게 하면 오히려 공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며 "실제로 빚을 누가 주로 썼는지 가려 사안별로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3년여간 진행된 이번 사건의 결론이 어느 쪽으로 나든지 상당한 사회적 파장이 예상된다. 기존 판례를 고수하게 되면 가사 소송에서 B 씨와 같은 안타까운 처지의 여성을 구제하는 건 법적으로 어려워진다. 그러나 기존 판례를 뒤집어 재산분할 제도의 근간을 좌우할 수 있는 새로운 판례가 나올 가능성도 없지 않다. 대법원이 어떤 판례를 내놓을지 주목된다. 강경석 기자 coolup@donga.com ⓒ 동아일보 & dong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동아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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