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부처님 마음

[붓다를 만난 사람들] 24. 마하캇차야나

淸潭 2011. 4. 29. 10:54

 

24. 마하캇차야나
탁월한 분석·명료한 법문으로 대중 제도한 논의제일〈論議第一〉
2011.04.26 14:15 입력 발행호수 : 1094 호 / 발행일 : 2011년 4월 27일

부처님 초청위해 아반티국서 파견돼 귀의
출가의식 간소화 요청으로 불교확산 기여

 

 

▲삽화=김재일 화백

 


부처님께서 주로 활동하시던 갠지스강의 중류 지역. 이곳으로부터 저 멀리 서남쪽에는 아반티라는 나라가 있었다. 부처님이 생전에 이곳을 방문하셨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지만, 경전의 기술을 통해 부처님 생존 당시에 이미 이곳에 불법이 널리 퍼져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마하캇차야나, 즉 대가전연(大迦旃延)이라 불리는 훌륭한 제자의 활동 덕분이었다.


캇차야나는 원래 아반티국의 수도인 웃제니 출신이었다. 당시 웃제니는 팟죠타라는 왕의 통치하에 있었는데, 포악해서일까 아니면 용맹스러워서일까. 팟죠타왕은 이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지니는 찬다(caṇḍa)라는 형용사를 동반하여 찬다 팟죠타라 불렸다. 캇차야나의 아버지는 팟죠타왕의 왕사(王師)로써 왕을 보필하고 있었다. 이국으로부터 전해져 오는 부처님의 명성을 들은 팟죠타왕은 부처님이라는 인물 그리고 그 가르침 등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가 어느 날 왕사의 아들인 캇챠야나를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파견했다. 부처님을 웃제니로 초청하기 위해서였다.


왕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캇차야나는 왕의 7명의 신하와 더불어 사왓티 교외의 기원정사에 머물고 계신 부처님을 찾아뵙게 되었다. 이것이 부처님과 캇차야나의 첫 만남이었다. 이때 그와 부처님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고 갔는지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으나, 캇차야나는 그 자리에서 부처님의 설법을 이해하고 출가하여 비구가 되었다고 한다.


출가 후 캇차야나는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힐 정도로 존재감을 드러내게 되는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의 능력은 바로 법을 알기 쉽게 풀어 설하는 것이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캇챠야나가 부처님을 따라 라자가하의 남쪽 교외에 있던 타포다정사에 머물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사밋디라는 비구가 새벽녘에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것을 본 캇차야나는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혹시 ‘일야현자(一夜賢者)의 게송’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 없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 청해서 배워두는 것이 좋습니다. 매우 유익한 게송입니다.”


초기불교 대표적 포교·전법사


좋은 가르침을 많은 수행자들과 함께 공유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캇차야나의 권유를 받아들인 사밋디는 목욕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부처님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아뢰며, 일야현자의 게송을 들려주실 것을 부탁드렸다. 그러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하셨다.


“과거를 돌아보지 마라. 미래를 염려하지 마라. 과거, 그것은 이미 지나갔으며, 미래, 그것은 아직 오지 않았느니. 다만 현재의 것을 그것이 있는 곳에서 있는 그대로 잘 관찰하여라. 흔들림 없이, 동요하는 일 없이 잘 살펴서 실천해라. 오로지 지금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해라. 내일 당장 죽음이 찾아올지 그 누가 알겠는가. 실로 죽음의 대군을 피할 수는 없는 법이니. 이와 같이 잘 알아서, 마음을 다해 밤낮으로 게으름 피우지 않고 실천하는 자, 이를 일야현자라고 한다. 또한 마음이 고요히 가라앉은 사람이라고 한다.”


부처님으로부터 이 게송을 들은 사밋디는 반복해서 암송하며 외웠는데, 그러다보니 그 게송이 지니는 깊은 의미를 알고 싶어졌다. 하지만 부처님께 다시 여쭙는 것은 왠지 좀 죄송스러웠다. 이런저런 궁리 끝에 그는 자신에게 일야현자의 게송을 들어보라고 권유했던 캇차야나를 떠올렸다.


하지만 사밋디의 부탁을 받은 캇차야나는 “이곳에는 부처님이 계신데 제게 그 해설을 청하다니, 여기 큰 나무가 솟아있는데도 그 작은 가지에 의존하려는 것과 같습니다”며 사양했다. 사밋디는 포기하지 않았다.


“저는 이미 이 게송을 부처님으로부터 배웠습니다. 그런데 또 부처님께 설명까지 부탁드려 귀찮게 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은 이미 부처님으로부터 그 게송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들으셨을 겁니다. 부탁드리오니 부디 그 이해한 바를 제게도 나누어 주십시오.”
결국 캇차야나는 사밋디를 위해 법을 설하게 된다.


“과거를 돌아본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내 눈은 과거에 이러했으며, 모든 색(色, 물질)은 과거에 이러했다. 이와 같이 거기에는 탐욕에 의해 속박된 의식이 있습니다. 의식이 탐욕에 의해 속박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기뻐합니다. 그것을 기뻐하기 때문에 과거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은 내 눈은 과거에 이러했으며, 모든 색은 과거에 이러했다고 거기에 탐욕에 의해 의식이 속박되지 않는 것입니다. 의식이 탐욕에 의해 속박되어 있지 않으므로 그것을 기뻐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것을 기뻐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과거를 돌아보는 일 또한 없습니다.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은 이러한 것입니다.”


캇차야나는 이런 식으로 귀와 코, 혀, 몸 그리고 의식에 대해 동일한 해석을 하며 반복해서 설명해 갔다. 이렇게 상세한 설명을 들은 사밋디는 크게 기뻐하며 부처님께 가서 이 사실을 말씀드렸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이여, 마하캇차야나는 현자이다. 마하캇차야나는 대지혜자이다. 만약 너희들이 내게 와서 그 뜻을 물었다 해도 나 역시 마하캇차야나가 해설한 것처럼 설했을 것이다. 그의 설명을 잘 기억해야 한다”고 하셨다.


이 외에도 그가 6근(根)6종(境)이라는 주관과 객관의 작용에 의해 6식(識)이라는 인식이 생겨난다고 하는 불교의 인식론을 설하여 부처님으로부터 칭찬받는 등 경전에는 그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쉽게 풀어서 설명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수많은 전승이 남아있다. 이와 같이 사람들에게 불법을 쉽게 전달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던 캇차야나는 포교사로서의 재능을 발휘하여 많은 사람들을 제도하며, 부처님으로부터 불제자 가운데 광설제일(廣說第一) 혹은 논의제일(論議第一)이라는 찬사를 받게 된다.


캇차야나의 업적 가운데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불교의 중심지가 아닌 변국에서도 구족계의식이 이루어지도록 한 것이다. 캇차야나가 아반티의 시골마을인 쿠라라가라 근처의 파밧타산에 머물며 포교활동을 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그에게는 소나라는 시자가 있었다. 캇차야나의 시중을 들며 날마다 설법을 듣고 있던 그는 출가해 본격적으로 수행을 하고 싶다는 원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 그 뜻을 캇차야나에게 전했다. 처음에는 출가생활의 어려움을 생각하여 소나의 부탁을 거절했지만, 결국 소나의 끈질긴 설득을 못 이기고 출가를 허락하게 된다.


지역특색 반영된 율장 허락받아


그런데 문제는 아반티가 변국이기 때문에 구족계 의식의 실행에 필요한 3사(師)7증(證)을 구할 수가 없었다. 3사7증이란 구족계의식을 치루기 위해 필요한 3명의 스승과 7명의 증인으로 율장에 의하면 이 10명의 비구가 동석한 자리에서 구족계가 이루어져야 그 유효성이 인정된다. 하지만 아반티와 같은 시골 나라에서 10명의 비구를 모으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소나가 구족계를 받은 것은 그 후 3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였다.


이렇게 힘들게 출가한 소나는 열심히 수행 정진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스승을 통해 말로만 듣던 부처님. 그 부처님을 꼭 만나 뵙고 싶었던 것이다. 소나는 부처님이 계신 코살라국에 다녀올 수 있게 해 달라고 캇차야나에게 부탁했다. 캇차야나는 기쁜 마음으로 소나의 만행을 승낙했다. 그리고 부처님을 만나면 다음과 같이 여쭈라고 당부하였다.


“아반티국에는 비구의 수가 너무 적어 소나를 출가시키기 위한 비구를 모으는데 3년씩이나 걸렸습니다. 부디 변국에서는 구족계의식을 거행하는데 필요한 비구의 숫자를 줄여 주십시오. 아반티의 토양은 거칠고 소 발굽으로 인해 도로가 딱딱해져 한 겹의 신발로는 생활하기 어렵습니다. 부디 여러 겹으로 된 신발을 신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이 지방에서는 목욕을 자주하여 몸을 깨끗이 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부디 이 풍습에 따르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이 나라는 짐승의 가죽을 깔개로 쓰는 풍습이 있는데 이 풍습대로 생활할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또한 이 나라에서는 다른 나라로 가는 사람에게 옷을 주는 풍습이 있는데 율에는 이에 대한 답이 없습니다. 가르침을 주십시오.”


아반티는 부처님이 활동하시던 갠지스강 중류 지역과는 기후나 풍습 등 다른 면이 많았고, 따라서 지키기 어려운 율 조항이 많았다. 평소 율 수지의 어려움을 느끼고 있던 캇차야나는 소나를 통해 이 사실을 부처님께 알리고 허락을 받고자 한 것이다. 소나는 스승 캇차야나의 말을 가슴 깊이 새기고 아반티를 떠나 오랜 여행 후 마침내 부처님이 계신 기원정사에 도착했다. 부처님은 멀리 시골에서 온 소나를 따뜻하게 맞이하며 아난을 시켜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다음날 아침 소나는 부처님을 뵙는 자리에서 캇차야나의 부탁을 상세히 아뢰며 아반티국의 사정도 설명하였다. 그러자 부처님은 아반티와 같은 변국에서는 5명의 비구들이 계율을 줄 수 있다고 허락하시고, 이 외 다른 네 가지에 대해서도 인정하셨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비구를 구하기 어려운 변국에서는 5명으로도 구족계의식을 실행할 수 있도록 의식 준비 과정이 간소화되었고, 이로 인해 불교는 좀 더 다양한 지역에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된다.


▲이자랑 박사
불법을 쉽게 설하는 능력 그리고 엄격하면서도 유연한 현실 감각을 통해 불법 전파에 큰 공을 세웠던 캇차야나. 초기불교교단의 대표적인 포교전법사로 그가 아닌 누구를 꼽을 수 있겠는가. 


이자랑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