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부산영화제 ‘아시아 간판’으로 키운 김동호 위원장
《‘김동호(金東虎)’라는 이름 석자를 빼고 부산국제영화제(PIFF)를 말할 수 있을까. 김동호(68) 집행위원장은 1996년 출범 이후 지금까지 영화제를 이끌어 오면서 명실상부한 아시아 대표 영화제로 키워 낸 PIFF의 얼굴이다. 1년 중 절반을 해외에서 보내면서 “짐 빨리 풀고 빨리 싸기”에는 도가 텄다는 그는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해 ‘친일파’ ‘친중파’가 대부분이었던 유럽 영화 관계자들의 눈을 한국 영화로 돌리게 만들었고 ‘친한파’의 인맥을 키워 왔다. PIFF 개막이 다가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김 위원장을 최근 인터뷰했다.》
―초창기엔 이동시간을 아끼려고 퀵서비스 오토바이를 타고 움직이는 모습도 보았는데….
“행사가 열리는 남포동과 해운대를 바삐 왔다 갔다 하다 보니까…. 요즘은 행사를 다 해운대로 몰아 놓아서 오토바이 신세 질 일이 없어졌다.”(웃음)
―PIFF를 성공시킨 핵심 전략이 있다면….
“우리 생각은 영화제를 ‘비경쟁’으로 이끌면서 아시아의 영화를 집중 발굴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아시아를 대표하던 도쿄영화제는 경쟁영화제였다. 경쟁영화제는 화려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작품을 모으는 데 한계가 있다. 베를린, 칸영화제와 경쟁관계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감독이나 제작자들은 베를린이나 칸으로 작품을 보내려 했고, 도쿄영화제는 점차 세가 줄어들었다. 그 틈을 노렸다.”
그는 사실 ‘충무로 DNA’가 박힌 토종 영화인은 아니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문화공보부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1988년 영화진흥공사 사장에 취임하면서 영화와의 ‘운명적 만남’을 가졌다. 그는 젊은 프로그래머들의 열정에 이끌려 한번 도박해 보자는 심정으로 집행위원장을 맡게 됐고, 그 ‘다걸기(올인)’는 성공했다.
―집행위원장으로서 ‘외풍’을 막은 것도 영화제 독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
“집행위원장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돈을 구해 오는 것이다.(웃음) 그 다음은 정치적 영향이나 정부 혹은 지방자치단체의 외풍을 막는 일이다. 과거 대선을 앞둔 시점에선 후보들이 앞 다투어 개막식에 서고 싶다는 뜻을 전해 왔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처음엔 섭섭해했을 테지…. 하지만 단 한 번의 예외도 허용할 수 없었다. 개막식에서도 조직위원장인 부산 시장이 개막 선언을 하는 것 외에는 어떤 축사나 기념사도 거절한다는 원칙을 10년간 고수해 왔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웃음)
그는 놀라운 친화력으로도 유명하다. 이름의 끝자 호(虎·호랑이)를 따서 만든 ‘타이거 클럽’은 그가 대만의 거장 허우샤오셴(侯孝賢) 감독, 칸 국제영화제 티에리 프리모 집행위원장, 사이먼 필드 로테르담영화제 전 집행위원장 등과 의기투합해 만든 국제적 ‘주당(酒黨)’ 모임.
―범아시아적인 축제로 키우는 데 성공했지만 지난해(‘2046’)와 올해(‘쓰리 타임즈’) 개막작이 칸영화제 출품작의 재편집본이다. 거장 감독들이 만든 영화를 세계 최초로 상영하는 월드 프리미어도 부족하다. 특히 완성된 영화를 사고파는 마켓의 기능이 적은 것도 아쉽다.
“그게 바로 향후 10년간 부산영화제가 해야 할 일이다. 월드 프리미어는 작년 40편에서 올해 63편으로 증가했지만 그 수를 늘리기 위해 더욱 열심히 뛸 것이다. 아직 10년밖에 안 된 영화제라 거장의 작품을 처음으로 상영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마켓 기능은 꼭 필요하다. 내년부터는 아시안 필름 마켓을 부산영화제에 신설할 계획이다. 현재 태스크포스를 만들어 연구 중이다. 세계 각국의 배급·투자자나 수입업자를 초청한다는 것은 수십억 원의 예산이 더 든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켓 신설은 문화보다는 교역의 측면이 강한 만큼 산업자원부의 지원을 얻어야 하는 새로운 과제도 있다.”
―이젠 PIFF의 ‘절대적 존재’가 됐다.
“난 원래 10회까지만 하려고 했다. 영화제의 전용관인 부산영상센터가 2008년 완공될 예정인데 이 문제가 정리되면 후계자에게 넘겨줄 생각이다. 한국적 정서도 고려해야 하고, 내 나이 생각도 해야지….”(웃음)
“평소 가무를 사랑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는 말을 건네자, 곧바로 “가(歌)와 무(舞)를 모두 잘하지는 못합니다. 음치예요. 술은 선천적으로 좀 마시지만…”이란 대답이 돌아왔다.
“춤은 1년에 딱 한 번 춥니다. 부산영화제에서 젊은 영화인들이 모이는 와이드 앵글 파티가 있는데, 사람들을 다 불러내요. 작년에는 빨간 티셔츠를 입고 췄는데. 내 춤은 ‘스포츠 댄스’래요. 막춤이란 얘기죠. 올해에는 더 ‘야한’ 옷을 준비했습니다.”
● 김동호 위원장은
△1937년 강원 홍천 태생
△1961년 서울대 법대 졸업
△1961∼80년 문화공보부 문화국장, 보도국장, 기획관리실장 등 역임
△1988년 영화진흥공사 사장
△1992년 서울 예술의 전당 사장
△1992∼93년 문화부 차관
△1993년 공연윤리심의위원회 위원장
△1996년∼현재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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