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화산도’쓴 재일교포작가 김석범 씨 첫 단편작품집
10월 1일 생애 첫 작품집 출간 기념회를 앞둔 80세 현역작가 김석범 옹. 그는 앞으로 5년간 활동 계획이 빼곡해 쉴 틈도 없다고 말한다. 도쿄=조헌주 특파원 |
《“건강은 걱정 없어요. 85세까지 살아 있을 ‘예정’이니까.” 80세 현역 작가 김석범(金石範) 옹. 허허 웃었지만 눈빛은 형형(炯炯)하다. 생애 첫 작품집 출간 기념회(1일·일본 도쿄)를 앞두고 인터뷰를 요청하자 “동아일보 지사를 꼭 보고 싶다”며 찾아온 그였다. “연재 중인 화산도(火山島) 후속편을 내년에 마치고, 쓰다만 다른 원고를 보충하는 데 2년쯤 걸리겠지요. 그리고 진짜 쓰고 싶은 소설, 진한 연애소설을 쓸 겁니다. 그러면 85세가 되겠지요.”》
그가 후배 작가, 지인들과 어울리는 자리에 몇 번 동석한 적이 있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술자리에서 그는 수틀리면 “썩은 것들!” 하고 일갈했다. 그런데 연애소설이라니. 국가와 민족, 혁명과 자유, 사상과 살상, 역사와 기억을 더 노래하지 않아도 좋은 세상인가. 그게 아니었다. 일관된 문학적 테마, ‘인간 해방’의 최종 편을 뜻했다.
“외로운 싸움이었지요. 일본 문단도, 민단도, 총련도 내 작품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지요. 좌우의 협격(挾擊), 사면초가에서 살아왔지요.”
제주도 4·3사건을 소재로 한 대작, 화산도를 20여 년간 일본어로 연재하며 겪었을 외로움. 그래서 40대 중반 큰 수술을 하고도 여전히 술을 좋아하는 것일까. 하지만 원칙은 있다. 원고지 앞에서는 단 한 방울도 안 마신다.
난리판을 피해 밀항해 온 제주도 출신 일가에게서 대학생 시절에 들었던 참상을 바탕으로 1957년 발표한 ‘까마귀의 죽음’ 이래 ‘4·3’은 그의 문학적 화두였다.
“작품에서 그렸던 ‘희망’이 현실이 되는 것을 지켜본 나는, 그래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2003년 4·3특별법을 통해 희생자들의 명예가 회복된 것을 그는 무엇보다 기뻐했다. 민족운동사적 의미를 평가받은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가 대학을 나와 처음 손댄 것은 평론지 편집이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소설은 아직 먼 존재였고, 민족운동에 가담하면서 사상적 편력은 이어진다. 일본 공산당 가입과 탈퇴, 지하조직 활동, 총련계 조선신보 기자 등등.
“자유주의적 성격 때문에 조직에 들어가면 싸웠습니다. 반민족이니 반혁명이니, 욕도 많이 먹었지요.”
분게이온주(文藝春秋)사의 월간문학지, ‘분가쿠카이(文學界)’에 화산도를 연재하기 시작한 1976년 이후 소설은 그의 삶이 되었다. 당초 200자 원고지 2000장을 예정했으나 끝내고 보니 2만2000장. 일본 문단의 외면 속에 아사히와 마이니치신문사가 각기 문학상을 안겨 주었다.
최근 영화화돼 일본 사회에 화제를 낳은 소설, ‘피와 뼈’를 쓴 재일교포 작가 양석일(梁石一)은 김석범의 첫 작품집 추천문에 이렇게 적고 있다.
‘만일 김석범 문학이 영어나 프랑스어로 번역됐다면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을 것이 틀림없다.’
김석범 문학은 일본어로 쓰였으나 ‘일본문학’이 아니고, 한국문학도 아니다. 화산도 이외의 단편 21편을 묶은 작품집이 80세에야 나온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통일이 없는 한 조국은 없다’며 남도 북도 아닌 ‘조선’이란, 국적 아닌 국적을 갖고 살아온 그다. 그 삶처럼 고단했던 김석범 문학이 제자리를 찾는 것은 언제쯤일까.
“한국은 민주화 투쟁을 거치며 멋진 조국으로 성장했어요. 어떤 위기에도 어려움이 없을 겁니다. 든든하고 기쁘지요. 한 가지, 모든 재일교포가 고민 없이 남북을 방문할 수 있게 ‘준(準)국적’ 개념을 만들어 주었으면 합니다. 유럽연합(EU) 사람들은 민족이 달라도 국경 없이 오가는데 같은 민족이 이게 뭡니까.”
광복 후로도 ‘국가’ 없이 지내온 한(恨) 때문인지 그는 이내 열혈청년이 되고 만다.
그는 오늘의 총련을 ‘평양의 로봇’으로, 일본의 경제 지원과 역사 청산을 맞바꾸려는 북한 지도자를 ‘제3의 이완용’으로 혹독하게 몰아세운다. 민족교육을 게을리 해 온 민단도 호되게 나무란다. 오늘의 일본에 대한 비판은 더욱 매섭다.
“60년간의 민주주의를 피와 살로 육화하지 못한 채 파시즘으로 가고 있어요. 역사 위에 현재가 있고 미래가 있는데, 역사를 땅에 묻으려 하니 어찌 전망이 있겠어요.”
‘기억의 부활’을 위한 그의 열정과 격정은 식을 줄 모른다.
도쿄=조헌주 특파원 hanscho@donga.com
○김석범 씨는
△1925년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제주도 출신 부모 아래 출생
△1951년 교토(京都)대 문학부 졸업
△평론지 편집자, 민족운동가, 조선신보
기자 등으로 활동
△1976∼97년 ‘분가쿠카이(文學界)’에
‘화산도’ 연재
△1983년 연재 중 아사히신문 ‘오사라기 지로(大佛次郞) 상’ 수상
△1998년 연재 완료 후 마이니치신문 마이니치예술상 수상
△2005년 생애 첫 작품집(상, 하) 발간. 문학지 ‘스바루’에 화산도
후속편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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