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7년 11월 24일] 신중기도입재법회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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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47년 11월 24일 신중기도입재법회에서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입니다. 신광 불매만고휘유 (神光不昧萬古輝猷)하고, 입차문내막존지해 (入此門內莫存知解) 이라.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습니다. 여러분들 오늘 신중 기도 입재 하셨지요? 초하루부터 초삼일까지 신중기도를 잘하시면 여러분들이 바라고 원하는 것을 다 이룰수 있습니다. 그런데, 잘못하면 1년 365일 지나도 부처님을 원망만합니다. 세상에 부처님은 내가 땀흘려 벌어서 돈 갖다놓고, 과일 갖다놓고,쌀 갖다 놓아도,나의 옆에 사람은 나처럼 많이 갖다 놓지도 않하고, 정성스럽게 잘 하지도 못하는데, 옆에 사람한테는 복을 주고 나한테는 안주나 하고 부처님을 한번 쳐다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오늘부터 신중기도를 잘 하시면 참말로 부처님을 대하는 마음이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잘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믿는 것은 자기 스스로 깨달음을 위해서, 쉽게 얘기 해서 자기 행복을 얻는 것, 부처님께 떡주고 과일 줄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내 행복을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잘못 믿으니까 그렇습니다. 오늘 기도 입재하는 날이고, 초하루이고 부처님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 �은 게송입니다. 실령스러운 부처님,신광 불매만고휘유 (神光不昧萬古輝猷)하고, 입차문내막존지해 (入此門內莫存知解) 이라. 실령스러운 부처님 결코 어둡이 없습니다. 그리고, 만고의 아름다움이 전개 됩니다. 날 밝으면 내가 하고 싶은대로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저녁에는 눈이 어둡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밖에 나갈려고 하면 정말로 허둥거리고, 무엇인가를 손에 잡지 않으면 불안합니다. 神光不昧萬古輝猷(신광불매만고휘유) ‘ 신광 신령스러운 부처님 결코 만고에 어둡지 아니하고, 만고에 하도 아름답게 펼쳐 지리라. 入此門內莫存知解(입차문내막존지해) 이 조계사 문안에 들어서는 사람은 아름알이를 벗어버리십시오. 내가 공연히 불교는 경전을 배우는 것을 불교를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와서 절하는 것이 참회라고 생각하고, 우리가 속으로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님, 아미타불님, 외우는 것을 우리는 염불이라고 합니다. 그런것은 결코 불교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를 알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점을 꺼꾸로 외운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내가 깨달음의 길을 가기 위한 길입니다.길을 가르쳐 준것입니다. 길은 아무리 잘 닦아나도 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잖습니까? 그래서 화엄경에 말씀하시기를 ‘ 입차 암물 다불다능 이라도 능히 여래지법이다’ 많이 알고 많이 배우고 많이 들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나의 행복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깨달음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왜 그러느냐? 실천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공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불교는 이론이나 아량이나 사량으로 헤아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조계사 문안에 들어서며서 그것을 집어 던지고, 여러분들이 바라고 원하는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원하는 행복을 담을 수 있는 주머니만 가져오십시오. 그래야 거기에다가 담아 가지고 갑니다. 거기에다가 잔뜩 내생각 또한 부처님 경전 아량 사량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는 것을 모두 담아 들어 오면은 받아 갈 수가 없습니다. 자루가 넘쳐서 담을 수가 없습니다. 실컷 와서 조계사 와서 듣고, 바로 법당 나가면서 “원장 스님이 무슨말을 했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는 마음의 빈 그릇만 가지고 들어 오세요.제가 아량이나 사량만으로 안된다고 하는 것은 유명한 소동파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짧으면서도 뼈있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중국 송나라때 소동파라는 유명한 학자가 있었습니다. 대문장가이자 인류학자입니다. 이 학자가 어느날 중국 옥천사라는 절을 찾아가서 보니까, 스님들이 앉아서 참선한다고 하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졸고 앉아 있는 스님들은 공인들이 땀흘려서 드린 시주를 먹고 가만히 앉아 있으니 혼을 내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마침 옥천사 수도 스님방에 들어가서 방에 들어갔습니다. 중국의 대문호인지라 아만과 오만으로 가득찬 사람이 스님을 혼낼려고 들어 선 사람이 어디 예의가 있겠습니까? 문을 갑자기 열면서 물었습니다. 손으로 스님을 가르키면서 “스님 이름이 뭐여?’ 가만히 정신 삼매에 들었던 스님께서 눈을 번쩍 뜨고 관상을 보니, 문장꽤나 학문꽤나 하는 사람이 와서 어느 거사가 와서 버릇없이 그렇게 물으니, 그러니까, “나는 이 절에 사는 중 승호라고 하오, 선생께서는 어디서 오신 누구시며, 성씨가 어떻게 되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소동파라는 거사가 오만스럽게 앉지도 않고 인사도 안하고 꼿꼿이 서서 “나는 중국의 대문장가이자, 대학자인 소동파요..성은 칭 (秤)씨요” 무슨 칭자를 쓰시오 “ 저울대 칭자를 쓰요" "하필이면 그 많은 글자중에 “저울대 칭자를”쓰는지요? " “본래 대학자들은 전국의 누구누구 학문이나 지식이 충만한 사람들은 달아 보기 위해서 저울대 칭자를 쓰지요” 옛말에 ‘청백 가풍은 직사혈이요 신죽 불의는 장승자라’ 선가의 그 청백이라고 하는 것은 맑고도 저울대 머리처럼 수평을 이루었습니다. 여기에는 파리에 앉아도 기울어집니다. 불가에는 이와 같이 진리가 엄한 것인데, 그래서 저울대 칭자를 씁니다. 세상에 있는 지식이나 유명한 학자를 달아 보기 위해 저울대 칭자를 씁니다’ 그 이야기가 끝나자 마자 승오 스님께서 “어이!” 병력같이 소리를 지르면서 “선생께서는 남이 학문이나 달고 지식이나 잴려고 저울대 칭자를 쓴다고 하셨는데, 내가 지른 소리는 지식이 얼마나 되고, 학문이 얼마나 되는지요?”하고 물었습니다. 유명한 학자요 대문장가이지만, 소리를 지르면서 그것을 재어 보라는 사람은 처음 보는 지라 그대로 말문이 막혀 말한마디 더 이상 못하고 돌아서서 나갔습니다. 그런 후에 어느 절에 가는데 이 사람이 가는 건은 자기 생각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그 소리 한번 질른 순간부터 자신이 가졌던 학문이나 지식이나 문장이라는 것이 일시에 완전히 잊어버리고,승호 스님께서 질른 그 소리만이 머리속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어느 절에 갔는데, 진명각이라고, 옛 전각이 있었습니다. 거기 가서 소동파가 “스님의 진명은 여기 있는데 주인공은 어디 갔는가?” 라고 안내하는 젊은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진명은 여기에 있는데, 그 스님은 어디에 갔는가" 라는 그것을 답변 할 수 없었습니다. 젊은 스님이 답변을 못하자 옆에 있는 노장이 묻기를 “소동파 거사지쇼?” “예” 그리고 "대답한 사람은 묻지 않겠습니다",하고 나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습니다. (소동파는 속으로) 대답한 사람은 묻지 않겠다. 그러면 진명목은 어디 있는가?그럼 진명목과 그사람은 어떻게 다른가? 너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겠다. 너에 대한 진면목은 너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러니 얼마 전에 승호 스님한테 벽력 같은 소리를 들은 후 또 그 노장이 말하기를 말한 사람은 더 이상 묻지 않겠다. 그러나 너의 진면목은 어디 갔는가?라고 하니, 의심이 깊어 질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의심을 가지고 재방의 의심을 깨치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 했습니다. 그러던중도 어느날 높은 선식 이 있다고 해서 그곳을 찾아 갔습니다. 삼총이라고 하는 유명한 선사가 계셨습니다. 그 스님을 찾아가서 “나는 스님한테 법문을 들으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자,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당신은 유정설법만 들으러 다니는가? 무정설법을 놔두고 유정설법만 들으러 다니느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정설법은 내가(총무원장스님) 이와 같이 나와서 여러분들을 보고 부처님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무정 설법은 일체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 이러한 것들이 전부다 부처님 말씀이 아닌 것이 없고, 그렇게 놔 두고 왜 꼭 형상만 찾아 다니느냐?” 그러니 세사람한테 그러니 유명한 문장가요 유명한 학자인데, 놀고 앉아 있는 시주밥만 얻어 먹는 스님들한테 야단을 치겠다고 했다가 말한마디 못하고, 머리속에 그것이 다 차 있어서, 그 차있는 생각이 부스러지지 않고, 버려 지지도 않고, 놔 버려지지도 않고, 누가 뭐라고 해도 승호 스님께서 질른 소리가 꽉 차있습니다. 또한 진면목, 무전 설법이 머리속에 꽉 차있습니다. 앉으나 서나, 먹으나 먹지 않으나 머리속에 꽉 차있습니다. 이 삼총스님으로부터 그 얘기를 듣고, 귀가를 하는데, 이 소동파는 말이 끌고 가는데로 갈 뿐 자신이 앞으로 가는지 뒤로가는지 어디로 가는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온통 머릿속에 그 생각 뿐, 산모퉁이를 돌아가는데, 개울 소리가 나는 것인데, 그 소리를 듣자마자, 소동파가 승호스님께서 지른 소리의 안목을 알게되고, 또 진영은 여기 있는데, 그 진영의 주인공을 알게 되었습니다. 유정설법과 무정설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은 게송이 계성변시장광설 (溪聲便是長廣舌) 이요, 산색기비청정신 (山色豈非淸淨身) 이리오. 야래팔만사천게 (夜來八萬四千偈) 하니 타일여하서사인 (他日如何擧似人) 이랴. 바로 이런 게송 뜻은 본래 계곡에 흐르는 물은 부처님의설법이 아닌 것이 없고.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 모든 일체 만물의 소리가 바로 진실한 진리의 말이 아닌 것이 없더라는 뜻입니다. 산색은 진위 청정색이요. 산에 있는 소나무 잣나무 바위덩어리 전부다 부처님이였습니다. 내가 생각 한번 바꾸는 야래 팔만사천게 하니, 내가 밤사이 팔만 사천을 외우고 순간에 깨달아서, �고 보니까, 승호 스님께서 나에게 팔만사천법문을 소리 한번 질러서 깨우쳐 주셨습니다. 또 노장한테는 사제는 여기 있어도 그 본체는 진면목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진면목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한 왜 유정설법만 들으러 다니느냐? 단지 안목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소동파의 오도송입니다. 바로 여기서 제가 우리 불자님들게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구천숙, 역대 조상님들게서 가르치신 것은 바로 네 생각 한번 바꿔라입니다. 너의 생각을 바꾸지 못하면 만사에 편하지를 못하고, 고통스럽고, 짜증스럽고, 원망스럽고, 미웁고, 이쁘고 시비를 가려야 하니 평생을 편하지 못하게 됩니다. 너의 생각을 바꿔라고 이렇게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오늘 조계사 초하루 신중 기도 법회에 참석하신 불자님들게서는 오늘 이 순간이라고 관념적 사고를 깨서 부서버리고, 새로운 신심으로 새로운 원력으로 실천할 때 만이 여러분들이 고통의 늪에서 벗어나서 가장 자유스럽게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여기서 한가지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옛날 어느 스님이 천일 기도를 하는데, 백성이 한명이 찾아와서 자신이 천일 기도를 하겠다고 부탁했습니다.백성이 하는 말인즉, 주지 스님께서는 목탁을 치시나 안치시나 매일 그대로 기도를 하는 것이지만, 백성은 신심과 원력이 부족해서 백성한테 양보를 해달라는 것이였습니다.. 그런데 이 주지 스님께서는 학문이 출중하고, 아주 청청한 스님이셨습니다. 어쩔수 없이 간청하는 바람에 자신의 자리를 내 주셨습니다. 그러나 축원은 스님께서 직접 하셨습니다.법당에 꼭 들어가서 축원을 하셨습니다. 3~4일 지나서 법당을 지나가면서 보니, 법당 앞에 빨래줄을 만들어서 속옷을 너접분하게 걸어 놓았습니다. 수행과 법력이 높은 스님께서는 어의가 없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부처님의 신성한 법당앞에 누가 그렇게 했느냐?” 엊그제 기도하겠다나고 온 백성이 "모든 것이 어리석고, 진실도 없고, 원력이 부족해서 제가무지한 탓에 청정한 성불전에 저의 속옷을 걸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알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다음날 법당에를 들어가서 주지 스님이 아연실색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제 야단 맞은 백성이 몸뚱이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홀딱 벗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주지 스님이 “당장 나와라 어제 야단을 맞고, 정신을 차려야지, 신도들이 다니는 법당에서 신성한 법당에서 실오라기 도 걸치지 않고, 이것이 무슨짓이냐?’ 삼배를 하고, “대자대비한 스님 오늘 더러운 속옷과 양말을 하염없이 걱정하다가 주지 스님께서 하신 말씀이 진정이기에 제가 벗고서 법당에 들어 갔습니다.” 이 소리를 듣자마자 주지 스님은 크게 깨달았습니다. 모든 것이 내 마음으로부터 더럽고 깨끗한 것이 있는 것이 있는 것이지, 더럽고 깨끗한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판단하는 안목이 열릴 때 만이, 신도님들도 정말로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하면 생각을 한번 바꾸세요. 생각 바꾸지 못하면 안됩니다. 공연히 입으로 조알거리는 송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과 마음. 바로 외우는 송불과 마음으로 기도하고, 진정으로 마음으로 참회하고, 함께 내 일처럼 갈 때 만이 여러분들이 진실한 행복과 깨달음과 성취가 이루어 집니다. 법당에 어떤 마음으로 들어가야 하는가? 염불은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시고, 죽을 때 극락을 찾습니다. 이것은 욕심입니다. 극락 찾지 않으면 지옥이 생기지 않습니다. 지옥이 없어지면 그대로 극락입니다. 그런 불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법회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복많이 받으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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