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7년 8월 28일] 신중기도입재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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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47년 8월 28일 초하루 및 가사불사 입재 법회에서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입니다.
BR>편히 계셨습니까. 반갑습니다. 엊그제만 해도 하늘에 구멍난 것처럼 폭우가 쏟아져, 저는 생사에 근심걱정이 없지만, 신도님들 걱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관세음보살처럼 자비스럽고 지장보살처럼 원력의 보살님들을 보니 반갑습니다.
오늘은 근대 한국불교의 중조이신 만공스님께서 덕숭산 능인선원에서 기라성같은 납자들을 데리고 정진할 때의 일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만공스님께서 수자들한테 내린 화두는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만법이 하나로 들어갔으니 그 하나는 또한 어디로 들어갔느냐' 였습니다. 그 당시에 혜암, 고봉, 춘성, 정강 스님과 같은 근대한국 불교의 기라성 같은 수자들이 용맹정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진성이라고 하는 사미 한 분이 공양주를 하고 있었는데 이 분도 만공스님한테 화두를 배웠는데, 불을 때다가 화두 삼매에 들어 불똥이 튀고 나무가 타서 나오는지 밥이 타는 지도 모르고 화두일념에 들어있었습니다. 이때 혜암스님이 지나가다가 이것을 보고 갑자기 다가가 말씀하시길 '하나가 어디로 돌아갔는지는 답하지 말고 그 하나를 나한테 일러라'.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때 진성 사미가 말하길 '하나라고 하더라도 맞지 않거늘 어찌 하나를 이르라 하십니까?' 라고 했습니다. 혜암스님은 '그럼 하나 말고 다시 한번 일러봐라' 고 하니 진성 사미는 막대기로 솥뚜껑을 두드리면서 노래를 했는데 '긴~ 것은 길어서 못쓰고~ 짧은 것은 짧아서 못쓰네~ 굽은 것은 굽어서 못쓰고 반듯한 것은 반듯해고 못쓰도다~.' 이렇게 노래로 답을 했습니다.
혜암스님께서는 진성 사미가 공부가 되어가나보다하는 생각으로 조실채에 계신 만공스님께 이 뜻을 여쭈니 만공 스님께서 진성사미를 불러서 말씀하시길 '부처님께서 가섭존자에게 법을 세 번 전했는데 그 도리를 네가 아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니 진성사미가 말하길 '태고 이전부터 이어져 오는 것을 새삼스럽게 여쭙는다는 것이 망령스럽습니다. 이미 삼처전심이라고 다 전해오는 것인데 그걸 다시 나더러 이르라고 말하는 것은 망령스럽습니다'.
만공스님께서 그때 말하길 '니가 정말로 열린 모습을 보는구나.' 이렇게 칭찬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심전심으로 내려오는 이 법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이론이나 학설로 판단 말고 아량이나 사량으로 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음과 마음으로만이 전할 수 있는 것이며 이것은 한 물건도 볼 수 없고 지극히 잡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 현재 미래 없이 분명히 전해오는 법은 분명히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법입니다. 이 도리를 알아야만이 오늘 여러분이 신중기도를 잘 입재하고 가사불사를 잘 할 수 있습니다. 공연히 손으로 잡히는 것, 눈에 보이는 것, 귀로 들리는 것 이런 것들로 복 짓고 재앙 없애고 소원성취 하려면 잘못입니다.
그럼 오늘 여기 모여서 하는 일은 어떤 일이냐? 이것은 여러분들이 각자 스스로 가지고 있는 등불을 밝히기 위함입니다. 등불은 내가 가지고 있으며 오고가고 듣고 보는 본래 면목입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찾아야 합니다. 손에 잡히는 것 눈에 보이는 것, 이런 것으로 시비하고 분별하고 갈등하면 어리석은 것이며 평생 살아도 고생하고 재앙을 면치 못합니다.
바로 이 이치를 알아야합니다. 이 법은 들어서 밝히는 일도 아니고 누구한테 지도 받아서 되는 일도 아니며 글로 되는 일도 아니고 하늘에서 떨어지고 땅에서 솟아나는 일도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냐? 스스로 자기 생각을 바꿔야합니다. 오늘 신중기도를 입재하고 가사불사를 잘 하고 싶은 생각이 있으면 여러분 생각을 한번 확 바꿔야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고정관념적 사고로 살면, 눈에 보고 귀에 들리고 입의 맛이나 물질적인 것만 가지고 소원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바로 네 생각을 바꾸는데 있습니다.
옛날 석가도 달마도 육조도 만봉 스님도 바로 생각 하나 바꾼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밝힌 것이지 남을 밝힌 것 아니고 남이 밝혀준 것 아닙니다. 이 이치를 알아야합니다.
예로 우리는 강원에서 경학을 배우고 선방에서 참선을 하고 있지만 바로 선이라는 것은 앉아서 공부만 하는 정(靜)에 있는 것만 아니라 동(動)에 있으며, 사(死)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활(活)에 있습니다. 진실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은 여러분 마음가짐으로 신심을 불태워 이것이 아니면 안된다고 하는 불퇴전의 신심을 가질 때만이 그것은 뚫리고 터지는 것입니다. 물질로 명예로 처자식 남편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한 번 바꿀 때만이 소원성취하고 부족한 것을 채우는 만족의 세계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은 다 이루는데 나는 왜 못 이루나, 이런 업적 같은 분심이 안 일어나면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신심과 분심이 생김으로 대의심이 생기고 의심이 터질 때만이 자유를 얻고 소원성취하고 행복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처님께서 가르친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을 때, 아까 진성 사미가 '긴 것은 길어서 못쓰고.... ' 라고 했는데 탁 한 생각을 바꾸고 나니 긴 것은 긴대로 쓰고 굽은 것은 굽은 대로 쓰고....... 이런 이치를 안단 말입니다. 그 이치를 알고 보면 볼래야 볼 것도 없고 미워할 것도 시비할 것도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게 시비 분별심이 탁 끊어진 상태를 깨달음의 상태라 합니다.
여러분도 지금 여기서는 맞다 하고 나가면서 '내 쌀자루 어디 있어'. 하지 마시고 생각을 편히 하고 신바람 나고 걸림 없이 사는 것이 성불이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오늘 팔월 초하루를 기해서 가사불사를 입재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가사불사는 '복전(福田)'이라 하는데 복밭에 씨를 뿌려야지 뿌리지도 않고 거두려고 하면 그것은 욕심입니다. 욕심은 이루어지지 않으면 분심이 생기고 분심은 투쟁과 시비를 일으킵니다. 그럼 고통스러워집니다. 복전에 씨를 뿌리십시오. 동참을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탁발을 하든 동냥을 하든 해야겠다는 신심을 발휘할 때 복전에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기도를 잘하는 것이 씨 뿌린 것을 가꾸고 키우는 것입니다. 그래야 탐스런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깨달은 행복의식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여러 제자들과 함께 영축산 가사굴에 계실 때 문수보살이 '사바세계에서 중생이 무슨 인연을 지어야 명과 복을 얻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가사가 복전의 으뜸이다. 가사는 여래의 웃옷이고 보살의 큰옷이다'. 하셨습니다.
가사불사에 동참하여 공덕을 짓는 이는 속히 뛰어난 과를 얻게 되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즉 가사를 수완 하는 사람은 대법천왕과 팔보신장이 옹호하고 받들어 모시는 까닭에 재앙을 소멸하고 일체 재앙을 받지 않는다.
가사에 보면 네 귀퉁이에 임금왕자가 새겨있는데 이는 사천왕이 옹호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가사를 시주한 사람은 한량 없는 복을 받아 모든 재앙이 소멸되고 모든 복이 구름이 일듯 일어난다. 사후에는 반드시 천상에 태어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부처님은 가사에는 여러 가지 족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십중대계를 범하더라도 일념으로 가사 입은 이를 공경하고 존중하면 삼승의 수기를 받을 것이다. 둘째는 천룡팔부가 가사 입은 사람을 공경하므로 불전에서 퇴전하지 않는다. 셋째는 귀신이나 모든 사람이 가사를 만들고 남은 조각을 조금만 가지고 있어도 음식이 충족할 것이다. 넷째는 중생이 서로 싸우고 질투하다가도 가사를 보면 자비심을 내게 된다. 다섯째 병난 이가 있어도 가사를 공경하면 병이 낫고 전쟁에 나가도 보호를 받을 것이다.
바로 이런 가사의 공덕이 지중하다고 하는 것은 이 자리에 있는 불자 여러분들은 잘 알것입니다.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이 없으면 뜬구름과 같은 것이니 실천에 앞장서 주시길 진심으로 빕니다.
중국 사마천이 기록한 사기라는 역사책에 사석의효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날 이광이라는 장군이 사냥을 나갔다가 하루종일 허탕을 치고 돌아오는데 어둑해질 때 호랑이가 한 마리가 산꼭대기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력을 다해 화살을 쏘았는데 푹 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꽂혔습니다. 비명도 없고 그대로 서 있어서 다시 화살을 몇 개 쏘았습니다. 이튿날 해가 뜨자마자 그곳에 가보니 바위에 화살이 박혀 있었습니다.
신도님께서는 거짓말 같은 소리 하지 마라. 어찌 화살이 바위에 박히겠냐 하겠지만 이것은 자기 생사를 집어던지고 일념으로 화살을 쏘았기에 바위에 박힌 것입니다. 의심과 잡념을 가지면 박히지 않았는데 어떤 일이든 혼신의 노력이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화엄경에도 '일체유심조' 라는 말이 있듯이 오직 여러분들의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오늘부터 안된다 말고 된다고 생각해야지 자기한테 시비하면 자기한테 돌아와 자기가 괴롭습니다.
제가 오늘 초하루 법회를 했으니까 여러분들이 저한테 선물을 주셔야합니다.
여러분 고통 있으시죠? 대답한 분만 제가 가져갑니다. 고통스럽고 원망스럽고 짜증나고 다리 아프고 허리 아픈 이런 모든 것을 저에게 다 주십시오. 오늘 이렇게 달라 해도 여러분 욕심 때문에 '안되요. 가지고 살거예요'. 하면 제가 그분은 평생 요모양으로 살아라 하고 축원할 테니까 전부다 저에게 주셔야합니다. 짜증나고 머리 아픈 것들 다 주시란 말입니다. 제가 다 가져가겠습니다.
그 대신 오뉴월에 볕도 쬐다 말면 섭섭하다고, 고통스러운 그것도 가지고 있다가 내놓고 나면 할 일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보충해 드리겠는데 여러분에게 만족의 보물을 주겠습니다. 자기 스스로 돌아볼 수 있는 거울을 주겠고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을 수 있는 수레를 드리겠습니다. 돈도 없는데 계절마다 옷 입어야 하는데 그저 입고만 있으면 여름 되면 여름옷 되고 겨울이면 겨울 옷 되는 자비의 옷을 드리겠습니다.
나한테는 조그만 걸망이 있는데 그 걸망은 여러분의 고통을 닮기 위한 것인데 제가 짊어지고 다닙니다. 차에 언제든 싣고 다닙니다. 조그만 걸망인데 일용용품만 지니고 다니면 어디서든 살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걸망은 주둥아리도 밑둥도 없습니다. 여러분 고통을 아무리 담아도 담아도 넘치지 않으며 아까 드린 보물도 주어도 주어도 걸망은 비지 않습니다. 걸망을 풀어서 저 앞에서 나누어줄텐데 만약 먼저 가져가야겠다고 해서 힘으로 밀어붙이면 욕심이 나서 그 보물이 보이지 않아 가져갈 수도 없습니다. 노인부터 한 줄로 서서 일년 삼백육십오일을 가져가도 절대 그 보물은 비지 않으니 차근차근 가져가셔서 신나고 멋있게 사시기 기원하면서 오늘 초하루 법회를 마치겠습니다.
복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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