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한국문인인장박물관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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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한국문인인장박물관을 찾아서...
마음먹고 찾아 나서기만 한다면 우리주변에는 문인들이나 문학의 흔적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문학관도 부지기수로 많고 여기저기에 산재한 시비(詩碑)들도 많다.
그러나 문인들의 인장에 한정한다면 단연 충남 예산의 예당저수지 부근에 있는
광시면 운산리에 있는 ‘한국문인인장박물관’이야말로 한국최초이면서 최대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될 것이다.
이 박물관의 설립자는 경기대 국문학과 이재인 교수다. 그는 베트남전을 배경으로
한 소설 “악어새”의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많은 수필집을 출간한 소설가로 알려져
있지만 한국문단에서 유일한 문인들의 인장을 전문적으로 수집하는 수집가이기도
하다.
지난 2000년 이교수가 자신의 고향인 예산군 광시면 운산리에 1750평의 대지위에
건평 150평 규모의 아담한 규모로 문을 열었다. 마치 편안한 가정집을 연상시키는
이 박물관은 2층 건물인데 1층은 전시실로 이용되고 2층은 서실로 사용되고 있다.
박물관 입구에는 문인들의 문학비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데 충청문단의 산 증인
으로 통하는 이교수이라서 일까 지역문인들의 시비가 유난히 많았다. 마침 방문했던
날에도 금방 제작해온 시비를 하나 세우느라 정신없이 분주했었다.
서정주, 김동리, 박목월 문인의 인장이 생전의 정다움을 간직한채 나란히 함께 했다.
인장의 역사는 장구하다. 그리스 로마시대에는 신분과 개인을 상징하는 반지를 만들어
끼고 있다가 점토판에 눌러서 문서의 효력을 표시했고 중국에서도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단군신화에 나오는 ‘천부인’같은 것이 존재하였을 만큼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의 제 7대 차대왕(次大王)이 무도하여 국정을
어지러피므로 살해되니 중신들이 의논하여 8대 신대왕(新大王)을 맞아들이고 무릎을
끓고 국새를 올리며 말하기를......」 이라는 기록이 있어 고구려의 건국 때부터 인장을
'국새(國璽)'로 사용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경주의 안압지에서 목인(木印)이 출토되어
신라 역시 인장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으리라 생각된다.
나무나 돌, 상아 같은 굳고 단단한 재질을 지닌 물체에 글이나 그림 등을 새겨 넣는 행위를
전각(篆刻)이라고 하는데 인장을 새기는 것도 이에 속한다. 서예가나 동양화가가 자신의
작품에 자신의 호와 이름을 쓰고 인장을 찍는데 이를 낙관(落款)이라고 하는데 이는
작품이 완성되었음을 나타낸다. 문인들에게 인장은 낙관이라는 용도보다는 도서인으로
쓰임새가 더 많았을 것이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인장들은 근, 현대 한국문단을 이끌었던 기라성 같은 문인들의
것으로 600여점에 이른다. 인장뿐만 아니라 문인들의 육필원고와 만년필 같은 문인의
숨결이 고스란히 베인 물품들도 제법 갖추어져 있다. 박목월?박두진?조지훈 등 청록파
시인들의 인장을 비롯해 서정주?김동리?오영수 같은 대표적 문인들의 인장이 망라되어
있다. 길거리 도장집에서 몇 천원이면 새길 수 있는 막도장에서부터 초대형 인장, 인장
하나만으로도 예술품이라고 해도 좋을 예술성을 겸비한 인장까지 관람객의 눈길을 묶어
두기에 모자람이 없다.
소설가 김동리의 낙관은 예술성 높은 인장으로 백옥에 길상문이 투각되어 있으나 인장이
글씨는 담백한 글씨체이다. 나란히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청록파 시인들인 박두진,
조지훈, 박목월의 인장들도 옥에 새겨진 것으로 모두 나름의 조형미를 가지고 있다.
소설가 오영수의 장서인은 사각형의 백옥에 위쪽에 꿈틀거리는 용이 조각되어 보기에도
장중해 보인다.
600여점의 문인들 인장 속에는 소설가 김학철 등 중국 연변 문인들의 인장들과 화가
김석중, 정치인, 교수 등의 인장도 있다. 특히 관심을 가져볼만한 인장으로 영조 등
조선왕조 옥새 7점과 구한말 내각에서 쓰이던 직인 8점, 조선시대 병마절도사와 과거
시험 합격서에 찍던 과거지보(科擧之寶), 중국 청과 명대의 인장 20여점으로 희귀한
인장들이다. 문화재급 인장도 있는데 은나라 때의 인장으로 사슴의 엉덩이뼈에
갑골문자로 새긴 인장이다.
이재인 교수가 유독 인장에 관심을 갖게 된 연유가 궁금해져서 질문을 던졌더니 그가
대학생일 때 서울 우이동에 있던 소설가 오영수 선생 댁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는데,
그때마다 서실에 놓여있던 거북이 모양의 흥선대원군의 인장을 하도 만지고 쓰다듬으며
애착을 넘어 집착을 보이자 보다 못한 오영수 선생님이 가져가라고 하셨단다. 이 교수는
그 일이 문인인장박물관을 세우게 된 근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 무렵에 김소월 선생님이
자신의 시집 ‘진달래꽃’을 김안서 선생님에게 증정하면서 속표지에다 사인을 하고 찍은
낙관을 보게 되어 문인들의 인장에 관심을 갖고 수집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난히 인장에 대한 쓰임새도 많고 권리이 표상으로 생각하는 터라 600여점의
인장을 모으기까지 이교수가 쏟았을 노고가 참으로 지난하였으리라 짐작이 되었다.
한국의 문인들의 인장집성
한자리에서 이렇게 많은 문인들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이재인 교수가 기울여온 노력의 결과이다.
중국의 황실에서 사용했다는 인장이다. 그 크기도 상당해서 한손으로 들기가 버거웠다.
문인인장박물관이 자리 잡은 곳은 서해안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접근성이 좋아져서
서울에서 2시간이면 넉넉하게 올 수 있고 가까운 곳에 전국적으로 소문난 낚시터인
예당 저수지, 완당 김정희 고택, 만해 한용운 생가, 윤봉길의사의 생가, 건축박물관
등의 문화유적지가 가깝게 있고 일엽스님과 고암 이응로 화백의 흔적이 배어있는
천년고찰 수덕사, 물 좋은 덕산온천이 지근거리에 있어서 가족들 간이나 문인들끼리
오붓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곳이다. 이재인 교수의 앞으로 계획은 3층을 증축하여
세미나실을 만들어 낭송회 등의 공간을 문인들에게 제공하는 것이라고 한다.
문인인장박물관은 박물관이라는 이미지가 주는 딱딱한 선입견을 나름대로 보완하기
위해 박물관 주변에 다양한 모양의 문학비를 세운 것이다. 대부분 예산지역 문인들인
이해문, 우제봉, 안흥준, 윤향기, 김광희 등의 문학비와 시비가 세워져 있고 한창 단장
중인 산책길을 따라 계속 시비를 세워가고 있다. 그리고 주변의 조경에도 세심하게
신경을 써 밤, 대추, 감 등의 유실수와 소나무, 주목, 오동나무 등의 관상수를 비롯하여
철쭉, 야생화들이 빈틈없이 심어져 있다. 마침 봄날에 방문한 탓에 철쭉이며 꽃잔디,
수선화 등이 서로 다투어 피고 있었다. 머지않아 주변 경관이 장관을 이룰 것이 짐작되었다.
한국문인인장박물관을 방문하려면 수도권에서는 서해안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홍성IC에서
나와 29번 국도를 이용하여 홍성읍-홍동면-광시면으로 길을 잡으면 쉽게 찾을 수 있다.
경부고속도로에서는 천안IC를 이용하여 21번 국도를 이용하여 아산을 지나 예산에서 홍성
가는 길에서 ‘예당국민관광지’ 표지를 따라가면 예당 저수지를 따라 광시면에 이른다.
광시면에서는 쉽게 찾을 수 있다.
박물관은 일주일중 4일간(목~일) 일반에게 무료로 공개된다. 지방도로에서 박물관에
이르는 100여 미터는 길이 좁으므로 교행하는 차량에 주의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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