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조로 본 조선왕조오백년역사
태조 (1335 -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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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생 : 1355년 이자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대담하였으며, 특히 활을 잘 쏘아 20세가 되기 전에 명궁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성격은 과묵하고 책임감이 누구보다도 강하였고 부하를 아끼고 사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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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시대적배경 : 북으로는 14세기 중반에 일어난 명나라가 원나라를 차지하기 위해 대륙은 혼란하였고, 남으로는 왜구들의 끊임없는 노략질로 백성들이 많은 피해를 보고있는 혼란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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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등장과 활약상 : * 고려말 공민왕의 반원정책에 힘입어 최영장군과 함께 원나라 군사를 토벌하는데 큰 공을 세워 이를계기로 태조 이성계는 세력을 넓혀갔고 전라도 일대의 왜구를 격퇴시켰을 뿐만아니라 오랑캐를 무리치는 등 승승장구함. 이같은 활약상으로 벼슬이 높아지고 명성이 나라안에 자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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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 회군 : 명나라를 공격하여 요동땅을 되찾으라는 우왕의 명령에 '4불가론'을 내세우며 말머리를 개경으로 돌려 회군함. 이로 인하여 이성계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력들의 추대를 받아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계기를 마련함.
4불가론 :
1)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치는것은 불가능함,
2) 여름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불가함,
3) 요동으로 군사를 일으키면 왜구가 침공해 올 수도 있다는 가능성
4) 장마철이라 활의 아교가 녹아 풀어지며 군사들이 전염병에 시달릴 염려가 있어 불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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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가 되다 : 1392년 4월 정도전, 조준, 남은, 이방원 등의 추대를 받아 새나라의 임금이 됨. 걸림돌이 되었던 고려의 마지막 충신 정몽주를 이방원이 제거함으로 인하여 임금으로서의 위치를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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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심안정책 : 국호를 단군조선을 이어간다는 뜻에서 조선으로 함. 서울을 한양으로 옮길것을 계획함. (풍수지리설과 무학대사의 조언) 정도전을 비롯한 학자들에게 법제 정비를 서두름. (조선경국전)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숭유억불 정책을 펴나감.(향교 건립 및 사찰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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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의 가족관계 : 부인 8명, 자녀 8남 5녀 신의 왕후 한씨에게서 6남 2녀를 두었는데 이중 둘째 아들 방과(정종), 다섯째 아들 방원(태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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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의 난 :
* 아버지 태조 이성계를 도와 가장 많은 공을 세운 방원이 왕세자 책봉에 불만이 많았고 정도전의 세력이 커가는 것을 지켜볼수만은 없었다. 그리하여 난을 일으켜 정도전, 남은 등을 제거함.(1차 왕자의 난)
* 박포라는 사람과 함께 이방원의 형 방간이 왕위에 욕심을 내어 군사를 일으켜 방원의 세력을 축출하고 왕위를 얻으려 하다가 싸움에서 패하자 유배를 떠나고 박포라는 사람은 사형을 당함.(2차 왕자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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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興差使 :
* 왕자의 난을 계기로 태조 이성계는 옥새도 내주지 않고 강원도 오대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태종 이방원이 그를 설득하여 옥새를 얻고 궁궐에서 지내도록 많은 차사를 보냈지만 그곳으로 갔던 차사마다 소식이 끊김.(심부름을 가도 사람이 오지 않을 때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말)
* 결국에는 이방원을 임금으로 인정하고 무학대사와 함께 불교에 정진하며 1408년에 세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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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의 주변의 인물들 :
1) 최영 : 태조 이성계와는 다르게 명문 가문 출신으로 반원세력에 앞장서는 뛰어난 명장이었다. 최영은 이성계와는 다르게 군사의 성격도 보병위주였으며, 이성계가 개혁파임에도 불구하고 훈구파의 성격이 강했다.(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이성계와의 관계가 갈등의 최고조에 이르렀고 이성계를 먼저 제거하려고 하지만 결국 먼저 죽음에 이른다.
2) 정몽주 : 고려를 끝까지 지키려는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다. 정도전이 이성계를 도와서 조선을 세운 역성혁명론자라면 정몽주는 고려왕조를 유지하면서 혼란함을 벗어나고자 개혁을 주장하는 고려개혁론자였다. 하지만 이성계의 세력에 의하여 선죽교에서 죽음을 당한다.
3) 정도전 : 보잘것없는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매우 총명하고 영리하였다. 끊임없는 공부를 통하여 실력을 쌓은 후 이성계의 명성을 듣고 이성계와의 관계가 시작된다. 위화도 회군에 이성계가 성공하자 이성계를 반대하는 일파를 몰아내기 위하여 힘을 기울였고, 조선이 건국되자 나라의 기틀을 세우기 위하여 법전을 편찬하였고 서울을 옮기도록 건의하였으며, 유교 사상을 확립시켰으며 그밖에 이성계를 위하여 많은일을 하다가 1차 왕자의 난을 통하여 이방원에게 죽는다.
4) 무학대사 : 일개 장군인 이성계에게 '당신도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준 사람으로 출신성분이 보잘것 없다는 이유로 불도에서 따돌림을 당하자 방랑생활을 하다가 이성계를 만나서 이성계의 서까래 꿈을 해몽하여 이성계가 후에 왕이 될 것을 장담하였다고 함. 풍수지리에도 능하여 이성계가 서울을 옮길때 한양(지금서울)으로 옮길것을 주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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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의 능에 관한 이야기 : 태조의 능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으며 (동구릉) 능 이름은 건원릉이다. 태조의 능은 지금도 갈대가 깎기지 않은 상태로 있으며 이는 태조 이성계가 죽을때 고향의 갈대와 함께 하고싶다는 그의 유언 때문이다.
정종(1357 -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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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정치, 힘없는 임금 : 태조와 신의 왕후 한씨사이에서 2째 아들로 태어났다. (영안대군 방과) 태조의 장남인 방우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이성계는 방과를 세자로 책봉했던 것이다. 여하튼 조선 2대 임금으로 추대되었지만 이방원 등을 비롯한 개국공신들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나라의 허수아비 임금에 불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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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의 난 : 2차 왕자의 난을 겪으면서 피비린내 나는 형제들간의 싸움에 그는 탄식을 거듭하였고 왕권을 계속 잡고 있을 경우에는 방원에게 죽음을 면치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동생 방원에게 임금자리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아무런 걱정없이 인덕궁에 살면서 사냥과 온천을 즐기다가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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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의 치적 : 교지를 발표하여 새로운 정치제도와 그 제도를 시행하도록 명함. 귀족의 횡포를 막기 위하여 '분경금지법'을 만들었으며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쳐 정치와 군사에 관한 일을 분리시켰으며 수도를 한양에서 다시 개경으로 옮겼다.
태종(1367 -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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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된 방원 : 두차례의 왕자의 난을 겪은 방원은 그 세력이 날로 커져만갔다. 정종은 아버지 태조를 설득하여 방원을 임금으로 인정하도록 하였고 드디어 방원은 조선 3대 왕이 되었다. 태종 이방원은 위로 상왕을 모시고 정치적 개혁을 단행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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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의 업적 :
민본정치 - 백성의 살림살이 파악을 위하여 '경차관'을 임명하여 파견 (개혁) 억울한 일 해결을 위하여 궁성 문 앞에 신문고 설치
왕군강화 - 국가의 중요한 기관인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라고 명하고 문하부까지 합함 (입법과 행정이 한곳으로 합쳐지니 임금의 권한이 강해짐) 조정 대신들의 권력이 커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노비변정도감' 이란 노비들의 호적을 관리하는 기관을 설치 정종때 옮겨졌던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다시 천도함. 대외정책 - 왜인들의 범죄가 잦아지자 '왜인범죄논결법'이라는 책을 만들어 다스림.
문화정책 - 책과 학문의 소중함을 알고 학자들을 귀하게 여겼으며 기술 교육을 위하여 10학을 설치 하였으며 나라의 일을 맡을 관리들을 능력과 실력 위주로 등용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절에 매여있던 노비를 공노비로 바꾸고 처녀로 중이 된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고려시대에 나쁜점이 많았던 연등제와 초파일을 없앰과 동시에 일반 백성들 사이에 유행하던 참위설(음양오행설 등) 등 개인적인 신앙을 국가 신앙으로 이끌어 유교를 숭상하게 만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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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경왕후 민씨 : 조선초의 학자이자 높은 벼슬을 지내고 있는 민재의 딸로 왕비가 되기 위하여 스스로 노력했던 인물이다. 제 1차 왕자의 난 때에는 정도전 등이 남편 방원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알고 방원에게 주의를 시키는 한편 방원에게 감추었던 무기를 내놓는 등 민씨 덕택에 태종 이방원이 왕자의 난에게 승리할 수 있었다. 이런 민씨라 자신의 주장이 매우 강하였고 이로인하여 태종과 잘 다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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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책봉 문제 : 태종은 원경왕후 민씨와 4남 4녀를 두었다.(양녕, 효령, 충녕, 성녕대군) 장남인 양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으나 외척세력인 민씨 집안의 세도정치를 우려한 태종은 원경왕후 민씨의 형제자매를 모두 귀양 보내거나 평민과 결혼하게 하는 등 강력하게 외척세력을 견제하였다. 이로인하여 총명하고 학문에 성실하던 양녕대군은 세자의 행동에 맞지않는 이상한 행동을 계속하였고 이로인하여 1418년 세자에서 폐위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조정대신들과 합의하에 셋째 충녕대군이 세자로 재 책봉 되니 이자가 바로 조선 4대 임금 세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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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때 기억할만한 일 : 신문고 제도 - 옛날 중국 송나라의 등문고 제도를 본따서 만든 제도이다. 신문고를 궁궐문 앞에 매달아 놓고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치도록 하였다. 무조건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신문고를 치는 것은 아니다. 부하가 상관을 고발할 때에는 오히려 벌을 주었다. 사소한 일로 신문고를 치는 자도 많아서 무질서한 현상을 낳기도 하였으며 연산군 때 폐지되었다가 영조때 부활됨. 의정부 설치 - 의정부의 사무를 이, 호, 예, 병, 형, 공조 등 육조로 나눠 보도록 하였으며 의정부에는 덕망이 높은 중신들이 나라에 중요한 일이 있을때만 모여서 의논하여 임금에게 고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왕-의정부-육조 체제에서 왕-육조로 바뀌어 임금의 권한이 한층 강화된 것을 알수 있다.
세종(1397 -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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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사롭지 않는 태몽 : 원경왕후 민씨가 셋째아들(세종)을 임신했을때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그 꿈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어느 화사한날 낮에 민씨가 마루에 걸터앉아 쉬고 있는데 집터에서 여의주를 물고 용(龍) 한마리가 북한산 꼭대기로 승천하여 하늘로 날아갔다는 것이다. 그러고나서 민씨는 꿈이 상서롭지 않아서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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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명한 왕자 충녕대군 : 충녕대군 (세종)은 타고난 성품이 총명하고 공부하기를 매우 좋아하여 추우나 더우나 밤늦도록 독서를 하였고, 그의 아버지 태종이 밤늦게 독서하는 충녕의 건강이 걱정되어 오히려 밤에는 독서를 못하게 할 정도였고 나라에 큰일이 있을때마다 의견을 말하였는데 태종을 비롯한 대신들이 생각지도 못한 의견을 내놓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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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즉위 : 세자로 책봉된 양녕대군은 세종에 비하여 독서량도 많지 않았고 충녕과 비교되는 점도 많았다. 그리하여 태종은 양녕을 폐위시키고 충녕을 세자로 다시 책봉한다. 1418년 드디어 충녕이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임금이 된 세종은 동방의 요순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임금이었다. 물론 세종의 뒤에서 눈에 보이지 않은 태종의 보살핌과 지도, 재상들의 공적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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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치적 :
정치 - 끊임없이 노략질하는 왜구때문에 백성들의 피해가 적지 않아 이종무를 시켜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고 유동성있는 외교 정책을 펴나갔다. 김종서에게 명하여 두만강과 압록강 주변의 여진족을 정벌을 위하여 4군, 6진 개척을 하였다.
경제 - 조선초 공신들을 위주로한 토지의 집중현상이 보이자 '전제상정소'라는 중요한 기관을 두고 전제와 조세의 방법을 의논하였고 합리적으로 토지를 조절하고 백성의 조세부담을 덜어주는 한편 나라의 재정이 확보되었다. 농민들이 농사를 과학적으로 짓도록 하기 위해 깊은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농사에 관한 책을 편찬하도록 명하였고 그결과 '농사직설'이라는 책이 편찬됨.
사회 - '속육전', '경제육전등록' 등 법전편찬으로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였으며 삼강행실도를 통하여 유교의 으뜸이 되는 사상을 백성들에게 실천하도록 권장하였다.
문화 - 집현전의 학자들과 함께 피땀흘려가며 한글을 창제하여 우리말을 쓰도록 하였다. 측우기, 자격루, 혼천의 등 과학의 발달에 노력하였다. 이는 농업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일이었다. 박연을 시켜 궁중의 아악을 정리하도록 하였으며 조선왕조 문화의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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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가족관계 : 영의정 심온의 딸 심씨와 결혼하여 8남 2녀를 두었고 5명의 후궁에게서 10남 2녀를 두었으나 세종도 또한 여러 아들을 두고 세자책봉 문제로 고민을 하였다가 결국은 몸이 허약한 첫째를 세자로 책봉하게 된다. 이후 건강이 약한 5대 임금 문종이 왕이 되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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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신하 :
황 희 - 18년 동안 영의정의 자리에 있으면서 농사의 개량, 예법의 개정, 노비나 첩의 소생들의 천역 면제 등 뛰어난 업적을 쌓아 칭송이 자자하였다.
맹사성 - 성격이 부드럽고 섬세하여 악공을 가르치거나 과거 응시자들의 학문적, 문화적 소양을 점검하였다. 세종의 신임을 받아 좌의정이 되었으며 평소 소타기를 좋아했다.
이종무 - 세종이 즉위한후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세종의 명을받아 대마도를 정벌 하였으며
김종서 - 용감하게 북쪽을 개척하여 종성, 회령, 경원, 경흥 등 4진을 설치하고 다시 두만강 근처에 온성진과 부령진을 두었다. 이것이 6진이다. 이로 인하여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으며 정치적으로 그의 입지가 커졌다.
장영실 - 천민의 신분으로 태어난 그는 손재주가 매우 뛰어나 세종의 부름을 받고 궁중 기술자가 되었다. 중국에서 새로운 문물을 배우며 천문기기에 매력을 느낀 장영실은 돌아와서 천문기구 등을 많들었으며 그는 조선시대 최고의 과학자이자 기술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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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 대왕이라는 칭호는 후세 사람들이 생각하여 그의 업적이 매우 뛰어났을때 부르는 칭호이다. 세종은 타고난 능력과 자상하고 부드러운 정치로 조선왕조에서 제일 훌륭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업적을 남기고 54세의 일기로 세상을 마쳤고 세종의 업적은 후에 조선왕조가 500년 이라는 긴 세월동안 왕조를 유지하도록 하는 원천이 되었다.
문종(1414 -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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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의 즉위 : 1450년 세종이 세상을 떠나자 8세때 왕세자로 책봉되어 29년 동안 왕세자로 머물러 있으면서 8년 동안 상왕의 대리로 나랏일을 하다가 마침내 왕위에 올랐으니 조선 제 5대 임금 문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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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의 업적 : 문종은 언론에 대하여 관대하였다. 6품이상의 신하들은 돌아가며 임금에게 의견을 올렸으며 문종은 의견들은 나름대로 수렴하여 정치를 실행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후 정도전, 정초 등에게 명하여 편찬하고자 하였던 '고려사'를 완성하였다. 고려사는 고려 34왕 475년간의 역사를 편찬한 역사책으로서 고려 시대의 기록이 담겨있어 가치가 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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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의 병세 : 문종의 건강은 어렸을적부터 좋지 않았다. 성품이 너그럽고 언론을 존중하여 너그러운 정치를 펼쳐나갔던 문종은 병세가 깊어가 결국 왕위에 오른지 2년만에 세상을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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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 문제 : 문종은 건강이 약한 탓으로 인하여 자식도 현덕왕후 권씨 사이에 1남 1녀만을 두었다. 문종이 세상을 떠나자 10세의 단종이 임금으로 보위되어야 하는 불운을 맞게 된다.
단종(1441 -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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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세자 : 1441년 (세종 23년) 비극의 주인공으로 결말을 맺게될 홍위(단종)가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도 아들을 낳자마자 눈을 감았다. 그의 할아버지 세종은 그를 유난히도 귀여워 하였고 1448년 세종이 목숨이 얼마남지 판단되었을때 그를 왕세손 으로 책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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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의 즉위 :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곧바로 즉위 하였으나 문종은 재위 2년만에 눈을감고 말았다. 문종이 승하하자 12세의 세자가 왕위에 올랐으니 바로 비극의 인물 단종임금이다. 보통 임금의 나이가 어리게되면 가장 지위가 높은 후비가 수렴청정을 하였는데 당시에 그럴만한 사정이 되지 못했으며 수렴청정할 대왕대비도 이미 세상을 떠나서 단종은 더욱 외로웠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나랏일을 세종때부터 재상으로 지내던 황보인, 정본, 김종서 등이 주가되어 나랏일을 처리해 나갔다. 이렇다보니 단종은 허수아비에 불과하고 재상들이 나랏일을 마음대로 처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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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정난 : 나라의 형세가 어린 임금을 두고 이렇듯 돌아가자 문종의 동생들이던 안평대군, 수양대군 등은 각자가 이름난 학자를 모으고 스스로 힘을 길러갔다. 드디어 1453년 수양대군은 신숙주, 한명회, 권남 등과 함께 조정의 대신들이 어린 임금 단종을 죽이고 안평대군을 왕위로 앉히려 했다는 구실로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귀양 보냈다가 죽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를 계유년에 일어났다고해서 '계유정난' 이라고 한다. 이를 계기로 조정은 수양대군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수양대군이 왕을 대신해서 나랏일을 처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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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징옥의 난 : 함길도 절제사 이징옥은 수양대군이 절제사를 다른 사람으로 임명하였다는 것이 수양대군이 처리한 줄 알고 난을 일으켜 수양대군을 죽이려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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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의 강등 : 수양대군의 동생 금성대군은 어린 조카 단종을 수양대군으로부터 보호하려고 하였지만 수양대군의 앞에서 모두 귀양을 가야 하거나 죽음을 당했다. 단종은 두려움에 떨며 옥새를 수양대군에게 내놓고 1455년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물려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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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 : 수양대군이 왕위를 차지하자 조정의 대신들은 단종의 복위를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함께 거사를 도모하기로 한 김질이 배신하고 단종을 복위하려는 계획을 노출시키고 말았다. 그리하여 성삼문을 비롯한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은 죽음을 당하게 된다. 이들을 사육신이라고 하며 죽는 순간까지도 수양대군을 욕하며 단종의 복위를 당당하게 주장하였다. (死六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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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육신 : 김시습, 이맹전, 원호, 조려, 성담수, 남효온은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적극 반대하였으며 사육신과 반대로 벼슬을 거부하거나 수양을 비난하는 등 살면서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반대하였던 사람이다. (生六臣)
세조(1427 - 1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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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 : 수양은 성격이 강하고 야심만만했으며 세력도 강했다. 안평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과 손을 잡게되자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세력을 키워가야 할 생각을 하였다. 1452년 명나라에서 단종의 즉위를 인정한다는 고명을 보내왔고 조선의 조정에서는 명나라에 감사의 뜻을 전할 사은사를 보내야 했다. 수양대군 심복들은 상대세력의 커짐을 걱정하여 반대하였지만 수양대군이 이일은 종친의 의무이므로 가야한다고 겉으로 주장하였다. 그리고 명나라를 자유롭게 여행하는 동안 그는 자유롭게 정권을 장악할 계획을 세워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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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의 즉위 : 단종세력을 하나둘 제거하고 1453년 그는 7대 임금 세조로 등극하였다. 세조는 정치를 잘함으로써 자신의 잘못을 벗으려고 백성들을 잘 돌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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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의 치적 : 사치풍조를 없애고 궁궐의 문화까지 검소하게 만들었다. 그는 또한 단종때의 왕권약화가 미치는 영향을 거울삼아 왕권을 강화하여 의정부의 정책 결정권을 폐지시키고 6조의 직계제를 부활시켜 의정부의 기능을 약화하였다. 또한 국방력 강화를 위하여 호적, 호패제도를 부활 시켰으며 두만강 건너 야인소탕, 서북면 개척 등 국토의 균형있는 발전을 꾀하였다. 문화적으로 세조는 불교를 숭상하여 1461년에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불경을 간행토록 하였으며 일본까지 유통시켰으며 태조이래 4대 임금을 찬양하기 위하여 '국조보감'을 만들고 세종때 시작한 '오례의'를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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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인물 :
한명회 - 칠삭동이로 태어나 인물이 형편없어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고 자랐으며 과거에도 번번히 낙방하여 30세가 넘도록 할 일이 없이 떠돌아 다니는 신세였으나 한명회의 친구 권남의 천거로 수양대군에게 소개되었고 그후 수양대군을 왕위에 오르게 하는데 큰 공을 세웠고 오랫동안 세도를 누리면서 1487년 생을 마감한다.
권 남 - 한명회와 친구사이였던 권남은 과거에 세번 응시하여 세번모두 장원 급제하여 '삼장장원'으로 이름을 날렸던 뛰어난 인물이다. 그러나 출세의 길이 열리지 않아서 세상을 원망하였으나 수양대군의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에 그 능력이 인정되어 한명회와 함께 부를 채우며 50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신숙주 - 세조와 동갑내기로서 이해력이 뛰어난 학자이다. 1452년 수양대군이 명나라에 사은사로 갈때 동행하였는데 여기서 수양대군의 끈질긴 노력으로 친분을 맺게되어 비록 역사적으로 변하기 쉬운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기는 하였지만 '국조보감'을 편찬 하였으며 고전과 불경을 우리말로 번역하였고 특히 외교와 국방에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어서 세조의 오른팔이라고 불리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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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관계 - 정희왕후 윤씨와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고 둘째 해양대군은 8대 예종으로 오르게 된다.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죄책감에 많이 시달려야 했으며 결국 1468년 돌아올수 없는 길을 떠나게 된다.
예종(1450 - 1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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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의 고민 : 세조는 정희왕후와의 사이에 2남을 두었다. 세조가 즉위하자 18세의 의경 세자가 세자로 책봉되어 왕위를 계승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2년뒤에 아무런 이유없이 죽고 말았다. 그래서 해양대군이 세자를 계승하였고 이때 나이 19세 였다. 이가 바로 조선 8대 임금 예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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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의 즉위 : 나이어린 예종이 왕위에 오르자 원상과 함께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으로 나랏일을 돌보았다. 정희왕후는 남자처럼 성격이 대담하고 결단력이 있어, 부드러운 예종의 성격과 조화를 이루어 나랏일을 무리없이 해나갈수 있었다. 1469년 삼포에서 왜와의 개별 무역을 금지시켰으며, 세조때 시작한 경국대전을 완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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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의 옥 사건 : 남이는 의산군 휘의 아들로, 태종의 외손이다. 어려서부터 활을 잘쏘고 힘이 장사 였다. 남이는 17세에 무과에 장원급제하였다. 그후 세조의 세력을 등에 업고 이시애의 난을 잠재웠으며 압록강 상류까지 원정을 가기도 하였다. 남이의 아래에 유자광이라는 갑사가 있었는데 유자광이었다. 남이가 벼슬을 얻어 승승장구 하는데 비교되는 것이었다. 유자광은 계략을 세워 남이를 제거하기로 하고 계획을 세웠으며 남이가 임금에 오르려 한다는 역모로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으며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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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의 임종 : 1년 2개월 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왕위에 올라 있었으나 원상제도와 수렴청정으로 제대로 권력을 행사하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성종(1457 - 1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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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결단 : 예종이 죽자 왕위를 계승할 사람은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 이었다. 하지만 제안대군은 겨우 4세에 불과했다. 예종의 병세가 심해지자 정희왕후가 원상들을 불러들여 이야기르 꺼냈다. 세조의 첫째 아들인 의경세자의 장남인 월산군을 다음 임금으로 지목했으나 원상들은 월산군의 동생인 자을산군에게 뜻이 있음을 내비추고 종친들의 반발이나 부작용은 한명회를 비롯한 원상들에게 맡기고 예종이 세상을 떠나자 자을산군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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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의 즉위 : 자을산군이 13세의 어린 나이에 제 9대 임금으로 올랐다. 정희왕후는 다시 수렴청정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주위에서는 임금의 지목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바로 세조의 동생 임영대군의 아들 구성군을 두고 이른말이었다. 구성군은 출중한 인물이었으나 탄핵이 들어와 1470년 아무런 죄도없이 멀리 귀양가게 되었으며 또한 원상들은 종친들을 관료로 등용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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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의 치적 : 성종은 총명하고 온순하였다. 그리고 정이 많았다. 성종의 업적으로 단연 돋보이는 것은 바로 경국대전의 반포이다. 1백여년에 걸친 법전의 반포로 국가의 중앙집권 체제는 더욱 강화 되었다. 성종 즉위 후 7년동안 할머니이자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1476년 수렴청정이 끝나자 임금이 직접 나랏일을 도맡아 하게 되었다. 그 첫번째가 왕권강화 였다. 젊은 사람의 등용(사림파)으로 젊은 문신들과 기존의 훈구 세력들의 세력을 적당히 견제 함으로써 나라를 안정되게 이끌어 나갔다. 성리학에 심취한 성종은 유교문화를 강화하기 위해서 여러 정책을 펴 나갔으며 농업의 장려를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성종은 국방정책도 훌륭하게 펴나가 두만강 방면의 여진족을 소탕하는 등 변방을 안정시켜 전쟁에 대한 위협을 없앴다. 성종시대에는 '문화의 황금기'라고 일컬을 만큼 문화정책을 폈다.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세상은 태평성대(太平聖代)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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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비윤씨 사건 : 춘추관기사관 윤기무의 딸로 뛰어난 미인인 윤씨는 어려운 생활을 하던중 후궁으로 들어왔다. 윤씨는 성종의 눈에 들어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1474년 왕비로 책봉된 윤씨는 그해에 아들을 낳아 그 기쁨이 두배에 달했다. 그러나 윤씨가 시기와 질투가 심하다는 이유로 성종도 은근히 그를 멀리하였고 그러던 도중 윤씨가 성종의 얼굴에 손자국을 남겼다는 이유로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를 비롯하여 조정의 대신들도 윤씨를 폐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윤씨는 폐비되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지만 주위에서는 윤씨를 원자가 자라나기 전에 죽여야한다고 하였고 그로 인하여 성종은 윤씨에게 사약을 내려 1479년 인생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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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파의 등장 : 성종은 학문을 숭상하고 도학 정치를 꿈꾸어 왔다. 성종과 같은 사상을 가지고 관계에 진출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들이 바로 사림파이다. 고려의 유신 길재가 은퇴한 후 고향인 영남에서 후진 양성에 힘쓴 결과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 사람들이 조선 시대의 유학의 큰 흐름을 이루었다. 이들은 한명회, 유자광, 이극돈 등과 같은 기존의 훈구 세력을 권세나 잡을 줄 아는 간사하고 도량이 좁은 사람들이라고 무시하였다. 성종은 김종직의 학문과 사상을 매우 좋아하여 그에게 형조판서의 벼슬을 주자 그의 제자들이 다시 몰려들어 기존의 훈구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사림파들은 '유향소제도'를 부활시켜 지방의 부정부패를 막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결국 성종은 사림을 중앙에 등장시켜 훈구와의 견제를 이끌면서 왕권을 강화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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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의 임종 : 25년 동안 정치를 잘하고 호화롭게 살다가 1494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다음 왕의 자리를 폐비윤씨의 사이에서 태어난 연산군에게 물려준다.
연산군 (1476 -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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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없는 세자 : 왕자 융은 성종과 폐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융이 4세때 태어났으므로 융은 정현왕후 윤씨가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인줄 알고 자랐다. 융은 인수대비와 정현왕후 윤씨 사이에서 온갖 미움을 받으며 자랐고 그로인하여 융의 성격은 삐뚤어질 수 밖에 없었다. 걸핏하면 화를 내고 책을 집어던지는 등 변덕도 심했다. 융이 8세가 되자 조정 대신들은 하루바삐 왕세자르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성종도 쉽게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인수대비와 상의한 끝에 왕세자로 책봉할 왕자가 융 밖에 없음을 알고 하는 수 없이 융이 왕세자로 봉해졌다. 그때부터 11년 동안 세자 수업을 받으며 왕위에 오를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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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 연산군 : 1494년 성종이 세상을 떠나자 19세의 세자 융이 왕위에 오르니 제 10대 임금 연산군이다. 성종이 정치를 잘하여 평화로운 세상이었기 때문에 힘을 들이지 않아도 나라의 질서는 잘 유지되었다. 연산군은 선정을 베풀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은 폐비윤씨의 죽음을 알게 되었고 또한 거기에 관여한 자들도 알아 버렸다. 그후 연산군은 폭군으로서 점차 바뀌어가게 되었다. 연산군은 권력을 쥐게 되자 문신들의 소리가 듣기 싫어 경연을 폐지하고 홍문관, 사간원도 없애고 각도에 채흥사, 채청사들을 파견하여 미녀들과 좋은 말을 뽑아 궁궐에서 즐겼으며 부처님을 모시는 원각사를 기생 양성소로 만들어 버렸다. 이로 인하여 나라의 살림은 말이 아니었다. 연산군의 이러한 폭정으로 그 밑의 권력을 쥔 신하들도 횡포가 심해졌다. 연산군의 폭정은 점점 극에 달했다. 자신의 정치를 비판하는 상소문이 국문으로 올라오자 훈민정음의 사용을 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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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사화 : 왕에게 학문을 하라는 등 여러모로 학문을 중요시하는 사림파를 연산군은 매우 싫어하였다. 그러던 중 성종실록 편찬시 김일손이 쓴 사초에 세조에 대한 비판의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고 그리하여 모든 것을 알게된 연산군은 김종직의 묘를 부관참시하고 세조를 욕되게 하였다는 이유로 사림파를 귀양보내는 등 사림파의 세력이 약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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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사화 : 무오사화로 언론기관이 없어지자 연산군에게 바른 말을 하는 사람들도 없어졌고 조정에는 연산군의 비위만 맞추는 사람들로 들끓었다. 그중 임사홍 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훈구파 세력을 몰아내고 남아있는 사림파를 완전히 없애버리고 싶었다. 그러던 중에 폐비윤씨가 후궁의 모함을 받고 죽었다고 고해받쳤다. 이로인하여 화가 끝까지 치밀은 연산군은 인수대비를 머리로 받아 그후 인수대비는 병석에 누워 영원히 일어나지 못하였으며 폐비윤씨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찾아내어 복수를 자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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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반정 : 연산군은 재위 12년만에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켜 수많은 학자들을 죽이고 경연과 대제학을 폐하였다. 더 기막힌 사실은 기생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이런일을 참지 못해 바른 정치를 하라는 상소를 올렸지만 연산군은 훈민정음을 상소나 하는 일로 쓰지 못하게 하여 언문이라고 하여 쓰지 못하게 하였다. 연산군의 이러한 폭정에 대해 몇몇 사람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서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진성대군을 새로운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중종 (1488 -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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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의 즉위 : 진성대군으로 책봉되었다가 연산군의 폭정으로 성희안, 박원종 등의 추대로 임금이 된 중종은 새로운 정치를 펴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어진 정치를 베풀고 연산군의 폐정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다. 나라의 기강을 세우고자 홍문관의 기능을 강화하여 임금의 자문을 맡도록 하였다. 경연을 부활시켜 정책에 대한 논쟁을 자유롭게 하고 인재를 많이 등용시키기 위하여 월과, 춘추과시, 사가독서 등을 실시하였다. 과거제도의 모순을 없애고자 조광조 등의 제청으로 현량과를 설치하고 인재를 뽑아 중요한 자리에 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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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정치 : 조광조를 중심으로 개혁정치를 폈다. 성리학에 의거한 철인군주주의를 펴 나가기 시작하였고 미풍양속을 장려하기 위해 미신 타파에 주력하였다. 백성들의 상부상조 정신을 심어주기 위하여 향약을 실시하여 건전한 정신문화를 정착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조광조를 위시한 사림파의 생각이 급진적이고 이상적이라서 옛날사상에 물들어 있던 훈구세력이 쫓아오지 못하여 이상적인 정치를 펴나가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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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의 가계도 : 중종은 단경왕후 신씨와는 자식이 없었으며 공신들의 반대로 폐비되었고 장경왕후 윤씨와 1남1녀를 두었고 문정왕후 윤씨와 1남 4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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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포왜란 : 좌수사 이우징이 왜인에 대한 횡포가 심해지자 왜인들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대마도 소오의 힘을 빌러 5천 명의 군사를 일으켜 부산포, 내이포를 함락시켰다. 이 사건이 바로 삼포왜란이다.
인종 (1515 -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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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孝)의 세자 : 1515년 장경왕후 윤씨의 맏아들로 태어난 호는 태어난지 일주일도 안되어 어머니인 장경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문정왕후 윤씨의 손에서 자랐다. 1520년 호가 6세가 되던해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너그러운 마음씨와 인정이 많아서 사람들로부터 귀여움을 많이 받고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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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의 즉위 : 1544년 세자는 깊은 슬픔에 잠긴채 임금의 자리에 오르니 바로 12대 임금 인종이었다. 인종은 바른정치를 하고자 노력을 하였고 그로인하여 어진 사람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을 알았다. 인종은 숨은 인재를 구하기 위하여 기묘사화로 폐지된 현량과를 부활시켰다. 그리고 기묘사화의 일을 신중히 검토하여 나름대로의 교훈을 얻은 인종은 느리고 완만한 개혁을 펼쳐 혼란한 정치를 막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퇴계 이황을 천거해 새로운 정치를 희망차게 펼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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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의 요절 : 문정왕후 윤씨는 그의 아들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자 인종을 어렸을 적부터 죽이려고 하였지만 계획이 성사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탈로나자 죽을 위기에 처해있었지만 효성과 마음이 넉넉한 인종 덕분에 계속 생활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인종이 왕위에 왕위에 오른지 8개월 30세의 젊은 나이에 어진정치를 마음껏 펼치지도 못하고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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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계자 문제 : 인종은 인성왕후 박씨와의 사이에 후사가 없었다. 후궁이 2명 있었으나 역시 그녀들 사이에서도 후사가 없었다. 그래서 인종은 중종과 문정왕후 사이의 경원대군이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하였다.
명종 (1534 - 1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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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의 즉위 : 인종이 세상을 떠나자 문정왕후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토록 바래왔던 모든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12세에 왕이된 명종은 나이가 어렸으므로 자연히 대왕대비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문정왕후가 권력을 손에 쥐자 윤원로, 윤원형 형제는 제세상을 만난것처럼 활개를 치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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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윤과 소윤 : 중종때 장경왕후 윤씨에게서 인종을 낳고, 문정왕후 윤씨에게서 명종을 낳았다. 장경왕후 윤씨나 문정왕후 윤씨는 모두 파평윤씨였고 두 윤씨에게는 남동생이 각각 한명씩 있었는데 사람들은 장경왕후의 동생 윤임을 보고 대윤이라고 하였고, 문정왕후 동생 윤원형을 보고 소윤이라고 하였다. 인종이 즉위하자 윤임이 득세하여 소윤의 기세를 꺽어 놓았으나 인종이 죽고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문제는 달라졌다. 윤원형 파인 소윤이 권세를 잡을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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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렴청정 : 문정왕후 윤씨는 명종의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대윤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동생 윤원형과 함께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이로 인하여 대윤은 기세가 완전히 꺾이고 말았다. 하지만 소윤이 안심하기에는 아니라고 판단하여 그들은 다시 '양재역 벽서사건'을 일으켜 소윤은 확실하게 권력을 잡고 조정을 뒤흔들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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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의 정치 : 명종은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뜻을 거르지 않고 나라를 잘 다스리려고 애를썼다. 하지만 그의 힘에는 한계가 있었다. 명종은 많은 시련을 겪으면서 재위기간동안 최선을 다하였다. 하지만 조정의 권력남용과 사회가 어지러우니 지방의 수령들도 백성들로부터 재물을 빼앗는 등 위기를 초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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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 1571년에 쓴 명종실록을 보면 임꺽정에 대한 이야기가 쓰여있는데 그 내용은 "임꺽정과 그 무리들이 도둑이 된 것은 왕정의 잘못이지 그들의 잘못이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임꺽정을 의적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익의 성호사설에서는 임꺽정을 다르게 본다. "임꺽정은 단순히 도적의 우두머리일 뿐이다. 그는 홍길동, 장길산과 더불어 조선의 3대 도둑이다." 아무튼 임꺽정은 5년동안 나라를 휩쓸고 다니며 전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은 보기 드문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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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묘왜변 : 조선의 두통거리 중의 하나는 왜구였다. 조정은 권력다툼으로 혼란하고 지방은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느라고 정신이없고 국방에는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왜구들은 문제를 일으켜 남해안 지방을 침입하였다. 하지만 중앙에서 손을써 사건을 마무리하였다.
선조 (1552 -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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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된 하성군 :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는 걱정이 태산같았다. 순화세자가 죽은지 몇 년이 지났지만 후사가 없었다. 나날이 수척해가는 명종을 보며 조정의 대신을 비롯하여 인순왕후는 걱정이 태산같았다. 명종은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세자책봉을 서둘러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세자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중종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중종과 장경왕후 사이의 인종, 중종과 문정왕후 윤씨 사이의 명종, 그러면 하성군 (선조)는 누구인가? 중종은 2명의 왕후와 5명의 후궁을 두었다. 5명의 후궁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은 대윤과 소윤의 다툼에 화를 면하지 못하고 모두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중종과 창빈안씨 사이의 덕흥군만이 화를 면하였다. 덕흥군은 3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3째아들 하성군은 총명함과 덕을 쌓아서 명종이 그를 총애하고 마침내 세자로 책봉한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하성군은 세자에 오르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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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즉위 : 1567년 7월 하성군이 경복궁에서 즉위식을 거행하니 바로 우리 민족사상 가장 큰 불행을 겪게되는 14대 임금 선조이다. 이때 선조의 나이 16세 였으므로 인종의 비 인성왕후가 대왕대비가 되고 그의 어머니 심씨가 왕대비가 되어 수렴청정을 거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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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업적 : 즉위당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나랏일을 잘 돌보았다. 매일 경연을 열어 정사를 논하였고, 성리학을 연구하여 바른 정치를 베풀려고 노력하였다. 기묘사화때 죽은 조광조의 죄를 풀어주는 등 억울한 사람을 조사하여 원한을 풀어주었다. 또한 현량과를 다시 실시하여 이처럼 선조가 국사를 능숙하게 처리하게 되자 심씨는 1년만에 수렴청정을 거두게 되었다. 나라가 조금씩 안정을 되찾고 조정은 평안하였다. 또한 이황과 이이를 스승으로 생각하고 두사람에게 어려운 일은 자문을 구하였으며 정성을 다하여 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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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파싸움 : 선조가 즉위하여 나라가 평안을 되찾아갔지만 조정은 다시 당파싸움에 휘말리기 시작하였다. 명종때는 대윤과 소윤이 갈려 싸우던 것이 선조때는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진 것이다. 동인 신진세력 이었고 서인들은 나이가 들은 기성세대였다.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진 조정은 나랏일을 의논하면서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의견에 반대를 위한 반대만 하고 있었다. 이에 율곡 이이는 선조에게 탕평책을 건의하였다. 하지만 선조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후궁에만 빠져 있었다. 이처럼 정치가 혼란하자 국방력이 흔들리게되어 야인들에게 침략을 받게 되었고 왜인들의 동태도 심상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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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내의 여러 작은 나라들을 하나로 통일하면서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 힘을 국내에 두기보다는 해외로 나가게 함으로써 일본 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을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대륙 침략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1592년 일본은 15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였다. 일본군은 3군으로 나누어 조선을 공략하기 시작하였다. 조정 대신들은 회의를 열고 대처하려 하였지만 속수무책 이었다. 한양 함락이 임박하자 조정의 대신들과 함께 평양으로 피난을 가기로 하였다. 일본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듯 하였고 선조는 다시 신의주로 피난을 가야만 하였다. 그러나 육지에서는 의병이 일어나 적과 싸웠으며 남해안 일대에는 이순신 장군이 승승장구 하였다. 명나라의 원조에 힘입어 평양을 탈환하였으나 다시 일본군은 1597년 정유년에 14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침입하였다. 이를 정유재란이라 하는데, 결국 명나라와 의병, 수군 등으로 인하여 일본군을 물리치고 조정은 전쟁을 끝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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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1545-1598) : 서울에서 태어나 어렸을적 부터 용맹하였고 결국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선다. 그후 권지훈련원 봉사, 발포만호, 녹도 둔전사의를 거쳐 전롸좌수사에 임명된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그의 능력은 후세에까지 남게 되었고, 부모님을 생각한는 효성또한 지극하였다. 임진왜란때 옥포에서 첫승을 거둔후 싸움을 할때마다 승리하였고 한산대첩, 명량해전, 노량해전 등 굵직굵직한 싸움에서 승리하였다.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기도 하였지만, 대신들의 모략으로 인하여 갖은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였고 이때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말로 유명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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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황 (1501-1570) : 경북 예안에서 출생하였으며 태어난지 7개월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진사에 합격하여 승진을 거듭한 끝에 성균관 사성이 되었으나 은퇴하여 고향에 돌아가 제자를 양성하였다. '주자전서'라는 책을 읽고 난 후 성리학에 깊이 빠졌다. 이황은 주자의 주장에 따라 우주를 이(理), 기(氣) 이렇게 이원으로써 설명하였다. 다시 말하면 이와기는 서로 다르면서 동시에 상호 의존관계에 있다는 말이다. 이는 기를 움직이는 기본 법칙을 의미하며, 기는 형태를 갖춘 존재로서 이의 법칙에 따라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여 이기이원론을 발전시켰다. 학문이 대성하자 '동방의 주자'라고 칭하였다. 인품과 학식이 뛰어나 조정에서 자주 불렀으나 벼슬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임진왜란 이후 이황의 학설은 일본에 소개되어 일본 학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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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 (1536-1584) : 강릉에서 태어난 이이는 어머니 신사임당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랐다. 어렸을적부터 영리한 그는 13세때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다. 16세때 어머니를 여의자 세상의 허무함을 느껴 한때 불교를 연구하였으나 다시 성리학에 발을 들여놓는다. 명성이 자자한 이황을 직접 찾아가 학문을 논하기도 하였다. 이이는 이황의 학설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이 (理)와기 (氣)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고 또 먼저와 나중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이와 기는 세상이 생기면서부터 동시에 존재하여 영원히 떨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주기론을 주장하여 아는 것보다 실천을 더 중요시 하였다. 당파싸움이 심해지자 성격이 활달하고 호탕한 그는 동인과 서인의 충돌을 막으려고 애를 썼다.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여 임진왜란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예지력도 갖고 있었으나 당파싸움으로 인하여 그의 주장은 백지가 되었고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광해군 (1575 -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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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책봉 문제 :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 박씨는 몸이 약하여 자식을 낳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궁들은 아들을 많이 낳아 14명이나 되었다. 선조는 후궁에게서 난 아들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지 않아 의인왕후가 아들을 낳기를 기다렸으나 선조의 나이 40이 넘어서도록 태기가 없었다. 이처럼 세자 문제가 붉어지자 대신들은 세자책봉 문제를 서둘렀다. 이때 동인과 서인의 의견대립으로 선조가 사랑하던 신성군은 희생되고 광해군이 세자에 오르게된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하였지만 명나라에서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끝난 1600년 의인왕후가 죽자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딸 김씨가 선조의 아들 영창대군을 낳았다. 선조는 왕후가 낳은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 하려고 하였으나 선조가 병석에 눕자 어린 영창대군 보다는 광해군을 왕위에 오르라는 교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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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의 즉위 : 광해군은 조선 15대 임금이다. 힘겹게 왕위에 오른 그는 나라를 잘 다스려야 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지만 그 역시 당파싸움의 소용돌이 휘말리고 말았다. 광해군은 임금이 되었지만 여전히 명나라의 고명을 얻지 못한 상태였다. 광해군은 자기를 인정해주지 않는 명나라를 섬기고 싶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한 소북파를 싫어했다. 이로인하여 광해군은 자신의 강력한 왕권을 위해서는 반대세력을 몰아내야 했다. '계축옥사'로 인하여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키는 등 소북파를 제거하였다. 이렇게 당파싸움에 휘말려 있는 동안 나라의 부정부패는 심해졌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궁궐을 다시 짓고자 영건도감을 설치하여 토목사업을 맡아보도록 하였다. 이처럼 건축사업이 활발하자 부족한 재정을 메워 나가기 위해서는 돈을 받고 벼슬을 파는 일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져 사회는 병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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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대륙의 판도 : 1618년 만주 대륙에서 일어난 누르하치가 나라를 세우고 후금이라 칭하였다. 후금은 세력을 크게 넓히려고 침략을 일삼았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을 통하여 전쟁의 잔인함과 피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한창 일어나는 누르하치와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신축성 있는 외교정책을 펴 나갔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고 후금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는 어려웠지만 외교정책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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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변화 : 당파싸움이 쉬지 않고 일어나니 백성들은 살고 죽는일에 대해 허무함을 느꼈다. 그래서 유행한 것이 풍수지리설이었다. 사람들은 부지런히 공부하여 출세하는 것보다, 명당 자리에 조상의 묘를 쓰고 좋은 터에 집을 지음으로써 가만히 있어도 복이 굴러 들어온다는 망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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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의 폐위 :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한 서인들은 세력이 많이 약해졌다. 하지만 끝까지 제거되지 않은 김자점과 이귀 등이 1623년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대북파는 몰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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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 : 지은이가 허균인 홍길동전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로서 그 문학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홍길동전은 조선 시대의 불평등한 사회적 모순을 지적하는 사회 풍자 소설이기도 하다. 이는 지은이 허균의 삶과 주인공 홍길동의 모습이 비슷하다. 중국의 유명한 소설인 '수호전', '서유기', '삼국지연의'등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한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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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 : 1546년 김포의 무인집안에서 태어난 허준은 29세에 의과에 급제하여 내의원 의관으로 출발하였다. 의학에 밝은 그는 왕자의 병을 낫게 하는 등 의술이 좋아 칭송이 자자하였다. 허준은 내의원에 있으면서 의학 연구를 하였다. 선조의 어명을 받아 내의원에 편찬국을 두고 여러 의관들과 함께 '동의보감'을 편집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한나라 시대에 이미 체계화되어 있느 한의학을 중심으로 동방 의학을 모두 모으고 그와 함께 우리 민족 의학을 바로 세우자는 뜻을 가지고 편집에 임하였다. 광해군 3년 1611년 완성되었다. 한국 의학의 우수성을 널리 알린 귀중한 책이다.
인조 (1595 -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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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 : '계축옥사'로 인하여 영창대군이 죽고 인목대비가 궁에 갇혔다. 이로 인하여 서인들의 불만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때 서인인 이귀, 김자점, 이괄 등은 광해군을 몰아내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은 점점 늘어났고 힘은 커지게 되었다. 어려운 고비끝에 반정은 성공에 이르고 광해군은 폐위되었다. 그리고 능양군이 즉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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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의 즉위 : 1623년 경운궁에서 능양군이 즉위하니 16대 임금 인조이다. 인조는 왕위에 오르자 반정을 성공시킨 서인에게 상을 내리고 인목대비의 유폐를 반대하다 여주에 귀양을 간 이원익을 불러 영의정 자리에 앉히고, 공신들에게 벼슬을 내렸다. 인조는 왕위에 올라 할 일이 많았다. 먼저 파탄지경에 이른 경제를 살리고, 굶주림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구제해야 했다. 그러러면 검소와 절약을 생활화해야 했다. 성품이 겸손하고 문장에도 뛰어나며 글씨도 잘 쓰는 인조는 사치와 오락을 멀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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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의 업적 : 1623년 경기도에만 실시해 오던 대동법을 강원도까지 확대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일도 쉽게 하였다. 1626년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그 부근을 중심으로 여러개의 진을 지키기 위한 수어청을 설치하였다. 또한 북방과 해안 지방의 경비도 강화하였으며 군역을 세금으로 대신하는 제도도 마련하였다. 두번의 호란으로 인하여 폐허가 된 나라를 바로 세우려고 여러일을 하였다. 화폐의 필요성을 느껴 상평통보라는 화폐를 만들었으며, 청나라 사람들과의 민간 무역을 장려하기 위하여 북관의 회령 및 경원, 압록강변의 중강에 시장을 열어 주었다. 1634년에는 충청도, 전라도 등 삼남에 양전을 실시하여 농사를 지을수 있는 땅을 정확하게 측정하여 세금 수입을 늘리는 한편 농민들에게 부담을 주는 전세법을 폐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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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호란 : 임진왜란의 상처가 아물지도 않았는데 조정의 대신들은 당파 싸움으로 날가는 줄도 몰랐고 국방 정책도 제대로 세워져 있지 않았다. 후금이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정묘호란을 일으켰다. 이로인하여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을 가게 되었고 우리에게 불리한 세가지 요구사항을 허락하고 결국 후금과 형제의 나라가 되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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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 1636년 나라 이름을 후금에서 청으로 바꾼 누르하치는 조선과의 관계를 형제에서 군신관계로 바꾸자는 제의를 해왔다. 조선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청은 군대를 이끌고 조선에 쳐들어왔다. 이를 병자호란이라고 하는데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갔다가 45일만에 삼전도에서 항복하였다. 이로써 청과 조선은 군신의 관계를 맺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볼모로 잡혀갔다. 삼전도에서 굴욕을 당한 인조는 청나라를 더욱 싫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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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의 가족들 : 인조는 인렬왕후 한씨와의 사이에서 4남을 두었다. 그중 소현세자는 일찍 세자로 책봉되어 인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소현세자는 병자호란이 끝나고 청나라에 동생 봉림대군과 함께 볼모로 잡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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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 : 인조의 첫째 아들로서 이미 왕위를 계승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병자호란이 끝나자 동생 봉림대군과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동생 봉림대군은 청나라는 우리에게 치욕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몹시 미워하였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봉림대군의 사상과는 전혀 반대였다. 청나라에 함께 머물러 있으면서도 발달된 청나라의 문물에 귀를 기울였으며 여러 새로운 학문을 배웠다. 청나라와 명나라의 전쟁시 소현세자를 전쟁에 이끌고 나가려고 하였으나 봉림대군이 대신 출전해 소현세자는 조선으로 돌아왔으나 몇개월만에 죽고 말았다.
효종 (1619 -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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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청사상을 가진 세자 : 소현세자와는 반대로 봉림대군은 청나라에 대한 시각이 완전히 달랐다. 봉림대군의 머리속에는 오로지 반청사상만이 가득차 있었다. 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봉림대군을 다시 왕세자로 맞이했다. 전쟁에 봉림대군은 청나라가 명나라를 어떻게 망하게 만드는지 청나라의 잔인함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인조는 자신과 같은 사상을 가진 봉림대군을 반갑게 세자로 맞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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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의 즉위 : 1649년 인조가 세상을 뜨자 봉림대군이 즉위하였으니 조선 17대 임금 효종이다. 효종은 즉위식을 치르는 동안 입을 굳게 다물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청나라 심양에 있을때 받은 수모를 잊지 말자"는 것이었다. 효종은 왕위에 오르자 즉시 인사를 단행하였다. 우선 파당을 지어 싸우는 두사람, 영의정 김자점과 호조판서 원두표를 파직시켜 귀양을 보내고, 유학의 거목이요 대학자인 송시열을 등용시키는 등 절개가 굳고 새로운 인물을 천거하였다. 효종은 반청사상이 강했으므로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를 빌미로 청나라가 군사를 일으켰으나 외교로 무마하였다. 이로인하여 효종은 북벌을 결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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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의 업적 : 효종은 역법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조선의 역법이 서양에 비해 뒤떨어지는 점을 알고 태음력을 구법에 태양력의 원리를 결합하여 24절기의 시각과 1일간의 시각을 계산하여 제작을 하였다. 또 백성들의 부담을 들어주기 위하여 호서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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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론 : 1652년 효종은 북벌을 실시하기 위하여 이완을 어영청 대장으로 임명하고 군영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임금의 호위를 맡을 군사를 모두 기병으로 바꾸었다. 또 서울의 방비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성곽을 손질하고, 잘 훈련된 병사를 지방으로 분산시켰다. 북벌 계획은 10년 이었다. 세월이 흐르자 지방의 군사가 수십만 명에 이르렀다. 각 도의 절도사는 이 병사들을 두 달씩 한양으로 보내 군사 훈련을 받도록 하였다. 1653년 제주도에 하멜이 표류하자 그를 훈련도감에 감금하여 조총, 화포 등의 신무기를 개발하도록 하였다. 온 나라와 국민들이 화합하여 청나라를 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벌론에 차질이 생겼다. 이는 백성들의 살림이 워낙 가난하데다 흉년까지 곁들어 나라의 경제가 어려웠고 조정의 대신들은 당파싸움까지 드세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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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의 가족들 : 효종의 부인은 2명 이었는데 인선왕후 장씨와의 사이에 1남 6녀를 두었다. 1659년 전국에 가뭄이 휩쓸고 있을무렵 원대한 북벌론의 계획을 남겨둔채 효종은 세상을 떠난다.
현종 (1641 - 1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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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의 즉위 : 현종은 세자로 있을 때 효종의 북벌계획을 누구보다도 잘알았다. 그래서 청나라를 싫어하고 명나라를 숭상하였다. 어린시절에 어린시절에 어른들로부터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란 세자는 조정을 향한 힘찬 걸음을 내딛었다. 1659년 20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니 조선 18대 임금 현종이다. 즉위식이 끝나자 현종은 바로 국사를 처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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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파싸움 : 상복을 몇년 입어야 옮은지 그른지로 대신들은 그들의 의견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이런 예론의 문제를 가지고 대신들은 파를 갈라서 그들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현종이 왕위에 있는 동안 외침이 없어서 비교적 나라가 안정되었다. 그래서 현종은 효종때부터 비밀리에 해 오던 북벌계획을 중단하였다. 그대신 훈련별대를 창설하여 군사력을 키워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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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지변 : 현종이 왕위에 있는 동안 계속하여 천재지변이 들어 백성들의 생활이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백성들로 부터 칭송을 받는 임금이 되지는 못하였다. 날씨가 가물어 소나무까지 말라죽는 형편이었고, 종로통에는 거지가 줄을 잇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도 백성들은 세금을 내야만 하였다. 현종도 백성들의 힘든 형편을 돕고자 호남지방에도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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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책봉 : 현종은 10세된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딸과 혼인하여 1남 3녀를 두었다. 단 하나밖에 없는 아들 순은 어릴 때부터 영민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순은 주위의 사물을 예사로 보지 않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알때 까지 질문을 하거나 책을 읽었다. 순은 7세때 왕세자로 봉해져서 세자의 수업을 착실히 받으며 자라났다.
숙종 (1661 -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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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의 즉위 : 세자 순이 창덕궁에서 즉위하니 조선 19대 임금 숙종이다. 13세가 되던해 효종의 비 인선왕후 장씨가 죽자 조정은 복상문제로 시끄러웠다. 이렇듯 아버지 현종과 비슷한 절차를 밟게 되었다. 바로 당파싸움에 빠져들게 된 셈이었다. 숙종은 아버지 현종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복상문제 때문에 혼란스러운 초창기를 보냈다. 숙종은 선조 초부터 시작한 당파싸움의 피해를 알고 있는 터라 당파 싸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노력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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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의 업적 : 1675년 숙종은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개성 북쪽의 대흥산성과 황룡산성을 다시 쌓았다. 그리고 외침이 있을 때 서울을 지키기 위하여 북한산성을 다시 고쳐 쌓았다. 이리하여 남쪽에는 남한산성, 북쪽에는 북한산성이 서울을 지키는 중요한 지점이 되었다. 또 금오위라는 군영을 하나 더 설치하여 5영을 만들었다. 또한 군제개편을 하며 양인들이 군역을 담당하는데 많은 폐단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양역이정청'을 설치하여 양인 1인당 포를 2필씩 내도록 하여 부담을 덜어 주었다. 또한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신식화폐가 주조 될 때까지 오래도록 통용하게 하였다. 또한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워 우리나라의 경계를 분명히 하였으며 울릉도에 침범한 왜구를 무찌르고 왜구로 하여금 울릉도에 출입을 금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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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 문제 : 당파싸움 등 큰 사건을 몇몇 치른 조정은 안정을 되찾아갔다. 하지만 숙종의 비 인경왕후 김씨가 20세의 나이로 죽고 인현왕후 민씨가 계비로 들어왔지만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그때 숙종은 소의 장옥정을 총애하고 있었다. 장옥정은 절세미인이었지만 성격이 포악하고 시기와 질투가 심한 여인이었다. 1688년 장옥정이 아들 균을 낳았다. 숙종은 너무 기뻐서 균을 세자로 봉하려고 하였다. 송시열을 비롯하여 반대가 심하자 송시열에게 사약을 내리고 장옥정을 희빈으로 올리고 균을 세자로 봉하였다. 2년후 희빈 장씨가 중전이 되자 인현왕후 민씨를 폐비시켰으나 다시 인현왕후 민씨를 복위시켜 중전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다. 그뒤 희빈 장씨는 민씨를 몰아내고 중전의 자리에 오르기 위하여 별별짓을 다하였다. 그 뒤 희빈 장씨는 인현왕후를 몰아내기 위하여 온갖 주술적인 행동을 했던것이 탈로났으며 숙종이 사실을 알게되었다. 그래서 희빈 장씨는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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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법의 시행 : 숙종은 이러한 치열한 당파싸움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평안도와 함경도 등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 대동법을 실시 하였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계속 추진해 온 토지 사업을 완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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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안정 : 숙종의 재위기간은 45년 10개월로 무척 길다. 이 기간에는 국내적으로는 당파싸움이 치열하여 정치적으로 혼란하기도 하였지만 외침이 없어서 사회는 안정되었다. 숙종은 수많은 당파싸움을 겪으면서 1720년 60세의 나이로 죽었으며 그의 능은 서오능이라고 불리우며 경기도 고양군에 위치해있다.
경종 (1688 -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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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세자 : 희빈 장씨의 몸에서 태어난 균은 태어난 지 두달만에 당파 싸움의 주인공이 되었다. 균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숙종에게 인현 왕후가 아들을 낳을지 모르니 좀더 기다리라는 서인들의 상소문이 줄을 이었다. 균은 세살때에 세자로 책봉되고 그의 어머니 장씨도 소의에서 희빈으로 벼슬이 올랐다. 2년 후 장씨는 중전이 되었다가 다시 희빈으로 밀려났다. 이렇듯 어머니 장씨 때문에 어렸을 적부터 많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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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의 즉위 : 1720년 세자 균이 왕위에 오르니 제 20대 임금 경종이다. 경종은 왕위에 오르면서 "과인은 당파 싸움을 근절시키며 백성들을 편하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노력하겠음을 온 천하에 선포하노라" 이렇듯 경종은 포부는 컸지만 몸이 너무도 약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연잉군을 세자로 책봉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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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한 정치 : 경종은 짧은 기간 왕위에 있으면서 피비린내 나는 사화만 4번 일으키고 많은 사람을 귀양보내거나 죽이고 자랑할 만한 치적은 하나도 남기지 못한채 임기를 마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영조 (1694 - 1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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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의 출생 : 숙종의 후궁인 최씨에게서 태어난 영조는 어릴 때 이름이 금이었다. 금의 어머니 무수리였다. 하지만 금을 낳자 숙종은 최씨에게 정2품 소의 벼슬을 내렸다. 금은 병약한 이복형 균과는 달리 튼튼하게 자랐다. 균과 금은 비록 이복형제지만 유난히 다정하게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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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즉위 : 경종이 37세로 세상을 떠나자 세자에 오른 금이 제 21대 임금으로 오르니 바로 정치, 문화의 전성기라고 불리우는 바로 영조이다. 영조는 당파싸움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한쪽당이 승리하면 반대 당은 역적으로 몰아 모조리 죽인다는 것도 또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영조는 내가 왕위에 오르면 기필코 당파 싸움을 없게 하리라는 생각을 가졌다. '탕탕평평'이란 말은 어느 한쪽도 치우치지 않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여 공평하게 정치를 행하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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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치적 : 영조는 당파 싸움에 휘말리지 않기 위하여 대신들의 말에 절대로 동요하지 않았다. 탕평정책으로 절제와 검소한 생활을 하도록 하였다. 세제를 개혁하기 위하여 균역청을 설치하고 균역법을 실시 하였다. 균역법은 양인 1인당 군포 2필씩 내는 것을 1필로 내도록 하여 어려운 농민들의 생활에 보탬을 주었다. 그리고 모자라는 수입은 魚, 鹽, 船稅를 징수하여 보충하였다. 영조는 또한 국방을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수어청에 조포를 제작하도록 명하고 군사들에게 조총 훈련을 시켜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영조는 또한 민심을 파악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민심이 임금을 떠나 있으면 아무리 좋은 정책을 펴도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태종때 설치했다가 없어진 신문고 제도를 부활하였다. 그리고 지방에는 영조가 신임하는 박문수를 암행어사로 임명하여 아무도 모르게 민심을 파악하였다. 농업의 발전을 위하여 각 도에 제방을 튼튼히 하여 홍수에 대비하도록 하였으며, 환곡제도의 폐단을 줄이려고 노력하였다. 서얼 출신들도 관리로 등용할 수 있도록 하여 사회의 불만 요소를 제거하였다. 영조는 성격이 엄격하고 작은 일에 동요를 일으키지 않는 성품을 가졌다. 그래서 일시적으로나마 당파 싸움을 잠재울 수 있었으며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밀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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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 영조는 정비에게서 후사를 보지 못하였다. 정빈 이씨가 낳은 효장세자는 일찍 죽고, 영빈 이씨가 낳은 아들이 장헌 세자이다. 영조의 나이가 마흔이 되서야 아들이 태어났기 때문에 정헌세자는 태어난지 2개월 만에 왕세자로 봉해졌다. 그리고 10세때 혜빈 홍씨를 세자빈으로 맞이하였다. 영조는 성격이 급하고 엄격했다. 그 성격 그대로 장헌세자를 대하니 세자는 영조 앞에만 서면 겁에 질려 아무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영조의 눈길이 미치지 않으면 일시에 풀어져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세자의 생활은 이상하였다. 그리하여 그 비행이 영조의 귀에까지 들어가자 영조는 세자를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명하였고 뒤주 속에서 장헌세자는 그렇게 죽어갔다. 당파싸움을 없애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노력한 영조였지만 결국 시파와 벽파의 당쟁에 휘말려 아들까지 죽이고 말았다. 나중에 영조는 자신의 잘못을 깊이 후회하고 아들에게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 혜빈 홍씨는 남편이 죽어가는 것을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홍씨는 한많은 60평생을 한중록 이라는 소설을 통하여 많은 이야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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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변천 : 조선의 학자들 중에서 이제껏 발달해온 성리학을 비판의 눈으로 보고 실학을 받아들인 사람을 실학자라고 한다. 실학자들의 학문적 관심은 먼저 농촌 문제에 쏠렸다. 농촌이 잘 살아야 사회가 편안하며 나라도 부강하였다. 그래서 실학자들은 농촌문제에서 토지, 조세, 교육, 군사 등의 문제점을 해결해 가고자 하였다. 실학은 영조와 학문 보호 정책으로 한때 융성하였으나 오랫동안 성리학을 숭상해 온 사회 분위기는 실학자들의 개혁을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정조 (1752 -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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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세자 : 사도세자와 혜빈 홍씨의 둘째 아들 왕세손은 어렷을 적부터 책을 좋아하였다. 할아버지 때문에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어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자신이 당파싸움에 의하여 희생될까봐 영조의 눈치를 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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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즉위 : 1776년 왕세손이 경희궁에서 즉위식을 갖고 임금에 오르니 22대 임금 정조이다. 왕세손의 시절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만 열중하였으나 즉위하면서 다른 행동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정조는 학문을 좋아하는 임금이어서 정치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자기를 왕위에 오르도록 도와준 홍국영을 승지로 명하고 임금의 좌우에서 명을 받들도록 하였다. 그리고 왕권을 위태롭게 하는 친척이나 대신들의 횡포와 음모를 미리 방지하기 위하여 규장각을 설치하였다. 규장각은 학식이 높은 신하들이 모여 경서와 사기를 논하며 정치가 잘 되었나 못되었나, 백성들의 고통은 무엇인가 등을 살피는 한편 학문의 진흥과 타락된 풍습을 본래의 순수함을 되찾도록 도와주는 기관이었다. 그러나 규장각은 임금 직속의 학술 및 정책을 연구하는 외 다른 목적도 있었다. 그 당시 진보적인 경향을 가진 학자들이 벽파나 시파 등 어느 당에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규장각에 모으려는 정치적 속셈이었다. 이리하여 박제가, 유득공, 정약용 등 실학자들이 당파 싸움에 하지 않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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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 : 정조는 왕세손으로 있을때부터 전 임금들이 지은 책이나 글씨, 그림 등을 한 곳에 모아 보관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생각을 해 왔다. 정조가 임금에 오르자 그는 규장각에 어제나 어서를 보관함은 물론 이름난 학자들을 모여들게 하여 왕권을 강화하려는 깊은 뜻을 가지고 있었다. 정조는 규장각 검서관을 모두 서얼 출신들로 뽑았다. 이덕무, 유제공, 박제가, 서이수 등을 등용하여 규장각 일을 모두 맡겼다. 검서관들이 규장각에서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글씨 쓰는 소리만 들릴 정도였다. 나중에 규장각 검서관 4명은 실학 보급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조선 후기 학문이나 예술을 크게 불러일으킨 중심 기관으로 많은 책을 편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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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가계 : 정조는 효의왕후 김씨와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의빈성씨와 문효세자가 있었으나 일찍 죽었다. 수빈 박씨와의 사이에 1남 1녀가 있었다. 정조는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나이가 들어갈수록 아버지 사도세자가 그리웠다. 정조 13년 사도 세자의 묘에 가본 정조는 아버지의 초라한 묘를 수원 화산으로 옮기며 자기도 죽거든 아버지 묘의 가까이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경기도 화성에 묻혀 있으며 묘의 이름은 건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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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1790 - 1834) 어지러운 세상 : 정조가 수빈 박씨와의 사이으 공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정조가 11세가 된 세자를 두고 세상을 떠나게 되자 세자가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이때는 청나라에서 들어온 천주교 신자가 늘어만 갔고 사람들은 '사람은 평등하다', '양반이고 상놈이고 할것없이 모두 하느님의 자식 이다'라는 말에 감동하여 많은 사람이 천주교를 믿고 있었다. 정조는 자신이 죽은 뒤 당파싸움 이 일어나면 어린 세자가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지 걱정이 태산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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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의 즉위 : 11세로 세자 공이 왕위에 오르니 23대 임금 순조이다. 11세의 어린 나이 때문에 증조모 되는 정순 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당파싸움은 끊이질 않았다. 벽파가 먼저 득세하여 시파를 몰아내기 위하여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수렴청정 중인 정순왕후는 오가작통법을 써서 천주교인을 모조리 잡아들라고 지시하였고 그 효과는 매우컸다. 정순왕후는 반대파인 시파나 남인을 조정에서 완전히 몰아낼 수 있었다. 1802년 정순왕후는 정조의 승하로 미루어온 순조의 혼례를 치르도록 하였다. 김조순은 시파이면서도 벽파들 틈바구니 속에서 벼슬을 하고있는 안동김씨였다. 그는 사람됨이 뛰어나 그동안 벽파들을 미움을 받지 않고 지내왔다. 정순왕후는 김조순의 딸과 혼인하여 순원왕후로 책봉되었다. 이로써 안동김씨의 세도가 시작되었다. 순조의 나이 15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그 때부터 안동김씨들이 서서히 정권을 잡아가기 시작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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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도정치 : 김조순은 우선 반남 박씨이며 임금의 외사촌인 박종경을 선혜청 당상관으로 임명하여 실권을 쥐게하고 그 동안 실권을 잡고 있던 김관주를 박탈했다. 이제 조선은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에 의해 좌지우지 되었다. 이들은 돈을 받고 벼슬을 팔고 샀으며 재물을 모으기 위해 백성들을 못살게 굴었다. 한나라의 정치가 안동김씨 일가의 부귀영화에 이용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천주교 박해는 계속되어 나라가 더욱 어지러웠다. 순조는 안동김씨의 세력을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풍양 조씨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하였으나 이들또한 자신의 가문만 잘되기 위해 권력을 움켜 잡을뿐 나라를 위하여 하는 일은 별로 있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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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의 난 :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계속되자 백성들은 내일이 없는 어두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 여기에다 천주교 탄압으로 사회는 극도로 불안하고, 가까운 바다에 출몰하는 이양선이 백성들을 불안하게 하였다. 이에 홍경래는 불만을 품고 1811년 서북인들을 차별대우 한다는 명목으로 난을 일으켰지만 결국 5개월만에 패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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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도정치의 희생 : 순조는 34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자랑할만한 치적이 별로 없다. 순조는 오랫동안 홍수와 가뭄, 당파싸움 세도정치의 횡포 등 많은 일을 겪고 4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헌종 (1827 -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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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의 즉위 : 순조가 4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니 어린 왕세자를 임금으로 내세워야 했다. 이때 왕세자의 나이 8세. 올바른 세자 수업도 받지 못하고 국사를 돌보아야 했다. 왕세자가 경희궁에서 즉위하니 24대 임금 헌종이다. 헌종이 등극하였을 때 신정왕후는 28세였고 대왕대비 순원왕후는 46세였다. 안동김씨인 순원왕후는 그 동안 며느리 풍양조씨의 일가에게 빼앗겼던 정권을 다시 되찾기 시작 하였다. 순원왕후는 홍경래의 난을 거울삼아 서북인들도 관리로 등용시킨다는 교지를 내려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하였다. 헌종의 나이 11세가 되자 순원왕후는 왕비를 맞아들일 준비를 하였다. 그래서 안동김씨 김조근의 10세된 딸을 효원왕후로 책봉하고 그녀의 아버지를 영흥 부원군으로 봉하였다. 김조근 순원왕후의 8촌된 가까운 친척이었다. 1840년 헌종의 나이가 15세가 되자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자 임금의 외척되는 풍양조씨가 다시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1846년 임금의 외할아버지 조만영이 죽고 그의 아들도 죽고 사람이 남지 않게 되자 다시 안동김씨들이 기지개를 펴기 시작하였다. 풍양조씨와 안동김씨가 서로 어렇게 정권을 잡으려고 싸움을 일으키고, 대왕대비를 비롯한 왕후와 후궁들은 후사가 없어 고민속에 나날들을 보냈으며 헌종또한 세도정치의 희생이 되었다가 1849년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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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선 출현 : 외국의 배들이 조선으로 들어와 통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서양인을 극도로 싫어하는 조선인은 그들을 배척하였고 통상도 거절하였다.
철종 (1831 - 1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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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령 원범 : 헌종이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나자 안동김씨인 순원왕후는 풍양조씨인 조 대비 일파가 자기보다 왕위를 더 빨리 세울 것에 대비해 재빨리 왕위를 이을 왕족을 찾았다. 그러나 왕족을 찾기가 어려웠다. 임금이 후사가 없을 경우에는 동생이나 조카뻘 되는 사람이 왕위를 물려받는 것이 원칙이었다. 즉 헌종보다 항렬이 높은 사람이 임금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철종이 누구냐하면 사도세자가 죽고 정조가 왕이 되었다. 사도세자를 죽게 만든 세력은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 피해를 입을까 두려웠고 정조대신 다른 사람으로 왕을 추대하려고 한 사건으로 은언군과 은신군 은 귀양을 떠나게 되었고 은언군은 강화도로 옮겨졌다. 은언군에게는 상계군, 풍계군, 전계군 등 세 아들이 있었는데 이중 전계군만 살아남고 모두 양자로 가거나 죽었다. 전계군에게는 다시 아들이 세명 있었는데 원범은 둘째부인 염씨에게서 태어나 원경, 경응의 이복동생이 된다. 이원덕은 다시 반란에 관계되어 원범또한 역적으로 몰려 강화도로 쫓겨났다. 이를 보면 임금의 자리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왕족을 죽였으며 정권을 잡은 대신들은 그들의 안전을 위하여 가만히 있는 왕족에게 역적의 누명을 씌워 죽이는 경우가 많았다. 원범의 형인 원경이 역적으로 몰리자 원범은 의지할 곳이 없었다. 아무튼 원범은 강화도에서 죄인의 취급을 받으면서 못나게 자랐지만 왕족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강화도령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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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의 즉위 : 대왕대비는 강화도에 원범이 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대왕대비는 하교를 내려 원범을 새 임금으로 모시도록 하였고 아무것도 모르는 원범은 궁궐에 들어와 여기저기 절을하고 난후 큰 관을 머리에 썼다. 대왕대비는 원범을 덕완군에 봉하고 1850년 덕완군이 인정전에서 즉위하니 25대 임금 철종이다. 철종은 강화도에서 농사만 짓고 왕위에 오른지라 대왕대비인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순원왕후는 그의 외가인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이 왕비가 철인왕후 김씨이다. 다시 안동김씨가 세도를 잡았고 철종은 형식상의 임금이었고 국사는 김문근의 마음대로 돌아갔다. 이렇게 되니 벼슬을 사려는 사람들은 안동김씨의 집에 돈을 싸들고 밀려들었고 삼정이 문란하였다. 철종은 그저 술이나 먹고 궁녀들과 노는일에 열중하였다. 강화도에 있을 때는 쓰러져 가는 오두막에서 제대로 먹지 못하고 살았건만 했던 그의 몸은 휘청거리기 시작하였다. 결국 왕위에 오른지 14년만에 병이들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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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정의 문란 : 안동김씨의 세도 정치가 계속되자 나라의 법이 필요없어졌다. 환곡이란 봄에 농민들의 곡식이 다 떨어졌을 경우에 나라에서 빌려주었다가 가을 추수 후에 받아들이는 제도이다. 갚을때는 1할의 이자만 내면 되었으나 환곡에서 제일 많은 부정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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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 :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에 대한 반발은 진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제주도에서 함경도 함흥, 경기도 광주, 경상도 창원, 전라도 남해, 황해도 해주에서 민란은 온 벌집을 쑤신듯 일어났다. 후에 철종이 죽고 안동김씨의 세력이 몰락하자 민란은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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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 이처럼 조선 후기에 이르러 여러가지 문제가 일어나 나라가 혼란하자 사람들은 강력한 힘을 가진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지고 이것이 바로 종교이다. 당시에는 뚜렷한 종교가 없었다. 이때 최제우라는 사람이 백성을 구해야 겠다는 마음으로 일어섰다. 그는 수도를 하며 조선왕조의 기운이 다하여 나라가 말세이 이르렀다는 것을 느끼고 세상에 나와 동학을 일으켰다. 최제우는 우리나라의 풍수사상과, 유, 불, 선 3교의 교리를 토대로 동학을 창시 하였다. '인내천', '천심즉인'의 사상을 기본으로 세도정치의 포악한 정치에 시달리고 있는 농민 대중에게 쉽게 다가섰다.
고종 (1852 -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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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위의 임금 : 안동김씨의 눈을 피하여 흥선군 이하응이라는 인물은 궁궐에 남몰래 드나들며 대왕대비를 만났다. 만약 철종이 후사 없이 죽게 되면 자신이 임금과 제일 가까운 친척이기 때문에 자신의 아들이 왕위를 물려 받을 수 있었다. 순원왕후도 죽고 여전히 안동김씨의 세도는 계속되었다. 1863년 철종이 후사없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대왕대비 신정왕후에게 흥선군의 아들 명복이를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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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즉위 : 1863년 신정왕후는 임금이 없으니 제일 가까운 친척 중에서 후사를 결정한다는 말을 하고 곧바로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에게 대통을 잇게 한다는 하교를 내렸다. 명복이 왕위에 오르니 26대 임금 고종이다. 이때 고종의 나이 12세 였으므로 흥선군이 대신 정치를 하였다. 대원군은 이제껏 세도를 누려왔던 안동김씨 세력을 사정해 가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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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의 정치 : 안동김씨의 세도 정치를 제거하기 위하여 고루 인재를 등용하여 중요한 자리에 앉혔다. 탐관오리를 없애며 서원을 47개만 남기고 폐지하는 등 중앙집권적 정치 기강을 세웠다. 이런 대원군의 정책은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켜 주었으며 서민의 부담도 덜어 주었다. 그러나 왕실의 권위를 세우려고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이로 인하여 나라의 재정이 흔들리게 되었다. 또한 천주교 박해령을 내려 수많은 천주교 신자를 죽여 대외적인 이미지를 좋지 않도록 만들었으며 쇄주정책으로 병인양요, 신미양요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게 하였다. 이렇듯 대원군의 정책이 자꾸 실패하자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여러가지 정치적인 이유로 정치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임오군란으로 인하여 대원군이 다시 집권하게 되었고 고종과 명성왕후 민씨는 대원군의 등장을 막기 위하여 청나라에 도움을 청하고 정권은 다시 고종과 명성왕후에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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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 고종과 청나라는 친했다. 여기에 두려움을 느낀 개화파들이 수구당 우두머리들을 죽이고 개화당 정부를 세웠다. 그러나 청나라의 힘으로 정변은 3일만에 끝났으나 이로 인하여 조선땅은 일본과 청나라가 서로 세력을 잡으려는 싸움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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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 갑신정변으로 청과 일본의 세력이 침투하자 반대하는 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바로 1894년에 일어난 동학혁명 이었다. 동학혁명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고종과 명성왕후는 청나라 군대를 불러 들였다. 조선을 넘보던 청나라가 급히 군대를 이끌고 조서으로 들어오자, 일본은 조선에 어려움이 처했을 때는 도와주어야 한다는 빌미로 군대를 동원하였다. 동학군과 조선 정부는 화의를 하고 싸움을 중단하였다. 그런데 일본은 서로 자기 나라로 되돌아가자는 청나라의 의견을 무시하고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의 정치를 공동으로 간섭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리고 이 의견에 청나라가 찬성하지 않으면 일본 단독으로 조선의 정치를 갑섭하여 개혁을 이루겠다고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청일전쟁이 터졌다. 일본의 승리로 인하여 청나라는 조선에서 물러나고 일본이 본격적으로 조선에 대한 정치를 간섭하기 시작 하였다. 일본은 대원군에게 정치를 대신하게 한 다음 고종과 민씨일파를 몰아냈다. 그리고 김홍집을 중심으로 한 친일파 내각을 출범시켰다. 일본의 내정간섭이 본격화되자 다시 동학군이 다른 나라 세력을 몰아내자는 표어를 내걸고 다시 혁명을 일으켰다. 그러나 제대로 훈련받지 않은 농민들은 일본의 총부리 앞에 실패하고 말았다. 일본은 대원군이 동학당을 선동하고 청나라 세력을 끌여들였다는 이유로 그를 몰아냈다. 박영효 등의 친일파들을 등용하고 고종으로 하여금 종묘에 나아가 홍범 14조에 서약하도록 하였다. 홍범 14조는 청나라의 세력을 몰아내고 대원군과 민비의 정치간섭을 없애자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것이 바로 갑오개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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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 : 일본의 내정간섭이 점점더 심해지자 고종과 명성왕후는 러시아의 힘을 빌러 일본 세력을 조선에서 몰아내려고 하였다. 이것을 안 일본은 명성왕후를 궁궐에 침입하여 죽여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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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관파천 : 일본은 음력을 사용하던 백성들에게 양력을 사용하도록 하였고 동시에 전국에 단발령을 내렸다. 단발령은 백성 사이에 커다란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내목을 자를지언정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며 전국의 백성은 각지에서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이유로 민란을 일으켰다. 을미사변 이후 위험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 세력과 비밀리에 접촉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숨겼다. 이를 아관파천 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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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 갑신정변때 미국으로 갔던 서재필이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부르짖으며 민중의 힘으로 독립국가를 수립하자고 부르짖었다. 그는 독립신문을 만들고 독립협회를 창립하였다. 이에 고종황제는 러시아 공사관에서 돌아와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라고 고친다음 왕을 황제라고 칭하니 조선이 자주 국가임을 나라의 안과 밖에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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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보호조약 : 한마디로 말하면 일본과 조선이 하나로 합쳐짐을 약속한 조약이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다시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은 러일전쟁의 승리와 함께 미국에 '가쓰라테프트조약'을 맺어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조선을 지배한다는 협약을 맺어놓은 상태였고 포츠머스 회담으로 한국에 있어서 일본의 우월권을 승인한다는 협약을 체결하였다. 이로 인하여 조선은 외교권을 박탈당하였고 사실상 조선이 일본의 지배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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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퇴위 : 고종은 이토록 두차례의 외국과의 격돌(병인양요, 신미양요)에서 부터 조선이 일본의 지배에 들어가기 전까지 43만에 강제로 임금의 자리를 내놓아야만 했다.
순종 (1874 -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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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의 즉위 : 고종이 강제로 물러난 다음 고종과 명성왕후 민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가 왕위에 오르니 27대 임금 순종이자 대한 제국의 제 2대 황제이다. 순종은 일본의 압력으로 왕위에 올랐고, 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겨 우리 나라가 독립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치적 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순종이 즉위한 7월 일본은 '한일신협약'을 체결 통감부를 두어 우리나라 정치 감독권을 가졌으며 각 부에 일본인 차관을 두어 차관정치를 하였다. 그리고 조선의 군대를 해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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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의 종말 : 이완용, 송병준, 이용구 등이 친일파 세력으로 구성된 일진회의 이름으로 조선 사람들은 일본과 합병하기를 원한다며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조약을 성립시켰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망하고 말았다. 전문 8개조로 된 이 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에 대한 일체의 통치권은 완전히, 동시에 영원히 일본에게 넘긴다. 한국의 황제 및 황족과 정부 요인들에게는 일본이 그에 맞는 대우를 해주며 봉급을 지급한다." 이로써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세운지 27대 임금 519년 만에 종말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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