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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의 '종'은 뭐고 선조의 '조'는 뭔가요?

淸潭 2007. 4. 23. 21:30
 

세종대왕의 '종'은 뭐고 선조의 '조'는 뭔가요?

 

종묘 창엽문

 

 

 

▲ 종묘 정전(국보 제227호). 우리나라 문화재 건축물로서 가장 긴 건물이며 품위와 장중함을 나타내고 있다.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2005 이정근

 

 

‘태정태세 문단세 예성연중 인명선….’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 때 우리들을 괴롭히던 문구입니다. 조선 역대 왕명(王名)을 외우면서 태조에서 조(祖)를 빼고 태종에서 종(宗)을 빼서 쉽게 외우기 위한 편법이었지요. 엄격히 말하면 단어도 아니고 문장도 아니고 암송하기 위한 약어나 부호라고나 할까요. 하여튼 구구단과 함께 달달달 외울 때까지 외우고 또 외워야 하는 명제였습니다.

하교시간 무렵에 아이들을 하나씩 불러내어 외운 아이는 집에 보내고 외우지 못한 아이는 외울 때까지 암송을 시키던 선생님의 얼굴이 아련히 떠오릅니다. 해는 서산에 기울고 도시락 하나 까먹은 배는 고픈데 외워지지는 않지, 땅거미는 짙어지며 어두워지지, 머리에서는 외웠는데 입에서는 안 나오지 눈물이 앞을 가릴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외운 분에게 “조(祖)와 종(宗)은 어떻게 다릅니까?”라고 물으면 난감하시죠?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 막상 질문으로 등장하니까 당혹스러우시죠? 이것이 우리 나라 역사교육의 현실입니다. ‘태정태세 문단세’는 달달 외면서 조(祖)와 종(宗)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 세종대왕 동상

 

ⓒ2005 이정근

 

“조(祖)는 쿠데타를 일으킨 분이고 종(宗)은 태평성대를 이룬 분이십니다”라고 조심스러우면서 당당하게 말씀하실 분이 계실는지 모르지만 그것이 정답은 아닙니다. 여기에서 힌트를 하나 드리고 다음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어짜피 이 기사는 이야기가 있는 문화기행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으니까요.

조일전쟁(임진왜란)을 겪은 왕을 우리는 선조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록은 선종실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조와 종을 왔다 갔다 한 왕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눈치 채실 분들은 채셨을 테니까 힌트를 잠시 접고 연관된 질문을 하나 더 하겠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세종(世宗)이나 선조(宣祖)는 왕의 이름입니까?” 역시 난감하시죠?

아닙니다. 세종이나 선조는 묘호(廟號)입니다. 임금에게는 대체적으로 세 가지의 호칭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호칭은 어렸을 때 부르는 초휘(初諱)나 호(號), 자(子)가 있었으며 재임 중 경사스러운 날이나 죽은 후에 올려지는 시호(諡號)가 있었습니다. 성군으로 추앙받고 있는 세종의 시호는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叡武仁聖明孝大王)이었습니다. 때문에 세종은 돌아가신 후에 붙여진 묘호입니다.

 

 

▲ 종묘 재실. 조선시대에는 춘하추동 그리고 섣달에 제례를 올렸으나 지금은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매년 5월 첫째 일요일 제례를 올리고 있다

 

ⓒ2005 이정근

 

이렇게 종과 조로 불리우는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神位)를 모신 곳이 종묘(宗廟)입니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는 도읍을 한양으로 정하고 자신이 집무할 경복궁보다 종묘를 먼저 완공하라고 명했습니다. 하여 정궁 왼쪽에 종묘를 짓고 오른쪽에 사직단(社稷壇)을 지어 경복궁을 중앙으로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완성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종묘에 봉안할 이성계의 4대 선조에 대한 존호(尊號)를 어떻게 정해야 할지 개국공신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이때 탁월한 식견으로 교통정리를 하고 나선 이가 있었습니다. 삼봉(三峰) 정도전이었습니다. 태조 원년(1392년) 11월 6일. 태조실록 황조실(皇朝室) 책호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功)이 있는 이는 조(祖)로하고 덕(德)이 있는 이는 종(宗)으로 한다.'

 

 

▲ 어숙실. 종묘에 도착한 임금과 세자가 목욕재계하고 기다리던 곳이다

 

ⓒ2005 이정근

 

정도전(鄭道傳). 그는 신생왕국 조선(朝鮮)의 설계자였습니다. 1342년, 경북 영주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친구이자 대유학자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밑에서 공부했습니다. 정몽주, 윤소종, 박의중, 이숭인 등이 당시 그와 함께 수학했던 동문들입니다. 정도전은 어려서부터 명석하여 주위의 주목을 받았고, 특히 유교 경전과 성리학에 능통했던 려말선초(麗末鮮初)의 학자였습니다.

그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은 성격 때문에 전라도 나주 땅 회진에 귀양 가는 등 여러 차례의 유배생활 끝에 이성계 장군을 만난 것이 그의 나이 마흔 하나였고, 이성계 마흔여덟 살 때였습니다. 삼각산(현 북한산) 아래 초막을 치고 삼봉(三峰)이라 호를 고쳐 지으며 절치부심 웅지를 펼칠 날만을 기다리던 그에게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이성계 역시 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었습니다. 그의 아들 이방원은 그래도 학문을 닦아 1382년 과거에 합격하여 고려조정에 관료를 지내다가 서장관으로 임명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지만, 장수 이성계는 칼(刀) 밖에 모르는 무인(武人)이었기에 정도전의 머리를 빌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 망묘루. 임금이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연못은 세종 25년에 조성된 것으로서 사각형의 못 가운데 둥근 섬이 있다. 섬에는 소나무를 심는 것이 통례이나 향나무가 심어져 있다

 

ⓒ2005 이정근

 

고려왕정을 뒤엎은 이성계를 바라보는 개성인들의 눈은 곱지 않았습니다. 한양천도를 최초로 구상한 것이 무학대사라 알려져 있지만, 이성계는 이렇게 따가운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왕국의 수도는 계룡산이어야 한다는 무학대사의 의견에 따라 10개월여 토목공사가 벌어지고 있을 때, 새로운 국가 조선의 도성은 한양이어야 한다고 도참설에 능한 하륜의 입을 빌어 주장한 것이 정도전이었습니다.

주자학적 위치에서 불교배척론을 체계화한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을 찬진하여 법치국가의 틀을 마련하는 한편 계룡산 아래에서 벌어지던 천도를 위한 토목공사를 중단케 하고 한양에 새 도읍지를 설계하였습니다.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자는 무학대사의 주장을 뿌리치고 북악을 진산으로 하고 낙산을 좌청룡 인왕산을 우백호로 하자는 정도전의 의견은 곧 정책이 되었습니다.

삼각산(북한산)과 목멱산(남산)을 잇는 성곽을 쌓고 동서남북에 대문을 두고 그 중앙에 대궐을 짓고 좌우에 종묘와 사직단을 두어야 한다는 구상이 정도전의 머리에서 나왔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대궐의 이름과 각 전각의 명칭, 동서남북 대문의 이름과 종묘 정문의 이름을 정도전이 지었습니다. 깊은 학문으로 무장하고 공민왕에게 강론을 펼쳤던 정도전 아니고는 해낼 수 없는 추진력이었습니다.

 

 

▲ 경복궁 근정문. 뒤에 보이는것이 근정전이다

 

ⓒ2005 이정근

 

조선왕국 정궁인 경복궁(景福宮) 이름만 보더라도 범상한 이름이 아닙니다. 경복(景福)이란 명칭을 시경(詩經) 주아(周雅) 편에서 따왔다고 밝힌 정도전은 이성계에게 이렇게 보고합니다.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가 불러서 군자의 만년을 빌고 빛나는 복을 빕니다'라는 시를 외우며 새 궁궐의 이름을 경복궁이라 짓기를 청하오니 전하와 자손께서 만년 태평의 업을 누리시옵고 사방의 신민으로 하여금 길이 보고 느끼게 하옵소서.”

만면에 흡족함을 감추지 못하는 이성계가 경복궁 정전인 근정전(勤政殿)에 대한 연유를 설명하라 하자 정도전은 거침없이 설파합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경계하면 걱정이 없고 법도를 잃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못하면 폐하게 됨은 필연의 이치입니다. 임금이 부지런하면 만백성이 편안하다고 문왕(文王)이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어진 이를 구하는데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근정문(勤政門)은 무슨 연유인고? 이성계가 물으니,

“아침에는 정사(政事)를 돌보고 낮에는 어진 이를 찾아보고 저녁에는 법령을 닦고 밤에는 몸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임금의 부지런한 바 입니다. 또한 어진 이를 구하는데 게을러서는 안 되고 어진 이를 쓰는데 부지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정도전의 답변은 거침이 없었다. 한 마디로 왕이 되었다고 황음무도(荒淫無道)에 빠지지 말고 백성을 위하여 열심히 일 하라는 주청인 셈이다. 정도전은 나주 회진현에서 유배생활 할 때 이 나라의 백성들이 관료들에게 착취당하고 핍박받는 것을 적나라하게 목격했다.

이때 정도전은 위정자가 바른 정치를 펼쳐야 백성들이 편안하다는 것을 통감했고 자신이 정치일선에 나서면 군주는 왕도를 걷고 재상은 백성들에게 봉사하는 정치를 펼쳐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 광화문

 

ⓒ2005 이정근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한 번 살펴볼까요? 근정전과 근정문을 일직선상으로 하는 남쪽에 대문을 세우고 정도전은 광화문(光化門)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이것이 전통이 되어 후대에 궁궐을 지을 때 대궐의 정문은 모두 화(化)자를 돌림자로 썼습니다. 창덕궁의 돈화문(敦化門)과 창경궁의 홍화문(弘化門)이 그것이며 경희궁의 흥화문(興化門)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런데 덕수궁은 웬일일까요? 인화문(仁化門)이라는 정문이 있었는데 대한문(大漢門)이 버젓이 정문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임진왜란을 피해 의주로 몽진했던 선조가 한양에 돌아와 보니 궁궐은 모두 불타고 있을 곳이 마땅치 않아 월산대군의 사저였던 경운궁을 잠시 이용한 것이 계기가 되었지만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가 등극했던 곳이며 광해를 폐위한 인조가 등극했던 곳입니다.

 

 

▲ 대한문

 

ⓒ2005 이정근

 

또한 고종이 거처하던 경복궁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라는 끔찍한 변고를 당한 고종이 아관파천하여 몰락하는 왕국을 부여잡고 몸부림치다 승하했던 곳입니다. 덕수궁에서 경운궁으로 바로 잡아야 하지만 대한문도 1905년 이전의 이름 대안문(大安門 )으로 되돌려야 하고 인화문 현판도 박물관에 보관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인화문 자체를 당당하게 복원해야 할 것입니다.

도성축조와 대소 전각과 문루를 손수 작명하던 정도전이 이성계에게 보고하지 않은 비밀이 하나 있습니다. 종묘의 정문을 창엽문이라 지어놓고 그 내력을 이성계에게 보고하지 않은 것입니다. 새로운 나라를 창건한 군주 이성계는 세세만년 왕국이 이어가기를 바랐지만 창엽문에는 500년과 28세라는 비밀이 숨어있었기 때문입니다.

 

 

▲ 종묘 정문. 창엽문이라는 현판은 없다

 

ⓒ2005 이정근

 

창엽문(蒼葉門). 정도전이 지은 종묘 외대문 이름입니다. 한자는 표의 문자이므로 창(蒼)자를 해자(解字)하면 艸, 八, 君의 합자이므로 스물여덟 임금이라는 뜻이 됩니다. 또 엽(葉)자를 풀어보면 艸,世, 十, 八이 되므로 28세(世)라는 뜻이 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지금으로부터 600여전에 조선 왕국의 마지막을 예견했다는 뜻이 됩니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세자빈 이방자여사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위패가 종묘에 봉안된 것을 마지막으로 종묘 봉안이 끝났는데 종묘에 모셔진 위패가 28위(位)입니다. 또한 마지막 왕손 이구씨가 최근에 영면함으로서 조선 왕조는 28세(世)로 끝났습니다.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정도전 그는 600년 전에 이미 알았지만 이성계가 진노할까봐 보고하지 않았고 천기를 누설하지 않았을까요?

확신에 찬 정도전, 천기를 누설할 수 없었다

정도전의 확신을 뒷받침할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인왕을 주산으로 하자는 무학대사의 의견과 북악을 진산으로 하자는 정도전의 주장이 팽팽히 맞설 때 무학이 이렇게 험담을 했습니다. “정도전의 주장대로 북악을 진산으로 도읍을 정하면 200년도 못가서 왕조가 망할 것이다”라고 흑평을 하자, 이에 정도전은 “500년은 무난할 것입니다”라고 당당하게 맞섰습니다.

무학대사의 예언대로 정확히 199년만에 임진왜란을 맞이하여 조선왕국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렸으나 무사히 넘기고 517년의 수(壽)를 다했습니다. 이토록 예지력이 신통했던 정도전이 조선 개국 1등 공신 이방원을 멀리하고 신덕왕후의 편에 서서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데 앞장서다 이방원의 손에 참살된 것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요?

 

 

▲ 하마비. 태종 때부터 종묘에 이르러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야 했다. 현존하는 비는1663년(현종4년)에 세운 것이다

 

ⓒ2005 이정근

 

그것은 유교를 바탕으로 하는 재상정치(宰相政治)를 이상으로 구현하려는 정도전이 강력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추구하는 이방원에게 희생됐다고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또한 스승 이색을 귀양 보내고 친구 정몽주와 등을 돌리는 유아독존적 성격이 정적을 양산하고 죽음에 이르는 화를 자초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역사에는 가정이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정도전이 중도에서 꺾이지 않고 요샛말로 내각책임제에 해당하는 재상정치를 펼쳤다면 조선이라는 왕국과 백성들은 어떠했을까요? 부질없는 생각으로 보이지만, 1397년 그러니까 조선개국 6년째 되던 어느 날. 이성계에게 요동을 정벌하자고 주장하던 정도전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명나라는 천하의 한족(漢族)이라 자처하지만 지난날 중원을 변방민족에게 내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거란족의 요나라, 여진족의 금나라, 몽골족의 원나라가 바로 그들입니다. 이제 우리 나라도 중원으로 웅비할 때입니다. 광활한 요동벌판은 실은 우리의 영토입니다. 고구려는 드넓은 만주벌판에서 말 달리며 대륙을 호령했습니다. 또한 그 땅은 발해의 영토였습니다. 이제 우리의 영토를 조선이 되찾아야 합니다.”

 

2005-10-28 /이정근 기자

ⓒ 2005 OhmyNews

 

 

 

조선 국왕의 ‘조’와 ‘종’ 차이

 


 

 

 

올해 가장 커다란 사회적 관심사 중 하나는 4월에 치러질 국회의원 선거인 것 같다. 그 결과를 대통령의 통치에 대한 평가와 연결짓는 일도 흔히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요즈음은 중요한 정치적 문제가 있을 때마다, 대통령이 정치를 잘 했느냐, 못했느냐가 입에 오르내린다. 그만큼 통치자가 국민의 생활에 끼치는 영향이 크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과거의 국왕들도 죽은 뒤 자신의 통치에 대하여 평가를 받았다.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왕명은 그 결과였다.

 

‘태조’, ‘태종’, ‘세종’, ‘선조’와 같은 이름은 왕이 죽은 다음 그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것으로, 이를 ‘묘호’(廟號)라고 한다. 본래는 나라를 세운 왕의 이름에는 ‘조’, 그 뒤를 이은 왕의 이름에는 ‘종’을 붙였다.

 

그런데 나중에는 나라를 세운 것에 버금가는 업적을 쌓은 왕에게도 나라를 잘 지켜나갔다는 뜻으로 ‘조’를 붙였다. 세조는 왕실의 위기를 넘기고 위엄을 확립하였다는 의미에서, 선조와 인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국가 위기를 극복하였다고, 영조와 정조는 개혁정치가 국가를 다시 세우는 것에 버금간다고 해서 ‘조’를 붙인 것이다.

 

따라서 ‘조’를 붙이느냐, ‘종’을 붙이느냐는 왕이 죽고 난 다음의 평가에 따르게 된다. 이 때문에 ‘조’를 붙이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한 논란이 일어난 경우도 종종 있었다. ‘영조’, ‘정조’, ‘순조’가 그러한 예였다.

 

이렇게 보면, ‘조’가 붙은 왕이 ‘종’이 붙은 왕보다 그 업적을 높게 평가받은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왕의 업적이나 성품이 평가되지는 않는다. 오늘날 사람들이 가장 훌륭한 왕으로 생각하는 ‘세종’의 경우, ‘종’이 붙었지만, 조선사회에서도 가장 정치를 잘 했으며, 뛰어난 업적을 남긴 왕으로 평가를 받았다.

 

한편 ‘연산군’이나 ‘광해군’ 같이 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경우는 왕의 자손이라는 것만을 인정받아 ‘군(君)’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군’이란 왕자를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비운의 왕인 단종의 경우는 왕에서 쫓겨난 뒤 ‘노산군’으로 낮추어지고, 다시 서인이 되었다가, 200여년이 지난 숙종 때 단종으로 그 지위가 회복되었다.

 

왕의 이름에는 묘호 뒤에 시호도 덧붙여진다. 시호는 보통 왕이나 왕비, 재상, 학덕이 높은 선비들이 죽은 뒤 왕이 내려주는 이름을 가리킨다. 예컨대 이순신의 시호는 ‘충무공(忠武公)’으로, ‘무예로 충성을 다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조선 태종의 시호는 ‘공정(恭定)', 세종은 ‘장헌(莊憲)’이다. 그러므로 태종의 공식 명칭은 ‘태종공정대왕’, 세종은 ‘세종장헌대왕’이다. 태종은 국가 기강의 기틀을 잡았으며, 세종은 그 규범을 잘 지켰다고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한국교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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