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두 하늘이 열린 순연한 땅이었습니다. 아잔타도 그랬고, 엘로라도 그랬고, 카추라호도 그랬습니다. 내가 본 인도의 좋은 사원들은 그 순연한 땅의 기운을 믿어 신성한 제단을 쌓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시 평온하고 평온해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축복의 땅은 나만의 땅일 수가 없습니다. ‘도시 풍수’(판미동)에서 최창조 선생은 이런 얘기를 하네요. 모두가 좋아하는 매력적인 사람은 나만의 사람이 되기 어렵듯이 모두가 좋아하는 땅은 독점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최창조 선생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땅이 참 사람을 닮았구나, 아니, 사람이 참 땅을 닮은 거였구나,하고 느끼게 됩니다. 당신이 버린 그가 누군가에겐 보배구슬이듯 그 누군가에게만 보배가 되는 땅이 있고,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 없듯 누구에게나 의지처가 되는 땅은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완전한 명당도 없지만 모두가 명당일 수 있는 거였습니다. 어린이들의 명당은 숨어서 세상을 엿보는 나무집이나 요새 혹은 동굴과 같은 곳입니다. 생각해보니 어렸을 적 좋아했던 곳인데, 그런 곳에서 어린이들은 안온함을 느끼며 억압되고 있는 심리를 정화한다는 군요. 생을 포기하는 자들의 명당도 있네요. 자살하는 사람들이 찾아가는 틀에 박힌 장소가 있지요? “바닷가 절벽 위의 자살바위, 한강대교의 교각 어느 지점, 고무신 벗어놓고 들어가는 저수지의 어느 지점. 그런 곳에 가보면 삶의 허망함, 어지럼증, 고통으로부터의 어긋한 탈출 등을 유도하는 느낌이 온다”고 합니다.
사람과의 사이에서도 궁합이 있듯 땅과의 관계에서도 궁합이 있습니다. 긍정적인 사람은 “안온하면서도 기운이 서린 곳”을 좋아하고, 삶에 지친 사람은 차라리 망우리 공동묘지가 깊은 위로가 됩니다. 건물은 도시의 나무이므로 도시에는 거리의 상징성에 걸맞은 “되바라지지 않는 건물”로 숲을 이뤄야 한답니다.
이 땅 풍수의 원조 도선 국사가 찾아낸 땅들은 발복할 수 있는 좋은 땅이 아니라 모두 병든 땅이었다지요? 땅은 어머니이니, 병든 어머니를 보살피는 심정으로 터를 고르고 집을 지었다는 겁니다. 여기저기 도선국사가 잡았다는 터들을 보는데, 두려움 없이 세상을 살고 사랑으로 세상을 품었던 보살의 섬세하고도 따뜻한 손길이니까 천년의 세월을 건너온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터를 닦고 살 수 있다면 명당 아닌 곳이 있겠습니까?
- ▲이주향 수원대교수·철학
- “기차길 옆 오막살이 아기아기 잘도 잔다. 기차길 옆이라는 주택입지는 최악의 가까운 조건이다. 그러나 아기는 평안히 잠자고 있다. 아기의 명당이다.”
무릎을 쳤습니다. 생을 긍정하는 아기의 에너지가 명당 아닌 터를 명당으로 바꿔준 거지요. 그러고 보니까 지금 내 집이 명당일까, 아닐까 따져보는 일이 무의미한 일이겠구나, 싶습니다. 어차피 나와 인연이 된 집이라면 내가 여기 살아야 할 이유가 있겠지요? 그러니 내 집, 내 공간을 좋아해서, 쓸어주고, 닦아주고, 정리해줘야겠어요. 내 집, 내 공간을 좋아하지 않으면 집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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