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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불교성지> 5대 적멸보궁

淸潭 2006. 9. 17. 20:46

불교성지 적멸보궁

(사찰 명 위에서 클릭하면 사찰 별 자세한 설명을 보실 수 있습니다.)

 

  5대 적멸보궁    
오대산 상원사(上院寺) (033)332-6666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산1번지
설악산 봉정암(鳳停庵) (011)361-2828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사자산 법흥사(法興寺) (033)374-9177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422-1
태백산 정암사(淨岩寺) (033)591-2469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고한리 2
통도사 통도사(通度寺) (055)382-7182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583번지


 

적멸보궁이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법당을 말한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으므로 불단은 있지만 불상이나 후불탱화를 모시지 않은 것이 특징이고 다만 이 법당의 바깥이나 뒤쪽에는 사리탑을 봉안했거나 계단(戒壇)을 설치한 경우가 많다.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적멸보궁으로는 경남 양산의 통도사와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 상원사, 강원도 인제의 설악산 봉정암, 영월의 사자산 법흥사, 정선의 태백산 정암사는 5대 보궁으로 유명하다. 이 중 태백산 정암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친히 가져 온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정암사의 적멸보궁은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왜적의 노략질을 피해 통도사 적멸보궁의 진신사리를 나누어 봉안한 곳이라고 한다.

(1)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

고려 때 고승인 일연(一然) 스님은 “국내의 명산 중에서도 가장 좋은 곳이요, 불법이 길이 번창할 곳이다”라고 오대산을 말하고 있다.

오대산은 바위와 암벽이 별로 없는 육산(陸山)이라고 합니다. 육산이란 어머니의 품과 같은 흙이 있어서 동물은 물론이고 식물들이 잘 자라는 산이란 뜻이다. 경치로 말한다면 기암괴석이 즐비한 악산(嶽山)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생명을 키우는 데는 육산이라야 한다.

그러나 일연스님이 오대산을 ‘불법이 길이 번창할 곳’ 즉 종교적 성지로 지목한 것은 이런 자연적 조건 때문만은 아니다. 이 산이 바로 부처님의 정골(頂骨)사리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오대산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찾아오게 하는 것은 바로 오대산 주봉인 비로봉 아래 적멸보궁이 있기 때문이다.

오대산에 적멸보궁이 들어선 것은 자장율사에 의해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자장율사는 중국 오대산에 가서 문수보살의 진신(眞身)을 찬견하고자 정관 10년(636) 입당을 결행했다.

스님은 태화지(太和池)에 있는 문수석상 앞에서 7일 동안 간절한 기도를 했는데 어느날 꿈 속에 문수보살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너희 나라 동북방 명주 경계에 오대산이 있다. 그곳에는 일만 문수가 상주하니 그곳에서 나의 진신을 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자장이 우리 나라의 오대산을 진성(眞聖)이 거주하는 곳으로 믿게 된 것은 중국 오대산에서 만났던 문수 현신(現身)의 깨우침때문이었다. 자장은 귀국 후 신라의 대국통(大國統)을 지내며 왕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으나 문수 진신을 친견하는 꿈을 버릴 수 없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오대산으로 들어와 모옥을 짓고 문수의 진신을 친견하기 위한 기도를 했다.

그러나 자장은 문수의 진신을 좀처럼 친견할 수 없었다. 자장은 오대산의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기도를 계속했으며 원녕사(元寧寺), 갈래사(葛來寺) 등에서도 기도를 했다. 오대산에 월정사와 상원사, 사자산에 흥녕사(지금의 법흥사), 태백산의 갈래사(지금의 정암사) 등이 창건된 것은 이런 인연에 의해서다.

중대에 터를 잡고 그 위에 적멸보궁을 지은 것도 자장 율사의 간절한 구도심과 관계가 깊다.

오대산은 중대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각각의 오류성중(五類聖衆)이 상주한다는 믿음이 산명(山名)으로 나타난 것이다. 즉 동대에는 관세음보살, 서대에는 아미타불, 남대에는 지장보살, 북대는 석가모니불, 중대에는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것이다.

자장율사는 이러한 믿음으로 이산 저 봉우리에서 기도를 했다. 특히 중대는 자장이 친견하고자 했던 문수 보살이 상주하는 도량이었다. 따라서 자장 율사는 중국 오대산에서 모셔온 사리 가운데 가장 소중한 정골 사리를 이곳 적멸보궁에 모시고 기도를 했다. 중대를 일명 사자암이라고도 하는데 사자는 문수보살이 타고 다니는 짐승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중대는 보궁의 불사리를 공양하는 분수승(焚修僧)이 머무르는 곳인 탓에 규모가 그리 크지 않다. 향각은 깎아지른 절벽에 석축을 쌓아 올린 뒤 지었는데 조선 초기 태종대에 중건한 것이라고 한다. 향각 앞에는 기도객의 눈길을 끄는 이상한 단풍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 나무는 근세 고승으로 추앙받는 한암 선사가 서울 봉은사에 머물다가 1926년 오대산으로 거처를 옮길 때 짚고 온 단풍나무 지팡이이다. 스님이 지팡이를 향각 앞에 꽂아 두었는데 어느덧 지팡이에서 잎이 피고 뿌리가 내렸다고 한다. 스님은 단풍나무 지팡이가 뿌리를 내리듯 한번 오대산에 들어 온 뒤로는 다시 산문 밖을 나가지 않았다. "삼춘에 말 잘하는 앵무새보다는 천고에 말없는 학이 되겠다”던 스님의 다짐처럼 이 단풍나무는 해마다 푸르름을 더해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말없는 가르침이 되고 있다.

적멸보궁은 오대산의 주봉인 비로봉에서 흘러 내린 산맥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그 중앙에 우뚝 서 있다. 풍수지리를 보는 사람들은 이곳을 일러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이라 하여 천하의 명당으로 꼽는다.

부처님이 계신 적멸의 도량 적멸보궁, 그러나 적멸보궁은 ‘보배궁전’ 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조촐한 모습으로 중생을 맞는다. 보궁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다른 보궁과 마찬가지로 불상은 없고 부처님이 앉아 계심을 상징하는 붉은 색의 방석만이 수미단 위에 놓여 있다. 그러면 오대산 보궁 어디에 사리를 모셔 놓은 것일까.

하지만 불사리가 어느 곳에 모셔져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지 보궁 뒤에는 약 1m 높이의 판석에 석탑을 모각한 마애불탑이 소담하게 서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불탑도 하나의 상징일 뿐 과연 어느 곳이 사리가 모셔져 있는 곳인지 아는 사람은 없다. 어쩌면 이 산 전체가 하나의 불탑이요, 부처님의 진신사리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다. 일찍이 오대산에 오류성중의 진신이 상주한다는 믿음이 그것을 말해준다.

적멸보궁에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4분정근이 행해지고 있으며 매년 음력 4월 1일부터 5월 1일까지 정골사리봉찬회가 주관하는 대법회가 한달간 열린다. 이 때가 되면 영동 지장은 물론 전국의 불자들이 보궁 참배를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아 온다고 한다.

(2) 설악산 봉정암

봉정암 적멸보궁은 설악산 소청봉 서북쪽 중턱에 천하의 승경 봉정암 적멸보궁이 있다.

신라의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3.7일 기도를 마치고 귀국한 것은 선덕여왕 12년(643)의 일이다. 문수보살이 현신해 부처님의 진신 사리와 금란가사를 전해주며 해동에 불법을 크게 일으키라고 부촉했으니 더 이상 중국에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

신라로 돌아온 스님은 우선 사리를 봉안할 곳부터 찾았다. 양산 통도사에 보궁을 지어 사리를 봉안한 스님은 경주 황룡사 9층탑에도 사리를 봉안했다.

그러나 스님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보다 신령한 장소에 봉안하고 싶었다. 발길을 북으로 돌린 스님은 먼저 금강산을 찾아갔다. 기암괴석과 아름다운 풍광이 과연 사리를 모실 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막상 사리를 봉안하려 하니 어느 곳이 신령한 장소인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스님은 엎드려 기도를 했다. 기도를 시작한 지 이레 째 되는 날이었다. 갑자기 하늘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어디선가 오색찬란한 봉황새 한 마리가 스님의 기도처로 날아왔다.

스님은 기도의 감응으로 나타난 것으로 알고 봉황새를 따라 나섰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봉황새가 좀처럼 아무곳에도 내려 앉지 않았다. 자꾸만 봉우리를 넘고 계곡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가려고만 했다. 스님은 할 수 없이 계속 새를 따라 갔더니 새는 드디어 어떤 높은 봉우리 위를 선회하기 시작했다. 스님이 봉우리로 올라가자 봉황은 갑자기 어떤 바위 앞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스님은 봉황이 자취를 감춘 바위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바위는 언뜻 보아도 부처님의 모습 그대로였다. 봉황이 사라진 곳은 바로 부처님의 이마에 해당하는 부분이었다. 이 불두암을 중심으로 좌우에 일곱 개의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었다. 온 산천을 다 헤매어도 더 이상의 승지는 없을 것 같았다.

자장율사는 바로 이곳이 사리를 봉안 할 곳임을 알고 봉황이 인도한 뜻을 따르기로 했다. 스님은 부처님의 형상을 한 바위 밑에 불뇌사리를 봉안하고 5층탐을 세우고 암자를 지었다. 절 이름은 봉황이 부처님의 이마로 사라졌다 하여 ‘봉정암(鳳頂庵)’이라 붙였다. 신라 선덕여왕 13년(644)의 일이었다. 자장율사의 간절한 기도에 의해 절터를 잡은 봉정암은 이후 불자라면 살아 생전에 한 번은 꼭 참배해야 하는 신앙의 성지로 정착되었다.

신라 고승 원효대사는 불연이 깃든 성지를 순례하다가 문무왕 17년(667)경 잠시 이곳에 머물며 암자를 세로 지었다. 낙산사를 창건한 의상대사도 이곳을 참배했으며,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 지눌도 1188년이 이곳을 참배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수 많은 고승들이 앞을 다투어 이곳을 참배하는 까닭은 오직 한 가지 여기에 부처님의 불뇌사리를 봉안돼 있어서 였다.

봉정암은 지금까지 아홉 차례의 중건 중창이 있었다. 1923년 백담사에 머물던 만해 한용운 선사가 쓴 <백담사사적기>에 따르면 조선 중종 13년(1518) 환적(幻寂)스님이 세 번째 중건불사를 했고, 네번째는 명종 3년(1548)에 등운(騰雲) 선사가 절을 고쳐 지었다. 이어 인조 10년(1632)에는 설정(雪淨) 화상이 다섯번째 중창을 했다. 특히 설정화상의 중창 때는 부처님의 탱화를 새로 봉안하고 배탑대(拜塔台)를 만들었으며 누각까지 지었다고 한다. 여섯 번째 중건은 정조 4년(1780) 계심(戒心) 스님에 의해 이루어졌고 일곱번째는 고종 7년(1870) 인공(印空), 수산(睡山) 두 스님이 불사에 원력을 모았다. 그러나 6.25 전쟁때 설악산 전투로 봉정암의 모든 당우가 전소되어 10년 가까이 5층 사리탑만이 외롭게 서 있다가 1960년 법련(法蓮) 스님이 1천일 기도 끝에 간신히 법당과 요사를 마련했다.

현재의 봉정암의 모습을 갖춘 것은 1985년부터이다. 우리나라 사찰 중에 가장 해발이 높은 봉정암은 기도를 하면 반드시 감응이 있는 도량으로 유명하다. 자장율사의 창건설화도 그렇지만 이 밖에도 신이한 영험과 이적의 이야기가 수없이 많다.

그 이야기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불법을 믿지 않는 유학자들 몇 사람이 산천유람을 하는 길에 봉정암을 찾아왔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제법 아는 척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보시오, 대사. 저 돌덩이에 대고 목탁을 치고 절을 한다고 무슨 영험이 있겠소. 차라리 나한테 사정을 하면 내가 술이라도 한 사발 받아 주겠소” 불뇌사리탑에 기도를 하러 가던 스님은 기막힌 생각이 들었으나 저러다가 떠나면 될 테니 분심을 낼 이유가 없다면서 참았다.

그런데 일이 공교롭게 되느라고 갑자기 날씨가 나빠져서 유람객들이 봉정암을 떠날 형편이 못되었다. 그들은 절 뒷방을 하나 빌려 잠을 자면서 술과 고기로 도량을 어지럽혔다. 그날 저녁 스님이 꿈을 꾸었는데 수염이 하얀 노인이 나타나 ‘저들이 부처님의 도량에서 계속 방자하고 버릇없이 행동하면 개를 보내 혼내주겠다. 스님은 유람 온 유생들을 찾아가 꿈을 얘기하며 보통 도량이 아니니 조심하라고 일러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꿈이란 본시 허망한 것’이라며 다음날도 술타령을 그치지 않았다. 날씨는 이틀이 지나자 개었다. 유람객들은 달도 떠오르고 해서 바깥 바람을 쐬기가 좋았던지 밖으로 나와 달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벼락을 치듯 큰 짐승 울음소리가 나더니 기도하는 스님에게 불손한 행동을 하던 유생을 물고 가버렸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 방으로 숨어 들어가 벌벌 떨며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아침 유생들은 친구를 찾아 나섰다. 절 밑으로 한참을 내려가 보니 불뇌탑을 모독한 그 유람객의 시신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다시 암자로 올라와 닽 앞에 나아가 참회기도를 하고 꽁지가 빠지게 산을 내려갔다. 끔찍한 얘기지만 사람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곳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설화다.

(3) 사자산 법흥사

자장율사가 문수보살 진신을 친견하기 위해 강원도로 올라와 세 군데를 돌며 사리를 봉안하고 적멸보궁을 지었다는 성스러운 곳으로 지금도 이곳을 찾으면 그 옛날의 법향이 천수백년의 세월을 뛰어 넘어 도량 곳곳에 남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

법흥사가 처음 창건된 것은 신라 선덕여왕 때인 7세기 중엽이었다.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자장은 꿈에도 그리던 문수진신을 친견하기 위해 오대산, 태백산, 설악산과 사자산을 오가며 기도를 했다. 자장율사는 이 때 당에서 가지고 돌아온 사리의 일부를 기도하는 곳마다 봉안했는데 사자산도 그 중의 하나다.

자장율사가 처음 초가삼간을 지어 기도할 때의 사찰명은 흥녕사(興寧寺)였다. 절 이름에 흥할 흥자나 편안할 녕자가 들어가면 왕실과 나라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뜻을 담은 것이라고 한다. 흥녕사가 우리 나라 불교사에 뚜렷한 이름을 남기게 되는 것은 신라 말 헌강왕 때 징효절중(澄曉折中)에 의해 이곳에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이 들어서면서 부터다.

구산선문은 홍척(洪陟)국사가 남원 실상사(實相寺)에 개창한 실상산문, 도의(道義) 국사를 스승으로 하는 보조체징(普照體澄)이 장흥 보림사(寶林寺)에서 개창한 가지산문(迦智山門), 범일(梵日)국사가 강릉 굴산사에서 개창한 사굴산문, 혜철(惠哲)국사가 곡성 태안사에 개창한 동리산문, 무염(無染)국사가 보령 성주사에서 개창한 성주산문, 도윤(道允)국사를 스승으로 하는 징효가 영월 흥녕사에서 개창한 사자산문, 도헌(道憲) 국사가 문경 봉암사에서 개창한 희양산문, 현욱(玄昱) 국사가 창원 봉림사에서 개창한 봉림산문, 그리고 이엄(利嚴) 선사가 해주 광조사에서 개창한 수미산문을 일컽는다.

구산선문의 소재 분포를 보면 대체로 호남지방에 3개 산문, 영남지방에 3개산문, 영동지방에 2개 산문, 기호지방에 1개 산문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중 가지산문을 개창한 도의국사는 양양 진전사(陳田寺)에서 최초로 터를 닦았으나 제자인 보조체징에 의해 장흥 보림사(寶林寺)로 옮겼갔다.

이에 비해 사자산문은 처음에는 도윤국사에 의해 화순 쌍봉사(雙峰寺)에서 문을 열었으나 제자 징효가 영월 흥녕사로 옮겨와 가장 번성한 문파가 되었다. 흥녕사에 사자산문이 들어서자 헌강왕은 이 절을 중사성(中使省)에 예속시켜 보살핌을 받도록 했다. 당시 이 절이 얼마나 번창하였는지는 현재도 남아 있는 안내 석탑과 수호불좌상이 말해주고 있다. 왕실의 비호를 받은 이 절에 수 많은 수행자와 참배객들이 찾아오자 흥녕사는 이들에게 이정표를 알려주기 위해 안내탑을 세웠는데 하나는 충북 제천시 장락동에, 또 하나는 영월군 주천면 주천리에,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영월군 수주면 무릉리에 있다. 이 가운데 두번째 것인 현재의 흥녕사지에 있는 것은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 그러나 진선여왕 5년(891)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흥녕사는 전쟁 중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 뒤 고려 혜종 1년(944)에 다시 중건됐으나 얼마 뒤 다시 불에 타는 재앙을 겪은 뒤로부터는 사자산문도 급격히 몰락의 길을 걸었다.

사자산문이 문을 닫은 후부터는 불사리탑을 공양하는 작은 절로만 명백을 유지해 오다가 1902년 비구니 대원각(大圓覺) 스님이 중건을 하면서 법흥사로 사명을 바꾸었다. 그러나 비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12년에는 산불로 소실되었고, 17년 동안 중건불사를 해서 1930년에 회향을 하자 다음해(1931년)에는 산사태로 옛사지 일부와 석탑이 유실되었다. 할 수 없이 1933년 현재의 절 터로 옮겨 1939년에는 적멸보궁만을 중수한 채 간신히 명맥만을 유지해 왔다.

그러다가 최근에 이르러서야 다시 조금씩 중창불사를 거듭해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다. 법흥사에 현존하는 건물은 적멸보궁을 비롯하여 1968년에 세운 무설전, 1980년에 수리한 노전, 1987년애 건립한 산신각, 1985년에 세운 요사채 2동, 1992년에 세운 대형 객사 등이 있다.

(4) 태백산 정암사

정암사의 옛이름은 원래 갈래사(葛來寺)였다.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는 갈래사란 사명은 이 절의 창건설화와 깊은 관계가 있다.

<갈래사사적기>에 따르면 신라시대 대국통(大國統)을 지낸 자장 율사는 말년에 강릉에 있는 수다사(水多寺)란 절에 머물고 있었다. 하루는 꿈을 꾸었더니 이상하게 생긴 스님이 나타나 ‘내일 대송정에서 보자’고 했다. 스님이 대송정으로 갔더니 문수보살이 꿈에 나타나 ‘태백산 갈반지(葛蟠地)에서 만나자’고 한 후 사라졌다. 스님은 태백산으로 들어가 갈반지를 찾다가 큰 구렁이가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고 ‘이곳이 바로 그곳’ 이라며 석남원(石南院)을 지었다. 이곳이 바로 갈래사라는 것이다.

갈래사라는 사명에 얽힌 또 다른 설화가 있는데 이것도 자장율사와 관련이 되어 있다. 자장율사는 처음에는 사북에 있는 불소(佛沼) 위쪽에다 사리탑을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탑을 쌓으면 자꾸 무너졌다. 그래서 기도를 했더니 하룻밤 사이에 칡넝쿨 세 갈래가 눈 위로 뻗어나가 지금의 수마노탑과 적멸보궁, 그리고 요사채가 있는 곳에 멈추었다. 스님은 이곳이 바로 절과 탑을 세울 곳이라 하여 절을 짓고 이름을 갈래사라 하였다는 것이다.

갈래사는 창건과 함께 3개의 보탑이 세워졌다고 한다.
북쪽의 금봉대에는 금탑, 남쪽의 은대봉에는 은탑을 세우고 가운데에 수마노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 중 수마노탑은 사람이 쌓은 탑이라고 볼 수 있지만 금탑과 은탑은 도력으로 지은 것이라서 물욕이 많은 중생의 눈으로는 볼 수 없다고 전해진다.

전설에 따르면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할 당시 용왕은 장차 자장이 이곳에 불사리탑을 지을 것을 미리 알고 마노석을 베어 배에 실어 보냈다. 이 돌은 울진포에 당도해 신력(神力)으로 이곳에 옮겨져 인연을 기다리다가 탑을 지을 때 쓰여졌다고 한다.

창건에 얽힌 설화가 이처럼 풍부한 데 비해 이후의 역사는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다만 조선 숙종 39년(1713) 자인(慈忍), 일종(一宗), 천밀(天密) 등 세 분의 스님이 합심하여 수마노탑을 중수했으나 그 해 8월 벼락으로 파손되자 6년 뒤인 1719년 천밀 스님이 다시 중수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 뒤 정조 12년(1788)에는 취암(翠巖), 성우(性愚) 두 스님이 적멸보궁과 탑을 다시 중수했으며, 철종 9년(1858)에 해월(海月), 대규(大圭) 두 스님이 다시 원력을 발해 보궁과 탑을 중수했다. 근년에 들어서는 1919년 보룡(普龍)화상이 중창불사를 했고, 1972년 이후는 등각(登覺), 삼지(三智), 법보(法寶), 삼보(三寶) 스님 등이 당우를 고쳐 적멸도량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암사 적멸보궁에는 불상이 없다. 다만 부처님이 앉아 계신 것을 상징하는 붉은 색 방석이 수미단 위에 놓여 있을 뿐이다. 보궁에 불상을 모시지 않은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가 직접 남기고 간 사리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리가 모셔진 곳이 바로 빈 방석 너머 장방형으로 난 창문 밖에 서 있는 수마노탑에 봉안되어 있다. 이 수마노탑을 보궁 안에서 직접 바라 볼 수는 없다. 탑을 제대로 친견하기 위해서는 적멸보궁 뒤편 급경사를 따라 100m쯤 올라가야 한다.

수마노탑은 보물 제410호로 지정된 국가지정 문화재이다. 모전석재(模塼石材)를 이용한 7층 탑으로 높이는 9m 가량이다. 탑신을 구성하고 있는 석재는 수성암질의 석회암으로 판석의 길이는 30~40cm , 두께 5~7cm 정도다. 상륜부는 화강암으로 조성한 노반(露盤)위에 모전석재를 올리고 다시 그 위에 청동제 상륜을 설치한 탑이다.

정암사는 불자들의 이 같은 열렬한 신심을 돕기 위해 1년 365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4분 정근을 실시한다. 그러나 불자들의 지극한 신심은 이것도 모자라 하룻밤을 꼬박 새우는 철야정진이 이어진다. 부처님 그 분에 대한 불자들의 존경과 귀의가 얼마나 크고 간절한 지는 철야정진에 동참해본 사람이 아니면 모른다.

일주문에서 왼쪽으로 1977년에 지은 선불장(選佛場)이 있다. 이곳은 정암사 스님들과 참배객이 머무르는 숙소로 쓰인다. 선불장 옆에는 무량수각과 자장각, 삼성각이 얼굴을 맞대고 나란히 서 있다. 도량을 가로질러 흐르는 작은 개울 건너에는 아침저녁 예불 때 울리는 범종루가 서 있다. 적멸의 땅 정암사에서 저녁 예불을 올리기 전에 듣는 범종소리는 다른 절에서 듣는 종소리와는 사뭇 감회가 다르다.

정암사를 찾는 사람들에게 자장율사 영정을 모신 자장각은 정암사를 더욱 특별하게 느끼게 한다. 불보살을 친견하려는 사람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 지를 생각하게 하는 자장율사에 얽힌 설화들이 많기 때문이다.

선덕여왕 12년(643)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율사는 승단의 최고 지위인 대국통(大國統)이 되었으나 문수보살의 진신을 친견하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이 되었다. 그래서 만년에 강릉 수다사에 머물며 문수보살을 친견하기를 원하던 중 갈반지에서 만나자는 현몽을 받고 이곳으로 옮겨와 기도를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날 다 떨어진 누더기를 입은 늙은 거사가 칡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아 가지고 와서 ‘자장을 만나러 왔다’고 했다. 시자가 대국통을 지낸 스승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나물자 늙은 이는 그저 ‘스승에게 여쭙기만 하면 내가 누구인지 알 것’이라고 했다. 시자는 마지못해 이 사실을 자장에게 전한다. 그러나 자장도 미친 늙은이겠거니 하고 만나 주지 않는다. 그러자 노인은 ‘아상(我相)을 가진 이가 어찌 나를 만날 수 있으랴’하면서 삼태기에 들어있던 강아지를 내려 놓자 강아지는 사자로 변했다. 노인은 이 사자위에 삼태기를 올려 놓고 보좌를 만든 뒤 그 위에 앉아 찬란한 빛 속으로 사라졌다.

뒤 늦게 이를 안 자장은 후회하면서 사자가 사라진 쪽으로 쫓아 갔으나 끝내 문수보살을 만날 수가 없었다. 자장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절규하다가 끝내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천하의 존경을 받던 고승의 열반 치고는 비극적인 최후였다.

(5) 통도사 금강계단

보물 제144호로 지정된 금강계단 앞의 대웅전은 인조 23년(1645) 우운(友雲) 화상에 의해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 내부에는 사리를 모신 절인 이유로 불상이 없고 대신 거대하고 화려한 수미단(須彌壇)이 좌대를 떠 받들고 있다.

통도사는 지금도 많은 보물을 간직하고 있으며 통도사 역사의 대부분은 사리신앙을 지키고 가꿔온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라의 자장율사가 사리를 봉안하면서 시작된 통도사의 역사는 1300년을 관통하는 전통이요, 우리 나라 불교의 자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라을 지키기 위해서는 남다른 고통을 감수하기도 하였다.

통도사의 사리는 워낙 귀한 보물이라 사람들이 항상 사리함을 열어 친견하기를 원했었던 모양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옛날 조정의 높은 벼슬을 하는 사람이 와서 계단을 예배하고 사리를 친견하기 위해 함을 열어 보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긴 구렁이가 석함을 지키고 있었으며, 두 번째는 큰 두꺼비가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후부터는 감히 이 함을 열어보지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그 후 산장군 김이생(金利生)과 시랑 유석(庾碩)이 고종의 명을 받아 낙동강을 지휘할 때 왕이 하사한 기를 가지고 절에 와서 사리함에 예배를 하고, 사리를 친견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이생과 유석은 군사들을 시켜 사리함의 뚜껑을 열게 하였는데 이때 함이 조금 상했다고 한다. 그러자 유석이 수정함을 기부하여 사리를 다시 봉안하였다고 한다.

그 후에도 통도사의 사리는 수 많은 수난을 당하였다. 통도사의 사리가 이처럼 수난을 당한 것은 오로지 무지한 사람들의 세속적인 욕심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통도사의 사리가 금은보화보다 더 훌륭한 보물’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도 몰랐다고 한다. 다만 금은보다 더 좋은 물건이라니 그것이 탐이 났을 것이다.

출처 : 수덕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글쓴이 : bany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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