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성지 삼보(三寶)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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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보 사찰 | |||
불보사찰 | 통도사(通度寺) | (055)382-7182 |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583번지 |
법보사찰 | 해인사(海印寺) | (055)931-1001 |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번지 |
승보사찰 | 송광사(松廣寺) | (061)755-0107 |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12번지 |
우리 나라에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수많은 절이 있다. 그 중에서도 삼보사찰을 소중하게 여긴다.
삼보(三寶)는 불교에서 귀히 여기는 세 가지 보물이라는 뜻으로 부처님(佛)과 부처님이 설하신 법(法), 그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는 스님(僧)을 말하는 것이다.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으므로 불보(佛寶)사찰이며,
해인사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만대장경 경판을 봉안하고 있으므로 법보(法寶)사찰이며,
송광사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을 한 스님들이 열 여섯 분이나 나라에서 내리는 국사(國師)의 지위에 올랐으므로 승보(僧寶)사찰이라고 한다.
(1) 통도사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다 하여 불보사찰(佛寶寺刹)이라 불리는 통도사는 경남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에 자리하고 있다.
통도사는 흔히 ‘불지종찰(佛之宗刹)’ 부처님의 으뜸 가는 사찰이요, ‘국지대찰(國之大刹)’ 나라의 큰절이라는 현판이 일주문에 걸려 있다. 이는 불교에서 소중히 여기는 삼보 중에서도 석가모니 부처님이야말로 불교 교단의 창시자요, 모든 중생의 스승으로서 불교의 중심을 이루기 때문에 그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통도사는 가장 성스러운 곳으로 받들어 지는 곳이다.
통도사가 위치하고 있는 취서산(鷲棲山)은 영축산(靈축山)이라고도 한다. 영축산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법화경> 등 많은 설법을 하신 인도 마가다 왕국의 수도 왕사성의 동쪽에 있는 영축산과 모양이 비슷하다 하여 그렇게 불린다고 한다. 이 산은 독수리가 날개를 펴고 앉은 모습과 흡사하다 하여 취서산이란 이름도 갖고 있다.
통도사는 서기 643년 신라의 대표적인 고승인 자장율사(慈藏律師, 590~658)에 의해 창건되었다. 자장율사는 6세기에 신라에 도입된 불교가 국가의 정신 사상으로 자리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분이기도 한다. 신라 귀족인 진골 무림(茂林)의 아들로 태어난 스님은 부모가 세상을 떠난 후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출가를 하였으며, 왕의 거듭되는 부름에도 산중에서 수행에만 전념했다고 한다. 서기 636년 제자들과 함께 당나라로 건너간 스님은 중국의 3대 명산 중의 하나인 산서성 청량선과 장안 남쪽의 종남산 등에서 수행을 하셨다고 전해집니다. 당 태종으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는 등 스님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구름 같이 몰려 드는 등 중국에서 이름을 크게 떨치던 스님이 신라로 돌아온 것은 643년 선덕여왕의 청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 때 자장율사는 부처님이 친히 입으셨던 가사와 사리, 패엽경(貝葉經)을 모시고 귀국하여 가장 먼저 사리를 봉안한 곳이 바로 통도사였다. 통도사 창건된 것은 자장율사가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온 선덕여왕 12년(643)이었습니다. 선덕여왕은 자장스님이 부처님의 친착가사와 사리를 가지고 귀국하자 진흥왕 3년(549) 양나라에서 보내온 사리와 함께 이곳에 봉안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통도사의 시초라고 한다.
통도사의 절이름은 ‘만법을 통달하여 중생을 제도하라(通諸萬法度濟衆生)'의 머릿글자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통도사가 세워지기 까지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통도사의 창건설화를 살펴보면 자장스님이 처음 절을 세우려고 할 때 이곳은 큰 연못이 있었고 아홉 마리의 용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스님은 연못을 메워 절을 짓고자 하였는데 절을 짓자면 용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야만 했다. 스님은 신력(神力)으로 여덟 마리의 용들을 제도해 하늘로 승천시키고 나머지 한 마리는 이곳에 남아 사찰을 지키겠다고 하여 작은 연못을 만들어 그곳에 살도록 했다고 한다. 이곳이 지금의 구룡지로 대웅전과 삼성각 사이에 있는 작은 연못으로 구룡지(九龍池)라고 불린다. 구룡지를 메우고 이곳에 통도사가 창건되자 자장율사는 계단을 세우고 사방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계법(戒法)을 설했다고 한다. 이로부터 신라는 비로소 계율을 존중하고 불법을 바르게 믿는 나라가 될 수 있었다.
통도사를 ‘불지종가(佛之宗家)’라고 하고 자장스님을 율사(律師)라고 부르는 까닭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통도사는 꾸준히 사세를 확장하여 고려시대에는 사찰을 중심으로 네 군데에 사유지의 경계를 표시하는 국장생석표(國長生石標)를 세울 만큼 번창하였다.
그러나 통도사는 국가의 변란이 있을 때마다 수난을 겪어야 했다. 그것은 이곳이 바로 불교 신앙의 최고 보물인 사리를 봉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임진왜란 때에는 절이 거의 불타고 사리를 모신 금강계단 만이 살아 남았다고 한다. 하지만 통도사에 모신 사리를 향한 뜨거운 불심은 다시 절을 중창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보물 제144호로 지정된 금강계단 앞의 대웅전은 인조 23년(1645) 우운(友雲) 화상에 의해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 내부에는 사리를 모신 절인 이유로 불상이 없고 대신 거대하고 화려한 수미단(須彌壇)이 좌대를 떠 받들고 있다. 통도사는 지금도 많은 보물을 간직하고 있으며 통도사 역사의 대부분은 사리신앙을 지키고 가꿔온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라의 자장율사가 사리를 봉안하면서 시작된 통도사의 역사는 1300년을 관통하는 전통이요, 우리 나라 불교의 자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랑을 지키기 위해서는 남다른 고통을 감수하기도 하였다.
통도사의 사리는 워낙 귀한 보물이라 사람들이 항상 사리함을 열어 친견하기를 원했었던 모양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옛날 조정의 높은 벼슬을 하는 사람이 와서 계단을 예배하고 사리를 친견하기 위해 함을 열어 보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긴 구렁이가 석함을 지키고 있었으며, 두 번째는 큰 두꺼비가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후부터는 감히 이 함을 열어보지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그 후 산장군 김이생(金利生)과 시랑 유석(庾碩)이 고종의 명을 받아 낙동강을 지휘할 때 왕이 하사한 기를 가지고 절에 와서 사리함에 예배를 하고, 사리를 친견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이생과 유석은 군사들을 시켜 사리함의 뚜껑을 열게 하였는데 이때 함이 조금 상했다고 한다. 그러자 유석이 수정함을 기부하여 사리를 다시 봉안하였다고 한다. 그 후에도 통도사의 사리는 수 많은 수난을 당하였다. 통도사의 사리가 이처럼 수난을 당한 것은 오로지 무지한 사람들의 세속적인 욕심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통도사의 사리가 금은보화보다 더 훌륭한 보물’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도 몰랐다고 한다. 다만 금은보다 더 좋은 물건이라니 그것이 탐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사리는 믿음의 보물이다.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영이(靈異)를 나타냅니다.<통도사사적기>는 그 신령한 이적들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첫째는 사부대중 가운데 누구라도 사리에 예배하거나 공양하면 원내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이 이상한 향기를 맡고 감탄한다고 한다.
둘째로는 인연의 유무에 따라 사리가 나타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고 한다. 사리의 크기나 색깔은 믿음의 크기에 따라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고 하는 것이다.
셋째로는 믿음이 없는 자가 오면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내리거나, 혹은 비가 내리다가 갑자기 개이기도 한다고 한다. 검은 구름이 깔리고 우뢰를 내며 나무를 쓰러뜨리기도 한다고 한다.
넷째는 사람들이 참배를 하기 위해 동구로 들어오면 석종에서 오색광명이 비춰 산과 골짜기를 환하게 밝히기도 한다.
다섯째는 향과 초로 공양하고 부지런히 정진하면 계단 반상에 모래알 같은 변신(變身) 사리가 무수히 나타나기도 한다고 한다.
여섯째는 몸과 마음이 부정한 자가 겸손하지 않고 소요를 일으키면 먼저 원내에 비위를 상하게 하는 고약한 냄새가 나고 그는 곧 광란하거나 미치게 된다고 한다.
일곱째는 구룡지 반석 아래에 푸른 달팽이가 붙어 있는데 사람들이 사리탑을 참배할 때는 흩어졌다가 사람들이 가면 다시 나타난다고 한다.
여덟째는 금강계단 위로는 일체의 날짐승들이 날아다니지 않으며 그 위에 똥과 오줌을 누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믿음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기꺼이 재산을 공양해 사리탑을 세우고 적멸보궁을 장엄하게 하였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통도사의 적멸보궁과 사리탑을 친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믿음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2) 해인사
해인사는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대장경을 간직하고 있어 법보사찰이라고 한다.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고려대장경이 바로 해인사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대장경은 흔히 경판의 수에 따라 팔만대장경을 불리기도 한다. 해인사는 우리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유명한 곳이다. 국보 제32호인 고려대장경은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방대한 규모와 정교함으로 우리 민족의 최고 문화 유산으로 꼽히고 있다. 1995년 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됨으로써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일 뿐 아니라 세계 인류의 문화재가 된 것이다.
불교에서의 고려대장경은 부처님이 설하신 가르침을 간직하고 있어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고려대장경은 고려 시대 몽고군이 침입했을 때 부처님의 힘을 빌어 이를 물리치려는 국가와 백성들의 염원을 담아 만들어졌습니다. 고려 현종 때 거란군을 물리치기 위해 조성했던 첫 번째 대장경(5천 48권)은 팔공산 부인사에 보관하였는데 고려 고종 19년(1232) 몽고군의 침입 때 불타버렸습니다.
그러자 고려 조정에서는 대장경 판각을 위한 본부를 설치하고 1236년부터 1251년까지 16년간에 걸쳐 6천5백68권, 8만1천2백58매의 대장경판을 다시 만들었던 것이다. 고려대장경이 해인사에 자리를 잡은 것은 조선 태조 7년(1398)에 이르러서 였다고 한다. 판각 후 강화도 선원사에 보관되던 고려대장경은 태조의 명에 의해 서울을 거쳐 해인사로 옮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태조는 고려대장경이 한강을 거슬러 올라오자 직접 나아가 이를 극진히 맞이했다고 한다. 고려대장경은 경판은 세로 25센티미터, 가로 70센티미터의 크기로 한면에 23행, 1행에 14자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경판의 재질은 산벚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판면에는 옻칠을 하였으며 양쪽에 마구리를 대어 뒤틀림을 방지했다고 한다.
고려대장경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앞서 만들어진 다른 대장경들의 내용을 비교 검토하여 탈자, 오자 등을 바로잡았기 때문에 내용이 정확할 뿐만 아니라 수천만의 글자가 한결같이 고르고 정밀한 서체여서 예술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해인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교에서 해인사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알아야 한다. 해인사는 오랫동안 전해내려 오는 사찰의 전통과 문화의 향기를 간직하고 있다. 해인사는 1967년 처음으로 불교 종합 수도장인 총림(叢林)이 되었는데 강원, 선원, 율원 등을 두루 내실있게 갖추고 있다고 한다.
(3) 송광사
송광사는 신라 말 혜린(慧璘)스님에 의해 창건되었습니다.
창건 당시 송광사는 길상사(吉祥寺)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유명한 사찰은 아니었고 고려 중기에 지눌 스님이 대대적으로 중창하고 사찰명도 송광사로 바꾸어 대가람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닦았습니다.
송광사가 승보종찰인 까닭은 송광사에서 수행을 하시던 많은 고승들에 의해서입니다. 보조국사 지눌 스님을 배출한 16분의 국사를 배출한 도량이기 때문이다.
황해도 서흥에서 태어나신 스님은 어려서 출가한 후 25세에 승과(僧科)에 합격했다. 스님은 다른 스님들과 함께 타락한 고려 불교를 바로 잡기 위하여 정혜결사(定慧結社) 운동을 다짐하였다.
이는 당시 불교가 지나치게 정치와 밀착되어 순수성을 잃어 버렸고 내부적으로는 선과 교의 대립이 심해져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눌스님의 생애를 기록하고 있는 <불일보조국사비명(佛日普照國師碑銘)>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불법(佛法)을 빙자하여 나와 남을 가리면서 이기적인 일에 구차스럽고 풍진 속에 빠져 도(道)와 덕(德)은 닦지 않고 밥만 축을 내니 비록 출가했다고 한들 무슨 득이 있겠는가. …위로는 도를 넓히는 일에 어긋나고 아래로는 중생을 이롭게 하지 못하며 중간으로는 네 가지 은혜를 저버렸으니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지눌 스님은 당시 서울인 개경을 떠나 전남 창평의 청원사에 들어가 수행을 했고, 이어 경북 예천의 보문사에서 3년간 머물며 <대장경>을 공부했다. 지눌 스님은 <대장경> 특히 <화엄경>을 통해 참선과 교학의 일치와 조화라는 사상적 해결점을 찾아낸다.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스님은 <화엄경>을 머리에 이고 방안을 돌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33세 되던 해 경북 팔공산의 거조사로 옮긴 스님은 그곳에서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을 발표하고 본격적으로 정혜결사 운동을 시작한다. 지눌 스님의 주창은 곧 각계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어 불교계의 승려와 신도들은 물론 유교와 도교 계통의 사람들까지 동참하게 되었다. 정혜결사 뒤에 ‘수선사(修禪社)’로 이름을 바꾸고 활동을 계속했다.
지눌 스님은 지리산 상무주암을 거쳐 고려 명종 30년(1200년), 스님의 나이 42세 때 전남 송광산 길상사로 자리를 옮겼다. 이는 정혜결사를 본격적으로 펼칠 수 있는 터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지눌 스님은 9년에 걸친 중창 불사로 송광사의 면모를 새롭게 한 후 산과 사찰의 이름을 길상사에서 조계산 송광사로 고쳐 불렀다. 스님은 송광사에서 입적 할 때까지 10년 동안 정혜결사를 이끌었으며 스님의 문하에는 많은 제자들이 모여 스승의 뜻을 받들고 전하였다.
송광사는 이후 고려 말까지 15분의 국사를 배출하며 ‘승보사찰’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또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청허 휴정과 쌍벽을 이루는 부휴 선수(1543~1615) 스님과 그 제자들에 의해 고승의 산실로서의 명성을 이어 왔다.
송광사의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분은 근대의 고승인 효봉(曉峰) 스님과 구산(九山) 스님이다. 판사 스님으로 더 잘 알려진 효봉 스님은 1950년대 후반 송광사의 수행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는데 전념하신 분이다. 그리고 구산 스님은 1969년 송광사에 총림을 개설하여 불교 종합 수련도량으로 만들었으며, 불일국제선원을 열어 한국 불교를 세계에 알리는데 기여한 분이다.
승보종찰 송광사에서 가장 의미가 큰 곳은 국사전이다. 16국사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이 국사전은 대웅전 동편에 자리하고 있으며 세종 2년(1420)에 지어진 조선 초기의 목조 건물로 국보 제56호로 지정되어 있다. 국사전은 수차례에 걸친 화재에도 피해를 입지 않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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