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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기(遊 金剛山 記)

淸潭 2024. 7. 29. 15:01

금강산기(遊 金剛山 記)

남효온(南孝溫)

 

백두산이 여진(女眞)의 경계에서 기원되어 남으로 조선국 해변 수천 리에 뻗혔다. 그 산의 큰 것은 영안도(永安道)에 있어서는 오도산(五道山)이요, 강원도(江原道)에 있어서는 금강산(金剛山)이며, 경상도(慶尙道)에 있어서는 지리산(智異山)인데, 수석이 가장 빼어나고 또 특이한 것은 금강산이 제일이다. 산 이름은 여섯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개골(皆骨), 하나는 풍악(楓岳), 하나는 열반(涅槃)인데 방언(方言)이요, 하나는 지달(枳怛), 하나는 금강(金剛)인데 화엄경(華嚴經)에서 나왔고, 하나는 중향성(衆香城)으로 마하반야경(摩訶般若經)에서 나왔는데 신라 법흥왕(法興王) 이후의 칭호이다.

내가 삼가 살펴보니, 부처는 본시 서융(西戎)의 태자이다. 그 나라가 중국 함양(咸陽) 9천여 리가 동떨어져서, 유사(流沙)ㆍ흑수(黑水)의 먼 땅과 용퇴(龍堆)ㆍ총령(葱嶺)의 험산으로 한계하여 중국과 더불어 통하지 아니하였는데, 어찌 중국을 넘어서 동국(東國)에 이 산이 있는 줄을 알았겠는가. 특히 이 산이 있는 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조선국이 있는 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역사로써 상고하면 주 소왕(周昭王)의 세대는 우리나라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중엽에 해당되고, 부처는 실로 서방(西方)인 사위국(舍衛國)에서 낳았다. 그 불설(佛說)의 천함()ㆍ만축(萬軸) 속에 무한의 세계를 말했으나, 일찍이 한마디 말로조선국이라 칭한 것이 없은즉, 그가 이 나라 이 산을 알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정녕 부처가 설법할 때 그 일을 과장하여, 바다 가운데 금강ㆍ지단ㆍ중향 여러 산이 있는데, 억만의 담무갈(曇無渴)이 그 권속을 거느리고 있다 하여, 어리석은 속인(俗人)을 놀라게 하기를 장주(莊周)의 곤붕(鯤鵬) 천지(天地)의 설과 고사(姑射)ㆍ구자(具茨)의 논과 같이 하여, 까마득한 가운데 말을 붙여 두고 고대(高大)한 지경으로 세속을 놀라게 하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 이는 무식한 대중을 뒤흔들어 꾀어내자는 것에 불과하다. 어찌 참으로 금강ㆍ지단이 이처럼 괴이한 것이 있겠느냐. 부처가 말을 붙여 둔 것이 이와 같은데, 신라 중으로 부처를 배우던 자도 역시 망령되어 스스로 자기 나라를 높이 평가하여 풍악(楓岳)으로써 금강산을 만들고, 담무갈의 상()을 추작(追作)하여 망령된 말 실지화한 것임에랴. 동해를 지적한 것인 줄을 알 것이요. 동서남북이 바다 아닌 것이 없거늘, 어찌 유독 동해(東海)만이 해중이 되려고 하여 풍악을 금강으로 단정하려는 것인가.

더더구나, 우리나라를 중국에서 비록 해외(海外)라고 하지만, 서북은 뭍으로 요동(遼東)을 연()하고, 그 사이에 다만 압록강 하나가 가로막혔을 뿐이며, 압록강이 결코 바다가 아닌데 우리나라를 지적하여 해중이라 하는 것은 대단히 틀린 말이다. 그러나 금강의 칭호가 세대를 지난 지 오래라, 졸지에 변경하기 어려워서 나 역시금강산이라 지칭한다. 대개 산의 모양이 하늘의 남북에 우뚝 솟아 큰 땅덩어리로 누르고 있는데 큰 봉우리가 36봉이요, 작은 봉우리가 1 3천봉이다. 한 가지가 남으로 이백여 리를 뻗었는데, 산 모양이 높고 뾰족하여 대략 금강의 본상과 같은 것은 설악산(雪岳山)이요, 그 남쪽에는 곁따른 영()과 악()이 있다. 동쪽의 한 가지가 또 하나의 작은 악()을 이뤘으니 천보산(天寶山)인데, 하늘이 장차 눈이나 비가 오려면 산이 저절로 운다. 그러므로 이름을 읍산(泣山)이라 한다. 읍산이 또 양양(襄陽) 고을 후면을 돌아서 바닷가로 닫는데, 오봉(五峯)이 특별히 섰으니 낙산(洛山)이다. 금강의 한 가지는 또 북으로 백여 리를 뻗어 한 고개가 있으니 이름은 추지(湫池), 추지의 산이 또 통천(通川) 고을 후면에서 잔산(殘山)과 서로 만나서 실낱같이 끊어지지 않고 북으로 굴러서 바다 가운데로 들어간 것은 총석정(叢石亭)이다. 산의 동쪽은 통천(通川)ㆍ고성(高城)ㆍ간성군(杆城郡)이요, 서쪽은 금성현(金城縣) 회양부(淮陽府)이다. 산에 벌여 있는 것이 부()가 하나, ()이 셋, ()이 하나이다.

을사년 4월 보름날에 서울을 출발하여 보제원(普濟院)에서 유숙하였다. 정묘일에 90리를 가서 입암(笠巖)에서 유숙하였다. 무신일에 소요산(逍遙山)을 지나서 큰 여울을 건너 60리를 갔다. 연천(連川) 거인(居仁)의 집에서 유숙하였다. 기사일에 보개산(寶蓋山)을 지나고 또 철원(鐵原) 고동주(古東州) 들을 지나고 남으로 머리 돌려 백여 리를 갔다. 금화(金化)에서 유숙하였다. 경오일에 금화현(金化縣)을 지나서 60리를 갔다. 금성(金城) 향교(鄕校)에서 유숙하였다. 신미일에 창도역(昌道驛)을 지나서 보리진(菩提津)을 건너 78리를 갔다. 신안역(新安驛)에서 유숙하였다. 입신일에 비에 막혀 신안(新安) 후동(後洞) 백성 심달중(沈達中)의 집에서 유숙하였다. 계유일에 우독현(牛犢峴)을 건너서 화천현(花川縣)을 지나고 보리진(菩提津) 상류(上流)를 건너 추지동(湫池洞)으로 가는데, 시내를 따라 올라가니 일기가 매우 차고 산의 나무는 바람을 받아 한 쪽으로 기울어져 연한 잎이 겨우 나오기 시작하였으며, 아가위는 만발하여 진달래는 아직 싱싱하니, 일기가 서울보다 2, 3배나 차운 것을 깨달겠다. 추지(湫池)는 보리진에서 나오고, 보리진은 금강산 외두설()에 이르러 금성진(金城津)과 더불어 합하고 또 산기슭을 다 지나서 만포천(萬瀑川)과 더불어 합하고, 또 춘천(春川)에 이르러 병항진(甁項津)과 더불어 합해서 소양강(昭陽江)이 된다. 예를 들면 나무꾼이 우연히 그곳에 갔다가 두 번 다시 찾으니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산 아래 사람들이 서로 전하여 선경(仙境)이 되었다고 한다. 재마루에 추지원(湫池院)이 있고 추지원을 지나니 동쪽 가에 하늘빛이 매우 새파랗다. 운산(雲山)이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아니고 바로 바닷물이다.” 하므로, 나는 눈을 씻고 다시 살펴본 연후에야 하늘과 물을 구별하게 되었다. 그 물이 언덕과 동떨어져서 차츰 멀어질수록 높아져 아슬하게 하늘과 더불어 서로 맞닿았으니, 평소에 본 물[]은 모두 이이들 재롱에 불과하다. 재마루에 동으로 내려가니 일기가 점점 따뜻하여 철쭉이 바야흐로 피고, 나뭇잎이 그늘을 이루어 비로소 여름 맛이 난다. 왕왕나무를 깎아 질러 길을 보수하였으니, 이른바 잔도(棧道)라는 것이다. 때때로 말 위에서 산 살구를 따서 먹었다. 재마루에서 20리를 가니 중대원(中臺院)이 있다. 5리를 더 가서 냇가에서 요기하고 비로소 평지를 밟기 시작했다. 15리를 더 가서 통천군(通川郡)에 당도하였다. 이날에 산을 걸은 것이 모두 90리요, 평지를 걸은 것이 15리였다. 군수(郡守) 자달(子達)을 찾아보니 자달(子達)이 나를 동헌(東軒)의 별실에 있게 한다. 자달의 춘부장이 나를 매우 다정스레 대우하였다. 갑술일에 자달과 작별하고 15리를 가서 총석정(叢石亭)에 도착하였다. 나는 그 아래 이르러 보니 과연 돌산이 바다 굽은 턱으로 들어가 뱀 형상과 같이 칭칭 감았다. 산이 바다에 들어가 그치는 대목에 사선정(四仙亭)이 있다. 정자에 다다르기 전 3, 40보 거리에서 북으로 한 가닥 길을 넘으니, 네 돌이 바다 속에서 솟아나 자른 듯이 석주(石柱)를 묶어놓은 것 같다. 총석이란 이름을 얻은 것이 이 때문이다. 바다 서쪽 변안(邊岸)은 모두 총석의 형태로 되어 1마장쯤 뻗었다. 총석의 곁에 하나의 평석(平石)이 또한 물 가운데 있고, 작은 돌이 잡되게 쌓여 뭍으로 연했다. 나는 운산(雲山)과 더불어 맨발로 기슭을 내려가 평석 위에 앉고, 종놈을 시켜서 석결명(石決明)ㆍ소라(小螺)ㆍ홍합ㆍ미역 등의 종류를 따오게 하였다. 운산과 더불어 두 손을 모아 물을 받아 서로 희롱하며 고개를 쳐들어 멀리 바라보니, 하늘 끝과 땅 끝이 툭 틔어 유리 명경이 서로 비치는 듯하고, 위언(韋偃)과 곽희(郭熙)가 재주를 다하여 그림을 그려 놀던 것 같았다. 그래서 뒤숭숭하여 꿈속이 아닌가 의심하다가 한참만에야 밝혀졌다. 나는 사랑스러워서 떠나려고 하지 아니하니, 운산이, “해가 벌써 많이 갔다.” 한다. 나는 비로소 걸어 나와 사선정에 오르니, 정사에 손순효공(孫舜孫公)의 현판시(懸板詩)가 있고, 또 중인[僧人] 석자(釋子)의 이름과 호가 많이 씌어 있다. 나는 그 안에 앉아서 한 바다를 굽어보니 네 총석(叢石)이 더욱더 기이하며, 보이는 것은 아래 평석(平石)에서 보는 것과 같으나 안계(眼界)는 더욱 광활하다. 정자 남쪽에 기울어진 비석이 있는데, 글자가 없어져서 어느 때에 세운 것인지 알 수 없고, 정자 동쪽으로 약 4,50리쯤에 섬 하나가 바다 가운데 있어 완연히 서로 마주 대한 것 같으며, 정자 밑 바위 아래 두어 척 배가 오락가락하여 고기를 낚고, 남으로 어점(漁店)이 있어 어부들이 그곳에서 그물을 말린다. 물 가운데 온갖 잡새가 좌우로 날아들어 우짖는데, 어떤 것은 몸이 하얗고, 어떤 것은 몸이 검으며, 어떤 것은 부리가 길고, 어떤 것은 부리가 짧으며, 어떤 것은 부리가 붉고, 어떤 것은 부리가 파랗고, 어떤 것은 꼬리가 길고, 어떤 것은 꼬리가 짧으며, 어떤 것은 날개가 검고, 어떤 것은 날개가 푸르러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나는 사언시(四言詩) 네 수를 정자 기둥에 쓰고 조금 앉았노라니, 풍랑이 일었다. 그래서 내려와 바닷가 백사장을 따라 나가는데, 모래가 허해서 말발굽이 빠지고, 오직 물가의 추진 땅만이 굳어서 굽이 빠지지 아니한다. 그러나 파도가 칠 때는 간혹 언덕에 대질러 말안장에까지 뛰어오르므로, 말이 놀래서 언덕으로 나온다. 종놈을 시켜 말고삐를 끌고 가는데 풍경이 더욱 아름답고 왕왕 모래통이 산을 이루었다. 바다가 뒤집힐 적에 물결에 밀린 것이다. 또 바닷물이 백사장 가에서 혹은 모여서 배설되지 않는 것과, 혹은 모여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있고, 또 조그마한 흰 돌이 뒤섞여서 해안을 이룬 것도 있고, 또 뭇 돌이 쫑긋하게 바닷가에 서서 송곳 같은 것, 채찍 같은 것, 사람 같은 것, 짐승 같은 것, 머리는 크되 부리는 뾰족한 것이 있다. 그리고 사석(沙石)가에 해당화가 서로 잇달아 혹은 꽃이 피고, 혹은 망울이 맺고, 혹은 붉고, 혹은 희고, 혹은 단엽(單葉)으로 되고, 혹은 여러 잎으로 되었다. 나는 도중에서 요기하고 60리를 가서 동자원(童子院)을 지나 등도역(登道驛)에서 유숙하는데, 밤에 큰 바람이 불어서 지붕이 걷히고 나무가 뽑혔다. 을해일에 등도역을 출발하여 만안역(萬安驛)을 지나는데, 경유하는 곳마다 방죽이 많고, 바닷가의 보이는 것은 전날과 같았다. 옹천(瓮遷)에 당도하니, 쌓인 돌이 언덕을 이뤄 대략 총석(叢石)의 백분지 일이나 된다. 옹천을 다 지나니 조그만 돌벼랑이 있어 푸른 독을 깎아지르듯 하고 냇물이 서쪽에서 바다로 들어가는데, 바위 밑을 빙 둘러 거위알처럼 툭 틔었다. 종놈을 시켜 미역을 따서 국을 끓이게 하고, 석결명(石決明)을 따서 소금에 구워 점심을 먹었다. 장정(長井)의 해변(海邊)을 지나서 고성(高城)의 온정(溫井)에 당도하니, 온정은 바로 금강산의 북동(北洞)이다. 이날 60리를 걸었다.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두견새 소리를 들었다. 병자일에 바람이 불어 돈정에서 머물렀다. 정축일에 금강산에 들어가 5,6리를 걸어서 한 고개를 넘어 남으로 신계사(新戒寺)에 들어갔다. 고개의 동쪽에는 관음봉(觀音峯)이 있고, 북쪽에는 미륵봉(彌勒峯)이 있다. 서쪽에 한 봉우리가 있는데, 미륵봉에 비하면 더욱 빼어났으나 그 이름은 무엇이지 알 수 없다. 또 그 서쪽에 한 봉우리가 멀리 구름 밖에 있으니, 비로봉(毗盧峯)의 북쪽 가닥이다. 신계사는 곧 신라 구왕(九王)이 창설한 것인데, 중 지료(智了)가 고쳐 지으려고 재목을 모으고 있다. 절 앞에 지공백천동(指空百川洞)이 있고, 그 남쪽에 큰 봉우리가 있는데 바로 보문봉(普門峯)이다. 그 봉우리 앞에는 세존백천동(世尊百川洞)이 있다. 동쪽에는 향로봉(香爐峯)이 있고 향로봉 동쪽으로 큰 봉우리 일곱이 서로 연하여 큰 산 하나를 이루었는데, 관음봉ㆍ미륵봉에 비하면 몇 십배가 되는지 알 수 없다. 하나는 비로봉의 한 가닥이요, 하나는 원적봉(元寂峯)의 한 가닥이요, 또 하나 위가 평평한 것은 안문봉(雁門峯)의 한 가닥이요, 또 하나는 계조봉(繼祖峯)의 한 가닥이요, 또 하나는 상불사의(上不思議), 또 하나는 중불사의(中不思議), 또 하나는 하불사의(下不思議). 불사의라는 것은 암자 이름인데, 신라 중 율사(律師)가 지은 것이다. 일곱 봉의 아래에는 대명(大明)ㆍ대평(大平)ㆍ길상(吉祥)ㆍ두솔(兜率) 등의 암자가 있어 세존천(世尊川)의 곁에 있다. 나는 지공천(指空川)을 걸어 보문암(普門庵)을 넘어 산으로 56리 가니 솜대[綿竹]가 길을 이루었다. 암자 아래 도착하니 사주(社主) 조은(祖恩)은 바로 운산(雲山)의 친구라 나를 대접하는 것이 자못 정의가 있었다. 암자에 올라앉으니 동북은 바다가 바라뵈고 동남은 고성포(高城浦)가 보인다. 암자 앞에 나옹(懶翁) 근선사(勤禪師)의 자조탑(自照塔)이 있다. 자리가 정해지자 조은이 생생한 배[]와 잣을 대접하고 다음에 밥상을 드리는데, 목이(木耳 버섯)와 석이(石耳)도 있고 산나물이 없는 것이 없었다. 때마침 두견새가 낮에 우니 밑은 깊은 산중임을 알 수 있었다. 식사가 끝나자 조은과 작별하고 산으로 56리를 가서 발연(鉢淵)을 지나고, 거기서 또 반 마장을 더 가서 발연암(鉢淵庵)에 이르렀다. 중이 전하기를, “중 율사(律師)가 이 산에 들어오니 발연의 용왕(龍王)이 살 수 있는 땅을 지시하였다. 그래서 절을 짓고 이름을 발연암이라 하였다.” 한다. 암자 뒤에 봉우리 하나가 있는데 보문암에서 바라보던 일곱 봉우리의 맨 끝 봉이다. 암자 위로 조금 가면 폭포가 있어 수십 길을 드리우고, 좌우에는 모두 흰 돌이 있어 다듬은 옥과 같이 미끄러우니 앉을 수 있고 누울 수도 있다. 나는 행장을 풀어 놓고 두 손을 모아 물을 받아 입을 축인 다음 꿀물을 마시었다. 발연의 고사(故事)유희(遊戱)를 좋아하는 중들이 폭포위에서 나뭇가지를 꺾어 놓고 그 위에 앉아 물 뒤에 놓아 물결을 타고 순류로 내려간다. 그러면 교()한 자는 순하게 내려가고, ()한 자는 거꾸로 내려가는데, 거꾸로 내려가게 되면 머리와 눈이 물에 빠져서 한참 허우적거리다 도로 나오니, 곁의 사람들이 모두 깔깔 웃었다. 그러나 그 돌이 미끄럽고 윤택해서 비록 거꾸로 날아와도 몸이 상하지 아니하므로 사람들이 희롱하기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나는 운산으로 하여금 먼저 시험하게 하고 뒤를 이어 따라갔는데, 운산은 여덟 번을 해서 여덟 번을 다 맞히고, 나는 여덟 번 해서 여섯 번 밖에 못 맞혔다. 그리고 바위 위로 나오니 손뼉을 치고 모두 웃는다. 이에 책을 베고 돌 위에 누워서 잠깐 잠이 들었는데, 사주(社主) 축명(竺明)이 와서 나를 끌고 사()로 들어가 사의 뒤뜰에 있는 비석을 보게 하였다. 비석은 바로 율사(律師)의 뼈를 저장한 비로서, 고려 중 형잠(瑩岑)의 소작이요, 때는 승안(承安) 5년 기미 5월이었다. 비 곁에 마른 소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율사의 비가 섬으로부터 5백여 년에 세 번 마르고 세 번 번성했는데, 지금 다시 말랐다고 한다. 구경을 다하고 도로 암자로 내려와 밝을 적에 저녁밥을 먹고 또 폭포에 갔다가 밤이 깊고 찬기가 들어서야 비로소 들어왔다. 무인일에 발연을 떠나 폭포 하류를 건너 소인령(小人嶺)을 올라가는데, 재가 험악하고 준급하여 걸음걸음이 쳐다보고 올라가기만 하니, 소인이란 이름을 얻은 것이 빈 말이 아니라는 것을 믿겠다. 나는 열 걸음에 아홉 번을 쉬어서 바야흐로 첫 번 고개를 올라가니 유점산(楡岾山)이 왼편에 있고 불사의봉(不思議峯)이 바른편에 있으며, 동해(東海)가 뒤에 있고 환희점(歡喜帖)이 앞에 있다. 소인령(小人嶺)이 무릇 여덟 고개인데, 점점 나아갈수록 점점 높아져서 일곱 번째 고개에 당도하면 세 불사의봉과 더불어 나란하고, 그 나머지 여러 산은 다 눈 아래 있다. 통천(通川)ㆍ고성(高城)ㆍ간성(杆城) 등 세 고을이 산 밑에 벌여 있고 아득한 바다를 바라보면 하늘과 더불어 가이 없다. 여덟 번째 고개를 오르니 불사의봉이 이제는 아래 있다. 여기서 서쪽으로 돌아 산그늘을 따라가는데, 길은 너무도 험준하며 측백(側柏)은 길에 비껴 있고 동청(冬靑 사철나무)은 섞여서 나고, 쌓인 눈은 골짝에 가득하고, 송라(松蘿 소나무 겨우살이)는 나무를 칭칭 감았다. 나는 호표(虎豹)에 걸앉고 규룡(虯龍)에 오를 나뭇가지를 더위잡고 가게 되어, 몹시 피곤하기에 눈을 가져다 꿀을 타서 마시니 갈증이 문득 풀린다. 이윽고 다시 나서서 돌고 돌며 엉금엉금 기어서 환희점을 오르니, 소인령의 제 팔봉보가 또 한두 등()이 더 높다. ()의 동쪽은 토봉(土峯)이 하나요, 점의 서쪽은 석봉(石峯)이 셋이다. 환희점을 넘어 남으로 내려오니 철쭉이 덤불을 이루는데 날씨가 차서 망울만 맺고 꽃은 피지 않았다. 작은 시내 하나 있는 데를 당도하여, 손과 얼굴을 씻고 또 작은 고개 하나를 넘어 두솔암(兜率菴)에 당도하였는데 이름을 백전(柏田)이라고 한다. 발연에서 여기까지가 삼십여 리나 암자에 들어가 한참 동안 앉았다가 도로 나와 출발하여 1리쯤 가서 적멸암(寂滅庵)에 들어가니, 중 하나가 가사(袈裟)를 입고 입정(入定)하였다. 암자 뒤에 토산(土山) 하나가 있는데 적멸봉(寂滅峯)이요, 암자 앞 골짝 동쪽에 석산(石山)이 있는데 성불봉(成佛峯)이다. 암자를 지나서 또 돌아서 서북으로 향하여 곧장 한 골짝으로 내려가니 두 개천이 어울려 흐르고 수석이 밝고 상쾌하다. 바로 12폭포의 원류이다. 내를 건너서 올라가니 개심암(開心庵)이 있고, 그 암자에 들어가니 중이 납의(衲衣)를 입고 있을 따름이다. 또 개심전대(開心前臺)에 올라 여러 봉우리를 바라보니, 앞에는 적멸봉 하나가 있고 뒤에는 개심후봉(開心後峯)이 둘이 있고, 왼편으론 백석봉(白石峯) 하나가 있는데, 이 봉은 봉우리가 스물다섯이다. 그 아래는 운서굴(雲栖窟)이 있고 바른 편에는 동구(洞口)이다. 다시 암자로 돌아와 요기하고 서울에서 온 거사(居士) 송생(宋生)이란 자를 보니 그 말이 몹시 허황했다. 운산이 말하기를, “지금 해가 아직 많이 남았으니, 이 암자에서는 유숙할 필요가 없고 다시 떠나서 더 가는 것이 좋겠다.” 하므로, 나는 그 말을 따라 개심후점(開心後岾)을 넘으니, 이 재는 환희재에 비해 한두 등급이 더 높다. 이로부터는 돌과 나무가 모두 하얗다. 왼편으로 가니 높은 봉 둘이 마주 섰고, 바른편으로 가니 석봉(石峯) 하나가 송곳과 같이 뾰족한데 아래에는 계조굴(繼祖窟)이 있다. 남쪽 가에 두 봉이 있어 솔과 잣나무가 울창하다. 두 봉이 합친 곳에 오르니 개심후절에 비해 또 한두 등급이 더 높다. 그 등성이를 따라 남으로 내려가니, 측백나무가 길을 메우고 두견화가 만개하여 진한 향기가 코를 찌른다. ()은 바로 대장동(大藏洞)인데 수석이 맑고 상쾌하여, 지나온 곳은 이에 비교가 안 되고 동()은 또 그윽하고 깊다. 이 물 근원을 따라가면 34일 후에 바야흐로 비로봉(毗盧峯)에 당도한다고 한다. 우선 눈에 보이는 것을 기록하면 내의 북쪽에는 석봉이 다섯이요 남쪽에는 석봉이 둘인데, 그 중 하나는 흰 돌이 포개져 서책(書冊)을 쌓아 놓은 것 같다. 호승(胡僧) 지공(指空)이 이곳을 가리켜 말하기를, “이 안에 대장경이 있으므로 동()이 이로 인하여 대장동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행장을 풀고 오래도록 앉아 구경하며 석상에서 노숙할 계획을 하니, 운산이 말하기를, “안개가 사람에게 스며드니 곤란하다. 오늘은 날이 비록 저물었지만, 오히려 원적암까지는 갈 수 있다.” 하므로, 그 말에 의해 대장봉(大藏峯)을 따라 서쪽으로 가니, 돌로 된 봉 다섯이 바른편에 있고 흙으로 된 봉 아홉이 왼편에 있고, 골짝 물은 남쪽으로 쏟는다. 물줄기를 따라 내려가 바른편 산중 허리를 끼고 한 큰 재에 오르니, 이름은 안문점(雁門岾)인데 안문봉(雁門峯)의 남쪽 가닥이다. 재는 대장후점(大藏後岾)에 비해 또 한두 등급이 더 높다. 고개를 내려가 서쪽으로 접어들어 시내를 따라가니 왼편에는 산이 있는데, 모두 소나무, 잣나무가 늘어서서, 그 봉우리를 분별하지 못하겠고, 바른 편에는 큰 봉 다섯이 있는데, 모두 내산(內山)의 남쪽 가닥이다. 냇물 남쪽 토산(土山)의 서쪽에 솟은 봉 셋이 있어 그 머리가 보이는데, 그 중 하나는 관음봉(觀音峯)이다. 그 봉 아래 돌이 있어 부처 형상과 같은 고로 그런 이름을 얻은 것이다. 그 아래 원적천(元寂川)은 안문천(雁門川)과 더불어 서로 합쳐, 맑고 넓은 것이 대략 대장동 물과 더불어 비슷하다. 잠깐 동안 앉아 구경하고 물줄기를 거슬러 북으로 올라가니, 밟히는 것이 모두 시냇가 하얀 돌이요, 좌우로 산 수십여 봉우리가 흰 병풍을 두른 것 같았다. 이윽고 원적암에 당도하니 암자 뒤에 큰 봉이 있어, 지난 여러 봉에 비하면 몇 백배나 더 높은지 알 수 없으니 이른바 원적봉이요, 원적봉 남쪽에 봉이 있어 원적봉에 비하면 몹시 낮게 보이나, 여러 봉우리에 비하면 또한 차이가 있으니 이른바 원적향로봉(元寂香爐峯)이요, 암자 동남쪽을 바라보면 토봉(土峯) 하나가 높이는 원적봉과 같고 그 위는 오목하니, 이른바 안문봉이다. 중이 이르기를, “사자가 그 위에서 새끼를 기른다.”고 한다. 백전(柏田)에서 여기까지가 또 30리이다. 암자에 중 계능(戒能)이 있어 문자를 조금 이해한다. 기묘(己卯)일에 원적암을 출발하여 오던 길을 따라 내려가 안문수(雁門水)와 합류하는 시내 위에 손을 씻고 입을 축이고 물줄기를 따라 문수암(文殊庵)을 지나 묘길상암(妙吉祥庵)에 당도하니, 암자가 시냇가에 있어 수석이 매우 명쾌해 보였다. 여기서부터 철쭉이 피기 시작했다. 냇물 남쪽에 봉우리 넷이 있고, 냇물 북쪽에 깎아지른 듯한 석벽 하나가 있다. 나는 시냇가 반석 위에 앉아 양추를 하고 암자에 들어가 제명(題名)하였다. 암자에는 노승 도봉(道逢)이란 자가 있었는데 용문사(龍門寺)의 사승(邪僧) 처안(處安)과 회암사(檜岩寺) 사승 책변(策卞)이 모두 대우하여 스승으로 섬기니, 이 때문에 명망이 여러 절에 떨쳐 재물을 모은 것이 가장 많았다. 나를 보고 인사하는데 매우 거만하므로 나는 말도 하지 않고 나와 버렸다. 시내를 따라 서쪽으로 가니 절터가 있고, 절터 안에 돌부처가 석벽 사이에 새겨져 있다. 절터 아래 큰 돌이 있어 위가 편편한데, 냇가 곁에 있으므로 나는 그 위에 앉아 잠깐 쉬었다. 북쪽에는 봉 여덟이 있고 남쪽에는 관음봉 이하 다섯 봉이 있고, 북쪽에는 여덟 봉이 있고 그 뒤에 큰 봉 둘이 있어 그 머리가 보이는데, 그 중 하나는 원적봉으로 서쪽으로 향해 있고, 그 중 하나는 월출봉(月出峯)인데 남쪽으로 향해 있고, 그 아래는 불지암(佛知庵)과 거빈굴(去賓窟)이 있다. 나는 이 두 암자를 지나서 마하연(摩訶衍) 전대(前臺)에 이르니, 담무갈(曇無竭)의 석상(石像)이 있다. ()는 바로 이 산의 한 중심지인데 담무갈은 이 산의 주불(主佛)이다. 그러므로 승속간(僧俗間)에서 여기를 지나는 이는 손을 모아 절하고 가지 않는 이가 없다. 그런데 운산은 지팡이로 그 이마를 두들겼다. 늙은 중 나융(懶融)이 마중 나와서 나와 더불어 이야기하고 마하연의 사적을 보여 주었다. 이때에 우는 비둘기가 뜰 안에 가까이 다니니, 산 사람의 기심(機心)이 없음을 짐작할 수 있다. 뜰에 있는 풀은 그 형상이 부추와 같은데 그 꽃이 조금 붉다. 나옹은 말하기를, “옛날 지공(指空)이 이 산에 들어와 말하기를, ‘이 산은 흙이나 돌이 모두 부처형상으로 되었는데 유독 여기에만 없다.’ 하여, 부처를 세워 예배하였으니 바로 산정(山頂)의 석관음(石觀音)이다. 그 부처가 선 곳에 이 풀이 나서 지금 백여 년이 지났어도 시들지 아니하니, 산 사람이 지공초(指空草)라고 부른다. 지공은 남천축국(南天竺國) 술사(術士)로서 고려 말에 들어와 그 도술로서 불법을 널리 선포하였다.”고 한다. 나는 만경대(萬景臺)로 가는 것을 나옹에게 청하니, 나옹은 자못 싫어하며 비로봉의 정상은 올라갈 수가 없다고 한다. 나는 나옹과 작별하고 만회암(萬灰庵)에 당도하여 종놈을 시켜 밥을 지어 싸가지고 만경대에 오르기로 하니 만회암 중도 역시 싫어하며 말리면서 하는 말이, “길이 없으니 가서는 안 됩니다.” 한다. 그리고 운산 역시 가고 싶어 하지 않는데, 내가 강행하여 한 산마루를 넘어 한 골짜기를 내려가고 또 한 마루를 올라 나뭇가지를 더위잡고 내려가는데, 낙엽이 쌓여 무릎이 빠지고 썩은 나무가 겹쌓여 동쪽인지 서쪽인지를 분간할 수 없고 새 한 마리도 울지 아니하며, 다만 두어 길 폭포가 숲 밖에서 울릴 따름이다. 운산이 바윗돌을 타고 올라가니 폭포 위에 또 폭포가 있어 아래에 있는 것과 같으므로, 운산은 몸이 오싹하여 간신히 내려오며 하는 말이, “산길을 이미 잃어버렸으니 수목 밑만 억측하고 무인지경을 찾아가서는 안 된다. 돌아가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만회암으로 와서 요기를 하고 도로 마하연을 지나고 또 묘봉(妙逢) 사자(獅子) 두 암자를 지나서 사자 목에 이르니, 그 돌에 쇠줄이 밑으로 드리워져 사람이 더위잡고 올라가는 잡이로 삼았다. 민채(閔漬)의 유점기(楡岾記)에 이르기를, “호승 종단(宗旦)이 이 산에 들어와서 차지하고자 하니, 사자가 길목에 와서 막고 있으므로 종단이 들어가지 못했다.”고 했다. 운산은 산마루의 한 돌을 가리키며 저것이 사자의 형상이라 하는데, 나는 자세히 보니 자못 사자와 같지 아니하고 바로 투박한 하나의 둥근 돌이다. 냇물이 여기 와서는 더욱더 기이하고 맑아서 10여 리가 한결같이 하얀 돌이 끊어지지 않고, 곳곳마다 폭포가 있어 그 아래는 깊은 못이요, 못 아래도 역시 폭포가 있다. 그러므로 동명(洞名)을 만폭동(萬瀑洞)이라 하니, 폭포가 하나만이 아니라는 것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나는 서쪽 가를 따라 내려갔다. 사자항에서 서쪽 가로 내려가면 봉 넷이 있는데, 하나는 윤필봉(潤筆峯)이요, 하나는 비로봉(毗盧峯)의 향로봉(香爐峯)이요, 하나는 향로봉의 다음 봉이요, 하나는 금강대(金剛臺)이다. 동쪽에 봉 셋이 있는데 모두 이름이 없다. 이 세 봉을 다 지나면 보덕굴(普德窟)이 있고, 굴 앞의 냇가에 하얀 큰 반석이 있어 수백 명이 앉을 수 있으며, 아래위로 폭포가 있고 폭포 아래는 모두 못이 있다. 반석에 앉아서 암자를 쳐다보니 매우 아름다웠다. 중국 사신 정동(鄭同)이 와서 이 산을 구경할 때에, 한 두목이 있어 하느님께 맹서하기를, “이는 참으로 불경(佛境)이니 원컨대 여기서 죽어 조선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 부처의 세계를 보련다.” 하고 드디어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지금 저 위 못이 바로 그 못이다. 나는 바위 면에 이름을 쓰고 굴에 오르는데, 돌을 쌓아서 운제(雲梯)를 만들어 높이가 수백여 길이 된다. 그 계단을 다 지나면 암자가 벽 사이에 걸려 있는데, 구리 기둥 두 개가 약 두어 길 되는 것으로 고이고, 기둥 위에다 집 하나로 짓고 쇠줄 하나를 만들어, 한 끝은 기둥에 매고 한 끝은 돌에 매어 또 쇠줄 하나를 만들어, 그 집을 묶어서 두 끝을 돌에 매고 관음(觀音)의 소상을 그 위에 안치하였다. 또한 사()를 지어 중이 거처할 곳을 만들었다. 그리고 또, 그 곁에다 집 하나를 만들어 포주(庖廚)로 삼았다. 승사(僧舍)의 서쪽 관음굴(觀音窟)의 위에다 대() 하나를 두어 이름을 보덕대(普德臺)라 하였는데, 보덕(普德)이란 것은 관음 화신(化身)의 이름이다. 나는 먼저 승사(僧社)에 들어가니, 바로 친구 동봉(東峯) 청한자(淸寒子)의 벽기(壁記)가 있고, 허주(虛舟)의 그림이 있다. 이윽고 사()에서 굴로 내려오니 쇠줄이 둘이 있으므로 나는 더위잡고 내려오는데, 판자 소리가 삐걱삐걱하여 공포심이 들었다. 이른바 관음 앞에는 원장(願壯)이 자못 많았다. 나는 나와서 대상(臺上)을 둘러보고 도로 승사(僧舍)로 들어가 밥을 먹고 내려와, 다시 냇물 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흰 돌이 하도 윤택하여 맨발로 거닐어도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다. 이윽고 앞으로 나가 수건암(手巾岩)에 당도하니, 동봉(東峯)이 기()에 이르기를, “관음이 변해서 아름다운 계집이 되어 수건을 이 바위에서 씻다가 중 회정(懷靜)에게 쫓겨서 바위 밑에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바윗돌이 비스듬하여 혹은 깊은 못이 되고 혹은 폭포도 되었으며, 바위 가에 많은 사람이 앉을 수 있게 되어 볼수록 심신이 상쾌하므로, 나는 앉았다 누웠다 하며 물을 희롱하여, 그 기이(奇異)함을 구경하고 떠날 줄 몰랐는데, 운산이 떠나자고 재촉하여 표훈사(表訓寺)로 내려왔다. 서쪽으로는 금강대(金剛臺)로부터 이하에 열 한 봉을 거쳐왔고 동쪽으로는 보덕굴(普德窟)로부터 이하에 일곱 봉을 거쳐서 왔다. 이날에 산을 타고 간 것이 전부 30리였다. 주지승 지희(智熙)는 운산의 친구인데, 나를 대우하기를 매우 후히 하여 등불을 켜고 차와 밥을 준비하여 준다. 절에, 지원(至元) 4년 무신 2월에 세운 비가 있는데, 바로 원()나라 황제가 세운 것으로 봉명신(奉命臣) 양재(梁載)가 글을 짓고, 고려 우정승(右政丞) 권한공(權漢功)이 글씨를 썼다. 황제가 표훈사 중을 재()하여 만인의 결연(結緣)을 만든 것을 기록한 것이다. 비석의 뒷면에 태황(太皇) 태후(太后)가 은포(銀布) 얼마, 영종황제(英宗皇帝)가 얼마, 황후(皇后)가 얼마, 관자불화(觀者不花) 태자(太子) 및 두 낭자(娘子)가 얼마, 완택독심왕(完澤禿瀋王) 등이 얼마, 대소 신료(臣僚)가 얼마라는 것을 기재하였으니, 이는 곧 시주한 것을 적은 것이다. 이날 밤에 나를 위해 조그마한 침방을 치워주니 친함을 표시한 것이다.

경진일에 지희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였는데 산중의 별미를 있는 대로 장만하여 나를 대접하고 노복들에게도 역시 후하게 하였다. 작별하게 되자 부채 하나 가죽신 하나를 나에게 선사하고 또 운상에게도 똑같이 선사하였다. 나는 냇가를 따라 오리쯤 내려가서 동남으로 한 산에 들어가 나무 밑으로 가는데 고개를 들어 보아도 하늘이 뵈지 않으며 역로(歷路)의 봉만(峯巒)도 헤아릴 수 없었다. 56리쯤 가니 묵은 성이 있다. 아마도 왜적의 난리를 피할 때에 쌓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성터를 지나서 한 높은 산에 오르니 절정의 동편에 두 암자가 있는데 대송라(大松蘿)ㆍ소송라(小松蘿)이다. 여기서부터 나는 발이 다 부르터 걷기가 매우 곤란하였다. 대송라에 당도하여 누워서 쉬다가 잠이 들었다. 잠이 깨자 그 절의 중 성호(性湖)에게 청하여 산길의 앞잡이가 되게 하고 망고대(望高臺)에 올라 암자 뒤 동쪽 가의 산상을 따라 측백나무 가지를 더위잡고 나뭇가지를 헤치고 한 산마루에 올라서 또 곧장 산 중허리로 내려가 거기서 돌아서 북으로 올라가니, 깎은 듯한 하얀 돌을 깎아 세운 것이 몇 천인지 알 수 없는데 드리운 것도 같고 떨어질 것도 같으며 왕왕히 쇠줄이 아래로 드리워 손으로 끊고 올라가 승상(僧床)ㆍ응암(鷹岩)의 두 봉 사이로 벗어났다. 승상(僧床)이란 이름은 봉의 아래 돌이 있어 승상과 같기 때문이요, 응암이란 이름은 봉의 위에 돌이 있어 매의 형상과 같기 때문이다. 응암(鷹岩)의 북쪽에서 절벽으로 오르는데, 혹은 나뭇가지 혹은 돌의 모서리를 더위잡았다. 모두 계산하니 암상(岩上)으로 걸은 것이 약 10여 리쯤 된다. 대상(臺上)에 오르니 45(四通五達)하여 승상(僧床)ㆍ응암(鷹岩) 두 봉이 도리어 산 밑에 있고 전일 만폭동에서 거쳐서 온 여러 봉은 구질(丘垤)과 같아 분변할 수 없다. 다만 보니 진견성봉(眞見性峯)이 북쪽에 당해있고 그 봉 뒤에는 비로봉(毗盧峯)이 형세가 하늘을 고인 듯하여 여러 봉에 비하면 몇 백 배가 되는지 알 수 없으니, 전에 평지에서 쳐다본 것은 바로 그 지엽이요, 상봉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봉우리 서쪽에 만경대(萬景臺)ㆍ백운대(白雲臺)ㆍ중향성(衆香城)이 있고 그 다음으로 마하연(摩訶衍) 후봉(後峯)이 서 비로봉과 연결하여 한 산악을 이룬 것 같다. 동북에 안문봉(雁門峯)이 있어 비로봉에 다음가고 안문봉 뒤에 대장(大藏)ㆍ상개심(上開心) 여러 봉이 있는데, 다만 뾰족한 머리가 붓끝처럼 보일 뿐이며 여러 뾰족한 봉우리 남쪽에 두 봉이 있어 여러 뾰족한 봉우리에 비하면 23 등급이 나직하게 보이는데, 이름은 십왕봉(十王峯)이다. 봉 뒤에 십왕백천동(十王百川洞)이 있고 냇가에 영원암(寧原庵)이 있다. 운산이 일찍이 이곳에 올랐다고 한다. 또 십왕수(十王水)가 내려와 만폭동과 더불어 합류하여 장안사(長安寺) 앞 내가 되고 십왕봉 뒤 백천동 동쪽에 토봉(土峯) 하나가 있어 위는 평평한데 십왕봉보다 약간 높으니, 그것은 천등봉(天燈峯)이요, 그 남쪽에 솟은 봉이 천등봉보다 한두 등급 높으니, 그것은 미륵봉이요, 천등봉ㆍ비륵봉의 사이에 두 봉이 그 머리를 내보인 것은 관음봉(觀音峯)ㆍ지장봉(地藏峯)이요 미륵봉 남쪽에 토봉(土峯)이 있어 미륵봉보다 12등급이 낮게 보이는 것이 달마봉(達磨峯)이요, 달마봉의 서쪽에 또한 토산 하나가 있어 몹시 나직한데 그 이름은 알 수 없다. 산의 남쪽은 곧 금장(金藏) 은장면(銀藏面)이다. 장안사(長安寺) 서북쪽에 신림사(新林寺)가 있고 신림사 서북쪽에 정양사(正陽寺)가 있고 정양사 서북쪽에 개심대(開心臺)가 있고 개심대 서쪽에 개심암(開心庵)이 있다. 그 산이 위까지 통해서 수목이 새파랗게 한쪽을 내리덮었다. 그러나 그 봉이 퍽이나 낮아서 여러 봉과 비교가 아니된다. 개심대 북쪽에 토산(土山)이 있어 몹시 높아 미륵봉과 더불어 동서로 마주 섰는데, 이름은 서수정봉(西水精峯)이라 그 봉의 남쪽에는 웅호암(熊虎庵)이 있고 봉의 뒤에는 수정암(水精庵)이 있는데, 곧 비로봉 북면의 물이 쏟는 골짝이다. 개심대의 뒤 수정암의 남쪽에 한 토산이 있어 개심대 뒷산보다 약간 높은데 이름은 발령(髮嶺)이다. 중이 이르기를, “고려 태조가 군사를 거느리고 여기를 지나다가 이 재에 올라 비로봉을 바라보고 수없이 예배를 드리며 머리카락을 끊어 가지에 걸고 사문(沙門)으로 들어가려는 뜻을 보였다. 그러므로 이 재를 발령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나는 대석(臺石) 위에 앉아 봉의 이름을 다 묻고서 사방을 두루보니 신기가 화평하고 상쾌하여 몸이 높은 데 있다는 것을 깨닫겠다. 한 시간이 지났기로 내려가려 하는데, 안변(安邊) 중 네 사람이 뒤미처 올라오기에 네 명의 중과 함께 내려왔다. 네 명의 중은 상운점(上雲帖)으로 돌아가고 나는 승상석(僧床石)에 오르니, 심신이 오싹하여 무서운 생각이 들기로 도로 내려와 송라암(松蘿庵)에 당도하여 벽상을 보니, 친구 대유(大猶)의 이름 및 자와 절구시(絶句詩) 한 수가 있다. 이날에 산길을 걸은 것이 모두 256리였다. 윤사월 신사일에 송라암을 출발하여 옛 성터를 거쳐 남으로 한 골짝을 내려가 왼편으로 두 봉을 지나고 바른편으로 네 봉을 지나서 안양암(安養庵)에 당도하니 암자 뒤에 나한전(羅漢殿)이 있어 개명(開明)하여 앉을 수 있기로 나는 그 위에 앉아 일기를 썼다. 암자 앞에 깊은 못이 있으니, 이름은 울연(鬱淵)인데 김동(金同)이 빠져 죽은 곳이다. 김동은 고려 시대 부자 사람인데 평생에 부처를 좋아하여 울연의 위에다 암자를 짓고 모든 바위의 면에다 불상(佛像)을 조각하여 부처를 공양하고 중을 재()하니 쌀바리가 개성과 연속하였다. 지공(指空)이 이 산에 들어와 김동을 보고 외도(外道)라고 지적하니 김동이 불복하였다. 지공이 맹서를 지어 말하기를, “네가 옳고 내가 그르면 오늘 안으로 내가 천벌을 받을 것이요, 내가 옳고 네가 그르면 오늘 안으로 네가 천벌을 받을 것이다.” 하니 김동이 그러자고 하였다. 지공은 마하연(摩訶衍)에 들어가서 자는데 과연 밤에 뇌성벽력이 일어나 김동사가 물과 돌에 부딪쳐 김동은 절의 부처와 절의 종 그리고 절의 중과 한꺼번에 울연으로 빠져 들어갔다고 한다. 울연 위 한 마장쯤에 김동사 옛터가 있다. 안양암을 지나서 동으로 산 중턱을 돌아드니 붉은 척촉과 푸른 솜대[綿竹]가 길가에 가득하다. 미타암(彌陀庵)에 당도하니, 암자 뒤에 칠봉(七峯)이 열립해 있고 암자 앞에 물이 있다. 이 물은 바로 울연의 하류(下流)이다. 주승(主僧) 해봉(解逢)에게 청하여 차 한 잔을 얻어 마시고 식사 후에 왼편으로 명수(明水)ㆍ지장(地藏)ㆍ관음(觀音) 세 암자를 지나고 바른편으로 양심(養心)ㆍ영쇠(靈碎) 두 암자를 지나니 십왕백천수(十王百川水)가 여기 와서 만폭동과 더불어 합류한다. 이곳을 벗어나니 냇가 돌들이 청흑색으로 변하였다. 미타암으로부터 십여 리를 향하여 장안사(長安寺)에 당도하니, 이 절은 바로 신라 법흥왕(法興王)이 초창하였고 원()나라 순제(順帝)가 기황후(奇皇后)가 더불어 중창(重創)하였다. 바깥문에는 천왕(天王) 둘이 있고 맨 안에 법당이 있고, 좌상에 큰 부처 셋과 중 부처 둘이 있다. 부처 앞에 금으로 쓴 액자(額字)에는, “황제 만만세(皇帝萬萬世)”라 하였다. 법당의 4면에 작은 부처 만 5천이 있는데, 모두 원나라 황제의 소작이요, 그 동쪽 모퉁이에 무진등(無盡燈)이 있는데, 그 등의 내부 4면은 모두 동경(銅鏡)으로 되고, 가운데다 촛불 하나를 두고 곁으로 여러 중의 형상을 세워, 이내 초에 불을 붙이면 여러 중이 모두 촛불을 잡고 있는 듯한데, 역시 원나라 황제의 소작이요, 다섯 왕불(王佛) 위에 또 다섯 중불(中佛)이 있는데, 복성정(福城正)의 소작이다. ()의 서실(西室)에 달마(達磨)의 초상이 있고 동북 모퉁이에 나한전이 있고 당에는 금불(金佛) 다섯이 있고, 좌우로 나한의 소상 16개가 있다. 나한의 곁에 각각 시봉승(侍奉僧) 둘씩이 딸려 기술이 극히 정밀하고 교묘하였다. 나한전의 남쪽에 한 집이 있고, 그 집안에 대장경함(大藏經)이 있다. 나무로 새겨 3층 집을 만들고 그 가운데 철구(鐵臼)가 있고, 철주(鐵柱)를 그 위에 두어 위로 집 대들보와 연속하게 하고, ()을 그 가운데 두어 집 한 모퉁이를 잡고 흔들면 3층이 저절로 돌아가게 되니 구경할 만하다. 역시 원나라 황제의 소작이다. 구경을 다하고 나니 주지(住持) 조징(祖澄)이 차와 밥을 준비하였다. 식사 후에 가랑비를 무릅쓰고 그 전에 오던 천변(川邊)을 따라 올라가서, 울연 보현암(普賢庵)을 지나서 신림사(新林寺)에 당도하여 잠깐 쉬었다. 장한사에서 지나온 여러 봉과 아울러, 아침나절 지나온 일곱 봉과 십왕동(十王洞) 어귀에서 바라보이는 여러 봉을 합쳐 헤아려보면, 냇물 동쪽에 봉 29개가 있고 냇물 서쪽에 봉 18개가 있다. 여기서부터 올라가는 데는 전록(前錄)에 실려 있다. 신림사(新林寺)로부터 천친암()에 오르고, 천친암으로부터 정양사(正陽寺)에 올라가면 절재[拜岵]가 바른편에 있다. 중이 말하기를, “고려 태조가 산에 들어왔을 적에, 5만의 담무갈(曇無竭)이 이곳 재에서 현신(現身)하므로, 태조는 무수히 절을 올렸다. 그래서 이름을 절재라 하였다.”고 하였다. 정양사로부터 또 비를 무릅쓰고 쌓인 수목 속으로 약 10리쯤 올라가서 보현령(普賢嶺)에 올라, 거기서 서쪽으로 34리쯤 올라가서 개심암(開心庵)에 당도하니, 옷이 다 젖고 또 큰 비가 오기 시작하였다. 이날에 산길로 모두 40리를 걸었다.

임오일에 비가 개어 개심대에 올라 여러 봉을 바라보니, 망고대(望高臺)와 더불어 대략 같고 조금 다를 뿐이다. 비로봉 중향성(衆香城)은 동쪽에 있고 선암(禪庵) 뒷봉은 서북쪽에 자리잡고 있으니, 곧 비로봉이 서쪽 가지이다. 마가연 뒷봉은 바로 선암봉(禪庵峯) 앞에 있고 영랑현(永郞峴)은 선암봉 뒤에 있고 서수정봉(西水精峯)은 영랑현 서쪽에 있고, 월출봉(月出峯)은 비로봉 동남에 있고, 일출봉(日出峯)은 월출봉(月出峯) 남쪽에 있고, 원적봉(元寂峯)은 일출봉 남쪽에 있는데, 망고대(望高臺)는 보이지 않는다. 원적향로봉(元寂香爐峯)은 원적봉 남쪽에 있고, 안문봉(雁門峯)은 또 그 남쪽에 있고, 안문봉 북쪽에 한두 봉이 있어 멀리 보이는데, 보문(普門)에서 서쪽으로 바라보이는 것이다. 진견성봉(眞見性峯)은 또 안문봉의 남쪽에 있다. 망고대는 또 그 남쪽에 있고 십왕봉은 망고대 위에 두각만 나타내고, 천등(天燈)ㆍ관음(觀音)ㆍ지장(地藏)ㆍ미륵(彌勒)ㆍ달마(達摩) 여러 봉은 그 동남에 퍼져있는데 이는 그 대략이다. 대 남쪽에 안심대(安心臺)가 있고 대 곁에 개심태자(開心太子)의 석상(石像)이 있는데, 중이 말하기를, “이는 신라국 태자와 개심 태자가 안심태자와 양심태자 돈대부인(頓臺夫人)과 함께 여기 와서 수도하였는데, 모두 법흥왕의 아들이다.”라고 한다. 지금 네 암자가 있어 그대로 옛이름을 쓰고 있는데, 그런지 않은지 자상하지 않다. 식사 후에 개심암으로부터 서쪽으로 묘덕암(妙德庵)을 내려가, 견극선암(見克禪庵)에 들어가니 뒤에 느린목[緩項]이라 이름된 것이 있는데, 지공(指空)이 산에 들어오던 길이라고 한다. 천덕암(天德庵)을 지나니 암자 앞 수원부(水原府)에 사는 양반집 과부가 도산재(都山齋)를 베풀어, 중 수백 명이 산 중턱에 열지어 앉아 떠드는 소리가 온 골짝을 요란하게 하는데, 과부는 뭇 중들 가운데 낯을 드러내놓고 결연(結緣)하고 있었다. 또 원통암(元通庵)을 지나니 암자의 좌우에 두개의 내가 있어, 암자 앞에 와서 합류하는데, 역시 승경이다. 여기를 지나서 원통암 뒷재 영랑현(永郞峴)을 오르니 지나온 봉이 일곱이었고, 또 윤필암(潤筆庵) 고개를 넘어 윤필암을 지나고, 또 사자령(獅子嶺)을 넘어 동으로 가니 바로 지난 날 보던 사자암이다. 여기서 보이는 것은 역시 전록(前錄)에 기재되었거니와, 산천이 다름없고 하얀 돌도 여전한데, 다만 냇가 양쪽에 철쭉꽃이 지난 밤 비에 활짝 피어 끊임없이 서로 연속하여 가다가는 무더기로 있으니 구경할 만하다. 나는 그전 길을 따라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 안문점(雁門岾)을 채 못가서, 동남으로 한 골짝에 들어가 요기하고 수점(水岾)을 넘어 동으로 내려 왼편으로 시내 줄기를 보고, 바른편으로 남산을 끼고 나무 그늘 속으로 거닐어 성불암(成佛庵)에 당도하여 불암 위에 앉아 동해를 바라보니, 비가 지난 뒤라 더욱더 환하여 전날에 비할 바 아니었다. 객승(客僧) 죽희(竹熙)란 자가 나를 위하여 식사를 준비하였었다. 식사를 마친 후에 죽희ㆍ성통(性通)과 더불어 불정암(佛頂庵)을 가보니 암자가 지난해에 화재를 만났다. 불정대(佛頂臺)에 올라가니 대 가운데 구멍이 있어, 산 밑 깊은 못에 통하여 바람이 그 속에서 나온다. 중이 말하기를, “옛적에 용녀(龍女)가 이 구멍에서 나와, ()를 불정조사(佛頂祖師)에게 받들었다.” 하는데, 그 말이 매우 순진하고 대 아래에 청학(靑鶴)이 해마다 그 가운데서 새끼를 기른다고 한다. 나는 대 위에 앉아 바라보니 동에는 바다가 있고 서에는 안문봉이 있고, 북에는 상개심(上開心)ㆍ적멸(寂滅)ㆍ백전(柏田) 등의 절이 있고, 그 아래는 흰 바위가 한 벼랑을 이루고 폭포가 아래로 드리워 11층을 내려가는데, 반은 숲 속에 들었고 내가 바라본 것은 6층일 따름이다. 저물녘에 돌아와 성불암(成佛庵)에서 유숙(留宿)하였다. 이날에 산길을 걸은 것이 60리였다.

계미일에 성불암에서 바다를 바라보니 여명(黎明)으로부터 하늘 동쪽에 붉은 빛이 비치더니, 잠깐 사이에 해가 솟아올라 온 바다가 다 붉게 보이고, 해가 간대[竿] 세 길이쯤 올라오니 바다 빛이 맑고 하얗다. 나는 단편시를 지어 기록하였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한 작은 고개를 넘어 10리쯤 가서 유점사(楡岾寺)에 당도하니, 구연동(九淵洞) 물 근원이 미륵봉(彌勒峯)에서 나와 절 앞에 당해서는 수점천(水岾川)과 함께 합류한다. 절에 수각(水閣)이 있어 내 남북쪽을 깔고 앉았는데, 물고기가 앞에서 뛰다가 큰물이 지면 연어(連魚)ㆍ송어(松魚)가 모두 수각 앞까지 올라온다고 한다. 절의 바깥문은 해탈문(解脫門)인데 천왕(天王) 둘이 있고, 다음은 반야문(般若門)인데 천왕 넷이 있고 다음은 범종루(泛鍾樓)가 있는데, 누 곁에 한 방에 노춘()의 상()이 있고, 맨 안에 능인보전(能仁寶殿)이 있고 전 안에는 나무를 새겨서 산 모양을 만들어, 53구의 부처가 그 사이에 열립해 있고 전 뒤에는 한 우물이 있어 이름을 오탁수(烏啄水)라 한다. 맨 처음 까마귀가 쪼는 것을 보고 발견했기 때문이다. 절에 명()이란 사주(社主)가 있어 묵헌()ㆍ민채(閔漬)의 유점기(楡岾記)를 내보는데, 그 대략에 53구의 부처에 대해서는 본시 서역(西域) 사위국(舍衛國)에서 세존(世尊)을 보지 못한 삼만가(三萬家)가 문수보살의 말을 받아서, 석가의 상을 지어 부어[] 쇠북 속에 담아 바다에 띄워 저 갈 데로 가게 하였다. 부처가 월지국(月氏國)에 이르자 그 나라 왕이 집을 지어 부처를 안치하였는데 그 집이 화재를 만났다. 부처가 왕에게 현몽하여 다른 나라로 가고자 하니, 왕이 부처를 쇠북 속에 넣어서 또 바다에 띄웠다. 부처가 신라국 고성강(高城江)에 이르니, 태수(太守) 노춘()이 부처에게 살고자 하는 곳을 물으매, 부처가 금강산으로 들어가는지라 노춘은 뒤를 따라 찾아가는데, []이 돌 위에 앉아 그 길을 인도한 데는 그 땅 이름을 이대(尼臺)라 하고, 개가 재 위에 있어 그 길을 인도한 데는 그 땅 이름을 구점(狗岾)이라 하고, 노루가 산협(山峽) 입구에서 길을 인도한 데는 그 땅 이름을 장항(獐項)이라 하고, 부처의 머무른 곳에 당도하여 쇠북 소리를 듣고 반긴 데는, 그 땅 이름을 환희점(歡喜岾)이라 하였다. 노춘이 남해왕(南解王)에게 아뢰어 큰 절을 지어 불상을 안치하였는데, 이름은, “유점사(楡岾寺)”라 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민채의 설이 여섯 가지 큰 망언(妄言)이 있는데 하나도 취할 것이 없다. 쇠가 물에 뜨는 이치가 없는데, , “사위국(舍衛國)에서 지어 부은 쇠북과, 부처가 바다에 떠나 월지국(月氏國)을 거쳐 신라에 왔다.”는 것이, 1의 크나 큰 망언이요, 쇠란 스스로 걸어가는 이치가 없는데, , “고성강에 밀린 금부처가 저절로 금강산 유점사로 들어가고, 또 물탕에서 끓어오르는 물방울을 피하여 구연동(九淵洞) 바윗돌 위로 날아서 들어갔다.”는 것이 제2의 크나 큰 망언이요, 불교는 본시 서융(西戎)의 교로써 후한(後漢) 명제(明帝) 시대부터 비로소 중국에 들어왔고, 또 수백 년 후 남북조(南北朝) 시대로 신라의 중엽에 당하여 동방으로 유입되어 소신(小臣) 이차돈(異次頓)이 그 법을 이룬 사실이 국사(國史)에 실려 있는데, , “전한(前漢) 평제(平帝)의 세상인 신라 제2대 남해왕의 조정에 일이 있어 비로소 유점사를 창설하였다.”는 것은 제3의 큰 망언이요, 가령 민채의 설과 같이 부처가 비록 한나라 명제 시대에 비로소 중국으로 들어왔지만, 우리나라에 부처가 있기는 남해왕 때부터 비롯되어, 실로 중국보다 앞섰다면 어찌하여 사적에 실리지 않았겠는가. 우리 사람이 무식하여 부처를 받들기를 제 아버지처럼 받든다. 그래서 왕건(王建) 태조의 고명(高名)으로도 속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숭상하기를, “우리가 나라를 지니게 된 것은 실로 부처의 힘을 입었기 때문이다.” 하였으니 이때를 당해서 이런 사실이 있었다면 반드시 그 언어와 문장을 크게 과장하여 역사에 실었을 터인데, 사가는 오히려 기재하지 않았거늘, 민채는 바로 무식한 야인의 말을 믿고 기록하였으니 제4의 큰 망언이요, 가령 그런 일이 있었다면, 우리 백성의 중도 있게 되고 신중[]도 있게 되어, 반드시 불법(佛法)이 그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며, 그전에 없었던 것은 너무도 분명한데, , “노춘이 부처를 찾아갈 적에 신중이 길을 인도하였다.”고 했으니, 불교가 있기도 전에 어찌 신중이 있겠는가. 이것이 제5의 큰 망언이요, 더구나 중국 인물들의 널리 듣고 많이 본 그것으로도, 오히려 서역(西域)의 범서(梵書)를 통하지 못하여 호승(胡僧)과 더불어 번역을 하고서야 그 글이 세상에 밝혀졌는데, 사위국 월지국에서 기록한 쇠북에서 글자를 노춘이 어떻게 해석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그때에 문적(文籍)이 희귀하여 사람들이 문자를 알지 못하였는데, 서역의 사적을 말한 것이 너무도 명백하여 제6의 큰 망언이니, 민채의 황당무계함은 말할 나위조차 없다. 여섯 가지 큰 망언이 있고 한 마디도 명교에 보탬 될 것이 없으니, 이 기록은 빼버리는 것이 옳겠다. 더구나 삼국의 초기에 사람이 일정한 성이 없고, 이름 자도 사람의 이름과 같지 않은즉 노춘이란 이름부터가 후세에서 지어 넣은 것이 아닐까 의심스럽다. 어찌 신라 말엽에 학식 있는 술승(術僧) 원효(元曉)ㆍ의상(義相) 율사(律師)의 무리들이 비로소 이 산의 사적을 과장하고자 하여 추후에 써놓은 것이라 아니하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어찌 이렇게도 그릇된 점이 많단 말인가. 두루 다 구경하고 누각으로 나와 앉으니, ()이 우리를 위하여 냇가에까지 보내주었다. 개복대(改服臺)를 지나니 이 대는 바로 지난 병술년에 유점사에서 불공할 적에 거가(車駕)가 옷을 바꿔 입던 곳이다. 또 단풍교(丹楓橋)를 지나자 다리 머리에서 잠깐 쉬었고, 또 장항(獐項)을 지나다가 말을 가지고 나를 맞기 위하여 온정(溫井)으로 오는 자를 만났다. 그래서 말을 타고 구점(狗岾)을 넘는데, 길이 험악하여 혹은 말을 타기도 했고 혹은 걷기도 했다. 이대석(尼臺石)을 지나서 마루로부터 평지에 당도하여, 건천(乾川) 가에서 요기를 하고 준방(蹲房)을 지나서 고성군(高城郡)에 도착하였다. 유점사에서 여기까지는 60리였다. 태수(太守) 조공(趙公)은 나의 조부와 더불어 좋아하는 처지라, 나를 보고 후히 대우하였다. 때마침 양양 군수(襄陽郡守) 유자한(柳自漢)이 먼저 와서 좌상의 반찬을 준비하였다.

갑신일에 태수 조공이 유양양을 위해 삼일포(三日浦)의 놀이를 하게 되어 나도 따라갔다. 삼일포는 신라 시대에 화랑(花郞) 안상(安祥)ㆍ영랑(永郞)의 무리가 와서 3일 동안을 놀고 파했다. 그래서 이름이 되었다. 포구의 암벽(巖壁) 사이에 단서(丹書) 여섯 글자가 있는데, 화랑의 무리가 쓴 것이라고 한다. 수면(水面)에서 45리를 가면 돌섬 하나가 있고, 낙락장송이 두어 그루가 있으므로 이름을 송도(松島)라 하고, 동남의 모퉁이에서 바라보면 돌이 거북 모양과 같으므로 귀암(龜岩)이라 하고, 귀암의 뒤에 하얀 바위가 바닷가에 우뚝 솟아 있으므로, 이름을 설암(雪巖)이라 한다. 물 북쪽에 몽천사(夢泉寺)의 옛터가 있는데 참으로 절경이다. 나는 훈도(訓導) 전대륜(全大倫) 및 유양양을 따라, 배를 타고 송도에 정박하였다가 또 배를 노질하여 단서(丹書)가 있는 암벽(巖壁) 아래 당도하니, 과연 여섯 글자가 있어, “영랑도 남석행(永郞徒南石行)”이라 하였는데, 그 글자가 돌에 심한 공격을 받았다. 전대륜은 말하기를, “옛날에 손님을 싫어하는 태수가 있었는데, 손이 이 고을에 오게 되면 반드시 단서를 보고자 하는 고로, 태수가 그 비용을 대어 주기 싫어서 쳐부숴버리려고 했다.” 한다. 그러나 그 글자가 획이 인멸되지 않아서 해독할 수 있다. 나는 그 글의 뜻을 물으니 대륜은 말하기를, “영랑(永郞)이란, 신라 사선(四仙)의 하나요, 남석(南石)은 이 돌을 지적한 것이요, ()이란 돌 위로 간다는 것이다. 세상의 문인들이 모두 이렇게 해석한다.”고 하였다. 나는 생각하건대 이 돌이 고성에서 보면 북쪽에 있고, 금강에서 보면 동북간에 있고, 동해 바다에서 보면 서쪽에 있는데, 남석이라 칭한 것은 더욱 해득할 수가 없고, 또 여섯 글자가 하나의 문장이 되는데, 문리(文理)가 대단히 소략(疎略)하여 아희들의 솜씨와 같으니, 옛사람의 문법이 응당 이와 같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일을 좋아하는 아희들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곧 수랑의 무리 가운데 남석행(南石行)이란 성명을 가진 자가 제 이름을 써 놓은 것이 아닌가 한다. 배를 멈추고 돌 위에 오르니, 그 정상(頂上)에 미륵불(彌勒佛)을 위한 매향비(埋香碑)가 있는데, 고려 시대에 세운 것이다. 배를 타고 송도로 돌아와 종일토록 술을 마시고 노는데, 반찬이 매우 풍성하였다. 혹은 어부를 시켜 고기를 그물질하여 회를 쳐서 먹기도 하고, 혹은 연구시(聯句詩)를 지어 부르고 화답하기도 했다. 오후에 큰 바람이 부니 태수는 무서워서 배를 타고 돌아가고 나는 온정(溫井)으로 돌아왔다.

을유(乙酉)일에 온탕에 들어가 목욕하고, 병술(丙戌)일에 목욕하고, 정해(丁亥)일에 목욕하며 무자(戊子)일에 목욕하고 나와 쉬었다. 기축ㆍ경인 양일간에 다 쉬었다. 가서(家書)를 받았는데 자당께서 안녕하시다고 했다.

신묘(辛卯)일에 회정(回程)하여 온정을 떠나가면서 고사리를 캤다. 고성군을 지나고 또 만호도(萬戶渡)를 지나서 배를 타고 고성포(高城浦)를 건너 강변에서 밥을 지어 먹었다. 영동(嶺東)의 민속이 매년 345월 중에 날을 가려 무당을 맞이하여 수륙(水陸)의 별미를 성비하여 산신에게 제사를 드리는데, 부자는 말바리로 실어오고, 가난한 자는 이고 지고 와서 신전에 차려 놓고 피리를 불고 비파를 타고 연 삼일을 재미나게 놀고 취해 배부른 연후에야 비로소 집으로 내려와 사람과 사고팔고 하며, 만약 제사를 아니 지내면 한 자치 베도 사람과 매매를 못한다. 고성의 민속제는 바로 이날인지라, 가는 길 곳곳마다 남녀들이 몸단장을 하고, 서 있는 사람들이 끊어지지 아니하며 왕왕 저자와 같이 많이 모인 데도 있었다. 설암(雪巖)을 지나니 설암의 이남에는 기묘한 돌이 몹시 많았다. 안창역(安昌驛)을 지나서 안석도(安石島)에 오르니 잘잘한 돌이 밑으로 연하고, 전죽(箭竹)이 덤불을 이루며, 전죽 아래는 해당화가 있고 해당화 아래는 하얀 돌이 있어, 혹은 평평하고 혹은 솟고 혹은 쌓이고 혹은 부숴졌다. 나는 섬 아래서 한바퀴 돌고 앉았다 누웠다 하며, 실컷 구경하다가 도로 나와 구장천(仇莊遷)을 지나니 역시 기묘한 곳인데, 옹천(瓮遷)만은 조금 못하다. 사천(蛇川)을 건너 명파역(明波驛)을 지나 냇가에서 요기하고, 술산(戌山)을 넘어 다시 바닷가를 따라 무송정(茂松亭)에 당도하니 정자는 바로 바다 굽은 턱에 있는데, 역시 육로(陸路)와 연결하여 장송(長松)이 그 맨 꼭대기에 나고, 하얀 돌은 그 기슭을 이뤘다. 그리고 안석(安石)에 비해 몇 배가 높은지 알 수 없다. 열산(烈山)을 지나서 간성(杆城) 땅에 들어가 포남(浦南)에 있는 어떤 민가(民家)에서 유숙하였다. 이날에 바다를 따라 행한 것이 모두 1 20리였다.

임진(壬辰)일에 비를 무릅쓰고 포남에서 출발하여 반암(盤巖)을 지나 19리를 가니 비가 몹시 퍼부어서 간성(杆城) 객사(客舍)에서 유숙하는데 태수 원보곤(元輔昆)이 술밥을 보내와서 운산은 취해 넘어졌다.

계사(癸巳)일에 비가 갰다. 출발하여 문암(門巖)을 지나 바다를 따라 45리를 가서 청간역(淸澗驛)에 당도하니, 누가 물가에 가까이 있고, 누의 뒤에는 절벽이 깎아지르고, 누 앞에는 많은 돌이 쫑긋쫑긋 솟았다. 나는 누의 뒤 절벽 위에 오르니, 바라보이는 것이 더욱 넓어 서쪽으로 설악(雪岳)을 보니 비가 내리 쏟아지는 것 같은데, 하늘 남쪽에는 해가 중천에 둥실 떴다. 그리고 앞에는 바다가 어둑하고, 뒤에는 꽃이 환하여 절묘한 경치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절벽 위에서 요기하고 또 바닷가로 행하여 사령(沙嶺)의 해안을 지나니 이때에 동남풍이 거세게 불어 바다 물결이 기슭에 대지르는데, 천병(千兵) 만마(萬馬)가 몰아서 노는 것 같았다. 물이 부딪는 곳에 붉은 무지개가 건각에 나타났다 도로 사라지곤 하니 참으로 장관이었다. 죽도(竹島)를 바라보니 백죽(白竹)이 연기와 같고, 개울 밑 돌 위에 해달(海獺)이 줄지어 떼로 우는데, 그 울음소리가 물소리와 더불어 어울려 해안에 진동하였다. 또 부석(腐石)에 당도하니 청간(淸澗)에서 여기까지는 20리이다. 또 바른편으로 천보산(天寶山)을 지나 송정(松亭)에 당도하여 여기서부터 낙산(洛山)을 바라보며 20리를 가서 낙산동(洛山洞)에 들어갔다. 10리를 가서 낙산사(洛山寺)에 당도하니, 지나는 길에 피택(陂澤)이 많아서 그 크기를 10리 혹은 20여리 되는 것이 여섯이나 된다. 그리고 두 곳의 큰 개와 두 곳의 큰 내를 건너고 죽도(竹島)를 셋이나 지났는데, 기암(奇巖) 괴석은 몇이나 되는지 알 수 없다. 낙산사는 신라 중 의상(義相)이 지은 것인데, 그 절의 중이 그 사적을 전하기를, “의상이 직접 괸음(觀音) 대사를 해변 굴속에서 만나니 관음이 친히 보주(寶珠)를 주고 용왕(龍王)이 또 여의주(如意珠)를 바치기에 의상은 두 구슬을 받았다. 이에 절을 짓고 전단토(旃檀土)를 가져다 손수 관음상을 만들었다. 지금 바닷가에 있는 조그마한 굴이 바로 관음의 머무른 곳이요, 뜰 가운데 있는 석탑이 바로 두 구슬을 수장한 탑이요, 관음 소상은 바로 의상이 손수 만든 것이다.” 한다. 무자(戊子) 연간에 요승(妖僧) 학열(學悅)이란 자가 있어 나라에 아뢰어 절터에다 큰 법당을 짓고, 그 안에 살면서 곁에 있는 민간의 전답을 다 빼앗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지금 학열이 죽은 지 1년인데, 그 도제 지생(智生)이 일찍이 학열에게 곱게 보였던 관계로 학열이 죽자 노비(奴婢) 전답, 재물을 다 얻어서 그 이익을 관리하고 있다. 절 앞에 정자 하나가 바닷가에 가까이 있고, 감나무 숲이 여러 겹을 두르고, 대와 나무가 온 산에 가득하다. 나는 정자에 올라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정자를 내려와 언덕 밑을 지나서 큰 대숲에 갔다가 도로 주사(廚舍)를 지나서 곡구(谷口)로 내려가 왼편으로 암석(巖石)을 거쳐 조그마한 댓가지를 헤치고 반 마장쯤 가서 이른바 관음굴이란 곳에 당도하니, 조그마한 동불(銅佛)이 굴속의 조그마한 실내에 있어 바람과 햇볕을 가리지 못하고 방 아래서는 파도 물결이 돌을 대질러 산 형상이 흔들리는 듯하고, 지붕 판자가 노상 울린다. 나는 내려와 동구에 당도하자 운산이 중 계천(繼千)을 데리고 와서 나를 맞아 절로 들어가니 지생이 나와 영접하여 하룻밤을 지냈다.

갑오(甲午)일 이른 아침에 나는 정자에 올라 앉아 해뜨는 것을 구경하였다. 지생이 아침 식사를 대접하고 나를 인도하여 관음전을 구경시키는데 이른바 관음상은 제작한 기술이 극히 정밀하고 교묘하여, 정신이 들어있는 것 같았다. 전 앞에 정취전(正趣殿)이 있고, 전 안에는 금불 셋이 있다. 나는 출발하여 남쪽 길로 가다가 서쪽으로 접어들어 20리쯤 가서 양양부(襄陽府) 앞 냇가에 당도하여 말을 쉬게 하고, 10리를 가서 설악(雪岳)으로 들어가 소어령(所於嶺)을 올라 고개를 내려오니 냇물은 왼편에 있고, 봉만(峯巒)은 바른편에 있다. 산기슭을 다 지나서 냇물을 건너 왼편으로 가니 물은 맑고 산은 빼어나고 하얀 돌이 담 쌓여 대략 금강산의 대장동과 같다.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서 오색역(五色驛)을 당도하니, 하얀 달이 벌써 산 위에 둥실 높이 떴다. 이날 뭍으로 30리를 걷고 산으로 40리를 걸었다.

을미(乙未)일에, 오색역을 출발하여 소솔령(所率嶺)을 지나니, 설악산이 무려 수십여 봉우리인데, 다 정상은 희고, 시냇가 돌과 나무도 또한 희게 보인다. 세상에서 작은 금강산이라고 부르는 것이 헛된 말이 아니다. 운산이 말하기를, “매년 8월에 다른 산은 서리가 미처 오지 않았는데도, 이 산만은 먼저 눈이 내리므로 설악이라 한다.” 하였다. 재마루 돌 위에 팔분체(八分體)로 쓴 절구시 한 수가 있는데, “무진년에 난 단군(檀君)보다 먼저 나서 기준(箕準)의 마한(馬韓)을 목도하였네. 영랑(永郞)과 함께 수부(水府)에 노닐고, 또 술을 마시며 인간에 머물렀네.” 하였다. 먹발[墨跡]이 아직도 쌕쌕하니, 반드시 쓴 적이 오래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 신선이라는 것이 없으니, 어찌 일 좋아하는 자가 우연히 쓴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나 정자(정이()), “하늘에 빌어 나라 운명(運命)을 길게 하는 것과 보통 사람이 성인에 이르는 것으로써 신체를 수련하여 연령을 끌어가는 것에 비한다.” 하였으니, 깊은 산중에 역시 그런 사람이 있는지도 알 수 없다. 그 시를 읽어 보니, 사람으로 하여금 속세를 벗어난 느낌이 들게 한다. 나는 재마루에서 동해 바다와 하직하고, 재를 내려와 서남으로 나무 밑으로 걸어가니 길이 험악하고 골짝기가 깊숙하였다. 정향(丁香) 꽃을 꺾어 말안장에 꽂고, 그 향내를 맡으며 면암(眠巖)을 지나 30리를 가서 말을 쉬고 신원(新院)을 지나 또 15리를 가니 냇물이 설악의 서쪽으로부터 와서 소솔천(所率川)과 합류하여 원통역(元通驛) 아래 이르러서는 큰 강이 되었다. 원통으로 전진하니 산천이 광활하여 매우 아름다웠다. 원통으로부터 평지를 밟고 또 25리를 가서 원통천(元通川)을 건너서 기린현(麒獜縣) 물이 여기와 합류하였다. 강을 따라 5리를 가서 인제현(麟蹄縣)에 유숙했다. 이 날에 산으로 60리를 걷고, 뭍으로 30리를 걸었다.

병신(丙申)일에 배를 타고 병항진(甁項津)을 건너 서ㆍ남으로 향하여 선천(船遷)을 지나고, 또 서남으로 향하여 만의역(萬義驛)을 지나며, 또 산간으로 향하여 홍천(洪川) 땅에 들어가 천감역(泉甘驛)에 유숙했다. 모두 80리를 걸었다.

정유(丁酉)일에 또 서ㆍ남으로 향하여 마령(馬嶺)을 넘고 또 서남으로 향하여 큰 강을 따라 내려가 구질천(仇叱遷) 영봉역(迎逢驛)을 지나 60리를 가서 홍천현에 당도하여 현감(縣監) 백기(伯起)를 만나보고 동숙(同宿)하였다.

무술(戊戌)일에 배를 타고 앞강을 건너 괘전령(掛錢嶺)을 넘어 백동역(百同驛) 뒷산을 거쳐 지평현(砥平縣)을 지내고, 또 천곡원(天谷院)을 지나서 서남에 돌길로 들어갔다. 이날에 도합 90리를 걸어서 권교리(權校理) 경우(景祐)의 집에서 잤다.

기해(己亥)일에 가랑비를 무릅쓰고 서쪽으로 향하여 천곡천(天谷川) 하류로 건너 오빈력(吾賓驛) 양근군(楊根郡)을 지나고, 또 월계천(月溪遷) 우원(偶院)ㆍ요원(腰院)ㆍ말원(末院)을 지나서 용진(龍津)을 건너 봉안역(奉安驛)에서 유숙하였다. 이날에 도합 80여 리를 걸었다.

경자(庚子)일에 두미천(豆尾遷) 평구역(平丘驛)을 지나 중녕포(中寧浦)를 건너 70리를 향하여 서울에 들어왔다. 총계하니 산으로 향한 것이 4 85리요. 바다로 향한 것이 2 74리요, 뭍으로 향한 것이 9 37리였다. 을사 윤 4 20일 신축에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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