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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시(非詩) - 不愛君憂國非詩也

淸潭 2019. 1. 13. 20:40
비시(非詩) - 不愛君憂國非詩也

鶴亭 李敦興 書 46×108cm
茶山先生曰
不愛君憂國非詩也
不傷時憤俗非詩也
非有美刺勸懲之義非詩也
故志不立 學不醇 不聞大道
不能有致君澤民之心者
不能作詩
汝其勉之
다산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다.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을 통분해 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다.
옳은 것을 찬미하고 잘못을 풍자하며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려는 뜻이 없으면 시가 아니다.
그러므로 뜻이 확립되지 못하고 배움이 순정치 못하고
큰 도를 듣지 못하고 임금을 바르게 인도하지 못하며
백성들에게 혜택을 베풀려는 마음이 없는 자는
시를 지을 수가 없다.

- 丁茶山 先生, <與猶堂全書> 句


임금을 사랑하지 않고 나라를 걱정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다(不愛君憂國非詩也)

음풍영월이 시가 아니다.
자아도취가 시가 아니다.
아무나 지을 수 있는 것은 시가 아니다.
시를 쓰려면 먼저 뜻을 세워라.
시를 쓰려면 먼저 배움에 몰두하라.
가슴에 큰 도를 품어 세상일을 제 일처럼 근심하는 마음을 지녀라.
시는 안타까움에서 나온다.
안타까움이 없는 자는 시를 쓸 생각을 마라.
시인이란 명성을 탐하여 개폼이나 잡으려거든 차라리 붓을 꺾어라.

- 다산어록청상(茶山語錄淸賞) -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와 교훈> (세상의 모든 아들딸들에게 보내는 사랑의 편지, 다산 정약용이) 저자 정약용ㅣ출판 문장
정약용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변방의 씨앗, 학문으로 꽃피다

변방은 창조 공간이다. 마흔 살, 인생의 황금기에 큰 시련이 찾아왔지만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22세에 진사로 성균관에 들어가 왕의 눈에 띄었고, 28세에 대과에 급제한 뒤 중앙관리, 지방행정, 암행어사를 두루 경험했다. 성리학, 건축, 천문, 지리는 물론 사회 전 분야에 깊은 철학으로 다가간 조선 최고의 지식인으로 시대정신을 정확히 읽어낸 실학자이자 개혁가였다. 정조의 총애를 받는 만큼 노론들의 끊임없는 공격에 시달리면서도 굳건히 버텼지만, 왕이 승하한 후에 그들이 가만 둘 리가 없었다. 1801년 신유박해로 그와 두 형이 구속되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한때의 재해를 당했다하여 청운의 뜻을 꺾어서는 안 된다. 사나이의 가슴속에는 항상 가을 매가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듯한 기상을 품고서 천지를 조그마하게 보고 우주도 가볍게 손으로 요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지녀야 옳다.”
- 189쪽, 1810년 봄 다산동암에서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중

세상의 이치와 만물에 관심이 많아 서학과 천주교에도 관심을 보였던 것이 화근이었다. 셋째 형은 곧장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둘째 형과 겨우 목숨을 부지해 유배형에 처해진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처자식이 눈에 밟혔지만 훗날을 도모하며 전라도 금릉, 지금의 강진 땅으로 떠나야만 했다. 억울하고 설움도 많았지만 한풀이가 답은 아녔다. 마음을 평화롭게 다스리며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괴로웠지만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형제로서 역할을 포기할 수 없었다. 더 크고 넓은 시각으로 변방에서 마지막 희망의 씨앗을 뿌리기로 다짐했다.

두 아들을 위해 수시로 글을 썼다. 선비로서 마음가짐과 자세, 옷차림과 살림살이에 대한 염려와 충고가 절도 있게 담겨진 사랑의 편지들이다. 절망에 빠진 아들들이 좌절할까, 방황할까 한시도 걱정을 놓지 못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글을 써 보냈다. 어떤 우환이 닥쳐도 학문에 대한 뜻을 꺾어서는 안 되는 이유와 희망을 놓치지 않아야 하며, 어차피 폐족이 되었으니 부귀영화 따위 꿈꾸지 말고 순수한 마음으로 학문할 수 있는 장점을 누리자고 설득했다. 시골에서 과수원이나 남새밭 가꾸는 일을 하지 않으면 세상에서 버림받는 것과 같은 이치라며 채소 농사도 권장했다.

사람 사귀는데 신중해야 함도 강조했다. 불효자와 불화 깊은 형제를 멀리하고, 계집종을 탐하여 횡포를 부렸다는 일가 사람도 멀리하라는 구체적인 지시, 닭을 키우겠다는 차남에게 사대부의 후예답게 지식에 기반한 격이 있는 양계를 해야 한다는 가르침, 주량이 늘었음을 지적하며 글공부는 아비를 이을 줄 모르고 주량만 아비를 능가한다는 농담 섞인 꾸짖음, 어머니 방은 종을 시키지 말고 직접 아궁이를 지펴 온기를 유지하도록 할 것, 형편이 어려워도 손님맞이에 최선을 다하고 기쁜 마음으로 대접할 것, 가문의 명예 회복에 희망을 놓지 말라는 당부가 절절하다.

“남이 알지 못하게 하려거든 그 일을 하지 말고, 남이 듣지 못하게 하려면 그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제일이다. 이 두 마디 말을 늘 외우고 실천한다면 크게 하늘을 섬길 수 있고 작게는 한 가정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온 세상의 재화, 우환, 하늘을 흔들고 땅을 움직이는 일이나 한 집안을 뒤엎는 죄악은 모두가 비밀로 하는 일에서 생겨나게 마련이니 사물을 대하고 말함에 있어 그 결과를 깊이 살피도록 하여라.”
- 190쪽, 1810년 봄 다산동암에서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중

유배생활 9년째 다산은 국사의 현장에서 중대한 사건 사고와 수많은 범죄의 실체에 대한 근원을 생각하게 하는 명문을 남겼다. 유명 연예인이나 프로야구 선수가 SNS 상에서 비밀리에 나눈 대화 내용이 알려져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최근 일련의 사건들도 생각나게 한다. 다산이 자식들에게 보여준 최고의 자긍심은 집안 어르신들이 거짓말을 입 밖에 내는 것을 평생 본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나눔에 대한 진리의 조언도 감동적이다. 재물을 가장 오래 보존하는 최고의 방법이 곧 남에게 베푸는 것이라는 말씀은 오늘날에도 기부 환경과 문화에 큰 울림으로 전해지고 있다.

의지할 것이라고는 책과 붓뿐이라고 했던 다산은 오직 독서만이 길이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강조했다. 아버지가 아무리 열심히 저술 활동을 하더라도 두 아들이 독서를 멀리하면 그것은 아무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라며 간곡히 부탁하고 타일렀다. 경학으로 독서의 밑바탕을 다진 후, 역사책을 섭렵하여 옛 정치의 득실과 잘 다스려진 이유와 어지러웠던 이유 등의 근원을 캐보도록 권한다. 우리 문학을 배척하는 세태와 역사적 사실을 인용함에 있어서도 걸핏하면 중국의 일이나 인용하는 것에 대해 못마땅함을 감추지 않으며 참된 독서법을 이야기한다.

천성적으로 시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다산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에 대한 많은 애정과 가르침을 남긴다. 채제공을 인용하며 시인의 활달한 기상을 강조했고, 시경 300편의 의미를 그대로 이어받은 시성으로서의 두보, 대현으로서의 한유, 도저히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은 소동파의 시를 예찬했다. 도연명과 사영운을 본받아 시의 근본에 대해 생각하고, 역사적 사실을 인용한 진실한 시 쓰기를 주문했다. 실학에 입각하여 옛사람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구했던 글들을 즐겨 읽도록 했는데, 삼국사기나 고려사, 징비록, 성호사설 등이 구체적인 추천도서다.

“천하에 두 가지 큰 기준이 있는데 옳고 그름의 기준이 하나요, 다른 하나는 이롭고 해로움에 관한 기준이다. 이 두 가지 큰 기준에는 네 단계의 큰 등급이 나온다. 옳음을 고수하고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높은 단계이고, 둘째는 옳음을 고수하고도 해를 입는 경우다. 세 번째는 그름을 추종하고도 이익을 얻음이요, 마지막 가장 낮은 단계는 그름을 추종하고 해를 보는 경우다. 너는 내게 홍의호에게 편지를 해서 항복을 빌고, 또 강준흠과 이기경에게 꼬리치며 동정을 받도록 애걸해 보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것은 앞서 말한 세 번째 등급을 택하는 일이다. 그러나 마침내는 네 번째 등급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 명약관화한데 무엇 때문에 내가 그 짓을 해야겠느냐.”
- 128쪽, 1816년 5월 3일 큰 아들에게 보낸 답장에서

귀양살이 16년째 끝을 알 수 없는 아버지를 걱정하여 장성한 큰 아들이 세상과의 타협을 제안했나 보다. 아버지 없는 설움 속에 살다가 딴에는 집안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머리를 굴려보고 방법을 모색했지만 돌아온 답장은 불호령이었다. 단순히 아버지의 자존심을 건드린 수준이 아니라, 여태 가르침을 헛되이 들은 스스로의 부끄러움에 얼마나 몸서리 쳤을까. 여전히 드러나는 매관매직의 유혹, 공공기관의 채용비리가 만연한 이 시대의 현상들을 생각할 때,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위대한 선비정신에서 큰 위로가 느껴지는 기분 좋은 글이다.

다산은 한 달쯤 뒤에 다시 두 아들에게 사대부다운 기상을 잃고 화려한 권력가의 집안이나 진수성찬으로 호위호식하며 사는 집안을 흠모하는 태도에 대한 서슬 퍼런 글을 남겼다. 노론들이 남인학파의 대부인 채제공을 떠받드는 것도 전국의 남인 사대부들이 모두 부모처럼 사모하는 존재이기에 불가피하게 존경하는 시늉을 하고 있을 뿐이라며, 중앙정부 돌아가는 사정을 꿰뚫어보는 혜안으로 조언한다.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온 자신과 달리 정적들에게 농락당하는 두 아들이 안타까워 더욱 강직하도록 타이르는 위엄이 느껴지는 명문이 아닐 수 없었다.

翩翩飛鳥 사뿐사뿐 새가 날아와
息我庭梅 우리 뜨락 매화나무 가지에 앉아 쉬네
有烈其芳 매화꽃 향내 짙게 풍기자
惠然其來 꽃향기 그리워 날아왔네
爰止爰棲 이제부터 여기에 머물러 지내며
樂爾家室 가정 이루고 즐겁게 살거라
華之旣榮 꽃도 이제 활짝 피었으니
有賁基實 열매도 주렁주렁 맺으리
- 138쪽, 1813년 7월 14일 한 해 전에 시집간 외동딸에게 보낸 하피첩에서 옮김

한 살 연상의 부인 풍산 홍씨(1761~1839)와 열다섯 살에 혼인한 다산은 참으로 금슬 좋은 부부의 모범을 보였다. 두 사람은 첫 아이를 유산한 뒤 모두 6남 3녀를 얻었으나 장남 학연(1783~1859)과 차남 학유(1786~1855) 삼녀(1793~?)만 남고 대부분 천연두로 잃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끝을 알 수 없는 유배령이 두 사람을 갈라놓았지만, 부인이 유배지로 보낸 신혼 시절 빛바랜 치마폭의 사연이 감동이다. ‘노을처럼 붉은 치마로 만든 첩’이란 의미의 ‘하피첩(霞?帖)’은 그 치마를 재단하여 글을 쓰고 첩을 만들어 자녀들에게 선물한 다산 편지의 백미다.

두 아들에게 먼저 하피첩에 글씨를 써 보내고, 남은 조각으로 딸에게 서화 매조도를 남겼다. 귀양살이 떠날 때 겨우 아홉 살이던 외동딸이 당시로서는 노처녀가 되어 스무 살 늦은 나이에 혼인한 것을 축하하며 보낸 사연이 참으로 애절하다. 곁에서 지켜주지 못한 딸을 아비 없이 시집보내는 마음은 딱하지만 깊은 사연과 정이 담긴 하피첩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 고귀한 사랑의 선물이 부럽기도 하다. 일흔다섯의 다산이 음력 2월 22일, 자신의 결혼 60주년 회혼일 아침에 부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타계한 것도 두 사람의 인연을 아름답게 하는 일이다.

두 아들만큼 빈번하게 서신을 교류한 대상은 흑산도로 유배 간 둘째형으로 그곳 어류에 관한 방대한 기록유산 ‘현산어보’를 남긴 정약전이다. 문화 예술을 비롯한 학문적인 성과를 논함과 더불어 형제애 깊은 편지를 수시로 주고받았다. 외동딸 혼사 무렵 기력이 쇠약해져 몇 달 사이에 이가 세 개나 빠져 서글프다는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꽤나 의지하던 존재다. 그런 형님이 유배지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다는 소식에 원통함을 감추지 못하고 오열하며 보낸 편지는 15년 전 막내아들 농장이 죽었을 때의 비탄에 빠진 이후 최대의 슬픔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직 다산에게는 이복형제 약현(1751~1821)과 약횡(1785~1829)이 있었지만 동복인 약전(1758~1816)과 약종(1760~1801)이 모두 서거하자 깊은 시름에 빠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두 아들이 힘겨운 생활에 부쳐 큰아버지 약현의 무관심에 섭섭함을 토로해 할 때에도 모질게 꾸짖었고 나약해진 마음의 아들들에 엄했었다. 남을 도와줄 때 정성을 다하되 그에 대한 보답도 바라거나 섭섭한 감정을 입 밖에 내뱉지 말 것과 아버지의 이복형인 큰아버지와 나이어린 작은아버지에게 소홀히 할까 걱정하며 구체적인 섬김의 방법을 적어 보낸 엄중함이 의연하다.

다산의 부친 정재원은 처복이 없어서 첫 부인 의령 남씨는 약현을 낳고 죽었다. 두 번째 부인 해남 윤씨와 사이에 각각 두 살 터울의 약전·약종·약용을 두었는데 그 마저도 요절하여 소실로 들어온 김씨가 어린 삼 형제를 거두어 키웠고, 한참 뒤 늦둥이를 얻었다. 늦둥이는 다산의 두 아들과 중간 나이의 아들 뻘 이복동생 약횡이었다. 서자인 그가 벼슬을 할 수 없어 의원이 되었다는 소식에 논어의 ‘지자이인(知者利仁; 지혜로운 사람은 어진 것을 이롭게 여긴다)’을 인용해 약자와 가난한 자를 먼저 돌보라는 귀한 글을 담아 부형의 도리를 멈추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과거제도는 쌍기에서 시작되어 춘정 변계량에게서 갖추어졌네. 무릇 이 과문을 익히는 자는 정신을 녹이고 세월을 허비하게 되기 때문에 무디고 거칠며 지리멸렬하게 그 생애를 마치게 되니, 참으로 이단 가운데서도 제일이고 세도의 큰 걱정거리네. 그러나 국법이 변하지 아니하니 이를 순순히 따를 뿐이며, 이 길이 아니면 군신의 의리를 물을 데가 없다네. 그래서 정암 조광조, 퇴계 이황 같은 선생들도 모두 이 과문을 닦아서 발신했다네. 그런데 지금 자네는 어떤 사람이기에 신발을 벗어던지듯이 돌아보지 않는가?”
- 325쪽, 유배에서 풀려난 순조 20년(1820년)에 마현으로 찾아온 이인영에게 당부하는 글

순조 18년, 드디어 귀양에서 풀려났지만 세상은 여전히 어지러워 다산초당 18제자들과 서신교환을 이어가며 희망을 전했다. 과거시험을 포기하려는 이인영에게 현실의 부조리함을 장단 맞춰 주면서도, 이상과 다른 현실을 받아들일 것을 당부했다. 다산초당 주인 아들 윤종심에게는 땅문서의 분석을 통해 사물의 변화무쌍함을 논했고, 윤종억에게는 성호의 실학사상과 삶의 지혜를, 장흥의 정수칠에게는 공부하는 경건한 자세와 기록하는 독서의 생활화를 가르쳤다. 변의지에게는 아름다운 꽃과 같은 문장을 이루는 방법에 대해 아름다운 글을 남겼다.

나라가 버린 지식인이 나라를 위해 실학사상을 집대성하고 학문·사상을 체계화하여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수백 권의 저서를 남겼지만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철저하게 무시당했다. 1936년 다산 200주기를 기념해 신조선사가 간행한 총 154권의 ‘여유당전서’가 최초의 공식 전집출판물이었지만 이미 나라가 망한 뒤였다. 또 다시 한 세기가 흘러 역사는 다산을 탄압했던 인물들과 다산의 위치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갈수록 쪼그라드는 이권을 놓고 중앙이 썩어갈 때, 망해가는 조선이 수용할 수 없었던 큰 그릇은 그렇게 변방에서 빛났다.

며칠 전, 500년간 조선의 육군 본부였던 600년 역사의 전라 병영성 복구 현장에서 놀라운 유물이 발견되었다. 조사 결과 그것은 다산의 병법서 '민보의'에 기록한 '함마갱'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수백 년이 흘러도 쓸모 있는 기록을 해두겠다고 다짐했던 다산의 꿈은 이렇게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조용히 빛을 발한다. 지금이야 경치 좋고 물 맑은 관광지로 각광받지만 그 시절 강진이라는 감옥에 갇혀 그 지역을 벗어날 수 없었던 다산의 신세가 얼마나 처량했던가. 조선을 집어삼킨 노론은 다산을 역적이라 불렀지만, 역사는 진실의 위용으로 우리의 자부심을 되살렸다.

시대는 바뀌어도 유배는 여전하다. 법 위에 군림하는 자들에 의해 탄압받는 정치사범, 거짓된 뉴스에 희생되거나 조작된 여론에 죽음으로 내몰리는 희생자들, 부당한 인사발령의 피해자들 모두가 이 시대의 유배자다. MBC 해직기자로 유배자의 삶을 살았던 이용마의 신간 ‘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는 암투병 중에 장래의 두 아들을 생각하면 쓴 진솔한 기록으로 다산의 마음이 느껴지는 책이다. 다산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희망이 보인다. 20년 20일의 긴 유배에서 돌아온 신영복 선생님 말씀처럼 야심성유휘(夜深星逾輝), 밤이 깊을수록 별은 더욱 빛나지 않겠는가.

- 안중찬 ahn0312@gmail.com 주)교보피앤비 기획실장 / 장거리 출퇴근의 고단함을 전철과 버스 안에서 책 읽기로 극복하는 낙관적이고 사교적인 생활인이다. 컴퓨터그래픽과 프로그래밍 분야 11권의 저서와 더불어 IT칼럼니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엔지니어 출신으로 한 권의 책에서 텍스트, 필자, 독자 자신을 읽어내는 서삼독의 실천가이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ㅣ저자 정약용ㅣ역자 박석무ㅣ출판 창비

“독서를 하려면 반드시 먼저 근본을 확립해야 한다. 근본이란 무엇을 일컬음인가, 학문에 뜻을 두지 않으면 독서를 할 수 없으며, 학문에 뜻을 둔다고 했을 때는 반드시 먼저 근본을 확립해야 한다. 근본이란 무엇을 일컬음인가. 오직 효제(孝弟)가 그것이다. 반드시 먼저 효제를 힘써 실천함으로써 근본을 확립해야 하고, 근본이 확립되고 나면 학문은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들고 넉넉해진다. 학문이 이미 몸에 배어들고 넉넉해지면 특별히 순서에 따른 독서의 단계를 강구하지 않아도 괜찮다. 또한 나는 천지간에 의지할 곳 없이 외롭게 서 있는지라 마음 붙여 살아갈 것이라고는 글과 붓이 있을 뿐이다. 문득 한 구절이나 한편 정도 마음에 드는 것을 만났을 때 다만 혼자서 읊조리거나 감상하다가 이윽고 생각하길 이 세상에서는 오직 너희들에게나 보여줄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너희들 생각은 독서에서 이미 연나라나 월나라처럼 멀리 떨어져나가 문자를 쓸데없은 물건 보듯 하는구나.”

정조와의 풍운지회(風雲之會)로 다산 정약용은 인생의 황금기를 보낸다. 배다리로 왕의 화성 행차를 기획하고 거중기를 활용해 수원화성을 매우 빠르게 축조하여 정조를 돕는다. 다산은 사도세자의 원혼을 달래고자 했던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임금의 측근 중의 측근이었다. 임금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관직에서도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다산이었다. 그러나 그의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었던 정조가 붕어(崩御)하자 다산은 새로운 운명을 맞게 된다. 붕당정치의 폐해가 극에 달했던 시대에 노론에게는 제거 대상 1호였던 다산, 그렇게 그는 원하지 않던,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유배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다산이 당쟁의 희생양이었다는 것은 아래의 기록을 보면 명확해진다.
  
- 이때 교리(校理) 윤영희(다산의 가까운 친구)가 다산의 생사를 탐지하려고 대사간 박장설을 찾아가 재판의 진행과정을 물었다. 마침 홍낙안이 와서 윤영희가 옆방으로 피해갔다. 홍낙안이 말에서 내려 방에 들어와 발끈 성을 내며 소리치길 ‘천 사람을 죽여도 정약용 한 사람을 죽이지 못하면 아무도 죽이지 않은 것과 같은데 그대는 왜 힘써 다투지 않소’라 하니, 박장설이 ‘저 사람이 스스로 죽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그를 죽이겠소’라 했다. 떠나간 뒤에 박장설이 말하기를 ‘답답한 사람이다. 죽여서는 안 될 사람을 죽이려고 두 번이나 큰 옥사를 일으키고도 나더러 다투지 않았다고 책하니 답답한 사람이로다.’라 했다. - 『사암선생연보』 1801년 10월 부분

두 번이나 큰 옥고를 치르게 해서서라도 다산의 죄를 찾고자 했던 반대파, 노론은 결국 그를 유배보내기에 성공한다. 그런데 만약, 그가 정쟁에서 밀려나지 않고 벼슬을 계속 했더라면 500권이나 되는 방대한 저술을 남길 수 있었을까? 어깨가 무너지고 복숭아뼈가 3번이나 구멍이 날 정도로 독서와 저술에 집착한 그의 치열했던 삶을 생각하면 처연하기까지 하다. 아마도 다산은 어쩔 수 없이 죄인은 되었지만 역사의 재평가를 위해서 열심히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의 글을 통해서 후세 사람들이 자신을 올바로 평가해 줄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는 죽음으로써 삶이 끝나는 게 아니라 죽어서도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것이 ‘글의 힘’임을 다산은 이미 꿰뚫고, 새로운 인생 역전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다산은 귀양지 강진에서 “어린 시절에 학문에 뜻을 두었지만 20년 동안 속세와 벼슬길에 빠져 옛날 어진 임금들이 나라를 다스렸던 대도(大道)를 알지 못했다. 이제야 겨를을 얻었구나. 그때야 흔연스럽게 스스로 기뻐하였다.”고 기록한다. 그리하여 육경(六經)과 사서(四書)를 가져다가 골똘히 생각에 잠기고 밑바탕까지 파내었다. 한(漢)나라 위(魏)나라 이후로부터 명(明) 청(淸)에 이르기까지 유학사상으로 경전(經典)에 도움이 될 만한 모든 학설을 광범위하게 수집하고 넓게 고찰하여 잘못되고 그릇되었음을 확정해 놓고는 그런 것 중에서 취사선택하고 다산 나름의 학설로 재정립한다. 다산은 하고픈 일이 있다면 목표 되는 사람을 한 명 정해놓고 그 사람의 수준에 오르도록 노력하면 그런 경지에 오를 수 있으니, 이런 것은 모두 용기라는 덕목을 통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p186) 밝힌다.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학문 연구의 기회로 삼고 방대한 저술을 남긴 다산의 긍정성과 용기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다산은 효제(孝弟)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효제를 풀어서 써보면, 부자자효형우제공(父慈子孝兄友弟恭)이다. 아버지는 자녀를 예뻐해 주고, 자녀는 부모에게 효도하며, 형은 아우와 우애롭게 지내고, 아우는 형을 공손하게 대해주는 일이라는 뜻이다. 다산은 효제를 ‘근본’이라고 쉽게 썼지만, 그의 표현은 ‘근기(根基)’라고 하여 ‘근본 바탕’이라고 한다. 그리고 효제가 아니고는 독서도, 학문도, 사람 되는 일도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래서 마음에 항상 만백성에게 혜택을 주어야겠다는 생각과 만물을 자라게 해야겠다는 뜻을 가진 뒤에야만 바야흐로 참다운 독서를 하라(p42)고 강조한다. 폐족이 되어 과거에 응할 수 없게 됐다고 해서 스스로 꺾이지 말고 경전 읽는 일에 온 마음을 기울여 글 읽는 사람의 종자까지 따라서 끊기게 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면서(p118) 자식들이 독서하는 것이 자신의 목숨을 살려주는 것이고,(p40) 자신의 제사보다 자신의 책 한편 읽어주고 자신의 책 한 구절 베껴두는 일(p150)을 더 중히 여기라고 두 아들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시와 문장에 대한 다산의 생각은 시를 지을 때는 역사적 사실을 인용하는 일에 주안점을 두도록 하고,(p56) 성정(性情)을 도야하려면 시를 읊는 것도 상당히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세상을 걱정하고 백성을 긍휼히 여겨 힘없는 사람을 구원해주고 재산 없는 사람을 구제해주고자 마음이 흔들리고 가슴 아파서 차마 그냥두지 못하는 간절한 뜻을 가져야 바야흐로 시가 된다.(p110)고 강조한다. 그리고 ‘문장이라는 것은.... 학식이 속에 쌓여 그 문체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는 기름진 음식이 창자에 차면 피부에 광택이 드러나고 술이 뱃속에 들어가면 얼굴에 홍조가 도는 것과 같다.’고(p323) 하면서 문장이라는 것은 급하게 완성될 수는 없기(p330) 때문에 꾸준히 갈고 닦아서 자신의 수양뿐만 아니라 남을 돕는데 쓰라고 당부한다.

비록 귀양지에 있었지만 폐족으로 가문이 멸문된 상황에서 학문이 뛰어나도 과거를 볼 수도 없고 과거를 봐서 급제해도 벼슬에 나갈 수 없었던 두 아들이 용기와 희망을 갖고 자신을 가다듬을 수 있도록 편지로 가르치고 훈계한다. 다산의 이 같은 정성과 가르침으로 장남 학연은 늦은 나이지만 직장 벼슬을 갖게 되고, 차남 학유는 농가월령가로 백성들이 농사를 짓는 데 유용한 지침서를 저술한다.

다산은 근검(勤儉)했고, 재물을 남에게 나누어 주는 것으로 애민(愛民)을 실천하고자 했고, 주막집 노파에게서도 겸손하게 배웠고,(p212) 天下腐已久(천하가 썩은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를 탄식하면서도 희희호호(熙熙??)의 시대, 만 가지 일이 모두 잘 다스려져 밝고 환하여 티끌 하나 터럭 하나 만큼 악이나 더러움도 숨길 수 없는 밤이 낮같은 세상(p201)을 꿈꾸었다. 그리고 그는 영오(潁悟)했지만 불행의 시대에 자신이 주어진 환경에서 기꺼이 자신의 삶을 살아냈던 선각자이자, 천리는 돌고 도는 것이니 한번 넘어졌다고 반드시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님(p162)을 믿었던 무한 긍정의 아이콘이었다. 다산은 몸에 중풍이 생겨 그런 마음이 점점 쇠잔해지고 있으면서도(p190) 사람이 해야 할 일을 다하지 않고 천명만을 기다리는 것 또한 이치에 합당하지 않지만, 사람이 해야 할 일을 이미 다했으나 이러고도 끝내 돌아가지 못한다면 이것 또한 운명일 뿐(p131)이라고 여전히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거인으로서의 면모는 후대에 큰 귀감이 된다.

-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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