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이야기/명법문 명강의

알아차림 하면 번뇌 사라지고 지혜가 일어난다

淸潭 2013. 11. 16. 16:16

 

담마찌따또야 선원장 아신 사사나 스님
 
알아차림 하면 번뇌 사라지고 지혜가 일어난다
 
2013.11.13 13:45 입력 발행호수 : 1220 호 / 발행일 : 2013-11-13

자신을 괴롭게 하는 마음
바꿔놓는 것이 바로 지혜


법으로 귀찮게 하는 이가

지혜롭고 현명한 수행자

 

 

▲아신 사사나 스님

 

 

저는 항상 배우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자리에 온 것도 배우기 위해서 즉, 담마로부터 배우기 위해서 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수행한지 이제 10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소중함과 훌륭함은 아무리 되새겨도 부족한 것만 같습니다.


가끔 이런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나는 절대로 부처님은 될 수 없겠다. 그냥 부처님 가르침대로, 법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자’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제가 비록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한국테라와다불교 상가에는 훌륭하신 선배 스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동안 저는 여름 안거를 미얀마에서 보내 왔는데 올해 처음 안거를 한국에서 보냈습니다. 아마 그 점을 스님들께서 아시고 올해의 까티나 가사를 제게 받으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


까티나 가사를 대표로 받는 스님으로 지정받고 법문까지 요청받았는데 제가 이 자리에서 드리고 싶은 말씀도 역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사띠(sati, 알아차림)와 지혜’ 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항상 사띠와 지혜를 강조합니다. 아마 제 법문의 전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항상 그 안에서 인터뷰와 수행지도를 합니다. 그 정도로 부처님께서는 사띠와 지혜를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라고 하면 사띠와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사띠와 지혜는 번뇌와 아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사띠와 지혜로서 생활하는 것은 ‘번뇌를 많이 이해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얻는 것에는 탐심으로 얻는 것과 지혜로서 얻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탐심(욕심)은 그냥 좋다고 생각을 해서 원하는 것이지만 지혜는 좋은 줄 알기 때문에 원하는 것(chanda, 서원)입니다.


지혜로서 좋은 줄 아는 것이란 탐심으로 원해서 좋은 것이 아니라 ‘최선-최고의 선(善)’을 말합니다. 그래서 최선의 다른 말은 ‘만족’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이 ‘얻음’이 되는 것입니다. 지혜가 났다고 하는 것이란 다른 말로 만족을 얻었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지혜로서의 최선은 딱 ‘알맞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지혜가 일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선입니다.


지혜로서 생활할 때 괴로움은 덜 할 것이며 탐, 진, 치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은 늘 평온하고, 상대를 배려할 줄 알고, 상대를 인정할 줄 알고, 시시비비하지 않기 때문에 늘 알맞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라밀 중 인내를 뜻하는 인욕바라밀이 있습니다. 진정한 인욕이란 무엇일까요? 무조건 참는 것만이 인욕이 아닙니다. 진정한 인욕은 탐, 진, 치가 없는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탐, 진, 치가 없다고 한다면 사띠와 지혜가 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사띠와 지혜가 좋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탐심, 진심, 어리석음으로 일할 때 아주 괴롭다는 것을 경험하였다면 사띠와 지혜가 일할 때의 평온함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여기 오신 이유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담마가 있는 곳에서는 탐, 진, 치가 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방금 여러분들이 스님들께 가사를 올리는 까티나 의식을 치렀습니다. 그때부터 지금 이 법문을 듣는 순간까지 탐, 진, 치가 일을 하였습니까? 아마 아닐 겁니다. 지금 신심은 배가 되어 있을 것이고, 삐띠(환희)가 일어나 있을 것이며, 물론 거기에는 사마디(삼매)도 들어 있을 겁니다. 번뇌가 일하지 않으면 사마디는 그냥 들어 있습니다.

 

그런 마음상태라야 더욱 담마를 소중히 알고 상가에 대하여 존경심을 갖게 되며 부처님에 대한 존귀함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그리하여 법석이 있는 곳이 항상 평온한 이유는 붓다, 담마, 상가가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재가불자 따로, 스님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불, 법, 승 삼보가 함께 하기 때문에 늘 평온한 것입니다.


담마를 생각하고 부처님을 생각할 때 마음이 평온한 이유도 바로 번뇌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명호(염불)를 부르거나 기도를 할 때도 ‘부처님은 번뇌가 없는 분’이라고 생각하면 평온해 집니다. 무턱대고 명호를 부르거나 빌기만 하는 것보다는 ‘부처님께서는 번뇌가 없는 분으로서 늘 평온하게 자비희사로 사셨다’라고 생각하면 아주 좋습니다. 하지만 무조건 바라고 빌기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잘 살펴보자면 빈다고 하는 마음 뒤에는 반드시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 마음이 탐심인데 그 마음으로 자꾸 빌기만 하면 곤란합니다.


불공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바라고 원하는 마음을 평온한 마음으로 바꿔놔야 합니다. 그러한 원인과 조건을 갖춰놓아야만 합니다. 번뇌로 가득 찬 마음으로 그냥 무턱대고 빈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마음의 문을 열어주고 방향을 틀어줘야 합니다. 원인과 조건을 잘 갖춤으로서 잘 되는 것이고 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일이 조건이 갖추어져야 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무조건 빌고 원하기만 합니다.


사실 무조건 원하면 괴로움만 남습니다. 그 마음에 만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탐심의 성질 자체가 불만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마음의 문을 열어 주고 방향을 틀어주면서 평온한 상태로 바꾸는 것이 조건을 갖춰놓는 것입니다. 결국 평온한 마음 상태로 바꿔놓는 것을 사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인 사띠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자신이 자신의 마음 상태를 직접 보기 때문에 알아차림입니다. 알아차림이 있는 상태에서 그것을 자꾸 생각하는 것을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혜는 멀리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괴롭게 하는 마음을 바꿔놓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제부터 지혜가 멀리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아주 단순하고 간단하게 생각하십시오. 불선(不善)의 마음, 번뇌가 자꾸 일어나는 마음을 알아차리면서 바꿔놓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는 것도 사띠라고 할 수 있고,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잘 모르고 원하는 마음으로 빌기만 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우리는 스님들의 법문을 많이 듣지만 잘 잊어버립니다. 왜 잊어버릴까요? 사띠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띠가 있습니다. 사띠를 더욱 계발시키는 것만이 관건입니다. 사띠연습을 많이 해두고 습관들여야 합니다. 습관 들이지 못해서 놓치고 잊어버립니다.

각 선원에 오고 수행처에 가야만이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수행을 잘하는 사람들은 때와 장소가 없습니다. 어디에서든 알아차림과 지혜를 잘 쓰는 것이 수행을 잘 하는 것입니다. 수행을 열심히 하는 이유도 수행을 언제 어디에서든지 능숙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잊어버리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게 해야 됩니다. 본래 사띠는 잊지 않는 성질이 들어 있습니다. 자꾸 사띠를 하는 것은 바로 마음의 아는 성질을 계발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사띠(알아차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습관화시켜 놓으면 마음에 번뇌가 거세게 몰아칠 때도 번뇌보다 사띠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사띠는 그 번뇌의 마음을 아주 빠르게 현재로 바꿔놓습니다. 새록새록 바꿔놓기 때문에 늘 현재에 평온합니다. 처음 수행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사띠연습을 많이 해야 됩니다. 그래서 연습을 많이 한 사람들은 많은 이점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꾸준히 수행을 해야만 합니다. “나는 어느 선원에 다니고 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 선원에서 꾸준히 수행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스스로 점검해 볼 일입니다.


알아차림이라는 것이 누가 갖다 주는 것이 아니고 오직 본인이 직접 해야만 합니다. 거기에 선업공덕도 부지런히 쌓아야 합니다. 선업공덕을 쌓는 가장 좋은 방법은 번뇌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자리에서 번뇌를 많이 덜어 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 상태를 한번 잘 들여다보십시오. 어쩌면 여러분들이 스님들보다 더 평온하고 잔잔한 삐띠(환희)가 흐르는 것 같습니다. 번뇌를 덜어내면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 안에 사띠와 지혜를 채워 넣으면 더욱 그렇습니다.


불, 법, 승 삼보 안에서 자신이 그동안 해왔던 신행을 지속해도 좋습니다. 여러 가지 선업공덕을 쌓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해도 좋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아주 작은 공덕이라도 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번뇌가 쌓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길게 놓고 본다면 ‘윤회에서 벗어난다’, ‘천상에서 태어난다’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우선이 되는 것은 바로 지금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조건을 만드는 것입니다.


수행하는 방법을 배워놓지 않으면 일어나는 번뇌를 어떻게 해결해야 될지 모릅니다. 수행방법을 알고자 한다면 스님들께 자꾸 물으십시오. 법으로 귀찮게 하십시오. 지혜롭고 현명한 수행자들은 법으로 귀찮게 하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청법을 하였는데 스님들이 못한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스님이 된 이유는 여러분 모두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주고 나눠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스님들도 수행과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선업공덕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수행하고 공부하는 것이 공덕을 쌓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수행하여 담마(법)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물어보는 사람마다 바르게 가르쳐 줄 수 있도록 항상 수행하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태어날 때 왕자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런데 왕자의 직함을 버리고 수행자가 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바른 법을 전하기 위해서겠지요. 그런 부처님을 생각하면 게을러질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있는 법석이라면 어디라도 꼭 참석해서 배우십시오. 배워가는 것 자체가 무지의 마음에 공덕을 쌓는 일입니다. 여러분들께 감사함을 전하고 건강을 기원하면서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내용은 10월26일 부산 붓다의 길따라 선원에서 봉행된 제5회 한국테라와다불교 까티나(가사공양) 법회에서 아신 사사나 스님이 설한 법문을 요약한 것입니다.

 



사사나 스님은 2000년 12월 미얀마 쉐우민 수행센터의 아신 떼자니아 사야도로부터 위빠사나 심념처(心念處) 수행을 시작했다. 이듬해인 2001년 11월에는 쉐우민 선원의 우 꼬살라 사야도로부터 비구계를 수지했다. 국내에서는 2006년 11월~2007년 6월 서울 보리수선원, 2007년 12월~2008년 3월 천안 호두마을에서 수행지도를 했다. 2007년 스님의 지도를 받는 수행자들이 뜻을 모아 다음카페에 온라인 수행모임을 개설한 이후 2008년 4월부터는 오프라인에서도 매월 1회 장소를 옮겨가며 정기적으로 개인 인터뷰 및 수행지도를 해왔다. 이러한 인연을 이어 스님은 지난 2012년 10월 전북 완주의 숲속 담마찌따또야(선원)에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