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남해 금산 보리암
- 풍랑 같은 번뇌가 관음의 품에서 숨을 죽이다
- 2012.03.26 15:58 입력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발행호수 : 1139 호 / 발행일 : 2012-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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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보낸 나뭇가지 사이로 합장한 마음이 걸렸다. 굽어보는 해수관세음보살상 뒷모습이 그윽하다. 멀리 다도해가 일렁였다. 남해 금산 보리암이 가슴에 담긴 순간이다.
남해 보리암(주지 능원 스님)은 강화 보문사, 여수 향일암, 양양 홍련암과 더불어 대표적인 관음기도도량이다. 금산 복곡 제2주차장에서 800m 오르다 100m 아래로 난 계단을 내려가야 만날 수 있다. 제법 가파른 오르막이다. 아이와 함께 온 부부와 지팡이 짚은 노보살, 연인들, 도량을 내려오는 기도객들이 마주친다.
느린 걸음으로 쉬엄쉬엄 올라도 30분이면 족하다. 아스팔트와 시멘트가 흙을 덮기 전 3~4시간 걸리던 길이다. 예부터 대자대비 관음보살을 찾는 발걸음은 좁고 위험한 산길도 개의치 않았을 게다. 등산복 차림에 카메라를 메거나 막걸리 들고 금산에 오른 이들도 적지 않다. 편해진 길을 고마워해야할지 옛 신심을 그리워해야할지…….
보리암 불교용품점에 다다르면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도량이 눈에 들어온다. 보리암은 원효 스님이 창건했다고 알려졌다. 바랑 하나 달랑 짊어 메고 운수행각 중이던 스님은 온 산이 빛나듯 방광한 모습에 홀린 듯 산에 들었다. 초당을 짓고 수행했다. 683년(신문왕 3)이었다. 이곳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한 스님은 산 이름을 보광산(普光山), 초당은 보광사(普光寺)라 했단다. 지금도 스님이 좌선했다는 좌선대와 ‘화엄경’을 읽었다는 화엄봉(華嚴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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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3년 원효 스님 창건…보광사서 이름 개칭
천년 지나 보광사는 보리암 옷을 입는다. 1660년(조선 현종 1) 현종이 이름을 바꾼다. 태조 이성계가 기도 끝에 새 왕조를 열었다 해서 왕실원당으로 삼고, 보리암으로 개칭했다.
조선시대를 열기 전 태조는 보리암에서 임금이 되길 비는 제사 선유제를 지냈다. 100일 기도에 치성을 드렸다. 지리산과 계룡산서 올렸던 기도가 답이 없자 비장미마저 서렸을 터다. 태조는 “원이 이뤄진다면 산을 비단으로 감싸겠다”고 약속했다. 덜컥 조선의 임금이 되자 태조는 난감했다. 값비싼 비단으로 어찌 산을 덮는단 말인가.
그 때 신하 한 사람이 묘책을 꺼냈다. “어명을 내려 이제부터 산 이름을 비단 금(錦), 뫼 산(山)자를 써 금산이라 부르게 하옵소서. 훗날 사람들이 금산이라 부르면 실제 비단을 두른 것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태조가 매우 흡족했다는 후문이다. 해서 ‘태조 이성계가 기도했던 곳’ 선은전(璿恩殿)이 보리암 인근에 자리하고 있다.
보광전(普光殿)과 예성당 사이에 섰다. 보광전 당호의 법당은 흔치 않다고 한다. 원래 고대 중인도 마가다국 보리도량에 있었다고 하는 법당 이름이다. 부처님께선 적멸도량과 보광법당회, 도리천회, 야마천회, 도솔천회, 타화천회, 보광법당중회, 보광법당심회, 서다림회 등 9번 법회를 열고 ‘화엄경’을 설했다. ‘깨달음(=빛, 光)을 널리 펴겠다’는 법당 이름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다. ‘화엄경’ 입법계품엔 관음보살이 상주하며 중생을 제도한다는 인도 남쪽 보타락가산이 등장한다. ‘화엄경’과 관음보살, 보광전이 그리 낯설지 않는다.
해수관음보살상 참배에 앞서 화엄봉으로 발길을 돌렸다. 바위 모양이 화엄의 한자 ‘화(華)’자를 닮았고 원효 스님이 이 바위에서 ‘화엄경’을 읽었다 해서 화엄봉이다. 화엄봉에 오르면 화엄봉 그늘이 드리운 보리암이 시선에 들어온다.
섬들은 푸른 다도해에 뿌릴 내렸고 도량은 금산을 병풍처럼 둘렀다. 앞과 양옆은 바다요, 화엄봉 그늘이 닿을 듯하니, 다도해 품고 화엄의 바다에 풍덩 빠질 듯한 기세다. 원효 스님도 봤으리라. 깎아지른 바위 위에 걸터앉은 도량을 보며 ‘화엄경’을 독송했을 터다. 풍경은 두 손을 가슴으로 모았다. 나지막이 “나무관세음보살”이다. 금산 제31경이다.
해는 화엄봉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다시 보광전과 예성당 사이에 섰다. 종각 그림자가 발치에 와 닿았다. 인연 그림자다. 3월20일 오후 5시, 지는 해, 보광전과 예성당 사이 그리고 객. 인연 따라 곧 사라질 게다. 등산객들이 지나쳐 갔다. 해수관음보살상으로 향하는 계단에 이르자 노보살이 올라오신다. 한 손은 지팡이에 한 손은 무릎에 올라가 있다. 계단 하나에 발걸음 하나 옮기실 때마다 한꺼번에 숨이 터져 나온다. 해수관음상을 참배해야 노보살 신심을 짐작이라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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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 병풍 두르고 다도해 끌어안은 기도성지
금산 제1전망대라고도 불리는 해수관음상은 참배객들이 끊이지 않았다. 헬리콥터로 이곳에 이운될 때 찬란한 서광을 내뿜었던 해수관음이다. 자신이 아닌 사랑하는 인연들을 위한 기도만 들어준다는 보리암 해수관음이다.
누구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누구나 찬 바닥에 무릎 꿇고 이마를 맞댔다. 탑돌이도 빼놓지 않았다. 누구를 위한 기도일까.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엔 마음속으로 관음보살을 간절하게 염원하면 불구덩이가 연못으로 변하고 성난 파도가 잠잠해진다고 했다.
고 정채봉 작가의 ‘오세암’ 길손이가 떠오른다. 폭설에 홀로 오세암에 갇혀 마음 다해 관음보살을 부르짖던 길손이는 게송 반쪽을 구하려 낭떠러지로 몸 던진 선재동자의 굳은 신심과 다를 바 없다.
파도처럼 밀려든 번뇌가 깎아버린 신심이라도 절절함은 남았을 터다. 남을 위한 기도는 불구덩이였던 자신 마음 한 자락에 연꽃 핀 연못이 자리하리라. 잠잠한 바다에 일렁이는 파도는 번뇌에 다름 아니다. 해수관음이 고해인 사바를 품듯 다도해를 안았다. 풍랑 같은 번뇌가 관음보살 품에서 숨을 죽였다.
해수관음 앞엔 보리암전 3층 석탑(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4호)이 덩그러니 놓였다. 나쁜 기운을 억누르고 약한 기운을 보충하는 성격을 지닌다 했다. 전설에 따르면, 683년(신문왕 3) 원효대사가 금산에 처음 절 세운 것을 기념하기 위해 가락국 수로왕비 허태후가 인도에서 가져온 석재로 탑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 다른 얘기도 전한다. 허태후가 가져온 부처님 사리를 이곳에 안치하기 위해 탑을 세웠다고도 한다. 허나 탑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고 양식 또한 고려 초기 것이기 때문에 전하는 얘기와 사실상 거리가 멀다. 이곳에 나침반을 두면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한다고 한다. 방향 잃어버린 신심으로 참배했지만 해수관음은 미소 지을 뿐이었다.
보리암 범종은 독특했다. 경봉 스님 글이 새겨져 있었다. ‘원음종(圓音鐘)’이다.
남해 금산의 끝 간 데 없는 경치에(南海錦山無限景)
하늘가 구름 밖 이 소리 퍼져 가네(天邊雲外此鐘聲).
삼라만상이 모두 다른 것 아닐진대(森羅萬象非他物)
한마음 나지 않아 여전히 미명일세(一念不生猶未明).
일승원음(一乘圓音)이다. 불이문 통과한 구도자의 법열이 소리로 화해 울린다고 한다. 아직 불이문에 이르지 못한 구도자에게 용기와 청량을 북돋고 일주문 바깥에서 허덕이는 중생 번뇌를 씻어주기 위함이다. 부처님 원음을 대신해서 토해내고 있는 게다. 모두 제각기 자신 귀로 불음을 듣는다. 마음 그릇에 따라 불음을 담는다. 기우는 해가 범종 그림자를 도량에 길게 드리웠다.
각진(47) 거사는 3년 발원으로 보리암에서 관음보살을 부르짖고 있었다. 3년째다. 남해군에 거처를 마련하고 동 트기 전 일어나 1시간을 꼬박 걸어 새벽 3시30분 예불에 참석했다. 마음 그릇에 부처님 법 담기 위해 정진했다.
오분정근으로 바뀌어 밤 11~새벽 1시 자시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길 11개월이 흘렀다. 2011년 7월부터 아예 사찰 일을 도우며 기도에 매진 중이다. “죽기 전 마음속 부처를 찾고야 말겠다”는 원력이었다. 복을 구하는 게 아니랬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마음 그릇 먼저 다듬는 게 먼저였다”고 했다. 그는 무소유 법정 스님 말씀을 빌렸다. “단지 자신의 간절한 소망을 염하는 것이 기도”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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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파리 다 떨쳐낸 나뭇가지가 앙상하지 않았다. 싹이 움틀 기운을 품고 있어서다. 봄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뭇가지가 잘려나가도 뿌리가 깊으면 새움이 돋아난다. 우리가 숨 쉬는 일을 그만두지 않는 것처럼 생명 있는 존재의 한결 같은 삶이다.
대신불약(大信不約)이다. 큰 믿음은 약속을 하지 않는다. 겨울 가면 봄이 온다 약속하지 않아도 봄은 온다. 겨우내 찬바람과 눈, 비를 견딘 보리암 고목들. 천년 풍설과 생명 다한 사연들을 품었다. 그리고 새싹이 터 다시 만년을 잇는다.
잎 떨군 나뭇가지 사이로 해수관음 앞에서 기도하는 이들이 보였다. 보리암 해수관음을 찾는 기도객 신심도 약속을 하지 않는다. 천년 번뇌와 망상이 나고 죽는 사연을 품은 마음엔 다시 신심이 싹 터 만년을 이으리라.
달빛은 천개 강 밑을 뚫어 비춰도 흔적이 없을 뿐이다.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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