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상 대신 적멸궁 뒤 수마노탑에 사리 봉안
한 겨울에도 참배객 발걸음…1년 내내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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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 숲과 골짜기는 태양만 허락했다. 멀리 세속 티끌은 끊어졌다. 정결하기 짝이 없다. 정암사(淨巖寺)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기도도량 정암사는 티끌 하나만큼 의심조차 머물지 않았다. 2월7일 오후 강원도 정선 고한읍 정암사는 영하 10도 언저리를 기웃거렸다. 속절없었다. 태백산을 휘감은 겨울바람은 외투를 파고들어 온몸을 떨게 했다. 세속 티끌은 끊기고 칼바람과 목탁 그리고 염불소리만 그득했다.
극락교 건너 털신 한 짝 올라선 적멸궁에서는 목탁소리와 염불만 흘러나왔다. 세차게 부는 산바람에 애꿎은 풍경만 몸서리쳤다. 적멸궁 정면에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돌았다. 사방 기둥 주련에 마음을 빼앗겼다. ‘법화경’ 여래수량품 게송 구절이다.
위도중생고(爲度衆生故)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까닭으로
방편현열반(方便現涅槃) 방편으로 열반을 나타내었으나
이실불멸도(而實不滅度) 이에 진실로는 멸도하지 않고
상주차설법(常住此說法) 항상 이곳에 머물며 법을 설하느니라
아상주어차(我常住於此) 내가 항상 여기 머무르면서
이제신통력(以諸神通力) 모든 신통력의 힘으로써
영전도중생(令顚倒衆生) 거꾸로 된 중생으로 하여금
수근이불견(雖近而不見) 비록 가까우나 보지 못하게 하느니라
중견아멸도(衆見我滅度) 중생이 내 멸도한 것을 보고
광공양사리(廣供養舍利) 널리 사리에 공양하며
함개회연모(咸皆懷戀慕) 모두 다 사랑해 그리워함을 품고
이생갈앙심(而生渴仰心) 목마르게 우러르는 맘을 내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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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르게 우러르는 마음이 있었던가. 간절하게 부처를 그리워했던가. 태백산 겨울바람이 코와 뺨을 붉게 물들였다. 바람은 얼어붙은 몸에 연신 채찍을 가했다. 이곳에 신라 645년 수마노탑을 세우고 절을 창건한 자장율사의 주장자처럼. 극락교와 적멸궁 사이에 율사가 평소 사용하던 주장자는 흰 눈 사이로 푸른 기상을 숨기지 않았다.
참회해야 했다. 일심교(一心橋)를 지났다. 기도객들이 곳곳에 쌓아올린 돌탑을 뒤로하고 183개 계단을 올랐다. 수마노탑은 온몸으로 찬바람을 맞이하고 있었다. 탑은 정암사 도량을 노려보고 있었다. 탑 옆 좌복을 꺼내 무릎을 꿇고 합장했다.
수마노탑은 자장율사가 모셔온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다. 때문에 적멸궁에는 불상을 모시지 않는다. 탑은 여느 탑과 달랐다. 높이 9m, 지대석 너비 3.04m, 상륜 높이 1.7m에 이르는 탑은 두께 5∼7cm의 크고 작은 벽돌로 7층을 쌓았다. 보물 제410호다. 1972년 전면 해체, 복원될 당시 기단부 최하단석 및 적심부에서 부처님 진신사리와 청동합, 은제외합, 금제외합 등 사리장엄구, 염주 및 금구슬 등이 발견됐다.
율사는 처음엔 산머리에 사리탑을 세우려 했단다. 그러나 세울 때마다 무너졌다. 간절한 마음이 부족한 탓이리라. 다시 기도하니 하룻밤 사이 칡 세 갈래가 눈 위로 뻗어 지금의 수마노탑, 적멸궁, 현재 절터에 멈췄고 율사는 절을 짓고 갈래사(지금의 정암사)라 불렀다.
일연 스님은 다르게 증명했다. 율사는 만년에 수다사를 세우고 그곳에서 기거하던 중 꿈을 꿨다. 스님 한 분이 “내일 대송정에서 만나겠다”는 말을 남긴 것이다. 다음날 율사가 송정에 이르니 과연 문수보살이 와 있었고 보살은 “태백산 갈반지에서 다시 만나자”며 사라졌다. 태백산에 이른 율사는 큰 구렁이가 나무 틈에 똬리 튼 모습을 보고 “이곳이 갈반지다”라고 했다. 소위 심봤다. 율사는 이곳에 석남원(현재 정암사)를 짓고 문수보살이 내려오길 기다렸다. 이에 어떤 늙은 거사가 누더기 가사를 입고 칡으로 만든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아 메고 와서 시자에게 말했다. “자장을 보러 왔다.” 시자는 “내가 좌우에서 시종한 뒤로 아직 우리 스승님 이름을 부르는 자를 보지 못했는데,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처럼 미친 말을 하느냐?”고 거사를 물리쳤다. 그래도 거사가 “다만 네 스승에게 아뢰기만 하라”며 재차 청했지만 율사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꾸짖어 내쫓으니 거사가 말했다.
“돌아가겠다. 돌아가겠다. 아상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겠는가?”
삼태기를 거꾸로 터니 강아지가 사자로 변했고 거사는 거기에 올라앉자 빛을 뿌리며 사라졌다. 율사는 시자에게 그 말을 듣고 그제야 위의를 갖췄다. 그 빛을 찾아 서둘러 남쪽 고개에 올라갔으나 벌써 까마득했다. 그리곤 세상을 떠났다. ‘삼국유사’ 제4권 제5 의해편 자장정율조 기록이다.
정월이라 수마노탑을 참배하는 사람이 많았다. 객들은 공양물을 올리고 108염주를 돌리며 절을 했다. 빨간 외투와 검은 바지, 마스크에 아이보리색 모자를 쓴 여성은 108배를 마저 채웠다. 버스 한 대로 서울 잠실 불광사에서 온 참배객 30여명이었다. 오대산 적멸보궁과 태백산 보궁, 사자산 보궁을 참배하는 순례 중이었다. 보현행(56) 보살은 “간절히 기도하면 감사하는 마음이 싹 튼다”며 “내가 잘 났다는 아상은 자리할 곳이 없다”고 했다.
10년 넘게 정암사에서 지낸 총무 덕진 스님은 “두꺼운 알 껍질은 아상이며 껍질 속에 불성이 있다”고 확신했다. “기도는 껍질을 깨뜨리는 과정”이라고 했다. “돈과 명예, 지위를 바라는 탐욕을 계속해서 바치고 비우고 녹여내는 마음”이 기도라고 강조했다. “껍질 갈라진 틈으로 모든 인연을 감사하는 마음이 조금씩 차오르면 결국 껍질이 완전히 깨진다”는 게 스님 설명이다. 스님은 2시간씩 하루 4번 기도하는 사분정근으로 2000일 기도를 회향한 어느 수행자 얘기를 꺼냈다. 한 번도 기도에 빠지거나 염증내질 않았다고 했다. 기도가 끝나갈 무렵 그 수행자 얼굴은 맑게 빛났다고 했다.
밤, 객실 인욕에 몸을 뉘였다. 정암사는 1박 이상 객을 머물게 하지 않는다. 인근에 도박하는 곳이 생겨 허깨비를 좇다 상심한 이들이 숙소마냥 머물러서다. 카지노가 생겨 적멸궁으로 향하는 참배객들을 위한 길이 넓어지고 차편이 잦아졌다. 하지만 비극 안은 이들이 정암사 품으로 들어오는 그림자도 생겼다. 새벽 3시, 오전 9시, 오후 2시, 저녁 6시30분 등 하루 4번 기도를 빠져도 퇴방이다. 마음은 쉬이 머리를 베개에 눕히지 못했다. 늦은 밤, 해우소에서 객실로 오르던 길에서 바라본 수마노탑은 형형히 빛났다. 탑 위 별들은 밤하늘에 총총히 박혔다. 밤낮으로 부처님이 365일 기도 끊이지 않는 정암사를 굽어보는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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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량석과 새벽기도소리가 도량을 장엄했다. 새벽바람에 몸살 앓는 풍경이 잠을 쫓았다. 수마노탑에 다시 오르기 전 관음전에 걸린 온도계는 영하 20도를 가리켰다. 정암사 스님들은 아랑곳 않고 극락교를 건너 적멸궁으로 향했다. 적멸궁에서 흘러나오는 기도소리는 태백산 골골마다 스며들고 있었다. 적멸궁은 정암사를 가로지르는 계곡물과 남쪽에서 흐르는 계곡물이 만나는 지점인 천의봉 자락 끝에 서쪽 방향으로 정좌했다. 이 계곡엔 천연기념물 제73호 열목어가 서식한다. 수온이 영하 20도 이하가 아니면 살지 못하는 민물고기다. 눈에 열이 많아 눈알이 빨갛기 때문에 열목어라 하며, 그 열을 식히고자 찬물에만 산단다. 참배객들도 탐심에 찌든 마음을 식히고자 태백산 정암사 적멸궁을 찾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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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마노탑에는 한 스님이 정성스럽게 절을 올리고 있었다. 영하 20도를 웃도는 칼바람도 스님의 신심을 흠집 내지 못했다.
정암사에는 봉우리가 셋 있다. 동쪽 천의봉, 남쪽 은대봉, 북쪽 금대봉이다. 이 가운데 보탑이 셋 있다. 금탑, 은탑, 수마노탑이다. 금탑과 은탑은 감춰져 눈에 보이지 않는단다. 후세 중생들 탐심을 우려해 불심 없는 중생들 육안으로 볼 수 없도록 했다. 불심 가득 일으켜 지혜의 눈으로 금탑과 은탑을 보는 주인공이 누굴지 궁금하다.
부처님은 거꾸로 된 중생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금탑과 은탑을 볼 수 없었다. 세간의 한 티끌 탐심조차 머물지 못하는 도량, 그곳은 중생심을 허락하지 않았다. 천하 고승 자장율사는 아상에 사로잡혀 문수보살을 친견하지 못했다. 잘못을 뉘우치며 절규하다 명을 달리한 율사 얘기는 정암사를 나서는 발걸음에 무거운 추를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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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 스님에게 인사를 청했다. 정암사 대중이 말렸다. “부처님 참배하고 가면 됐다”는 평소 스님 가르침을 전했다. 수마노탑 위에 총총히 박혔던 별들이 까마득하다.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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