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539년 고구려 수도 낙양. 동사(東寺)의 주지 승연을 비롯해 40여 명의 스님과 불자들은 전국 곳곳에 부처님 가르침을 널리 알려 국가가 번영하고 백성을 평안하게 할 것을 발원했다. 그리고 그 발원을 실현하기 위해 천불을 만들어 전국에 배포하기로 하고 함께 힘을 모아 불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때 자리에 참여했던 비구 법영은 그 가운데 스물 아홉 번 째 불상인 인현의불(因現義佛)을 모시고 공양하게 됐다. 그러나 이 불상은 세월이 지나면서 어느 때인가 모르게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1963년 1400년만에 발굴
그리고 1400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 넘은 1963년 7월 16일. 경남 의령군 대의면 하촌리에서 홀로 시어머니와 다섯 남매를 돌보며 막일로 생계를 꾸려나가던 41세의 강 모 여인은 이날도 일당을 받고 도로공사장에서 돌 나르는 일을 하던 중 돌무더기 속에서 반듯하게 누워있는 금빛 찬란한 작은 부처님을 발견했다.
여인은 금으로 만든 부처라는 생각에 품속에 감춰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소문이 나면서 새로 제정된 문화재보호법의 존재를 알고 있던 동네 어른들이 지서에 신고할 것을 권유하자 고민 끝에 지서에 가서 금불상 취득 경위를 신고했다.
불상은 곧바로 경상남도 당국을 거쳐 문교부에 보고되고 이어 전문가들이 수 차례 현장조사와 불상에 대한 평가를 하면서 ‘남한 지역에서 출토된 유일한 고구려 불상’으로 밝혀졌다. 이 불상이 바로 539년 고구려 수도 냑양 동사에서 제작된 인현의불로, 1963년 말 국보 제119호로 지정된 ‘연가칠년명금동불입상(延嘉七年銘金銅佛立像)’이다.
연가칠년명금동불입상은 광배에 ‘연가 7년’으로 시작하는 4행 47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어, 이 불상이 곧 고구려 동사에서 제작된 불상(인현의불)임을 증명했다. 발견 장소가 절터나 불교유적지가 아니라는 점은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으나, 발견자인 강 여인은 당시에 문화재보호법 제정 공포 후 최대 액수인 20만원을 보상금으로 받기도 했다. 어려운 살림에도 시어머니와 다섯 남매의 생계를 책임지던 여인이 부처님 가피를 입은 셈이다.
금동제인 불상의 높이는 16.2cm로 작은 규모다. 그러나 삼국시대 불상으로는 드물게 작은 소라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고 정수리에는 커다란 육계가 있다. 비교적 작은 얼굴에 살이 빠져 길쭉한 가운데 미소를 머금고 있으며 왼쪽의 세 번째와 네 번째 손가락을 구부리고 있는 모습이 삼국시대 불상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옷자락은 좌우로 힘차게 뻗쳐 있으며 날카롭고 힘있는 모습이 중국 북위 이래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어, 오늘날에도 균형미와 조각미가 뛰어나다는 찬사를 받고 있다.
엽기적 도난 사건에 사라질 뻔
현존 최고의 유명세 때문이었을까. 불상은 국보로 지정된 3년 후 정체 모를 사람에 의해 또다시 모습이 감춰질 위기에 처했다. 1967년 10월 24일, 덕수궁미술관 2층 제3 전시실 진열장 안에 있던 불상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 불상이 있던 자리에는 “오늘 24시안으로 반환한다. 세계신기록을 세우기 위해….”라는 메모만 남겨 있었고, 범인은 이날 밤 11시를 조금 넘긴 시간 문화재관리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한강철교 제3교각 16번과 17번 침목 받침대 사이 밑 모래밭에 묻었으니 찾아가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불상은 다행히 훼손되지 않고 비닐봉지 안에 쌓인 채 모래 속에 묻혀 있었다.
1400여년 만에 빛을 본 불상이 또다시 사라질 뻔했던 이 사건은 문화재 도난사에서 ‘엽기적 도난 사건’으로 불리고 있으며 범인이 누구인지는 물론, 왜 그랬는지도 알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연가칠년명금동불입상은 광배에 뚜렷한 명문을 남겨 제작 연대를 알리고 있기 때문에 현재 우리 나라에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불상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이보다 100년 앞선 불상이 존재한다는 목소리 또한 적지 않다.
연가칠년명금동불입상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1963년보다 4년 앞선 1959년 서울 뚝섬에서 우연히 발견된 금동여래좌상이 그 주인공. 이른바 뚝섬 불상으로 불리는 금동여래좌상은 4.9cm 크기로 5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연가7년불 보다 100여 년이나 앞선 연대라고 할 수 있다.
100년 앞선 뚝섬 불상 재조명 중
이 불상은 중국 불상 중에서도 5호 16국 시대나 북위 초기 인도 간다라 불좌상을 수용하면서 유행한 불상들과 관련이 있다는 점 때문에 중국의 불상으로 보는 견해가 강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민머리에 높은 육계, 도툼한 눈두덩, 통견에 브이자형 옷 주름, 몸을 약간 앞으로 숙인 선정인(禪定印)상, 사각대좌 양쪽에 있는 사자 등으로 미뤄볼 때 크기는 작아도 우리 나라 초기 불상의 조성 양식을 알 수 있는 귀한 유물로 평가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또 정신성이 강하게 작용한 강한 아름다움이 표현된 것이 특징이며, 속이 꽉 찬 통주식이라는 점을 들어 우리 나라 불상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와 관련 김리나 전 홍익대 교수는 “고구려, 백제 또는 중국 그 어느 곳에서 제작했는지 단정해서 말하기 어렵다”며 “우리 나라에서 만들었어도 충분히 이런 모습으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며 성분 분석 등 보다 정밀한 검증이 필요하다”고 조심스러운 입장을 밝혔다. 동국대 문명대 교수는 한발 더 나아가 “뚝섬 불상은 고구려 불상이고, 지금은 학계에서도 고구려 불상으로 보는 시각이 더 우세하다”며 뚝섬 출토 불상이 연가칠년명금동불입상보다 100년 앞서는 5세기 초 고구려 제작 불상이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향후 재평가 과정을 통해 뚝섬 불상의 제작 연대 및 장소 등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나올 경우 우리 나라 현존 최고(最古) 불상이 바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951호 [2008-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