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길의 끝에선 ‘나’를 만나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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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오래도록 함께해 온 소중한 벗이 하나 있다. 내가 가는 곳이면 어디나, 내가 가야 할 곳이면 어디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함께하며 내 삶의 배경이 되어 주고 동반자가 되어 준, 아주 오래된 그 벗의 이름은 ‘길’이라 한다.
내가 머물고 있는 산사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자주 닿지 않는 숲이 하나 있다. 그 숲 앞에서 푸른 바람이 열어 주는 초록의 문을 밀고 들어가면 숲은 어느새 반가운 얼굴로 길손을 맞이한다. 그 숲에서는 겨울의 작은 햇살에도 강아지풀은 얼음 잠에서 깨어나고, 노란 복수초 꽃망울은 잔설 사이로 애잔한 얼굴을 내민다.
겨울바람마저 해맑은 웃음을 남기고 사라지는 그 숲에서 뒤를 돌아보면 길은 어김없이 나를 쫓아와 있다. 그리고 그 숲의 길은 침묵하고 있다. 숱한 사연이 가득한 지나온 세월을 묻고 바이로차나의 침묵은 장엄하다. 그렇다. 모든 길은 순결하다. 그 순결한 길 위에 마음의 자취가 나뭇잎처럼 뒹굴고 있을 뿐이다.
아무리 작은 숲의 오솔길이라도 그 길에는 먼저 지나간 이들의 자취가 묻어 있다. 그것이 사바의 길이다. 그 길로는 미망의 중생도 걸어갔고 반야의 보살도 걸어갔다. 그러나 그들은 둘이 아니다. 화약 냄새가 진동하던 길로 평화의 행진이 이어지듯 미망의 중생이 내민 손길이 곧 보살이 내민 구원이 되기도 한다. 그것이 길의 법칙이다.
언제나 시시비비로 조용할 날이 없는 이 세상. 대로를 찾아 너도 나도 나서는 세상. 그러나 그 순결한 길 위에서 먼저 걸어간 이들의, 뒤쫓아 걸어오는 이들의 마음을 읽지 못한다면 그 길은 금세 자취를 감춰 버린다. 그것은 세상의 길에서나 숲의 길에서나 마찬가지이다. 길이 사라진 곳에서 남는 것은 미망뿐이다.
길을 찾는 이들. 어떤 봇짐을 지고 길을 떠났든 모든 길은 마음 여행이다. 그 모든 길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길에서 우리 모두가 결국 만나게 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래서 모든 길의 끝은, 자신을 찾아 떠나는 새로운 여행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이제 다시 무언가를 시작하려 길을 찾는 이들이여. 오늘, 그대가 가려 하는 길이 어디든 봇짐을 꾸리기 전에, 바로 지금 그대 발아래 침묵으로 드리워진 마음을 먼저 살펴볼 일이다.
오성 스님 한라산관음사 총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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