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이 박정희 이길 수 없는 이유
게재일 : 2005년 01월 28일 [31면] 글자수 : 2037자 기고자 : 정진홍 중앙일보 논설위원
"박정희는 거북이고, 노무현은 토끼다." 최근 일고 있는 광화문 현판 시비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를 모를 사람은 없다. 그런데 그 경주에서 거북이가 토끼를 이긴 진짜 이유를 아는가? 간단하다. 거북이는 산등성이의 깃발만을 보고 갔고, 토끼는 깃발이 아니라 거북이를 보고 달렸기 때문이다.
거북이는 고지가 절대 목표였고, 토끼는 상대인 거북이만 제치면 된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토끼는 상대적으로 거북이보다 훨씬 빨랐지만 느릿느릿 오는 거북이를 보고 다 알다시피 중간에 방심해 잠자고 말았다. 문제는 빠르고 느림 이전에 뭘 보고 달리느냐다. 목표냐 상대냐!
박정희는 산등성이의 깃발만 보고 간 사람이다. 분명한 목표, 절대적 목표를 보고 간 사람이다. 그 시대엔 비웃음도 샀지만 '1000불 소득 100억불 수출'이라는 목표가 분명했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갔다. 그래서 욕도 많이 먹었다. 오죽하면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고 했겠는가.
반면 노무현은 토끼다. 목표보다는 상대를 보고 뛴다. 상대만 제치면 일등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상대는 계속 바뀐다. 지금은 상대가 박정희 아니 박근혜일지 모른다. 하지만 조만간 상대는 손학규일 수도 있고, 이명박일 수도 있다. 심지어 고건이나 김근태가 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상대를 보는 사람'은 '목표를 보는 사람'을 결코 이길 수 없다. 노무현이 박정희를 이길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새해벽두에 경제에 모든 것을 걸겠다고 했다. 그런데 지난 한 달 어떠했는가. 30년 전의 철 지난 문서를 공개하면서 우회적으로 박정희를 때리고, 광화문 현판을 바꾸겠다면서 박정희를 지우려 한다는 의심만 증폭시키며 2005년의 첫 달이 지나고 있다.
문서 공개는 기준과 방식에 모호한 면이 적지 않지만 그렇다 치자. 하지만 박정희가 쓴 광화문 현판을 바꿀 요량이라면 콘크리트로 만든 광화문 자체를 먼저 문제 삼았어야 옳지 않았을까? 차라리 광화문을 부수고 새로 제대로 세우면서 현판도 갈겠다고 나섰다면 모르겠다. 콘크리트 광화문은 그대로 두면서 그것을 만든 시대의 대통령이었던 박정희가 쓴 현판만 떼라.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다. 차라리 새로 세우고 거기에 노무현 대통령의 친필로 현판을 써서 달아라. 그게 낫다. 애꿎게 아무 상관없는 정조의 비문에서 글자를 채자 한다고 법석 떨지 말고!
우린 갈 길이 바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뭉개고 있나 하고 곰곰 생각해 보니, 노무현 대통령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이 아직도 고장 난 시계를 차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1980년대를 관통해 90년대 초반까지 철 지난 마르크스주의와 주체사상의 늪에서 허우적거린 경험이 있다. 그 당시 우리의 이른바 진보적 지식사회는 마르크스 원전 연구에서부터 그람시·알튀세르·루카치·로자 룩셈부르크와 그 밖의 다양한 네오마르크스 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마르크스주의의 잡화상'을 차릴 정도였다.
하지만 프랑스의 공산주의 이론가 루이 알튀세르가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경고하던 때가 70년대 중후반이었고, 자기 인식과 현실과의 괴리를 못 이겨 아내마저 교살했던 것이 80년이었던 점을 되짚어 생각하면 뒷북치기도 그런 뒷북이 없는 일이었다. 하다못해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마르크스주의의 미래가 있는가』라는 책을 82년에 냈지만 정작 우리가 그것을 번역해 열독했던 것은 92년이었다.
한마디로 우리의 인식시계는 고장 나 있었다. 아니 멈춰 있었다. 그래서 최소한 10년 이상의 시간 격차를 갖고 우리는 엉뚱한 곳을 헤매며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학술적으로 읽는 것이야 시차와 크게 관련 없다. 하지만, 고장 나서 멈춘 인식의 시계를 차고 현실로 나서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노무현 대통령과 그를 둘러싼 이른바 386세대가 갖는 위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지금 2005년을 살고 있다. 차고 있는 시계가 맞는지 다시 볼 일이다. 그리고 미래로 가야 한다. 분명한 목표를 바라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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