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흐르면서 꺾이는 법을 배웠습니다. 아니 처음에는 당혹스러웠습니다. 내 칼보다 더 예리한 칼이 있다는 것이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날카롭게 벼리기 위해 별별 수단과 방법을 다 써 봤습니다. 하지만 이내 칼을 거둘 수 있게 되었습니다. 칼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지혜는 그렇게 늦게 찾아왔습니다.”
1980년대를 지나온 지식인들은 누구나 그렇게 마음속에 푸르게 벼린 칼을 지니고 있었다. 시대를 베고 사회를 베는 칼을. 그러나 그 칼날을 날카롭게 세울수록 가까운 사람을 베고 자신까지 베게 된다는 것을 깨달은 이는 얼마나 될까.
40대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저자(가톨릭대 교수)가 지인에게 보낸 편지를 엮어서 낸 이 책을 집어 든 순간 우리는 진짜 성찰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성찰이라는 말은 상대를 베는 데 쓰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마음속 칼날을 뭉툭하게 만들 때 써야 하는 말이다.
저자가 서문에 쓴 것처럼 60여 년의 짧은 역사를 지닌 대한민국의 추억은 전혜린처럼 요절한 이들에 대한 ‘청춘예찬’으로 가득하다. 시인 기형도가 그러하고 가수 유재하 김현식 김광석이 그러하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청년이라는 칭호를 훈장처럼 달고 다니는 이가 수두룩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런 사회적 맥락에서 “너희가 인생을 아느냐”고 외치는 이들은 젊은 시절 칼 한번 휘둘러 보지 못한 열패감에 사로잡힌 사람이거나 등 따습고 배부른 삶에 중독된 속물로 희화화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3, 4쪽의 짧은 편지글 속에서 만나게 되는 저자는 결코 그런 속물이 아니다. 항암치료로 하얗게 센 아내의 머리를 염색해 주며 젊은 시절의 사랑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가슴 아파하고, 노래방에서 제자들이 좋아하는 랩송을 따라 부르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좋아하는 미술작품을 월부로 구입하기 위해 10년 넘게 고물차를 모는 사람이다. 젊은 나이에 은퇴해 전설로 남은 그레타 가르보보다는 명배우로 늙어간 캐서린 헵번을 사랑하고, 70대 이상 노인으로 구성된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의 삶의 무게가 실린 음악을 좋아하는 사내다. 아내와 나란히 얼굴을 마주보고 음식을 준비할 수 있는 아일랜드 부엌을 꿈꾸고, 부모의 발을 씻어 주는 과제를 통해 제자들에게 ‘과거와 화해하는 법’을 가르치는 이다.
흥분하기보다 삭일 줄 알고 분노하기보다 보듬을 줄 아는 완숙한 삶의 지혜, 세상이 타락했다고 손가락질하는 완고함보다는 세상의 변화에 맞춰 자신을 변화시키는 유연함을 꿈꾸는 지성이 어우러진 글들이다. 누군가 디지로그 세대로서 한국의 4050세대의 저력을 묻는 이가 있다면 고개 숙여 이 책을 펼칠 것을 권한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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