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스틸컷.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우리네 모두는 참 바쁘게들 산다. 조금만 느려지면 뒤처질 것 같고, 남들과 약간이라도 다르면 모난 돌이 돼 정 맞을 것 같은 획일적 사회. 숨 막히는 경쟁 속 다름을 배척하고 틀림으로 규정하는 사람들. 나다움을 지키긴커녕 나다움이 뭔지 고민하는 것조차 사치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런 각박한 현실을 두고 1일 개봉한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감독 이언희)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뭐 어때? 내가 나라는데.” 두 주인공 재희(김고은)와 흥수(노상현), 이 ‘겉돌이’(아웃사이더)들이 어떻게든 이 도시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는 모습에 마음이 찡해지는 건 누구나 같은 순간을,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리라.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을 연출한 이언희 감독.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막연하게 시작해 구체화한 재희… 이 감독의 ‘사랑법’
‘대도시의 사랑법’은 주인공의 흔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포스터 속 배우들의 정겨운 모습만 보고 로맨스를 기대했다면 오산. 영화는 재희와 흥수의 성장담에 가깝다. 남들과 달랐던 이들이 나다움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이 감독은 재미로 읽던 원작 소설에서 반짝이는 재희를 발견했다. 자신과 다른 재희에게 부러움도 느꼈다. 지난 24일 서울 소격동 한 카페에서 만난 이언희 감독은 “원작 속 시선은 놓지 않으면서도 재희를 비롯해 흥수와의 관계까지 좀 더 잘 보이길 바랐다”고 했다. 각색을 위해 모인 여성 작가 5인방의 넘쳐나는 수다 속에서 지금의 시나리오가 나왔다. 밤길이 무서우니 일찍 들어가라는 말에 ‘남자들이 일찍 들어가면 여자들이 안 무서울 것 아니냐’라고 일갈하거나 ‘네가 너인 게 어떻게 네 약점이 될 수 있냐’며 흥수를 위로하는 재희의 주옥같은 어록이 이때 탄생했다.
열성적으로 작품을 개발해 가던 어느 날, 감독의 마음속에 한 가지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시나리오 윤곽을 잡던 중 재희가 왜 잘 안 보일까 생각했어요. 그러다 문득 소설이 남성 주인공인 영의 시선으로 이뤄졌다는 걸 깨달았죠. 그제야 강의실을 빠져나온 재희의 덜덜 떨리는 손이 보이더라고요.” 감독을 비롯한 각본가들이 머리를 맞대며 탄생시킨 재희는 살아 숨 쉬는 듯한 생동감을 보여준다. 기능적으로 소구되던 여느 영화 속 여성 캐릭터와 달리 현실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온다. 재희에게 공감하고 그를 안쓰러워하다가도 응원하게 만든다. “보고 싶은 캐릭터를 생각하다 보면 대리만족을 위해 ‘센 언니’나 어디서든 굳건한 사람을 떠올리게 돼요.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그런 식으로 구현한 여성은 주인공이 아닌 조력자로 쓰일 뿐이었죠. 감정을 파고들면 사람은 누구든 약한 지점이 있고, 흔들릴 수밖에 없어요. 거기서부터 재희를 찾아갔습니다.” 상업영화로 나오기에 요원해 보이던 비주류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그렇게 생명력을 얻었다. 감독은 “이 영화가 만들어져서 다행이라는 말이 듣고 싶다”면서 “관객이 자신의 경험을 자연스레 꺼내게 하는 영화가 되길 바란다”고 소망했다.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스틸컷.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에서 흥수를 연기한 배우 노상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스크린 첫 데뷔…노상현이 ‘대도시’서 찾은 확신
극 중 흥수는 소수자로서 다름을 어떻게든 숨기려 한다. 사랑도, 사랑을 티 내는 것도 그에겐 버겁다. ‘보편성에 위배되는’ 흥수를 연기할 적임자를 찾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다 물망에 오른 게 노상현이다. 당시 노상현은 애플tv+ ‘파친코’를 통해 배우로서 조명받기 시작하던 때였다. 노상현에게 흥수의 ‘남다름’은 걸림돌이 되아니다. “특정 요소가 있어도 문제 될 건 없다고 생각했어요. 재밌는 시나리오에 매력 있는 캐릭터, 신선한 소재와 설정까지 거리낄 게 전혀 없었죠. 어떤 시선들 때문에 출연을 망설이고 싶진 않았어요.” 지난 25일 서울 소격동 부근에서 만난 노상현이 들려준 이야기다. 노상현에게 흥수는 틀리지도, 다르지도 않은 사람이다. “누구나 얘기하고 싶지 않은 비밀이 있잖아요. 그걸 들킬 때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는 건 당연해요. 취향은 내면의 핵심에 근접한 가치잖아요. 피부색을 바꿀 수 없듯 취향 역시 내가 원한다고 바꿀 수 없고요. 그러니 훨씬 더 진지하게 흥수에게 다가갈 수밖에요.”
흥수의 내면은 여러 감정으로 똘똘 뭉쳐 있다. 정체성을 이해받지 못한 채 억눌렸던 과거부터 고립감, 수치스러움, 억울함 등이 흥수를 숨게 만들었다. 모친마저도 외면하던 ‘진짜 자신’을 유일하게 이해해 주는 게 바로 재희다. 그와 함께하며 흥수는 조금씩 스스로에게 떳떳하고 솔직해진다. “흥수가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에 의의를 둔 노상현은 직관적이고 본능적으로 캐릭터에 접근했다. 계산적인 연기보다 자신이 느끼는 대로 대사를 내뱉었다. 균형감을 잡는 것보다 흥수가 느낄 감정에 집중했다. “복잡미묘한 흥수의 감정”이 이끄는 대로 연기한 결과가 지금의 흥수다. 노상현은 “대단한 감정을 표출하는 것보단 중의적으로 다가갔다”며 “오히려 그런 데서 관객에게 흥수의 마음이 충분히 전달되리라 믿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 모두 내가 누군지, 나답게 살고 있는지, 나다움은 무엇인지 고민하곤 한다. 정체성을 고민하던 흥수와 재희의 성장이 관객에게도 가닿길 바란다”고 했다.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스틸컷.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에서 재희를 연기한 배우 김고은.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성장통과 시행착오에 끌리다… 김고은이 얻은 위로
김고은은 ‘대도시의 사랑법’의 생명줄과 같다. 제작이 진행되지 않고 표류하던 2년여 동안 김고은은 꾸준히 이 작품을 지켰다. 감독이 김고은을 천사라 칭할 정도다. 김고은이 이 영화를 기다린 이유는 분명했다. 30일 서울 삼청동 모처에서 기자와 만난 그가 말했다. “13년이라는 서사로 성장통과 시행착오를 담아낸 작품이 귀하잖아요.” 그의 말처럼 ‘대도시의 사랑법’은 흔치 않은 ‘겉돌이’들의 이야기를 끈기 있게 풀어낸다. 김고은은 “소재에 관한 불편함이 있을 수는 있다”면서도 “결국은 사람 사는 이야기”라고 했다. “세상엔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다양한 사람이 다양한 방식으로 삶을 살잖아요. 다름에 관한 존중이란 화두를 던지는 영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우린 서로 각자의 다름을 가졌지만 이런 걸 늘 존중받진 못해요. 내 다름을 올바르게 표현하기까지의 성장담이 바로 ‘대도시의 사랑법’입니다. 진짜 우리네 삶이 이런 거죠.”
소설이 영(영화 속 흥수)에게 집중한다면, 영화는 재희의 존재감이 도드라진다. 재희의 서사가 극에서 뚜렷하게 나오진 않는다. 다만 그의 안타까운 전사라 우회적으로 언급돼 그간의 고생을 짐작게 한다. 이를 과하지 않게 살려내는 김고은의 연기가 백미다. 재희가 청소년기에 프랑스에서 유학 생활을 한 것처럼 김고은은 중국서 10대 시절을 보냈다. 재희가 느꼈을 시행착오와 충돌을 몸소 겪은 셈이다. 그는 “자신의 특별함을 내려놓고 사회에 타협하고 순응하려 한 재희도 자신을 표현하면서 잘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며 “내 20대 역시 그랬다”고 돌아봤다. 그에게 20대는 “가장 불완전한 시기”다. 사회에 내던져지지만 아는 건 없고, 하지만 성인이니 뭔가를 해내야 한다. 김고은은 “‘대도시의 사랑법’은 누구나 실수를 하고 누구든 이런 과정을 겪으니 너 또한 괜찮다고 위로해 주는 영화”라며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 만큼 관객마다 제각기 다른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 것”이라며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