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아니었다면 대한민국이 있었겠는가 |
"이제부터는 공산당과 싸운 경험을 세계와 나누는 일이 중요해. 중동지역 국가들은 알라신이 공산주의를 막아준다고 생각하는데 정말로 뭘 모르고 하는 소리다. 그들에게 공산당과 싸운 경험을 전해 주고, 조언해 주는 것이 한국 외교에서 아주 중요하다네. 자네처럼 젊은 군인이 적임자야." 姜英勳 전 국무총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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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 |
강영훈 前 국무총리의 이승만 이야기 |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경무대에 계실 때 나는 청년장교였다. 이박사가 어떤 지도자인지에 대해서는 책을 읽고 주변에서 많이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이박사의 일화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분은 우리나라 개화운동을 주도했고 형무소 생활도 했는데(이박사는 독립협회 사건으로 1898년부터 1904년까지 옥고를 치른 바 있다), 내가 감동받은 부분은 그분이 감옥 안에서 영어 공부를 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매우 열심히 했다고 한다. 감옥에 간 독립운동 지도자가 죽기살기로 영어 공부에 매달린다는 것은 당시 정치적 환경이나 사회 풍토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한번은 함께 감방에 갇힌 이상재 선생이 이박사가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을 보고는 이렇게 놀린 적이 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무슨 영어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하느냐.” 그런데 이박사의 응수가 걸작이었다. “혹시 내가 이 감옥에서 살아 나가게 되면 우리 민족과 국가를 위해 영어를 배워둬야 합니다.” 보통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은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런 얘기를 1952년 워싱턴 주미 대사관에 무관으로 나가 있을 때 알게 되었다. 당시 김세선이라고, 대사관에서 부대사인가 하는 직책에 계셨던 분한테 들었다. 1953년 10월 예기치 않게 이박사를 직접 만나게 되었다. 당시 국방장관이 손원일 제독이었는데 느닷없이 나를 국방부 차관에 발령냈다. 당시 국방부는 서울에 있었고, 육군본부는 대구에 있었다. 나는 육군본부에서 인사국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하루는 손장관이 나를 서울로 불려올려서는 국방차관에 임명됐다고 통보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완강히 거부했다. 나는 손장관 앞에서 “저는 나이도 어리고 차관을 하려면 군복을 벗어야 하는데 그러면 정치에 휘말리게 된다. 군인으로 남고 싶다”며 한사코 사양했다. 당시 내 나이는 32세였다. 하지만 손장관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손장관은 “몇사람에게 의견을 구했더니 전부 강장군이 적임자라고 하더라. 군소리 말고 중책을 맡아 나를 도와달라”고 강권했다. 옥신각신 끝에 손장관이 “정 그러면 내일 아침에 우리 집에 와서 함께 경무대에 들어가자. 거기서 해결하자”고 했다. 구한말 감옥에서 영어 공부 하던 집념과 선견지명 다음날 나는 손장관과 함께 경무대에 들어가 대통령을 배알했다. 손장관이 대뜸 “이번에 차관으로 발령난 강영훈입니다”라며 나를 이박사에게 소개했다. 이박사는 웃는 낯으로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차관 임명을 축하하네”라고 말씀하시더니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이렇게 물었다. “자네 자신이 있나?” 나는 기다렸다는 듯 큰 소리로 “자신없습니다”하고 외쳤다. 이박사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래, 자신없어?” 하시더니 “그러면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나는 “사단장을 한번도 못했는데, 사단장 시켜주면 잘 할 자신이 있다”고 대답했다. 이박사는 사단장이 몇명을 지휘하느냐고 손장관에게 묻더니, “1만5,000명이나 지휘한다고? 그러면 아주 중요한 직책이네. 이봐 손장군, 이 사람 사단장 시켜주도록 하게” 하고 지시했다. 손장관이 깜짝 놀라면서 “이미 발령났는데 번복할 수 없다”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이박사는 “그거야 취소하면 되는 것 아닌가"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겼다. 나는 그 대범함에 놀랐다. 이박사는 “차관 하고 싶어하는 사람 많으니 이 사람은 2사단장에 임명하도록 하라”고 못을 박았다. 나는 대통령께 “고맙습니다”라고 크게 외치고 꾸벅 인사를 하고서는 경무대를 나왔다. 그런데 다음날 일이 꼬였다. 손원일 장관이 백두진 국무총리를 만나서는 “대통령께서 강장군에게 차관 임명장을 줘야 하는 자리에서 갑자기 2사단장에 앉히라고 그런다”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자 백두진 총리는 “그게 말이 되나. 3개월만 차관 하면 될 텐데, 내가 각하께 말을 해 보지”하며 어제 일을 없던 일로 돌려놨다는 것이다. 손장관은 다음날 나를 다시 불러 “아무래도 자네가 차관을 맡아줘야겠다”며 또 차관직을 강권했다. 나는 “대통령께서 말씀도 하셨는데…. 하여간 잘 부탁합니다”라는 말을 남겨놓고는 훌쩍 대구로 내려와 버렸다. 그런데 손장관은 내가 차관직을 수락한 것으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대구에 내려가 있는데 이번에는 경무대에서 올라오라는 연락이 왔다. 이번에도 손장관과 함께 경무대에 들어갔다. 부속실로 들어가니 박찬일 비서관이 “강장군만 먼저 들어오라고 한다”며 나를 대통령 집무실로 데리고 갔다. 대통령께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시더니 “자네 차관 하겠다고 그랬나?”하고 물었다. 물론 나는 손장관 앞에서 차관 자리에 앉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내가 무슨 소리인지 몰라 직접 알아보려고 자네를 불렀네. 장관이 자기 형편만 생각해서 그러는 모양인데….” 이박사는 비서를 시켜 장관을 들어오라고 해서는 “강장군을 사단장 시키도록 하게”하고 거의 명령하다시피 했다. “대통령이나 국방장관이 무엇 때문에 그 자리에 앉아 있는가. 저런 친구를 알맞은 자리에 보내는 것이 그 첫번째 임무”라는 말씀과 함께. 덕분에 나는 2사단장이 되었다. 트루먼 대통령의 저서 중에 “대통령이 할 일”이라는 책이 있다. 트루먼은 책에서 적재적소에 인물을 앉혀 힘껏 일하도록 밀어주는 것이 대통령이 할 일 중에서 첫번째 덕목이라고 강조했다. 내가 이 대목을 책에서 읽어 알고 있었는데,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처음으로 지도자란 어떤 인물이어야 하는지를 체험하게 되었다. 나에게는 진심으로 큰 교훈이었다. 국방차관 거부한 나의 뜻 순수하게 받아들인 대범함 그후 57년초 무렵이다. 경무대에서 급히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당시 나는 이박사 덕분에 육군 제2사단장, 연합참모회의 본부장, 국방부 동원차관보를 거쳐 육군본부 관리부장을 지내고 있었다. 이박사는 나를 보자마자 “중동하고 아프리카에 대통령 특사로 다녀오라”고 지시하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도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평소부터 대통령 특사로 외국에 나가려면 아무래도 참모총장과 국방장관 등을 지낸 인물이 적격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저는 나이도 어리고 선배님들도 계신데…”라며 머뭇거리자, 이박사는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 대로 할 일이 있고, 자네는 자네대로 거기에 다녀오면 돼”라고 못을 박았다. 당시 나의 군 선배로는 정일권·이형근·백선엽·유재홍·김일환·이종찬같은 분들이 계셨고, 이한림 같은 분들이 친구로서 나와 친하게 지냈다.내 짐작으로는 53년 차관 거부사태 때 이박사께서 나에 대해 ‘별난 놈’ 이라는 인상을 받았던 모양이었다. 이박사는 내 앞에서 일사천리로 자신의 생각을 말씀하셨다. “특사로 바깥에 다녀올 마음의 준비를 하게. 이제부터는 공산당과 싸운 경험을 세계와 나누는 일이 중요해. 중동지역 국가들은 알라신이 공산주의를 막아준다고 생각하는데 정말로 뭘 모르고 하는 소리다. 그들에게 공산당과 싸운 경험을 전해 주고, 조언해 주는 것이 한국 외교에서 아주 중요하다네. 자네처럼 젊은 군인이 적임자야. 그리고 가는 길에 오키나와에 들러 따끔하게 독립정신을 일깨워줄 필요가 있네. 오키나와가 원래 대한민국과는 가까운 사이였는데, 이 사람들이 또 일본 치하에서 살려고 그러는 모양일세(당시는 미군정). 그들에게 우리의 예를 들면서 독립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주게.” 이를 계기로 나는 이박사를 다시 한번 쳐다보게 되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에서 별 영향력이 없었다. 그러나 이박사의 생각은 달랐다. 어떤 정치인과 관료들도 엄두를 내지 못할 때 그분은 자유민주주의를 세계에 전파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생각이 넓고 깊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전쟁을 치러본 젊은 장군을 ‘특사’로 내보내려고 마음먹은 것도 남달랐다. 요즘 젊은이들이 이박사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하면서 저평가하고 그러는데, 내가 아는 이승만은 요즘 우리 젊은 세대들보다 민족의 장래를 훨씬 멀리 내다보고, 깊게 생각하는 분이었다. 하지만 1957년 8월 나는 갑자기 미국 참모대학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 주변에서도 병과 장교로 군에 있으려면 한번은 다녀와야 한다고 권했고, 마침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백선엽 장군이 나에게 “특사 문제가 걸려 있으니 각하를 한번 뵙고 인사드려라”라고 하길래 인사차 경무대에 들렀다. 나에게 특사 임무를 맡겼기 때문에 무어라 말씀드려야 할지 걱정도 되었다. 그러나 이박사는 또 한번 나를 놀래켰다. “보고받았네. 공부하러 가는 데야 말릴 수 있나. 미국 가면 군사학만 배우지 말고 경제학도 좀 배워라. 국내적으로 경제가 매우 중요하다.” 이런 말씀을 듣고 경무대를 나오면서 나는 ‘이박사야 말로 이 나라를 어떻게 끌고 가야 하느냐를 항상 고민하는 분이다. 이박사야말로 정말로 훌륭한 국가 지도자다’라는 생각을 굳혔다. 요즘 젊은 역사학자들이 이박사에 대해 광복후 친일파를 재기용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시각에는 감정이 배어있다고 생각한다. 이박사는 평소 “식민지 경험이 없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는 그날, 한일관계가 진정으로 청산될 것”이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요즘 친일파 기용 문제로 젊은이들 일부에서 이박사를 비판하는 것은 당시 상황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는 단견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세계에 전파하겠다는 깊은 안목 이박사가 독재를 했다는 비판도 그렇다. 당시 우리 국민 수준에서 그분만큼 국제정세를 꿰뚫어볼 만한 분이 어디 있었나. 전쟁중인 1951년부터 휴전회담을 했는데, 한번은 대통령 주재로 긴급 내각회의를 열었다. 그때 정세는 미국과 소련이 양쪽으로 갈려 의견이 충돌했는데 대한민국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가 매우 중요한 때였다. 이박사가 내각회의에서 각료들에게 자문을 구했으나 누구 하나 의견을 내놓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이박사가 독자적으로 결정해 처리했다. 그런 의미에서 독재를 했다면 그것은 독재라고 비판해도 무방하다. 미국이 우리에게 잉여농산물을 제공할 때에도 이박사는 결코 비굴하게 굴지 않았다. 당당했고 대등한 태도를 취했다. 무쵸 대사 시절이었는데 미국이 이것 저것 참견하니까, 이박사는 그들에게 “당신들이 우리를 도우려면 우리가 도움이 필요없어지도록 도와줘야지, 우리가 언제나 당신들 도움을 받아야만 살아가도록 도와주면 뭐하나. 그런 식의 도움은 필요없으니 여기서 미국 것 다 거둬가라”고 호통친 일화는 유명하다. 나라의 주권을 지킨다는 견지에서 그분의 배짱은 정말 대단했고 높게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이박사가 아니었던들 대한민국이 있었겠는가. 공산화됐을 것이다. 분단, 민족분열의 책임이 이승만에게 있나? 독립투쟁 당시부터 분열했던 사람들이 누구인가. 당시 군대까지 다 붉은 물이 들었었다. 공산당이 다 침투했다. 북한이 전쟁을 일으켰을 때 박헌영이 김일성에게 호언장담하지 않았는가. “남쪽에는 각계에 공산당이 다 침투해 있기 때문에 전쟁만 일으키면 금방 남한을 점령할 수 있다”고 말이다. 이박사가 아니었으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됐을지 걱정이다. 나는 고향이 이북(평안북도 창성)이다. 해방후 고향에서 보니 소련 점령군 장교들이 들어와서는 성출미라는 명목으로 주민들 쌀을 거둬가고 압록강 수풍댐 등 수력발전소 5개 중에서 발전기 3개를 떼어가고 그랬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른다. 나는 그걸 보고 공산주의가 우리를 잘 살게 해줄 수 있겠나,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다. 대학 시절(만주 건국대)에도 공산주의에는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는데 직접 경험한 셈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소련군이 발전기를 떼어가고 거지같이 남루한 차림으로 쌀을 빼앗아가는 것을 보고 우리 민족의 운명이 순탄치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는 군대가 필요하고, 내가 거기에 일조하겠다는 생각으로 군에 입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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